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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仇衡王)
자료 검색을 하다보면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지명이나 인명이 여러 가지로 나오거나 같은 음이라도 한자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가야’만
하더라도 ‘구야(狗邪), 가락(駕洛, 伽落), 가야(加耶)’등으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구형왕(仇衡王), 양왕(讓王), 구해왕
(仇亥王), 구충왕(仇衝王), 구차휴(仇次休), 김구해(金仇亥)’등으로 나온다.
생각해 보건대 이것은 가야 역사가 망국의 역사로 남아 있는 역사적 자료가 부족한 것과 고대 한국어를 한자로 표기함에 있어 사람마다 달리
생각했거나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은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인 김구해(金仇亥)다. 그는 가야의 시조 김수로(金首露)왕의 김해김씨 9세손으로 날로 세력이
확장되는 신라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신라 법흥왕 19년에 왕궁의 보물 전체를 싸들고 왕비와 세아들(노종,·무덕,·무력)과 함께 신라에
항복(귀순?)을 하므로서 한 때 찬란하게 철기문화를 발전시키며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쳤던 가야는 개국 후 약 500년만에 멸망했다.(AD 532
금관가야, 562년 대가야 신라에 합병)
신라 법흥왕의 선택지는 매우 많았다. 구형왕 일가를 경주에 잡아두고 가야를 차지한 다음 신하를 하나 보내어 다스리게 하거나, 혹시 가야지역에서
부흥운동을 꾀할 것을 피하고자 아예 전부 죽여 구심점을 없애 버리는 것, 항복해온 모두를 노비로 복속시켜 이를 지켜보며 즐기는 것 등등. 그러나
법흥왕은 매우 현명하게 처신한 것 같다. 구형왕을 환대하고 벼슬을 내림과 동시에 왕족에 해당하는 귀족인 진골 대접을 했다. 한편 가야 땅을 그대로
구형왕의 식읍지로 주어 버려 민심을 수습케 했다. 이로써 별 다른 충격파 없이 양국에 사상자가 없는 무난한 합병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구형왕의
자손 김해김씨들은 신라에 충성을 하게 된다.
구형왕의 왕릉은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산 16에 있다. ‘산청 전구형왕릉’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앞에 ‘전(傳)’자가
붙은 이유는 왕릉이라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왕릉이라고 전해오기만 할 뿐이며 돌무더기로 쌓은 7층탑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런
형태의 탑이 다른 몇 곳에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이 왕릉 주변에 옛날 ‘왕산사(王山寺)’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왕릉이 맞는다는 설도 있다.
2. 김유신(金庾信)의 조상들
구형왕 김구해의 세 아들 중 셋째인 김무력은 신라의 장수가 되어 백제와의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 전투에서 백제 성왕과 왕비를 죽게하고,
좌평 4명과 3만명 가까운 백제군을 참살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후 관등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김무력과 부인 아양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김서현은 진평왕 51년 같은 대장군 김용춘(김춘추의 아버지), 부장군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여 김유신의 활약으로 고구려군 5천여명을 전사시키고 성을 함락하는 공을 세웠다. 후에도 양주총관이 되어 여러번 백제군과 싸워
공을 세웠다고 한다. 김서현은 진흥왕의 조카인 만명부인과 눈이 맞아 교제를 하였는데, 부모의 반대가 심하여 남의 집 방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었다고 한다. 마침 벼락이 쳐서 문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놀라 흩어지는 바람에 탈출하여 만노군(지금의 진천) 태수로 부임하는 김서현을 따라
도피행각을 벌였다. 혼전에 김유신을 낳고 부모의 승락을 얻어 결혼하였다 한다.
김유신은 595년 만노군 김서현의 집(현재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18)에서 태어났다.
3. 김유신(金庾信)과 두 여동생
김유신을 말하자매 김춘추를 빼 놓을 수 없다. 김유신은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를 도와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고, 결국 문무왕에 이르러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한다. 그리고 통일 이후에도 평생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수많은 전투에서 나아가 큰 공을 세운다. 뿐만 아니라 생전 신라의 5왕을 섬겼으며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수습하여 왕족들의 질투를 받을 만큼 후한 대접을 받고 대대로 귀족의 지위를 이어간다.
유신에게는 보희라는 큰 여동생과 문희라는 작은 여동생이 있었다. 당시 서라벌(경주)에서는 잘 생기고 똑똑한 김춘추가 모든 여성이 바라는 이상형
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춘추는 이미 혼인하여 부인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랴? 당시에는 능력만 되면 부인 두셋 얻는 것 정도야, 뭐!
(남성들이여, 그렇다고 ‘이야, 나도 그때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걸!’하는 생각은 버리시라. 그런 생각하는 남자 백만 명이 있다면 그 중 99.999% 이상은
젖 떨어지기가 무섭게 평생을 어둡기도 전에 일어나서 허리가 부러져라 일하다가 해가지고 어두워져 앞이 잘 안 보일 때까지 일해도 하루 밥 3끼
제대로 못 먹고 살아야 되었다. 김춘추 같은 남자가 되기는 로또 일등 당첨보다도 천배 만배 이상 더 확률이 낮다. 힘든 일은 죽어서야 끝난다. 또
그보다 더 고된 군역, 부역에 많은 세금에도 시달려야 된다는 생각도 해야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돌아 가시라! ^^;)
하루는 언니 보희가 문희에게 말했다.
“얘야, 나는 어젯밤 기이한 꿈을 꾸었구나!”
“언니, 무슨 꿈인데?”
“글쎄, 내가 서악에 올라 오줌을 누었지 뭐야.”
“그래서?”
“그런데 오줌을 얼마나 많이 누었던지 오줌물이 서라벌에 찰랑찰랑 넘쳤지 뭐니!”
“어머나 망측도 해라.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게 꿈의 전부야!”
언니 보희의 그 꿈 이야기를 듣고 문희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이게 예사의 꿈이 아닌 것 같다. 문희는 보희에게 그 꿈을 팔라하고, 보희는 그 까짓
꿈이 뭐 대단한 거냐고 웃으며 무엇을 줄 것인가 묻는다. 문희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비단 치맛감 한 벌을 주기로 하고 사게 된다.
“자, 내 꿈 여기 간다. 받아라! 나중에 물러달라기 없기다.”
문희는 자기 앞 치마를 벌려 받는 시늉을 한다.
“응, 언니! 잘 받았어!”
보희는 별 것 아닌 꿈 이야기를 들려주고 비단치마 한 감을 얻은 것에 좋아라 하였다.
4. 김유신 여동생과 김춘추(金春秋)
망국 가야의 왕손인 김유신 가문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진골의 지위를 부여 받았지만, 기존의 왕족들로 부터는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놓고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왕족들이 많았다. 웅대한 포부를 지닌 김유신은 신라 왕족들의 지지 기반을 확고히 확보하고 싶었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김유신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있었다. 누가 봐도 뛰어난 용모에 학식이 풍부하고 행동거지가 신중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왕손이었다. 요즘 한류 붐을 타고 세계적으로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며 나처럼 귀공자같이 잘 생기고 멋진 BTS나 차은우 이상 가는 인기를 누렸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의 할아버지였던 진지왕의 실책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죽은 연유로 당시 진평왕을 중심으로한 왕족의 주류는 아니었다.
바로 김유신보다 9살 아래인 김춘추라는 인물이다. 서로 처지가 비슷한 때문인지 둘이는 의기투합하여 친구처럼 가까이 지낸다.
어느 날 김유신 집 근처에서 둘이 지금의 축구와 비슷한 공차기 축국놀이를 하다가 김유신의 발에 김춘추의 옷고름이 밟혀 떨어지고 말았다.
김유신은 김춘추에게 우리 집이 가까우니 가서 옷고름을 고쳐 달자고 청하였다. 김춘추는 이미 혼인을 하여 부인이 있는 처지였지만 능력
있는
남자이므로 서라벌 장안의 최고 인기남이었다. 김유신의 두 누이도 김춘추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음은 다를 바가 없다. 장유유서에 입각하여
먼저 언니 보희에게 얘기를 했다.
“야, 보희! 춘추공 옷고름이 떨어졌다. 네가 모시고 들어가 좀 달아 드려라!”
“싫어요. 난 못해요. 남사스럽게 어떻게 외간남자를...!”
보희에게 무시를 당한 유신 이번에는 문희 방문을 두드린다.
“얘, 문희야! 네가 좀 해 드리면 어떻겠냐?”
“글쎄요, 뭐... 저...!”
유신은 두 번 무안을 당하기 싫어 더 물어 볼 것도 없이 김춘추를 반 강제적으로 문희 방에 밀어 넣는다. 김춘추는 본심과 달리 힘에 떠밀리는
양 '어, 어, 어...!' 하다가 자의 대 타의 6:4 비율로 문희의 방안에 골인을 한다. 그 후의 방안에서 일어난 구체적 상황은 매우 궁금하겠지만 이야기가
너무 늘어져 상상에 맡긴다. 이 일로 인하여 김춘추와 문희는 부쩍 가까워져 애프터를 갖고 밀회를 즐기는 지경에 까지 이른다!
꽃피는 춘삼월 호시절 어느 화창한 봄날 우리나라 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무슨 연유인지 김유신은 불참한 가운데 대신들을 불러 모아
꽃놀이를 제안한다.
“유신공은 우째 안 보이노?”
“집안에 긴히 해삐릴 일이 있다 카데예!”
이어 진달래 만발한 남산에 올라 넓은 자리를 찾아 주연을 베풀고 꽃놀이를 시작했다. 술잔이 오가고 악공들은 ‘애애앵~~, 둥기당 둥기당 두기당당,
두드락닥 두구두구...’ 아쟁소리, 가야금소리, 드럼소리(그때도 있었나?) 울리고, 무희들은 부채춤을 비롯하야 디스코, 밸리댄스, 쎅시댄스 등 온갖
춤을 추어대며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근위병졸 하나가 난입하여 급박한 어조로 아뢴다!
“억수로 클났다 아잉교!”
“뭐꼬? 니 디질라카나 와 흥을 뽀사삐리 쌓노?”
병졸 왈, 서라벌 끝자락 쯤 어디선가 불이 났는지 연기가 장난 아니게 왕창 피어오르고 있단다. 남산에서도 다 보인다. 즉시 가서 현장 상황을 살피고
소상하게 보고하라고 이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화재는 큰 문제다. 마을에 나면 사회문제, 산불이 나면 국가적 재앙인 것이다. 변변한 소방 장비도
없어서 불을 끄려면 물동이를 이고 가거나 바가지를 들고 뛰고 정 급하면 물을 가마니에 담아 가거나 두손을 모아 물을 떠서 가지고 달려야 했을
시대가 아니겠는가? 빠께쓰도 없던 시절이니...!
헐레벌떡 숨이 넘어가게 달려온 병졸의 보고에 의하면 다름 아니고 김유신 저택 마당에서 난 불이란다.
“아니 유신공 댁에 무슨 통돼지 바비큐 퐈티라도 벌이는 모양이제?”
“그렁기 아이라요. 유신공이 억수로 열 받아서 누부 문희를 태워 죽인닥꼬 길길이 날뛰며 마당에 산더미 같이 장작을 쌔리 쌓아놓고 불을 질러삐린
것이라 하옵니더.”
선덕여왕이 식겁 깜짝 놀라 되 묻는다.
“아니, 왜 멀쩡한 미녀 누부를 태워 죽인닥꼬라?”
“예, 문희 가스나가 애비 없는 얼라를 잉태했닥꼬...!”
“엥, 머라꼬? 혼인도 안한 문희 가스나가 얼라를? 그래 그 당사자가 누구락카드나?”
“예, 저... 저... 서라벌 장안에는 소문이 다 났닥 카더이다마는...!”
“아, 속 디비진다. 그 놈팽이가 언놈인지 속히 아뢰지 않으면 물고를 낼 거인즉!”
“예, 아이고, 살려 주셈. 제 입으로는 차마...!”
하고는 자꾸 김춘추 쪽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닌가? 눈치 백단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여왕위에 오른 선덕여왕, 얼굴이 벌개진 김춘추를 향하여
냉큼 한마디!
“공이 그 놈팽이가?”
“네, 그... 저... 뭐...!”
똑똑한 김춘추가 평생에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번 말을 더듬었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같은 여자 입장에 자기가 타오르는 장작더미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심정이 되어 급히 명령을 내린다.
“뭣을 망설여 쌓노! 문희 가스나를 태워 죽인다 안카나! 퍼뜩 달려가서 구하고 앞으로는 공이 책임 지라카이!”
“옛썰(Yes, sir)!” -김춘추가 무슨 영어를 했냐고? 아, 최상류층을 넘어서 극상류층 귀족인데 설마 영어학원을 안 다녔을리 없자너?-
김춘추는 지체 없이 말을 나는 듯이 몰아 김유신 집으로 달려갔다.
-진평왕의 딸 선덕여왕은 처녀 시절 친언니 천명과 김용춘(김춘추의 아버지)을 둔 경쟁에서 밀린 아픈 추억이 있다. 보희의 동생 문희와 자신의
처지가 비슷한데서 문희의 구출에 더 신경을 썼을 수도 있다. 진평왕의 두 딸은 김춘추의 아버지를 놓고 경쟁하고, 김용춘과 낭비성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를 거둔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의 두 딸은 김춘추를 놓고 경쟁을 한 거이다.-
“멈추그라, 여기 왕명을 받은 슈퍼맨이 왔다아이가?”
김춘추는 그렇잖아도 일을 저질러 놓고 전전긍긍 문희를 그냥 버려두자니 김유신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아 무섭고, 집으로 데려가자니 성깔
사나운 본부인이 손톱 끝을 갈고 얼굴은 물론 온 몸에 다섯줄짜리 빨간 줄을 좍좍 그어 놓을 것 같고...! 이 모든 것이 일순간에 해결 되었다. 김춘추는
당당히 문희를 말에 태워 집으로 데려갔다. 누가 문희에 대하여 무슨 말만 꺼내려 하면 나는 그럴 생각이 없는데 ‘왕명’이니 어찌할 것이냐?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것이냐? 하고 말을 막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선덕여왕이 문희를 구한 시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덕만공주 때의 일이었다고도 함)
김유신에게는 이미 치밀하고 큰 계획이 다 있었던 거디다. 축국놀이 하다가 김춘추의 옷고름을 일부러 밟은 것도 그렇고, 문희와 얽히게 한 것도
그렇고, 문희를 태워 죽이겠다고 선덕여왕의 꽃놀이 행차 날에 맞춰 불꽃 쇼를 한 것도 그렇다! 김춘추가 문희를 구하러 달려가지 않았더라도 김유신은
장작불이 다 사그러 들어도 문희를 태워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차선책을 구하려 '팽팽' 팽이가 돌아가듯 머리를 굴렸을 것이다.
그런 김춘추가 성골로 이어져 오던 신라 왕위에 성골은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되고 김유신의 지원과 여러 전개되는 상황에 따라 진골로서는 최초로
왕위에 올라 ‘태종무열왕’이 되었다. 김춘추는 장수급의 카리스마 있는 무인은 아니다. 능란한 정치 외교술로 무장하고 처남 매부 사이가 된 김유신과
유착하여 부족한 군사 분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큰일을 하려면 자신의 능력 외에 운도 따라야 한다. 문희는 김춘추에게로 가서 정실부인은 되지 못하고 차실부인이 되었는데, 하필 정실 부인이 둘째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되어서 정실부인이 되었다. 문희 사후에는 문명왕후로 추존되었다. 문희가 왕비가 된 것은 어쩌면 언니 보희로부터 꿈을 사들인
것과 관계가 있는 듯 보인다. 보희는 어쩌다가 동생에게 왕비의 자리를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어 속이 상했는지 늦게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문희는 보희를 궁궐로 불러 들여 김춘추의 부인이 되게 해준다. 물론 서열은 동생 문희가 명실공히 퍼스트레이디다.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이 사실도 이해가 어려운 노릇이지만 문희는 이보다도 더 이해가 안 되는 일을 벌였다. 오빠 유신 덕분에 왕비의 자리에 오른
것이 고마웠던지 바로 자신의 딸을 늙은 오빠(당시 60세 정도)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시집 보냈다기 보다 줘 버렸다는 표현이 더 알 맞겠다. 막장
드라마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없다. 언니는 불러들여 자신과 함께 김춘추의 부인이 되게 하고, 자신의 딸은 늙은 자기의 오빠 김유신에게로 시집을
보낸 것이다. 엄연한 근친혼인데 이것은 유교를 정치철학으로 삼은 조선시대 이후 현재의 정서로 보아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고려시대까지, 그리고 이웃나라 일본이나 서양에서는 근세까지도 사촌간의 결혼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특히 왕족이나 귀족들은 자신들의
재산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 형제자매나 사촌 등과의 근친혼이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이므로 속아서 결혼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도 하나의 좋은 점이다. 이보다 확실한 그들만의 리그는 없다!
문희와 김춘추 사이에서 출생한 딸은 외삼촌 김유신에게 시집을 가서 ‘지소부인’이란 명칭을 얻었다. 김유신의 부인중에는 ‘영모부인’, ‘재매부인’이란
명칭도 있는데 이 둘은 같은 지소부인이라는 설과 김유신이 조카 문희와 첫 결혼을 했다면 나이 차이가 사오십년 정도로 상당했을 것이므로 귀족이
환갑이 다 되도록 독신으로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첫 부인이 영모부인 혹은 재매부인일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김유신의 부인이 된
지소부인은 문희의 딸이 아닌 첫째부인의 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설만 무성할 뿐이다.
나이 차이를 떠나서 지소 부인은 유신과의 관계도 매우 좋았던 것 같고, 행적은 훌륭했다. 다섯 아들을 낳아서 훌륭하게 키웠다. 그 중 패전하여
돌아와 유신에게 내침을 당한 둘째 아들 '원술'이 김유신 사후에 돌아왔을 때, 모정을 매정하게 끊고 김유신의 유지를 받들어 받아들이지 않은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5. 김유신의 업적
김유신은 15세 때 이미 화랑의 지도자 국선이 되어 낭도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할 만큼 무예에 능했다.(어머니 만명부인의 조기 천재교육의 덕분?)
그의 업적을 중요한 것 몇 개만 간추려 보면 황산벌에서 백제의 명장 계백 장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 대장군 김용춘, 아버지 김서현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 전투에 참전하여 함락시킨 것, 당나라의 지원을 받기는 한 것이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신채호를
비롯한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과 고구려 영토를 온전하게 접수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다.)
김춘추와 함께 상대등 비담, 염종이 일으킨 내전에 준하는 반란을 10일 간의 싸움 끝에 진압한 것 등이다.
하나 더 나당전쟁 승리에 대하여는 특히 눈여겨 볼만 하다. 김유신은 애당초 김춘추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정책에
반대를 하였다 한다. 결국 백제, 고구려가 멸망하고 삼국을 통일하자,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물론 김유신의 우려대로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를 당에 편입시켜 직접 통치하려 들었다. 김유신은 이를 예상하고 미리 준비를 해 두었으므로 대승을 거두고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었던 모양이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하고 골치 아픈 신라 내부 문제에 개입하여 정치를 안정시켰다.
김유신이 큰 공을 세우는 데는 휘하 장졸들의 절대적 신임 없이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김유신이 보여준 행적에 장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숨을 내던져 가며 싸웠기 때문이다. 그런 행적 중 일화 하나!
연이어 2번이나 전투에 투입되면서 피로가 누적되어 사기가 떨어진 장졸들이 경주까지 왔다가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출정해야 했다. 장수,
병졸들의 심신이 극도로 지쳐 있는데 김유신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그의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나와 기다리고 있었으나 대장군
임에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가족들에게 눈길 한번 안 주고 그대로 문 앞을 통과했다. 다만 조금 지나서 지근거리에서 따르던 하인에게 자기
집에가서 물 한 그릇을 떠오라고 시켜 마시고는,
“우리집 물맛이 여전 하구나!”
하고는 그대로 출발하였다 한다. 대장군도 집에 들어가지 않는데 부하들이 어찌 전장에서 돌아와 집에도 못 들어가고 또 싸우러 간다고 불평할 수
있으랴! 병사들이 대장군의 그러한 행동을 보고 더욱 믿고 따랐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김유신 가문의 종택인 재매정택(財買井宅)의 우물 맛은, 우물 맛 때문에 재산을 기울여 집을 사들였다는 이름이 붙을 만큼 유명했다. 재매정은
현재 경주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비각까지 세워놓고 보존하고 있다. 당시 경주에는 진골귀족의 ‘금입택(金入宅, 금들이집)’으로 불리는 호화저택이
39채 있었는데 그중 김유신 가문의 소유가 6채였었다고 한다. -
김유신은 가야 김수로왕의 12세손으로 현재 모든 김해김씨의 중시조로 알려져 있다.(한가지 의문, 김수로왕의 다른 자손들도 매우 많은데, 왜 하필
모두 김유신을 중시조로?) 그는 어려서는 화랑의 지도자 국선, 젊어서는 군의 총사령관인 대장군, 말년에는 최고위직 벼슬 상대등에 올랐다. 가야가
신라에 합병되어 주변인으로서 주류에 합류하기 어려웠지만 뛰어난 용기와 지혜, 용병술로 군을 장악했으며, 처신을 잘하여 김유신 사후에
오랫동안 후손들도 정통 왕족 못지않은 대접을 후하게 받아 신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 많다!
김유신은 사후 160여년 만인 흥덕왕 때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다. 이는 가야의 추존왕이 아닌 신라의 추존왕인 것이다. 이것은 김해김씨
족보에만 오른 것이 아닌 신라 정사로 인정된다.(일반적으로 추존왕은 세습된 왕이 아닌 사람이 왕이 되었을 경우, 그 왕의 부모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신라 1,000년의 역사 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 전체에도 이런 경우는 김유신이 유일하며, 중국사에서는 ‘공자’와 ‘관우’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죽은 후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조선의 충무공 이순신도 추존왕 추대론이 나올 만도 한데 그렇지는 못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 분위기가 좌우하는 것이며 왕족이 아니면서
추존왕이 되는 것은 그만큼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6. 김유신의 자식들
김유신과 지소부인(김유신 57세에 결혼) 사이에서 아들 5명과 딸 4명을 두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딸에 관한 이야기는 없는 것인지 자료를 찾지
못했다. 첫 부인은 20대 무렵에 영모부인과 결혼했다고 나오는 자료도 있는데, 확실한 근거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나 추측컨대 김유신이 환갑
가까운 나이에 결혼을 하여 79세에 사망할 때까지 9명의 자녀를 낳았다는 것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 영모부인이나 또는 다른 부인과 젊은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아들을 낳지는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지소부인의 4딸은 영모부인의 소생이 아닐까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그래야 지소부인과의
약 20년간 결혼 생활에 5명의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 합리적으로 이해가 된다.
* 장남 김삼광(金三光) : 첫부인 영모의 아들일 것으로 추측하는 후세의 사가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당나라
장군 유인궤와 함께 고구려를 정벌했으며 이찬 관등(벼슬)을 역임했다.
* 차남 김원술(金元述) : ‘원술랑’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삼국통일 후 당과 말갈의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했을 때 출전하여 신라군이 진을 치기 전
공격하여 열세에 몰려서도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담릉의 만류로 후일을 도모하고 후퇴하였다. 김유신은 화랑계율인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를 어겨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버지가 죽은 후 찾아갔으나 어머니 만명부인은 아버지가 받아들이지 않은 자식을 어머니가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하여 집에 들이지 않는다. 이에 태백산으로 들어가서 은둔생활을 하며 동지를 규합하여 힘을 길렀다. 원술이 패전 후 3년 뒤 당군이
매소성(양주)을 공격해오자 이에 참전하여 적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다. 신라에서 벼슬을 내리려 하였으나 어머니의 용서를 받지 못함을 한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오래전 영화화 되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 3남 김원정(金元貞) : 해간(海干: 波珍飡)의 관등으로 서원술성(西原述城)의 축성책임자를 지냈다. 기타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 4남 김장이(金長耳) : 대아찬(大阿飡)을 역임한 관리. 자세한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 5남 김원망(金元望) : 기록에 관등이 대아찬이었던 사실만 전해지고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 서자 김군승 : 아찬을 역임한 신라의 장수로서 역사적 기록에 유일하게 서자로서 이름을 올렸지만 어머니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아비 김유신의
명령으로 김인문(金仁問)·양도(良圖)와 함께 그 선봉이 되어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군량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후세에 혹시 널리
알려진 김유신이 말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의 중심인물 천관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닐까 추측이 무성하다.
- 천관녀 이야기 : 천관(녀)는 궁안에 신점을 보는 일종의 관원인 '신녀' 신분이지만, 기녀의 역할도 하는 직책이었던 모양이다. 유신이 천관녀(본래는
'천관'인데 성별을 표시하기 위하여 ‘녀’자를 붙였다 한다)와 사귀면서 그의 집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에 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이 그런 유신의
모습을 보고 눈물로 하소연을 했다.
“나는 이제 늙었다. 네가 커서 공을 세워 왕과 부모에게 기쁨을 안겨 줄 날을 밤낮으로 고대해 왔는데 너는 어찌하여 술과 여자나 쫓아 다니며 헛된
세월을 보내고 있느냐?”
유신도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여 울면서 천관녀의 집에 들르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한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졸면서 말을 타고 가던 중 말이 걸음을 멈춰 눈을 떠 보니 천관녀의 집 문 앞이었다. 말은 날마다의 습관대로 가던길을 갔던
것이다. 천관녀가 나와 반갑게 맞이하는데, 유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말의 목을 베어 죽이고 집으로 돌아갔다. 김유신의
집이었던 재매정택과 천관녀가 살았던 집은 불과 500m의 거리였었다고 한다.
천관녀는김유신의 충격적인 이 행동에 원망을 하며 '원사(怨詞)'라는 향가를 지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신녀직을 그만둔 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절에서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천관녀를 찾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여서 '천관사'라는 절을 그녀의 집
자리에 지어 그녀의 혼을 위로했다고 한다.
7. 김유신과 나와의 관계
김유신은 김해김씨로 가락국시조 김수로왕의 12세손이며, 나는 71세손으로 김유신은 나의 59대조가 된다.
※ 이 글은 역사적 지식의 깊이 없이 거의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내용, 책이나 영화를 통하여 보고 들은 이야기,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를 바탕으로
흥미 본위로 쓴 글이므로 신뢰도 60% 이하로 보면 된다.
※ 일부 대화글에 사용된 어설픈 경상도 사투리는 영남권 토박이의 방언에 대한 자문 없이 충청도 토박이인 내가 써본 글이므로 잘못 되었더라도
그냥 애교로 보아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