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무량수경과 백련결사(白蓮結社)
/ 지안 스님
불교의 수행 가운데 오로지 염불에만 전념해서
정토왕생을 이루고자 발원하는 수행법이 있다.
이를 수행하고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조직을 결성한 것을 백련결사(白蓮結社)라 했다.
중국에서 동진(東晋) 때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혜영(慧永), 혜지(慧持),
도생(道生), 종병(宗炳), 유유민(劉遺民), 뇌차종(雷次宗) 등
123인이 모여 반야대 무량수불 앞에서 재회(齋會)를 행하고
염불삼매를 닦기 시작한 것이 최초의 백련결사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인 1216년에
전남 강진의 백련사에서 요세(了世)에 의해
조직된 결사체를 '백련결사'라 하였다.
이 백련결사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결성한
'정혜결사(定慧結社)'와 더불어 당시 불교의
수행가풍을 진작하는 큰 역할을 하였다.
고려불교가 쇠미해지며 타락현상을 보이자
불교계의 반성을 촉구하며,
불교중흥을 시도했던 결사운동이었다.
다만 이 두 결사가
지눌은 선수행을 위주로 결사를 했고,
요세는 염불수행을 위주로 결사를 했다.
요세도 처음엔 지눌과 같이 수선(修禪)을 통한 결사를 생각하다
중생의 근기를 감안하여 상근기가 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행도(易行道)인 정토사상의 염불수행이 적합하다 하여
수선결사에서 염불결사로 전향을 한 것이다.
이때 요세는 [관무량수경]을 해석한 사명지례(四明知禮)의
[관무량수불경소묘종초(觀無量壽佛經疏妙宗抄)]에
의거해 염불결사를 하였다.
강진의 부호였던 최표(崔彪), 최홍(崔弘)의 지원을 받아
백련결사를 만들고 나중에는 보현도량을 개설하였다.
요세의 제자 천책(天)은 [백련결사문]을 찬술하여 반포하였다.
원래 요세는 천태종 스님이라
왕생정토를 구하는 데도 [법화경] 독송을 권하고
법화삼매를 통해 정토발원을 하기도 했다.
백련결사를 주도한 사람이 요세와
그의 제자 천인(天因)과 천책이었다.
이들이 가르친 것은
모두 염불과 정토발원 그리고 참회였다.
백련결사에서 내건 취지는
업장이 두터운 범부중생을 구제하는 데는
이행도인 염불수행이 최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염불수행의 이치도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선의 대의와 일치하는 것이라 했다.
그 근거로 [관무량수경]의 본문 한 구절을 인용했다.
“이 마음이 부처를 만드는 것이니,
마음이 바로 부처다.(是心作佛 是心是佛)”라는
[관무량수경]의 말을 사명지례가 천태종의
법화사상과 미타정토사상을 접목하여
천태정토사상을 제창하면서 내걸었던 것이다.
[관무량수불경]은 [아미타경] [무량수경]과 함께
정토삼부경의 하나로 극락정토를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관찰하게 하는 방법을 설해 놓은 경이다.
모두 16관법을 설하여 관불삼매와 염불삼매를 이루게 했다.
왕궁회(王宮會)와 영산회(靈山會)의
두 법회에서 설해진 내용이 합쳐져 있다.
유송(劉宋) 때의 강량야사(畺良耶舍)가 번역했으며
혜원(慧遠), 길장(吉藏), 선도(善導) 등에
의하여 많이 연구된 경이다.
정토불교의 목적은 왕생에 있다.
부처님 세계에 가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
구경목적으로 그것이 곧 성불의 경지이다.
요세가 입적할 때 원효의 [미타증성게]를 외우다
제자와 나눈 대화가 전해진다.
"세상을 떠날 때 정(定)에 든 마음이 곧 극락정토인데,
다시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
천인이 묻자 요세는 대답했다.
"이 생각에 움직임이 없다면
바로 이 자리에 道가 나타난다.
나는 가지 않아도 가는 것이고,
저들은 오지 않아도 오는 것이다.
서로 감응하니 제법의 실상은 마음 밖에 있지 않다.”
정토가 곧 유심정토임을 말해준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 지안스님[조계종 고시위원장] / 불교신문에서
- 그 림 / 담원김창배님 - 禪수묵화[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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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처님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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