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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詩 읽기 스크랩 폐계 일지 / 서춘기
동산 추천 0 조회 24 17.10.16 19: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폐계 일지 / 서춘기

 

 

양계장에서 죽도록 알만 뽑다가

이젠 늙어, 문드러진 알집으로 버려진

폐계 한 마리 얻어 집안에 풀어놨더니

난생처음 탁 트인 풍경 너무 숨막혀

비칠비칠 제 그림자 물고 뒤안으로 숨는다

 

지지리도 못나 복다림상에도 오르지 못한 놈

그럭저럭 여름 한철 넘기는가 싶더니

눈빛이 제법 또렷또렷해져 있다

종종걸음으로 꽃밭을 후비고 참대밭을 후비고

허구한 날 내 무관심의 푸석돌을 쪼아댄다

 

백로 지나 바람이 한결 선들선들해지자

낼갯죽지에도 힘이 붙어 가는지 장독 위까지 퍼드덕퍼드덕

시든 꽃잎처럼 팍삭 오그라들었던 볏이

쪽빛 하늘 아래에서 홍단풍보다 붉게

제 빛깔 찾아간다

 

첫눈 내리는 날 무심코 대숲길 오르는데

저 안쪽에서 암탉이란 놈 불쑥 나타나 줄행랑이다

의뭉스런 놈, 앉았던 자리가 궁금해진다

댓잎에 에둘린 작은 둥지가 보이고 그 안에 큼직한 알이 하나

아하 저 놈이 낳았구나 이 겨울날

피 묻어, 눈물보다 더 따뜻한 알 하나를

 

 

 

***********************************************

 

고통극복 의지와 성찰의 시학 - 서춘기 시인

 

<폐계 일지>는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타자인 ‘폐계’가 처한

소외의 고통을 벗겨주는 태도를 지닌다.

고통의 질보다는 고통이 예술적 정서로 변용시키는데

집중하고 있는데, 이는 화자 자신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즉 폐계는 일생동안 알만 생산한 늙은 닭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인간에게는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버려진 폐계를 얻어 화자의 집안에 풀어 놓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

화자는 폐계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느끼는 것보다 예술적

정서의 변용에 집중한다.

 

“양계장”에 갇혀 살다가 “집안”에 풀어진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동은 폐계에게 새로운 생명을 제공하는

기회가 된다.

그래서 폐계는 “비칠비칠” 걸었던 것을 종종걸음으로

꽃밭을 후비고 참대밭을 후비고” 다닐 수 있게 되며

“눈빛이 제법 또렷또렷해져 있다”

그동안 자유를 박탈당한 채 인간에게 알을 생산하는 도구로

이용당한 후 쓸모없어지자 버림을 받았지만 폐계는 화자의

집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어 “날갯죽지에도

힘이 붙어 가는지 장독 위까지 퍼드덕퍼드덕”거리게 되고

“시든 꽃잎처럼 팍삭 오그라들었던 볏이” “제 빛깔 찾아”

가게 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대숲 속에 둥지를 틀고 “큼직한 알”

“피묻어, 눈물보다 더 따뜻한 알 하나를”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생명을 낳기에 이른다.

소외되고 버려진 상처를 안은 폐암탉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고통을 극복하는 법을 보여

주는 <폐계 일기>는 암탉이 금방 낳은 알만큼 따뜻해

보인다. <폐계 일기>에서는 구체적인 서사를 통해 고통을

추스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 강경호 시인

 

 

 

서춘기 시인

 

1957년 전남 광양 출생

광주교대, 한국교원대 대학원 졸업

1995년 시와 시학 등단

 

시집

『그 섬에 가려면』

『사람에 취하다』

『새들의 밥상』

『얼굴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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