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 (Dmitri Hvorostovsky)는 1962년 10월 16일, 러시아 시베리아 지방의 중공업 도시인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공학자인 아버지 알렉산드르(Alexandre)와 산부인과 의사인 어머니 루드밀라 (Ludmila)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마추어 합창단원으로도 활동하는 등,음악에 대한 재능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자신이 이루지 못한 음악가의 꿈을 아들을 피아니스트로 키움으로써 실현시키고자 했고,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흐보로스토프스키는 7살 때부터 어린이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14살 무렵엔 밴드의 리드 보컬로서 루이 암스트롱에서 프레디 머큐리까지,당시 그가 좋아했던 재즈와 락을 즐겨 불렀다고 한다. 16살,고등학교를 마친 후 음악학교에 진학하기 전 합창단 지휘자와 음악교사를 양성하는 직업학교를 잠시 다녔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지닌 잠재력을 깨닫고서 오페라 가수가 되기로 결심한다.
1982년 크라스노야르스크 예술학교에 입학한 흐보로스토프스키는 아버지와 더불어 음악가로서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 예카테리나 요펠 (Yekaterina Yofel)을 만난다. 그녀는 흐보로스토프스키의 목소리를 바리톤으로 자리잡게 하였고 (전에 가르쳤던 선생은 그를 테너로 만들려고 했었다),호흡을 조절하는 법과 표현력을 길러 주었다. 또한 과거의 위대한 바리톤들 - 마티아 바티스티니(Mattia Battistini),쥬세페 데 루카(Giuseppe de Luca),파벨 리시치안(Pavel Lisitsyan),에토레 바스티아니니(Ettore Bastianini),티토 곱비(Tito Gobbi)등의 음반을 들으며 혼자서 벨칸토 스타일을 공부하던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그중에서도 바스티아니니는 그의 우상이었다.
1985년 크라스노야르스크의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 (Rigoletto)> 공연에서 마룰로역으로 오페라무대 데뷰를 가진 흐보로스토프스키는 1986년 예술학교를 졸업한 후 크라스노야르스크 오페라의 솔리스트로 활동하면서 1987년 글린카 국제 성악 콩쿠르등 소련 내 주요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1988년에는 처음으로 서방의 콩쿠르인 툴루즈 국제 성악 콩쿠르에 참가하여 역시우승을 차지하였고,1989년에는 그의 후원자였던 메조 소프라노 이리나 아르히포바(Irina Arkhipova)의 격려에 힘입어 참가한 BBC 카디프 세계 성악 콩쿠르에서 웨일즈 출신의 바리톤 브린 터펠 (Bryn Terfel)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함으로써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게 된다.
1989년 위그모어 홀에서 가진 그의 런던에서의 첫 리사이틀에 대해 더 타임즈는 "He came,He sang,He conquered." 라는 헤드라인 아래 호평을,다음 해 앨리스 툴리 홀에서 열린 뉴욕에서의 첫 리사이틀에 대해 뉴욕 데일리 뉴스는 "the latest of the red-hot baritones" 라는 말로 찬사를 보냈다. 이어 1989년 니스 오페라에서의 차이코프스키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 (Pique Dame)>의 옐레츠키 역과 1991년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의 <예프게니 오네긴(Eugene onegin)>의 타이틀 롤로 유럽에서의 오페라 무대 데뷰를 갖고,1993년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서의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의 제르몽역으로 미국 무대 데뷰를 가진 이래, 런던 로열 오페라 코벤트 가든,파리 샤틀레 극장,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뮌헨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베를린 국립 오페라, 빈 국립 오페라,몬테 카를로 오페라,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샌프란시스코 오페라,상트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등 세계 주요 오페라 하우스에서 활동하고 있으며,액상 프로방스,잘츠부르크 페스티벌,BBC 프롬나드, 홍콩 아트 페스티벌 등 세계 유수의 음악제에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오페라 배역으로는 역시 러시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인 <예프게니 오네긴>의 타이틀 롤과 <스페이드의 여왕>의 옐레츠키를 꼽을 수 있다.
프로코피에프의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의 안드레이 공작도 그에게 잘 어울리는 역할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차르의 신부 (The Tsar's bride)>의 그랴즈노이 역으론 게르기에프 지휘로 전곡 음반도 남겼지만,계속해서 소리지르듯 불러야 하는 그랴즈노이를 실제 무대에서 부르는 건 너무 힘들다고 한다. 흐보로스토프스키의 레퍼토리는 비단 러시아 오페라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전형적인 리릭 바리톤으로서 그는 베르디의 작품인 <라 트라비아타>의 제르몽과 <돈 카를로 (Don Carlo)>의 로드리고로서도 뛰어난 해석을 들려주고 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의 알마비바 백작과 <돈 죠반니 (Don Giovanni)>의 타이틀 롤 역시 그의 주요 배역들 중 하나로,1995년과 1999년에 각각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다.
프랑스 레퍼토리로는 현재 구노의 <파우스트 (Faust)>의 발랑탱이 유일하지만,토마의 오페라 <햄릿 (Hamlet)>의 타이틀 롤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 기대가 된다.
벨 칸토 오페라로는 도니제티의 <라 파보리타 (La Favorita)>의 알폰소 왕,그리고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Il Barbiere di Siviglia)>의 피가로 같은 코믹한 역도 의외로 잘 소화해 내고 있다. 그의 런던 오페라 무대 데뷰 작품이기도 한 벨리니의 <청교도 (I Pulitani)>에 대해서는 "내용이 너무 한심해서" 더 이상 부르고 싶지 않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푸치니의 작품들은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하니 그가 부르는 마르첼로나 스카르피아를 들을 수 있는 기회 또한 쉽게 오지 않을 듯 싶다. 흐보로스토프스키는 오페라 공연 뿐만 아니라 리사이틀과 콘서트도 활발하게 가지고 있다.
자신을 러시아 문화 사절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조국 러시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지닌 그답게 프로그램엔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가곡,무소르그스키의 <죽음의 노래와 춤 (Songs and Dances of Death)>,쇼스타코비치의<스페인 노래 (Spanish Songs)>등 러시아 가곡이 빠지지 않는다. 또한 그를 위해 가곡집<상트 페테르부르크 (St. Petersburg)>를 작곡하기도 한 러시아의 현대 작곡가 게오르기 스비리도프 (Georgii Sviridov) 의 작품들도 리사이틀을 통해 꾸준히 알리고 있다. 말러의<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와<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Kindertotenlieder)> 역시 그가 콘서트나 리사이틀에서 자주 부르는 곡들이다. 현대 작곡가 기야 칸첼리 (Giya Kancheli)는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흐보로스토프스키를 위해 오라토리오 <슬퍼하지 말아라 (Don't grieve)>를 작곡했는데,2002년 5월 마이클 틸슨 토머스 (Michael Tilson Thomas)의 지휘로 데이비스 심포니 홀에서 초연되었다.
볼프와 슈베르트의 가곡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도전하기엔 너무 늦었다며,차라리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Dietrich Fischer-Dieskau)나 토머스 햄슨 (Thomas Hampson)이 부르는 걸 듣는 쪽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퍼셀과 헨델,글룩의 고전 아리아도 그의 주요 레퍼토리이다.1997년 녹음한 "고전 아리아 (Arie Antiche)" 음반에서 들려준 그의 노래는 성악 전공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최근엔 러시아 민요에 이어 이탈리아 테너들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나폴리 민요에까지 레퍼토리를 넓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재 그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베르디이다. 2000년 모스크바 노바야 오페라에서의 <리골레토> 공연을 시작으로, 2002년 로열 오페라에서의<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e)>의 루나 백작, 2003년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서의 <가면 무도회 (Un ballo in Maschera)>의 레나토 등 그의 오페라 공연 일정에서 베르디의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가고 있다. 그는 리골레토와 레나토 역에 대해 각별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특히 리골레토는 1985년 크라스노야르스크 오페라에서 <리골레토>의 마룰로로 데뷰할 때부터 언젠가 반드시 무대에서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 왔다. 레퍼토리 선택에 있어서 항상 신중한 태도를 취해 온 흐보로스토프스키는 이제는 베르디 바리톤 역들에 본격적으로 도전할 수 있을 만큼 목소리가 무르익었다는 판단이 섰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텔로 (Otello)>의 이아고! 26살 때, 지휘자 솔티의 오디션에서 이아고를 불러 보라는 제의를 받은 이후로 (그는 서툰 영어로 자신은 아직 이아고를 부르기에는 어리다며 조심스레 거절했다) 이 배역은 항상 그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고, 드디어 2008년,그의 첫 번째 이아고를 부를 예정이라고 한다.
흐보로스토프스키는 필립스 레이블에서 1990년 이래 십수종의 음반을 녹음했으며,2001년부터는 델로스 레이블로 옮겨 음반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공연 후엔 보드카 두 병을 거뜬히 비울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던 그는 술 때문에 종종 문제도 일으키곤 했는데,요즘은 술을 끊은 대신 여가 시간에 체홉,고골,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다시 읽는 등 독서를 즐기고 있다고 한다. 2001년엔 러시아 발레리나 출신의 부인과 이혼하고 제네바에서의 <돈 죠반니> 공연 중 만난 스위스 - 이탈리아 출신의 메조 소프라노 플로렌스 일리(Florence Illi)와 재혼했으며,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7살된 쌍동이- 아들 다니엘 (Daniel),딸 알렉산드라 (Alexandra)와,2003년 플로렌스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기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