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구, 우리 소가 70마리나 물에 떠내려갔어요. 우리 소가…” 할머니의 눈물이 움푹 패인 주름에 배여 흘러내리질 못하고 있었다.
진흙 뻘이 된 비닐하우스, 사라진 논, 가지 끝만 보이는 과수원. 갈퀴 같은 손으로 촌로는 땅을 치고 있었다. 부채 상환기일을 늦추고 학자금을 융자해주고 수리비를 얼마 지원해준다 해도 그들이 온전한 삶을 되찾기는 아주 어렵다. 앞으로 저이들이 얼마나 오래 물질적, 정신적 곤궁함을 짊어지고 가야 할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땅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 때문에 우리는 태풍을 피할 도리가 없다. 해마다 맞이하지만 그때마다 힘들고 어려운 손님이다. “하늘이 하시는 일이라 어쩔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하네요…”라는 아낙의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역은 달라져도 비 피해를 당하는 이들은 언제나 `없는 사람들’이다. 텔레비전을 켜 보라. 수해현장에서 피해를 당하고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은 으레 온종일 논밭에서 일하느라 등이 휘었거나 뒷골목 옹기종기 모여 사는 쪼들리는 이웃들이다. 마이크 앞에서도 이들은 자신의 입장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그저 한두 마디로 호소하는 게 고작이다. 정연한 문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모습으로 고통을 다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다리가 무너지고 길이 끊어져 구호의 손길이 제대로 못 미치는 고립무원의 지역이 아직도 있다고 한다. 태풍의 피해가 가장 먼저 닿은 자리에 구호의 손길은 가장 더디게 가니 이 얼마나 역설인가.
안전한 내 집 방안에 앉아 수재민들의 소식을 접하는 게 그렇게 죄스러울 수가 없다. 당장 일어나 트럭에 담요를 싣고 가야 되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누구나 들 것이다.
1980년대 언저리에 재해구호단체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태풍이 온다는 전갈이 언제나 귀 너머로 들리지 않는다. 여름만 되면 긴장하며 살던 버릇이 남은 탓이다. 어느 해는 태풍이 살짝 지나가기도 했고 어느 해는 마을 학교에서 단체급식을 해야 할 정도로 수재민을 내기도 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에 담요를 싣고 달리기도 했다. 수해현장에 도착했지만 다리가 물에 잠겨 그 따뜻한 담요가 무용지물이 된 적도 있었다. 물이 빠져나간 어느 자리에서 한 부인이 앨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미 출가한 딸아이의 졸업사진에서 흙을 털어 내며 안쓰러워하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재해를 당한 사람들이 잃어버리는 것은 유형의 재산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억과 시간을 모조리 앗긴 사람들이다. 그들의 어려움을 도울 때는 단순한 `피해자’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이든 그들의 `존재’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당시 외국의 적십자사를 방문했을 때 그곳 구호품 상자 안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물품이 있다. 매니큐어 세트였다. 물난리를 당했건, 불이 나서 집이 몽땅 타버렸건 간에 `당신의 존재를 우리는 온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라는 표시 같았다. 담요 한 장으로 잠자리를 만들고 라면을 받아먹는 상황이지만 한 인간의 모든 면모를 간직하시라는 메시지 같았다.
마을이 잠겨버린 동네의 한 어린이가 말한다. “빨리 전기도 들어오고 물도 나오고 해서 그전처럼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린 초등학생의 눈망울에 `아무렇지 않은 엊그제’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이 역력했다. 그런 날은 우리사회가 모두 힘을 모아야 만들어진다. 천재지변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겪는 일이라지만 유독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재해가 아니다. 갠 날, 태풍이 불지 않을 때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을 평평하게 골라놓을 일이다. 태풍의 피해로 온 땅이 휘청거리고 있지만 이번 고통이 주는 교훈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