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여성 어떻게 살았나
대쪽같은 성격의 전형적 북방계
고구려 여성들은 자기 주장도 분명해 현대 여성주의 운동가들의 ‘롤 모델’이 될 만한 대선배들이었다.
왕후가 됐어도 궁궐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의 뜻대로 궁을 떠났으며, 왕위계승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물론 적국의 인질로 가야 하는 현실에 저항, 자살로 맞서기도 했다.
2대 유리왕의 애절한 사랑의 노래 ‘황조가’의 주인공은 치희. 유리왕은 첫 부인 송비가 아들을 낳고 사망하자 절망 속에 헤어나지 못하고 술에 의지해 국사를 소홀히 한다.
왕의 외로움을 위로하기 위해 신하들은 서둘러 화희를 소개했으나 유리왕은 쉽게 송비를 잊지 못했다.
유리왕에게 다시 사랑을 느끼게 한 인물은 사냥터에서 만난 한나라 여인, 치희.
하지만 세 번째 왕후가 된 치희는 화희의 질투로 편할 날이 없었다. 급기야 유리왕이 사냥으로 궁궐을 비우자 일주일이나 계속되는 화희의 욕설을 참지 못해 마침내 치희가 짐을 싼 것.
9대 고국천왕의 부인 우씨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 없이 고국천왕이 세상을 뜨자 그의 유언을 조작, 고국천왕의 동생 연우에게 왕위를 승계하고 자신 또한 10대 산상왕이 된 연우의 부인이 되어 왕후자리를 고수한다.
그는 고국천왕의 형, 발기를 먼저 찾아가 왕이 될 것을 제안하지만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하자 왕의 동생, 연우를 설득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임종을 지키려는 신하들을 물러가게 하고 혼자 임종을 지키는 한편 왕이 승하했음에도 불구하고 발기에게 임종 사실을 숨기는 등 치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우씨는 산상왕과의 사이에서도 아들을 낳지 못한다.
산상왕의 아들을 낳은 인물은 주통천이라는 산간마을 농부의 딸 후녀. 후녀는 미색에다 무예까지 신기에 가까운 인물.
그가 왕과 정을 통한 것을 안 우씨는 지속적으로 후녀를 위협했으나 그는 꿋꿋하게 버텨 아들 교체를 낳았다.
교체가 바로 11대 동천왕이다.
20대 장수왕의 조카딸인 효문 공주는 당시 강국이었던 위나라에 인질 격인 왕후로 가야 되는 신세가 되자 자결로 저항했다.
당시 고구려는 국력이 커나가고 있었지만 위나라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던 상황.
위나라 역시 강해지고 있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다.
이 때 위나라가 제시한 것이 공주를 왕후로 삼겠다는 것.
그러나 장수왕의 딸은 이미 출가를 해 질녀였던 효문 공주가 대상이 돼 버렸다.
하지만 효문 공주는 인질로 시집가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했다.
위나라의 사신이 도착하자 몸에 지니고 있던 단도를 꺼내 자결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결국 장수왕은 궁녀 중 한 사람을 양녀로 받아들여 위나라에 보낼 준비를 했으나 위나라 왕이 죽는 바람에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함영이 기자 hyy@iwomantimes.com
참고문헌-‘고구려왕조 700년사’(한국역사연구회),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김용만), ‘고구려의 발견’(김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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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여성은 어떻게 살았을까. 우먼타임스[제176호] 2004.08.25 인용.
김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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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8.21 16:09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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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수왕의 조카딸 효문공주를 위에 황후로 시집보낸다는 것은 인질이기보다는 위를 부마국으로 삼는 것이니 여기서도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얼마나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군요. 원이 공주를 고려왕에게 시집보내어 부마국으로 삼은 것처럼 말입니다. 고구려의 대중국 외교에서 나타나는 사례들은
전적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중화주의의 근거한 춘추필법의 윤색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조공 책봉등...고구려 공주를 위에 시집보내는 것은 분명 위를 부마국으로 전락시키는 면이 있으니 고구려 우위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