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꼬리 내린 심술
함영연
체육 시간에 뜀틀 넘기를 했다. 훌쩍 넘을 때는 신나서 방방 뛰던 아이들이 5단부터는 뜀틀 앞에서 엉겨 주춤했다. 나도 심호흡하고 힘차게 도움닫기를 했다. 하지만 뜀틀 앞에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멈췄다. 그런 뜀틀을 준범이는 물 찬 제비처럼 거뜬히 넘었다.
“우와! 대단해.”
“준범이 최고!”
아이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은 다음 시간에 뜀틀넘기 수행평가를 보겠다고 했다. 5단을 거뜬히 넘는 준범이가 부러웠다. 준범이는 뜀틀뿐만이 아니라 못 하는 운동이 별로 없다. 배구에서 토스를 배울 때나 배드민턴에서 스매시를 배울 때도 선생님과 짝이 되어 시범을 보였다. 처음에는 회장인 나를 시범 상대로 부르더니 준범이 실력을 알고부터 선생님은 내 이름을 더는 부르지 않았다.
‘눈에 거슬리는 녀석이야!’
마음 언저리가 불편했던 체육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과 교실로 가고 있었다.
“같이 가자.”
준범이가 곁으로 왔다.
“할 얘기라도 있냐?”
반갑지 않아서 떨떠름하게 물었다.
“꼭 있어야 같이 가니?”
준범이는 자연스레 아이들과 어울려 갔다. 도리어 내가 뒤처지고 있었다.
“야, 박준범. 예의 없이 끼어들면 어떡해?”
버럭 화를 냈다. 그 바람에 아이들이 돌아보았다.
“그런 거냐? 그럼나 먼저 간다.”
준범이가 손을 들어 보이고 앞서갔다.
“야, 이세호! 같이가면 어때서 화내니?”
나와 친한 동희가 말했다. 준범이를 감싸는 것처럼 들려서 마음이 배배 꼬였다.
"저 자식, 하는 행동마다 다 마음에 안 들어."
입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졌다.
“준범이가 뜀틀 잘 넘어서 부러워 그러지? 아무리 그래도 생각하고 말해. 교실 같이 가자는 게 예의 따질 일이니? 준범이 상처받겠다. 말로 난 상처는 아물기 어렵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
동희가 걱정스러워했다.
"내가 뭘 어쨌는데? 우리가 얘기하면서 가는데 준범이가 끼어든 건 맞잖아."
“어머, 왜 저러니?”
몇몇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순간 아이들이 나와 준범이를 비교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겼다. 공개수업 다녀온 날, 엄마는 어쩜 그렇게 발표 잘하냐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준범이를 칭찬했다. 은근히 준범이와 비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머리를 저어서 생각을 털어냈다.
점심시간에 급식을 빨리 먹고도서관에 갔다. 엄마가 도서관 봉사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책 읽으라는 타령을 밥 먹듯 했다. 그래서 엄마가 봉사하는 날엔 책을 몇 권 골라 오곤 했다.
"우리 아들, 무슨 책 골랐는지 보자."
엄마는 책을 받아서 들었다. 언제 왔는지 준범이가 옆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준범이가 엄마에게 인사했다.
"어머! 준범이구나. 어서 와라."
엄마는 준범이를 엄청나게 반가워했다. 누가 보면 준범이가 아들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때 사서 선생님이 불렀다.
“세호야, 학년 추천 도서 목록 좀 가져다줄래?.교무실에 가서 말씀드리면 줄 거야.”
“네.”
나는 도서관을 나왔다.
“같이 가 줄게.”
준범이가 따라 나왔다. 마음으로 밀어내는데도 다정하게 구는 게 싫어서 못 들은 척 빨리 걸었다. '박준범, 나와서 시범 보여봐라. 역시 준범이야. 준범아, 교무실에 가면….' 머릿속이 온통 준범이 이름으로 소용돌이쳤다. 생각에 빠져 걷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아얏!”
무릎이 까져서 피가 나고 있었다.
“아프겠다. 보건실에 가서 약 바르자.”
준범이가 부축했다.
"됐어. 저리 비켜!"
뿌리쳤지만, 상처가 따끔거려서 결국 보건실로 갔다.
"됐어, 이제 가."
보건실까지 바래다준 준범이에게 말이 퉁명스럽게 나갔다. 그래도 준범이는 무릎에 약 바르고 밴드 붙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고마워할 줄 알았니?"
보건실에서 나오며 나는 또다시 이죽거렸다.
"넌 좋겠다."
대거리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준범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뭐가?"
"……."
말이 없자, 심술이 났다.
"너, 발표 잘하고 체육 잘해서 인기 좋으니 다 네 세상 같지? 어림없어."
마음속에 품고 있던 불만을 내뱉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무릎 아플 텐데 도서 목록은 내가 가져다드릴게.”
내 빈정거림에도 준범이는 나를 위해주려고 했다.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놔둬! 내가 해.”
나는 절뚝거리며 교무실로 갔다 왔다. 준범이는 교실로 갔는지 도서관에 없었다. 속 모르는 엄마는 학교 마치고 준범이와 같이 떡볶이 먹는 게 어떠냐고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교실로 왔다. 수업 시간에 준범이를 흘끔흘끔 보았다. 나더러 좋겠다고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다.
5교시는 학급회의 시간이었다.
“자자, 회장은 나와서 학급회의 하고 있어. 선생님은 잠깐 교무실에 갔다 올 테니.”
선생님이 당부하고 교무실로 갔다.
나는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교실 앞에 섰다.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장난치기 시작했다. 학급 회의는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여러분, 조용히 해 주십시오."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아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치밀었다.
"얘들아, 조용히 해야 회의 진행하지. 시끄러워서 회장이 못 하고 있잖아."
그때 준범이가 일어서서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목소리까지 우렁했다. 그제야 아이들은 학급회의 시간인 걸 알아챈 표정이었다. 어이없어서 콧방귀가 나올 지경이었다. 준범이는 왜 내일에 나서는지, 아니꼽기 그지없었다. 부아가 나서 어떻게 회의 진행을 했는지 모른다.
선생님이 교실로 왔다.
”자, 좋은 소식이 있다. 세호가 수학경시대회에서 상을 받게 되었어.“
”와, 세호 좋겠다.“
“세호야, 축하해.”
아이들이 기뻐하며 박수를 보내주었다. 모처럼 어깨가 으쓱했다. 해졌다. 준범이는 쉬는 시간에 내 자리로 와서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축하해. 멋지다.”
엄지손가락을 보니 준범이를 칭찬하던 엄마 모습이 떠올랐다. 누그러졌던 심술이 발동했다.
“부럽지? 부러우면 너도 상 받아. 너희 엄마도 좋아하시게.”
괜히 준범이 엄마를 들먹였다.
"뭐?"
준범이 눈이 흔들리며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면 너희 엄마가 좋아서 칭찬하실 거잖아. 안 그러냐?"
빈정대기까지 했다.
"잠깐 나와 봐!"
준범이가 팔을 잡아끌었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라 내가 너무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해."
팔을 뿌리쳤다.
“나가서 할 말이야.”
안 나가면 안 될 분위기였다.
“쟤들 왜 저러니? 저러다 싸우겠다.”
“세호 쟤는 준범이한테 왜 심술을 부리는지 몰라.”
동희 목소리도 들렸다. 또 짜증이 났다. 준범이는 아래층 내려가는 계단에서 나를 돌아보았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엄마 얘기를 꺼내니?“
“못할 말이니?”
어깃장을 놓았다. 준범이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래, 못 할 말이지.”
“왜?”
“난…, 엄마가 안 계시니까. 2년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거든.”
아차 싶었다. 준범이 얼굴을 보니 눈물 소나기가 한차례 퍼부을 것 같았다.
“그런 줄 몰랐어.”
“네가 날 싫어하는 거 알아. 나도 널 멀리하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친구를 가려 사귄다고 걱정하던 엄마 생각이 나서 친해 보려고 애썼어.”
준범이 귀가 빨개졌다. 숨소리에도 슬픔이 묻어났다. 순간 이글거리던 마음이 꼬리를 내렸다.
“그러니 심술 나게 뭐든 잘하래?”
멋쩍어서 준범이 어깨를 툭 쳤다.
“네가 잘하는 건 생각 안 하니? 봐, 수학경시대회 상도 받았잖아. 도서관에서 다정하게 대해주는 너희 엄마를 보니 참 좋아 보였어. 나야말로 수학 잘하고, 다정한 엄마가 계시는 네가 부럽더라.”
‘좋겠다는 말이 그거였구나!’
가슴이 짠했다. 준범이는 창 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활달한 준범에게 그런 아픔이 있을 줄 몰랐다. 준범이 말대로 잘하는 건 생각하지 않고 심술부렸던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엄마 얘기해서 슬프게 하지 마.”
할 말을 다 했는지 준범이가 교실로 향했다.
"야, 박준범! 잠깐 기다려 봐."
나는 무릎이 쓰라려서 짝발로 뛰어 준범이 손을 잡았다.
“학교 마치고 떡볶이 먹으러 가자. 네가 발표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어떤 분이 사 주실 거야.”
준범이가 살며시 손을 뺐다.
“고맙지만 오늘은….”
“오늘은 뭐? 오늘이 딱 좋은데.”
나도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엄마 제삿날이라서 집에 빨리 가려고. 다음에 갈게.”
준범이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그, 그러자. 다음에도 학급회의 때 조용히 좀 시켜줘. 도와주는 친구가 있으니 좋은걸.”
너스레를 떨었다. 준범이가 엷게 웃었다. 웃어주는 준범이가 고마워서 눈시울이 뜨끈했다.
‘에이, 밉게 본 내 눈이 문제야. 옹졸한 마음도 문제고. 준범이 운동 잘하는 거 인정!’
나는 교실로 가는 준범이 등을 보며 어깨를 추어올렸다. 요동치던 마음에 잔잔한 고요가 스몄다.
함영연
계몽아동문학상 수상으로 동화를 쓰고 있음. 작품집으로 『가자! 고구려로!』 『로봇 선생님 아미』 『석수장이의 마지막 고인돌』 외 여러 권 있음. 방정환문학상, 한정동아동문학상, 강원아동문학상 등을 받음. 현재 대학 출강.
출처 : 2024 생명과문학 여름호 제13호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아이들의 심리가 잘 나타나 있는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