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만사 새옹지마 / 이정아
페이스북에 20대의 사진을 올리는 게 요즘 유행이라기에 쓸만한 사진을 찾아보았다. 우리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추억에 잠겨 옛날을 반추하는 걸 좋아하는지, 여기저기 한창때의 사진으로 젊었던 한 시절을 과시하기 바쁘다.
작정한 이민이 아니라 유학생 남편 따라와 눌러앉은 이민이라 젊을 적 사진이 수중에 없다. 한국의 친정집 다락
어딘가에 있을 듯하다. 대학 졸업 앨범 사진을 올렸더니 “총기 있네” “똑똑해 보이네” 칭찬이 무성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똑똑하지 않았다.
치열한 중학교 입시를 치르고 들어가서 받은 첫 성적표엔 형편없는 석차가 적혀있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내겐 큰 충격이었다. 엄마도 마찬 가지였는지 망연자실. 모녀는 부뚜막에 앉아 기막혀 울었다.
심기일전하여 머리 싸매고 공부해 보았으나 다음 학기도 성적이 크게 오르지 못했다. 강남 강북이 있기도 전이니,
연희동 변두리 아이와 도심 아이들의 차이였는지 아니면 전국에서 몰려든 비슷한 아이들끼리의 경쟁이어서였는지
성적 올리기는 참 어려웠다.
교복을 입고 길에 나서면'경기 학생’이라고 모두들 칭찬하였지만 내 마음속엔 남모를 열등감이 있었다. 중고교 6년
동안 성적은 그저 그 타령으로 뒤에서 세면 더 빨랐다.
고3이 되자 입시를 대비하여 반을 나누었다. 절반은 서울대반, 20% 정도는 연고대반. 나머지는 기타 등등반이었다.
집 가까운 여대를 갈 생각이었던 나는 ‘기타 등등반’에서 대입 준비를 하였다. 내가 시험을 치던 해부터 논문식
시험으로 바뀐 그 대학은 선생님들도 처음 경험하는 것이라, 대책이 없다며 신문의 사설을 읽게 하는 것이 입시
준비의 전부였다. 혼란 속에서 기타 등등반은 여유작작 놀아도 양해가 되었다.
나의 열등감인 ‘기타 등등’의 역사는 이처럼 오래된 것이다. 동기들이 의사나 박사로 학위를 받고 전문직을 택할 즈음
나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왔다. 비교적 평등한 이곳에서 살면서 열등감은 많이 희석 되었다. 동창들처럼 초일류가
아니었기에 남편을 공부시키기 위한 궂은일도 큰 갈등 없이 감당할 수가 있었다.
꽃집 알바도, 세탁소의 옷 수선도, 인형 만들기도 기꺼이 해냈다. ‘기타 등등의 삶’으로 이미 단련된 마음의 근육이
아니던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예비하신 ‘기타 등등’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삶의 지경을 넓혀준
그늘의 체험이 살다보니 참 소중한 거였다.
이랬던 내가, 글을 써서 모교를 빛냈다며 자랑스러운 졸업생에게 주는 영매상을 받았다. ‘기타 등등’의 열등감을
한방에 날려버린 가문의 영광 사건이었다.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 맞다.
새옹지마 (塞翁之馬)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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