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諱)는 흠(欽)이요 자(字)는 경숙(敬叔)이다. 신씨(申氏)는 전라도 곡성(谷城)에서 나왔다. 그뒤 태사(太師) 장절공(壯節公)숭겸(崇謙)이 삼한을 통일하는 고려 태조의 일을 도와 원훈(元勳)이 되었는데, 끝내 자기가 몸으로 대신 순절(殉節)하자 태조가 평산(平山)을 그의 관향으로 내려 주었으므로 그 뒤로 마침내 평산인이 되었다.
공을 임신했을 때 태부인(太夫人)이 가슴 속으로 큰 별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 다음날 공을 낳았는데, 이 때가 가정(嘉靖) 병인년(1566, 명종21) 정월 28일 경신이었다.
자질이 특이하여 이마가 넓고 귀가 컸으며 눈은 샛별처럼 빛나고 오른쪽 뺨에 탄환(彈丸) 모양의 빨간 사마귀가 있었다. 유아 시절에 노는 것도 범상치 않았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무게가 있었다. 7세 때 태부인이 송도(松都)의 임소(任所)에서 죽자 공이 장례 행렬을 따라 수백 리 길을 걸어갔는데 슬퍼하고 사모하여 부르짖는 등 상을 당해 취해야 할 태도가 어른스럽게 표출되었으므로 길가의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아버지를 잃게 되자 외할아버지 송공(宋公)이 데려다 키웠는데, 8세 때에야 비로소 글 공부를 하게 되었다. 송공이 여러 손자들을 모아놓고 한 구절씩 만들어보라고 하면서 ‘춘(春)’ 자로 제목을 내주었는데, 공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천지 만물 가운데 봄이 맏이다.’고 하자, 송공이 감탄하며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공은 기억력이 비상하였다. 10세 때 《논어》를 몇 차례 읽어보고는 곧장 배송(背誦)하면서 한 글자도 틀리지 않자 송공이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며 상자 속에서 새로 장정한 《논어》 한 질을 꺼내어 아끼지 않고 공에게 내주었다.
13세에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을 두루 보고 유려하게 표현하며 글을 잘 지었는데, 서애(西厓)유성룡(柳成龍)이 그 글을 기특하게 여겨 와서 찾아보기도 하였다.
14세에 염락(㾾洛 송 나라 성리학파를 말함) 제현(諸賢)들이 남긴 글을 모두 가져다 보는 한편 노장(老莊)이나 불가(佛家)에까지 관심을 쏟았는데, 그 뜻을 궁구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송공의 집에 장서가 많았으므로 공이 늘 서재 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면서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는데, 상위(象緯 천문(天文))ㆍ감여(堪輿 지리(地理))ㆍ율력(律歷)ㆍ산수(算數)ㆍ음양(陰陽)ㆍ황기(黃岐 의학)의 글에 대해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경진년에 청강(淸江) 이공 제신(李公濟臣)의 문에 납채(納采)를 들였다. 청강공은 《주역》을 잘 알기로 유명하였으므로 공이 배움을 청하였는데, 청강공이 전(傳)을 얼마 강하고 나서 별안간 사석(師席)을 사양하며 말하기를,
“이미 대의를 터득하였는데 다시 무슨 도움이 필요하겠는가.”
하였다.
계미년에 삼사(三司)가 이 문성공(李文成公 이이(李珥))을 무함하여 권력을 독점하고 마음대로 휘두르며 교만 방자하다고 헐뜯었다. 이때 대사간이었던 송응개(宋應漑)가 바로 공의 큰 외삼촌이었는데, 조회에서 돌아와 탄핵문을 꺼내 공에게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너의 뜻에는 어떠하냐?”
하자, 공이 다 보고 나서 천천히 대답하기를,
“이모(李某)는 당세의 중망(重望)을 지고 계신 분인데, 치곤(緇髠 승려) 등의 말을 넣은 것은 너무 심한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대사간은 잠자코 있었으나 여러 종자제(從子弟)들이 문성공을 편든다고 시끄럽게 떠들면서 비방하는 의논을 크게 펼쳤는데, 공이 군소배에게 배척을 받게 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을유년에 생원에 제8명(第八名)으로 합격하고 진사시에 제3명으로 진출하였다.
병술년에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의(朝議)가 바야흐로 당파를 세워 자기들과 다른 사람은 배척하는 때였으므로 축출되어 성균관 권지에 소속되어 있다가 경원(慶源)의 훈도로 나갔고 다시 광주(廣州)로 옮겨졌다.
무자년에 사재감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무슨 일 때문에 파직된 뒤 책을 끼고 동호 독서당(東湖讀書堂)에 나가 거하면서 강학(講學)하며 유유자적하게 보내었다.
경인년에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고 차서에 따라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신묘년 여름에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고, 천거를 받아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일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
임진년에 왜구가 승승장구하여 도성에 육박하였을 때 양재 찰방(良材察訪)에 서용되었는데, 이는 권신(權臣)이 공을 사지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 공이 그날 즉시 조정을 하직하고 역(驛)으로 가보니 병마(兵馬)가 구름처럼 일어나는 때에 역사(驛舍)가 모두 텅텅 비어 있었다.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은 평소 위엄이 있고 용맹스러웠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었는데, 공이 들어가 신립을 보고서 조용히 피폐해진 상황을 설명하니, 신립도 공경하는 태도로 대하면서 책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공이 신립을 따라 조령(鳥嶺)의 진(陣)으로 갔는데 신립이 패하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는 등 경사(京師)가 크게 혼란 상태에 빠졌다. 공이 행재소(行在所)로 가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도달하지 못하고 협중(峽中)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가을에 간도(間道)를 따라 강도(江都)로 내려갔는데, 이는 행조(行朝)로 곧장 가기 위함이었다.
당시 상국 정철(鄭澈)이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와서 편의대로 일을 행하고 있었는데,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해도 공이 사양하고 응하지 않자, 상국이 말하기를,
“바로 조정의 명령이 아니라서 그러는 것인가.”
하고, 마침내 사유를 갖추어 계문하니, 공이 그제야 임명에 응하였다. 체찰사를 따라 누선(樓船)을 타고 바다로 내려가 호서(湖西)에 이르렀을 때 상국이 공의 재주를 인정하고 삼남(三南)의 기무(機務) 일체를 공에게 위임하였다. 공이 예민하고 민첩한 관리로서 문법(文法)에 익숙한 자 십여 명을 불러들여 부첩(簿牒)을 나누어 주고 소리를 가지런히 하여 사뢰게 하는 한편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불편한 정상을 개진하게 하였는데, 아무리 안독(案牘)이 번거롭고 호소하는 내용이 혼란스러워도 공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묻고 손으로 판결하면서 종횡으로 치달려 처리하는 것 어느 하나도 사리에 합당하게 되지 않는 것 없이 막부(幕府)의 융사(戎事)가 모두 그 자리에서 해결되었다. 또 글을 지어 조정의 덕의(德意)를 선포하였는데 말의 뜻이 지극히 간절하여 부로(父老)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며, 의병과 관군 사이에 틈이 벌어져 장차 분쟁이 일어나려 하자 공이 또 글을 지어 타이르니 장사(將士)가 모두 두려워하며 태도를 바꾸었다.
겨울에는 사헌부 지평으로 영유(永柔)의 행궁(行宮)에 입조(入朝)하였다. 이때 대적(大賊)이 왕경(王京)을 점거하고 나머지 왜구가 팔도에 가득차 있는 상황에서 명(明) 나라 군대가 원병으로 나와 우격(羽檄)이 빗발치듯 하였는데, 이에 대해 응대하고 수작하는 일을 이공 호민(李公好閔)이 관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공이 상을 당해 떠나가자 조정이 모두 공에게 맡겼는데, 처리해야 할 각종 문서가 밤낮으로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에 특별히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이라는 직책을 설치하여 공에게 제수하고 또 지제교를 겸대하게 하였으며, 이로부터는 혹 교리(校理)와 참교(參校)를 늘 겸대하게 하기도 하였다.
계사년 5월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도성에 돌아왔다. 행인(行人)사헌(司憲)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국경에 이르자 원접사(遠接使)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공을 종사관으로 삼았다.
갑오년 정월에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송유진(宋儒眞)이 모반한 일이 발각되자 상이 친국(親鞫)하면서 공을 문사낭청(問事郞廳)으로 삼았는데, 지극히 상세하게 안문(按問)하고 정밀하면서도 민첩하게 응대하자 상이 자주 공을 지목하여 그 일을 맡겼다. 그리고 옥사가 완결되자 승진시켜 사복시 첨정으로 서용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조 낭관에서 사복시로 가는 것이 좌천이었지만 공이 오래도록 이조에 있는 것을 염증내었기 때문에 요청해 그 자리를 얻은 것이었다.
그 뒤 곧이어 사헌부 집의로 임명되었다. 이 때 조정이 명 나라 병부 상서의 뜻에 쫓긴 나머지 사신을 보내 기미책(羈縻策)을 청하자 공이 상차하여 잘못이라고 배척하였다. 송강(松江)정철(鄭澈)이 시배(時輩)에게 모함을 받았었는데, 죽은 뒤에도 여전히 당로자(當路者)가 물고 늘어져 그의 관작을 추탈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정공 엽(鄭公曄)이 옥당에 있는 것을 꺼린 나머지 그를 먼저 공격해 제거하려 하면서 내놓은 말이 바르지 못했는데, 이는 실로 한 시대의 사류를 내쫓으려는 것이었다. 이에 공이 사실을 주워모아 스스로 탄핵하여 마침내 헌직(憲職)에서 체차된 뒤 성균관 사성을 제수받았다. 그 뒤 얼마 있다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다.
을미년 2월에 복명한 뒤, 장악원 첨정ㆍ군기시 정ㆍ성균관 사성을 역임하였다. 순안어사(巡按御史)로 함경도에 갔는데, 마음가짐과 행동이 대범하면서 엄격하고 출척(黜陟)을 분명하고 온당하게 하여 부하를 사납게 대한 장수와 탐관오리들이 많이 인수(印綏)를 풀고 떠나갔으며, 본래 성격이 거세고 거만하여 남에게 굽히지 않는 감사 홍여순(洪汝諄)도 공을 보고는 문득 자기를 낮춰 대하였다. 공이 험난함을 꺼리지 않고 직접 시골 마을들을 찾아다니면서 백성의 질고를 조목별로 진달하여 견감시켜 주었으므로 북도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일컫고 있다.
병신년에 의정부 사인에 임명되었다가 장악원 정으로 옮겨졌으며,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있다가 서반직(西班職)에 서용되어 부호군(副護軍)이 되었고 다시 사성(司成)으로 전직되었다.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도모하고 잇따라 몇 개 고을을 함락시키자 원수가 변을 듣고 군대를 진격시켰는데, 적이 사로잡힌 뒤 조정에서 괴수만 다스리고 나머지 패거리들 수천 명은 원수로 하여금 취조하게 하였다. 이에 원수가 모두 죽이려고 하자, 공이 원수에게 말하기를,
“경(經)에 이르기를 ‘남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는 그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적도(賊徒)가 모두 농사나 짓는 백성들인데 지금 모두 죽여버린다면 왕자(王者)의 정치가 못 됩니다.”
하니, 원수가 공을 보내 사유를 갖추어 조정에 보고하게 하였는데, 상이 그 청을 윤허하는 동시에 공으로 하여금 원수와 협동하여 조사해 다스리도록 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옥사를 처리하면서 수악(首惡) 7인만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경중을 나누어 너그럽게 처결하니, 물정이 모두 쾌하게 여기고 호서 백성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
정유년에는 사섬시 정과 예빈시 정이 되었다. 명 나라 군문(軍門) 병부 상서 형개(邢玠)가 군대를 감독하러 나오자, 접반사(接伴使) 신점(申點)이 공을 종사관으로 삼아 요동(遼東)봉황성(鳳凰城)에서 군문을 맞이하였다. 11월에 조정에 돌아와 평산부사(平山府使)와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대신이 문서에 관한 일을 공이 전담하고 있다는 이유로 문득 아뢰어 그대로 머물게 하였다.
무술년에는 장악원 정으로 시강원 필선을 겸하고, 천거에 의해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로 있다가 응교로 승진했으며 교서관 교리를 겸하였다. 이때 경리(經理)양호(楊鎬)가 군량이 조달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근신(近臣)을 차출해 보내어 독촉하도록 요구하니, 선묘(宣廟)가 공에게 가도록 명하였다. 공이 입직소(入直所)에서 나와 하직 인사를 드린 뒤 관서(關西) 지방으로 달려가 무더위와 비바람을 무릅쓰고 해항(海港)을 드나들며 군량 17만 곡(斛)을 운반하였다. 겨울에 문서를 작성하는 일로 급한 부름을 받고 돌아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체차되고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사옹원 정으로 옮겨졌다.
기해년에는 재차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가 종부시 정으로 바뀌었으며, 다시 중서 사인(中書舍人)으로 들어갔다가 홍문관 전한으로 승진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되면서 동부승지 겸 승문원 부제조가 되었다. 고사(故事)에 의하면 승지는 승문원 제조를 겸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도 대신이 특별히 아뢰어 그대로 겸대하게 한 것인데, 이로부터 여러 차례 승지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겸대직을 띠고 있었다. 겨울에 체차되어 충좌위 상호군(忠佐衛上護軍)이 되었다가 형조 참의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로 옮겨졌다.
경자년에 호군(護軍)을 거쳐 정원의 우부승지로 들어갔다가 순서에 따라 전임되어 우승지에 이르렀고 여기에서 체차되어 사직(司直)이 되었다. 여름에 예조 참의와 사간원 대사간으로 옮겨졌으며 여기에서 체차되어 호군이 되었다. 가을에 병조 참지에서 이조 참의로 이동했는데 병으로 체차되었다.
신축년 정월에는 또 병조 참지가 되었고 2월에는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상이 옥당(玉堂)에 명하여 고경(古經) 《주역(周易)》을 등사하도록 하니, 공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정사에 바쁘신 여가에 더욱 학문을 열심히 닦으시어 뛰어나게 홀로 희문(犧文 복희씨와 문왕으로서 여기서는 《주역》을 가리킴)의 신령스러운 이치에 계합(契合)하셨으니, 하늘과 땅을 두루 에워싸고 만물의 뜻을 통하여 천하의 사무를 성취시키려는 그 뜻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정(貞)과 원(元)의 덕이 모이고 비(否)가 태(泰)로 교차되는 때인 동시에 전하께서 영원한 천명(天命)을 기원할 일대 계기가 된다 할 것이니, 이 마음을 미루어 나간다면 어찌 정치가 넓게 펼쳐지지 못하고 교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대저 《주역》이란 책은 네 분의 성인(聖人)을 거쳐 대의(大義)가 밝혀지고 세 분의 현인(賢人)을 경과하며 미지(微旨)가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괘효(卦爻)의 강유(剛柔)와 상수(象數)의 변역(變易)과 유명(幽明)의 일과 귀신의 정상과 삼극(三極 천ㆍ지ㆍ인 삼재(三才))의 도리가 모두 드러나 명쾌하게 밝혀지면서 숨김없이 들추어지고 길흉(吉凶)과 회린(悔吝)의 길이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쉽게 이해됨으로써 혐의하던 것을 해결하게 되고 유예하던 것을 결정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해서 비로소 사람들이 미혹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체(體)와 용(用)의 근원이 하나이고 현(顯)과 미(微)에 간격이 없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그 말이 오묘하고 가리키는 뜻이 심원하고 그 변화가 무궁한 만큼 참으로 성인의 마음과 같은 경지에서 보고 올바른 의리를 터득한 자가 아니면 다른 길로 빠져들지 않는 경우가 드물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수(數)를 훔친 자는 점서(占筮)를 전문으로 하고 그 비밀스러운 것을 도적질한 자는 단약(丹藥)을 만드는 것을 제일로 치게 된 결과, 경방(京房)이나 위백양(魏伯陽) 같은 무리들이 가득 퍼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정자와 주자가 각각 전(傳)과 본의(本義)를 내지 않았던들 그 속에 온축되어 있던 조촐하고 정미로운 도가 하마터면 없어질 뻔하였습니다.
선유가 말하기를 ‘선천(先天)의 학문은 심(心)을 근본으로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선천도(先天圖)야말로 심학(心學)인 것이다.’ 하였으며, 주렴계(周㾾溪)의 태극도(太極圖)에 이르러서는 중정(中正)인의(仁義)로 단안을 내리면서 이 도리에 따라 닦아나가면 길하게 되고 이에 어긋나게 하면 흉하게 된다고 경계하였는데, 계사전(繫辭傳)을 보면 ‘성인이 이것을 가지고 마음을 닦아 그 의식(意識)의 비밀스러운 곳에 보관해 둔다.’ 하였습니다. 따라서 《주역》을 공부한다고 하면서 이를 먼저 마음에 적용하지 않으면 《주역》을 배우면 배울수록 더 배우지 못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 선(善)이 발하는 것이 복(復)이고 악(惡)이 싹트는 것이 구(姤)입니다. 한 번 구가 되고 한 번 복이 됨에 따라서 혹 곤(坤)의 위태로움에 처하게 될 수도 있고 혹 건(乾)의 강명(剛明)한 덕과 짝할 수도 있으니, 그 차이가 현격하다 할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그 누가 또한 저쪽을 버리고 이쪽으로 나아오려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천리(天理)는 기르기는 어려운 반면 잃기는 쉽고 인욕(人慾)은 빠져들기는 쉬운 반면 막기가 어려운 법인데, 이에 대해서 대처할 방도를 알지 못하게 되면 가려진 자는 더욱 가려지고 어두운 자는 더욱 어두워지기만 한 결과 음의 기운이 끝까지 치고 올라가 양을 모두 떨굼으로써 천지가 폐색되고 말 것입니다.
《주역》에서 말한 ‘적연부동(寂然不動)’은 곧 자사자(子思子)가 말한 ‘미발지중(未發之中)’이고 《주역》에서 말한 ‘감이수통(感而遂通)’은 곧 자사자가 말한 ‘발이중절(發而中節)’로서 하나로 관통되는 것일 뿐 처음부터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의 심체(心體)로 하여금 적연부동한 가운데에서 천기(天機)가 어두워지지 않도록 하고 감응할 때에 본원(本源)이 늘 깨끗해지게 하면서 외물(外物)이 내 앞에 교차되어도 같이 휩쓸리지 않고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티끌 하나라도 오염되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신령스러움과 밝음이 내 몸에 있게 되고 열리고 닫히는 것이 나를 말미암게 될 것이니, 상(象)을 관찰하고 점(占)을 음미하는 것은 단지 여사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천도(天道)는 원(元)에 기초하여 만물을 내고 인주(人主)는 그 원을 몸받아 만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남의 임금이 되는 도는 하늘과 똑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천도는 꾸준하여 쉬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오면서도 그 차서가 문란되지 않고 어둠과 밝음이 교체되면서도 그 운행에 착오가 없는 것인데, 한 번이라도 쉬는 일이 있게 되면 만물을 내는 공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주역》을 통해 법받아야 할 것이 바로 건(乾)의 꾸준함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구두와 글뜻에만 신경을 쓰지 마시고, 여러 주석가들의 자질구레한 해석에도 구애를 받지 마시고, 오직 중정(中正)인의(仁義)로 방향을 정하시어 만물을 곡진히 이루어주는 묘한 이치를 탐구하도록 하소서. 비(否)의 극한 상황에 당하면 그 상황을 전환시킬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시고, 규(睽)의 극한상황에 당하면 모여 합하게 할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시고, 손(損)의 때를 당하면 아랫사람들에게 더해 줄 계책을 생각하시고, 박(剝)의 때를 당하면 수레를 얻을 방법을 생각하소서.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의 괘 하나의 효를 만날 때마다 모두 그 시의(時義)를 궁구하여 각각 쓰임에 맞게 하면 쉽고 간명하게 되어 천하의 이치를 터득하게 될 것이니, 영원히 지속될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것 또한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아, 양수(陽數)는 1이고 음수(陰數)는 2인 관계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잘 다스려진 때는 항상 적었고 어지러운 때가 늘 많았는데, 이 점을 성인이 걱정하시어 소장(消長)과 관련된 절목에 대해서는 일찍이 근실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시대에 따라 응하면서 변통해 그 기준에 합치되게 함으로써 이 세상을 대유(大有)의 성세에 올려놓고 미제(未濟)의 어려움을 면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 나름대로 성명에게 기대하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요즈음 천재(天災)와 지이(地異)가 잇따라 이르고 거듭 나타나는가 하면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백성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고 정사가 피폐해지고 있으며 세도가 무너지고 기강이 허물어져 마치 끝도 한도 없이 큰 강을 건너는 것 같기만 한데, 신들은 오직 전하께서 천덕(天德)으로 임어하시어 시행해 조치하시기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니, 선묘가 너그럽게 답하였다. 선묘가 또 《춘추(春秋)》의 좌씨(左氏)ㆍ호씨(胡氏)ㆍ정씨(程氏) 등 3가(家)의 전(傳)을 모아 한 책으로 만들도록 명하였다. 책이 완성되자 또 차자를 올려 복수(復讐)를 중히 여기는 《춘추》의 의리를 신명하였는데, 그 대략에,
“《춘추》 한 책이야말로 성인의 대용(大用)이요 오경(五經)의 단안(斷案)입니다. 왕자(王者)를 높이고 패자(伯者)를 물리치며, 명분을 바르게 하고 분수를 정하며, 시비를 분별하고 선악을 분명하게 판별하여 이미 지나간 2백 년 동안의 자취를 가지고 천만 세 미래의 모훈(謨訓)을 삼았으니, 그 뜻이 은미하고 그 의리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성인에게 또한 부득이한 면이 있었다 할 것입니다. 가령 과거에 주(周) 나라 왕실이 동천(東遷)하지 않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교화가 없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부자(孔夫子)의 도가 당시에 행해질 수 있었더라면, 《춘추》 1부의 글이야말로 그 당대에 바로 시행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을 것이니, 어찌 앞으로 올 세상을 가르치는 정도로만 끝나고 말았겠습니까. 성인의 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고 성인의 정치를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성인의 말씀을 높고 위대하여 준행하기 어렵다고 하지 마시고, 옛날의 도를 오활하고 시대에 동떨어져 행하기 어렵다고 하지 마소서. 가슴 속에 간직하는 것은 반드시 천리의 바름에 기초하시고 인욕의 사사로움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일을 행하실 때에는 반드시 왕도의 표준에 맞도록 궁구하시고 치우친 패도(伯道)의 술수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크게는 나라를 경륜하고 다스리는 일과 작게는 갖가지 일에 응수하는 일과 은미하게는 아무도 보지 않는 방에 혼자 있을 경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덕(天德)을 지니고 계신다면 백왕(百王)의 바꿀 수 없는 대법을 어찌 오늘날에 행할 수 없겠습니까.
더구나 《춘추》의 기록을 보면 난신 적자에 대해서 그렇게 엄할 수가 없고,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분별하는 데 그렇게 근실할 수가 없으며, 복수의 의리에 대해서는 더욱 크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씨의 전을 보면 이 점에 대해 간절하게 이야기하면서 후세를 위해 경계해 주고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 애석하게도 그 말이 쓰여지지 않은 채 남도(南渡)한 뒤 목전의 안일만 탐하다가 날로 쇠퇴해진 나머지 끝내는 이적이 중하(中夏)에 들어 와 주인 노릇을 하게까지 되었으니, 이는 꼭 이러한 뜻이 밝혀지지 않은 관계로 그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아,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 금석(金石)도 뚫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군신 상하가 힘을 합치고 마음을 같이하여 복수의 의리를 가슴에 새긴 뒤 한 세상을 떨쳐 일어나게 하여 통쾌하게 이목을 일신시킨다면, 전하께서 이 책을 숭신(崇信)하시는 실제적인 효과를 더욱 보게 되실 것입니다.”
하니, 선묘가 하교하며 추장(推奘)하고 특별히 가선대부로 가자케 하는 동시에 이 차자들을 두 책의 첫머리에 아울러 싣도록 하였다.
임인년 2월에는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체차되어 호군을 제수받았다. 4월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하고, 겨울에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명을 받아 동정(東征)한 명 나라 장사(將士)의 실상에 대해 약간 권을 지어 올리고, 또 왕비 김씨(金氏)의 책문(册文)을 지었는데, 그 공으로 구마(廐馬)를 하사하는 명을 받았다.
계묘년 정월에는 예조와 병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예문관 제학을 겸하였다. 이 해에 세 번 부제학이 되고 세자 우부빈객을 겸하였다. 선묘가 비서(秘書)와 옥당(玉堂)에 소장된 우리 나라의 시문 1천여 권을 공에게 맡겨 산정토록 명하였는데, 공이 순서를 정리한 뒤 문형(文衡)과 사한(詞翰)을 맡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하기를 청하여 검증하고 마무리해서 위에 바치니, 구마(廐馬)를 하사하여 위로하였다. 겨울에 예조 참판으로 옮겼다.
갑진년 여름에는 부제학으로 세자 좌부빈객을 겸하다가 체차되어 상호군(上護軍)이 되었으며 성균관 대사성과 동지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선묘가 한창 《주역》을 강하면서 국(局)을 설치해 교정케 하였는데, 경전에 밝은 사람들을 뽑아 고를 때 공도 참여되었다. 가을에 병조 참판이 되고 겨울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을사년 정월에는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가 여름에 체차되어 호군이 되었고 곧바로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0월에 도승지를 제수받고, 11월에 발탁되어 자헌대부로 가자되고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다.
병오년 봄에 예문관 제학을 겸하였다. 명 나라 조정의 학사(學士)주지번(朱之蕃)과 급사중(給事中)양유년(梁有年)이 조칙을 싸들고 와 반포하였는데, 공이 의주 영위사(義州迎慰使)가 되었다. 복명한 뒤 특명을 받고 《황화집(皇華集)》 서문을 지었다. 여름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무선(武選)을 공평하게 행하자 여론이 쾌하게 여기며 칭송하였다. 이때 명 나라 군사 중에 탈영병이 많았는데, 이들이 쇄환당하게 되자 서로 모여 무리를 이루고는 난동을 부리려 꾀하였다. 이에 공이 장사(壯士)를 뽑아 방편을 써서 그들을 호위해 보냈으므로 아무 탈이 없게 되었다. 체차되어 상호군이 되었다. 가을에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김계(金稽)라는 자가 상소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선조의 아버지)을 추숭(追崇)할 것을 청하였는데, 소가 종백(宗伯)에게 내려졌다. 당시 수상 유영경(柳永慶)이 정무를 담당하고 있으면서 부제학 이유홍(李惟弘)을 보내 공의 뜻을 낚아보려 하였다. 이에 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선유의 정론이 있는데, 어떻게 다른 의논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하니, 유홍이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떠나갔는데, 이로써 의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정미년에 체차되어 상호군이 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였다.
무신년 정월에는 지중추부사로 경기 관찰사를 겸하였다. 2월에 선조대왕이 승하하였다. 초상(初喪)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경기에 의지해서 마련했는데, 공이 미리부터 응용할 물품을 짐작하고 한 권에 손수 기록해서 담당 관리에게 내준 뒤 예비하고 기다리게 했으므로 일이 군색스럽게 되지 않았다. 옥책문(玉册文)을 짓는 일로 부름을 받고 예문관 제학이 되어 선조의 애책문(哀册文)을 지었다.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되어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고 지의금부사를 겸하였으며, 돈체사(頓遞使)로 호상(護喪)하였는데, 일이 끝난 뒤에 구마를 하사받았다. 이때 삼사가 왕자 임해군(臨海君)이 불궤(不軌)를 도모했다고 고하여 큰 옥사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당여(黨與)를 체포해 다스리고 임해는 해도(海島)에 금고시켰는데, 공이 10일 동안에 두 번이나 대사헌이 되었으면서도 모두 숙배하지 않았으므로 이때부터 광해(光海)가 좋지 않게 여겼다.
기유년 봄에는 예조 판서와 동지성균관사에 임명되었다. 명 나라 조정의 행인(行人)웅화(熊化)가 조시(弔諡)하는 일로, 태감(太監) 유용(劉用)이 책봉(册封)하는 일로 모두 조칙을 받들고 왔는데, 공이 의주영위사가 되었다. 가을에 예조 판서와 동지성균관사에 임명되었다. 겨울철 11월에 지중추부사로서 세자책봉주청상사(世子册封奏請上使)로 차견되어 연경(燕京)에 갔다.
경술년 4월에 복명하고,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책봉에 관한 일을 준허(准許)받았다 하여 노비 4구와 전지 30경을 하사받고 숭정대부로 가자되었다. 광해가 새로 법궁(法宮)으로 나아갈 때에 동남 동녀에게 경(經)을 외우며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게 하려 하자, 공이 말하기를
“임금이 법궁에 나아가는 것은 해가 하늘 가운데에 있는 것과 같은데 어찌 비정상적인 일을 행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일로 후세에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모두 세 차례를 아뢴 끝에 윤허받았다.
신해년 여름에 동지경연사를 겸하고 겨울에 지중충부사가 되었다.
임자년 여름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였다.
계축년 4월에는 사형수 박응서(朴應犀)가 이이첨(李爾瞻)ㆍ이창후(李昌後)의 사주를 받고 옥중에서 상소하여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끼고 역모했다고 고하였는데, 진신(搢紳)에게까지 말이 연루되었다. 광해가 제남을 하옥시켜 사사(賜死)하고 교묘하게 얽어 옥사를 일으켰다. 이에 앞서 선묘가 재신(宰臣) 7인에게 유교(遺敎)를 내렸는데, 이들은 모두 평소 선묘로부터 공경을 받고 중시되었던 사람들로서 공도 실제로 참여했었다. 그 유교 가운데,
“내가 왕위에 있으면서 신민에게 죄를 졌으므로 깊은 골짜기와 못 속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심정이었는데, 지금 홀연히 중병을 얻게 되었다. 오래 살고 못 사는 데에는 운수가 있고 죽고 사는 것에도 명이 있는데, 이는 밤과 낮이 바뀌는 것을 어길 수 없는 것과 같아서 성현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다만 대군(大君)이 어려 다 자란 모습을 미처 보지 못하니, 이 점이 마음에 걸릴 따름이다. 내가 죽은 뒤 인심을 측량하기 어려운데 만일 사설(邪說)이 일어나면, 여러 공들이 사랑하여 보호하며 거들어 주었으면 한다. 감히 이 일을 부탁한다.”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뒷날 이런 변이 일어날 줄을 선묘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대사간 이지완(李志完)과 정언 유활(柳活) 등이 권간의 뜻을 받들어 7신이 즉시 변명(辨明)하지 않았다고 논하여 사판(仕版)에서 삭제되도록 하였는데, 이는 마치 있지도 않은 선왕의 유교를 있는 것처럼 꾸민양 여기는 태도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는 정협(鄭浹)이란 자가 몰래 사주를 받고 이름있는 공경들을 마구 끌어대었으므로 차례로 옥에 나아갔는데, 공도 조사를 받고 즉시 석방되어 전리(田里)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시의(時議)가 그렇게 혹독할 수가 없어 가죄(加罪)하려고들 하였으므로 감히 멀리 가지 못하고 강상(江上)에서 몇개 월 동안 체류하다가 중추(仲秋)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김포(金浦) 선산 아래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 칸 초옥에서 사노라면 너무 비좁아 참지 못할 법도 하건마는 공은 느긋하게 거하면서 ‘하루암(何陋菴)’이라는 편액을 내걸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었다.
갑인년에는 산기슭에 집을 지어 못을 파고 나무를 심고는 그 거처를 ‘감지와(坎止窩)’라고 명명한 뒤 깊이 들어앉아 나오지 않은 채 초연히 물외(物外)에 노닐면서 도서(圖書)를 좌우에 두고 깊은 이치를 탐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하루는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수록된 소자(邵子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가져다 몇 번 보는 순간 홀연히 개오(開悟)하고 마침내 상수(象數)를 궁구하여 《선천규관(先天窺管)》을 저술하였는데, 뒤에 《소자대전(邵子大全)》을 연경의 저자 거리에서 사서 비교해 보니 서로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병진년 가을에 광해가 대비(大妃)를 폐하려고 하면서 김제남(金悌男)을 추형(追刑)하여 저자 거리에 전시하였는데, 대사헌 정근(鄭瑾)ㆍ대사간 정조(鄭造)ㆍ부제학 유숙(柳潚) 등이 공을 무함한 결과 춘천(春川)에 유배되었다. 공은 배소(配所)에 이르러 풀뿌리를 엮어 우거(寓居)를 만들고 이름을 여암(旅庵)이라 하였는데, 유배 생활 5년 동안 문밖을 나서지 않고 오직 옛 전적을 보고 즐기면서 고향 떠나 구속되어 있는 외로운 신세를 잊었다.
신유년 봄에 사면을 받고 다시 전리(田里)로 돌아 왔다.
계해년 봄에 금상(今上)이 의거를 일으켜 반정(反正)하고 무신년 이후의 죄적(罪籍)을 말끔히 씻어주었는데, 공은 입조(入朝)하던 그날 이조 판서에 임명되고 곧 이어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를 제수받았다.
혁명 초기에 내외 관료 대부분이 거의 바뀌었는데, 공이 물의(物議)를 널리 채집하여 주의(注擬)하고 전형(銓衡)하는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며 상도 공을 중하게 의지하여 수의(首擬)된 자를 모두 등용하니, 사람들이 성신(誠信)으로 화합되었다고 칭하였다.
7월에 승진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대배(大拜) 예정일에 상변(上變)한 자가 있어 매우 빈번하게 잡아들이는 상황이었는데, 상이 특별히 불러 기용하려고 하루에 모두 세 차례나 명을 내렸으므로 공이 어쩔 수 없이 명에 응하였다. 상이 즉시 인견하고 옥사에 대해서 자문을 구하니, 공이 새로이 교화를 펴는 마당에 억울한 사람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덕의(德意)를 앞세우고 형정(刑政)을 뒤로 돌려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진달하면서 매우 간절하게 아뢰었는데, 상이 이 때문에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하여 옥사에 과연 실상이 없게 되자 모두 용서하는 명을 내렸는데, 이에 환호하며 경축하지 않는 도민(都民)이 없었다. 이튿날 용서받은 자들이 공의 집 문 앞에 떼로 몰려 와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드렸는데, 공은 이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위해 그렇게 했을 뿐이다. 어찌 너희들에게 사정(私情)을 둔 것이겠는가.”
하였다. 겨울에 재이를 인하여 구언하자, 공이 상차하여 시무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치도(治道)에는 대본(大本)과 대경(大經)이 있고 정치에는 대요(大要)가 있습니다. 대본이 확립된 뒤에야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이 드러나고, 대경이 닦여진 뒤에야 집안의 틀과 국가의 법도가 세워지는 것이며, 대요를 얻은 다음에야 시행하고 배치하는 일이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천지(天地)의 중정(中正)한 기운을 받고 태어나므로 마음의 본체(本體)가 허명(虛明)하고 순일(純一)하여 당초 선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단지 외물(外物)에 감응되는 것이 하나가 아닌 까닭에 선과 악이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큰 것이 확립되면 작은 것은 개입할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신이 말하는 대본(大本)인 것입니다.
신은 전하에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반드시 의로운 일을 많이 축적하시면서 잊지도 않고 억지로 조장하지도 않는 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일에 따라 체험하시면서 거기에 동요되거나 마음을 뺏기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문자를 통해 찾아보시면서 이치를 끝까지 궁구해내실 수 있겠습니까. 강론을 통해 탐색하시면서 선을 택해 고수하실 수 있겠습니까. 인애(仁愛)를 체(體)로 삼으시면서 지성(至誠)으로 견지하실 수 있겠습니까. 분노를 징계하고 욕심을 막으면서 다른 곳에 화풀이하거나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삼가하며 싹트기 전에 경계하실 수 있겠습니까. 넓고 텅 빈 대공(大公)의 마음으로 외물(外物)이 올 때 순응하실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위태로운 것이 천위(天位)이고 지극히 어려운 것이 천위인데, 하늘이 밝은 명(命)을 내렸을 때 앞으로 길하게 되고 흉하게 되는 것은 처음에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크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규합할 수 없고 지극히 바르지 않고서는 사람들의 모범이 될 수 없습니다. 일거수 일투족을 아랫사람들이 엿보고 영(令)이 한 번 나올 때마다 사방에서 말을 주고 받습니다. 기뻐하면 그것을 빙자하여 은혜를 파는 자가 나오게 되고, 화를 내면 그것을 이용해 위세를 부리는 자가 생기게 되고, 사랑하면 그 틈에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자가 나타나게 되고, 미워하면 그것을 핑계대고 원망을 키우는 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의리가 정립되지 않으면 귀에 들어오는 것이 많을수록 쉽게 미혹되고, 뜻을 확고하게 수립하지 않으면 선을 고수한다고 하면서도 혹 다른 길로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이것이 근본을 세움에 있어 삼가야 할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인군(人君)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마땅히 집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齊家)가 되지 않고서 어떻게 나라가 다스려지겠습니까. 성주(成周) 때에는 빈어(嬪御)와 시위(侍衛)를 비롯해서 음식ㆍ의복ㆍ재화를 담당하는 관원들 모두가 천관(天官 이조)의 통솔을 받아 설어(褻御)와 복종(僕從)에 정인(正人) 아닌 사람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위에 서서 자기 몸만 삼가고 아무 하는 일이 없어도 정치의 교화가 널리 퍼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폐조(廢朝) 때에는 가정(家政)이 먼저 문란해진 탓으로 참언이 이를 통해 들어오고 뇌물이 이를 통해 들어왔으며 사사로이 바치는 것이 이를 통해 들어오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벼슬 주는 권한이 모두 이를 통해서 나오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인척(姻戚)이 행하고 중간에는 무변(武弁)과 음관(蔭官)이 행하고 나중에는 사대부 중에 이름이 있다고 하는 자들까지도 모두 이런 일을 행하다가 끝내는 나라를 망치고야 말았습니다.
아, 처음에 그런 일을 할 때에야 또한 어찌 끝내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저 사대부들도 어찌 모두가 탐욕에 눈이 먼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까. 단지 발신(發身)하는 길이 그것밖에 없고 온 세상이 다 그런 짓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둑에 터진 구멍 하나가 엄청난 홍수의 재앙을 가져오고, 처음에 싹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끝내 도끼자루를 들어야 하는 법이니,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성명(聖明)께서 임어(臨御)하신 것이 해가 중천에 뜬 것과 같으니 조금이라도 운무(雲霧)가 끼는 일이야 다시 염려할 것이 없겠습니다만, 한 생각의 차이에 따라 성(聖)과 광(狂)이 판가름나는 것인 만큼 삼가하고 경계하셔야 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요전(堯典)》을 보면 ‘능히 큰 덕을 밝혀 구족(九族)을 가까이하였다.’고 하였고, 「예기(禮記 대전(大傳)을 말함)」에는 ‘성인이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릴 때 우선적으로 행한 일이 다섯 가지인데, 그 첫째가 친족을 다스리는 일이었다.’고 하였으니, 이 어찌 친친(親親)한 다음 인민(仁民)하고 인민(仁民)한 다음 애물(愛物)하는 것이 본래 선후(先後)의 순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 폐조 때에는 간신(奸臣)이 권력을 장악하고 시의(猜疑)로 유도한 나머지 종척(宗戚) 가운데에서 멸망당한 자가 많이 나오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고 내외의 마음이 이탈된 것 모두가 이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창성하는 기회를 만나 윤기(倫紀)가 다시 밝혀지고 사람들마다 살 곳을 얻게 되어 겨우 숨을 쉬다가 소생하게 되었으니, 편안하게 감싸주고 화목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법(家法)상 당연히 힘써야 할 바라고 하겠습니다. 이상이 신이 말한 대경(大經)입니다.
정치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한 마디 명령으로 다그치며 곧바로 이루어내기란 본디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큰 난리를 겪은 뒤로 민심이 쉽게 동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재생(裁省)하는 제도의 목적이 본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인데도 완민(頑民)은 원망하고, 대동법(大同法)무변(武弁)의 본래 목적이 균역(均役)에 있는데도 호민(豪民)은 원망하고 있으며, 널리 탕척(蕩滌)해주지 않는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족함을 알지 못하는가 하면, 초병(抄兵)하는 일이야말로 그만둘 수 없는 일인데도 거꾸로 고달프게 여기고 있으니, 이는 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백성의 습성이란 변화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백성이 원망한다고 한다면 완민이나 호민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국가의 근심거리가 된다 할 것입니다.
도민(都民)의 휴척(休戚)은 탁지(度支)에 달려 있고 외방의 휴척은 수령에게 달려 있는데, 백성의 원망이 없어지게 하려면 백성의 호오(好惡)를 살펴서 하기만 하면 될 뿐이니, 섣불리 내려온 관습대로 따르려 하면 성헌(成憲)이 무너질 것이고 너무 지나치게 몰아붙이려 하면 슬퍼하며 탄식하는 소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만약 광무(光武)가 중흥(中興)했던 것처럼 하려 한다면 구장(舊章)을 모두 일소한 뒤 한 시대의 제도를 새로 제정해야 할 것이고, 서한(西漢)의 소제(昭帝)나 선제(宣帝)처럼 조종(祖宗)의 법도를 계술(繼述)하려고 한다면 너무 심한 것들을 제거하고 미비한 점만 보충하면 될 것이니, 완급에 중도를 얻어 각박한 것만 없애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무릇 경장(更張)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하정(下情)을 살펴 시행할 발판을 마련해야 하고, 변통할 때에는 반드시 시작할 때와 끝날 때를 잘 계획하고 생각해서 영구히 지속되도록 도모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명령을 내리는 것이 흐르는 물에 근원이 있는 것처럼 되어 순리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쓸 때에는 행실이 올바른지 먼저 살피고 풍속을 권장할 때에는 근본이 충실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양(禮讓)하는 정신을 드높이고 경쟁하는 일을 멎게 하며 염치를 기르고 부박한 행동을 억제하게 하여 차라리 형식보다는 내용을 따르게 하고 명분보다는 실질을 앞세우게 한다면, 세도(世道)를 혹 만회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행하다 보면 백성의 뜻이 안정되고 국체(國體)가 확립될텐데, 그럴 때 시의(時宜)를 살피고 헤아려 행한다면 거의 성취될 희망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말한 대요(大要)입니다.
치병(治兵)에 관한 한 가지 일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급히 해야 하는데, 제때에 정비해두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변에 대처할 수가 없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수신(帥臣)과 병무를 잘 아는 여러 숙장(宿將)들에게 하문하시어 일찍 계책을 세우도록 하셨으면 합니다.
수령은 고을마다 적임자를 얻기가 여러가지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수령들을 현부(賢否)에 따라 출척(黜陟)시키는 권한은 전적으로 감사(監司)에게 있는데, 성격이 유약해서 결정을 짓지 못하고 주저하는 자는 그런 일을 처리하는 데 방해만 되고, 한창 나이에 기세가 날카로운 자가 족히 풍력(風力)으로 재단할 자질을 지녔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재질을 가지고 있어도 시험해보지 않으면 능력이 발휘되지 않는 법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종신(從臣)과 낭서(郞署)라 하더라도 진정 그런 재질의 소유자가 있을 경우에는 잘 살펴 발탁해서 방면(方面)의 중책을 맡겨 보았으면 합니다.
관료가 자주 바뀌는 바람에 아전이 권세를 행사하고 있는데 백사(百司)의 일이 번쇄해지고 있는 이유는 모두 이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육조의 낭료와 각사의 관원들에 대해 일체 법전에 실려 있는 임기만료제를 적용하고 앞질러 옮기는 일이 없게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담당 관아가 잘 다스려지지 않을 경우에는 그 관아가 소속된 육부(六部)를 늘 규찰하고 적발하여 정부(政府)에 보고토록 해야 할 것이니, 그러면 육부와 각사 모두 통제되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체적인 일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일이야 원융(元戎)에게 책임이 있다 할지라도 그 절제를 받아 수행하는 수령을 더욱 중요시해야 할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서 헤아리기보다는 직접 확인하는 것이 낫고 미리 추산하는 것보다는 상황에 부딪쳐 처리하는 것이 낫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도원수 및 양서(兩西)의 관찰사에게 하유하시어 그 도의 수령의 현부를 가지고 한 번 상세히 살펴 조사한 뒤 조목별로 상문토록 함으로써 이웃 고을들이 모두 실질적인 재능이 있는 자로 채워져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되도록 했으면 합니다.
원자(元子)의 나이가 이미 12세나 되었으니, 국본(國本)을 세우는 일을 참으로 제때에 맞게 해야 함은 물론 올바로 인도하는 방도 역시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예관에게 봉전(封典)을 품하여 행하도록 분부를 내리시어 일찍 사부(師傅)와 빈료(賓僚)를 가까이하게 함으로써 덕을 기르는 터전으로 삼도록 했으면 합니다.”
하고, 원춘(元春)의 4잠(箴)으로 임조(臨朝)ㆍ연거(燕居)ㆍ진학(進學)ㆍ체건(體乾)을 바치니, 상이 가납하고 선온(宣醞)하는 한편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
갑자년 봄에는 부원수 이괄(李适)과 순변사 한명련(韓明璉)이 군사를 출동시켜 반란을 일으켰다. 상이 장차 남쪽으로 내려가려 하면서 공에게 자전(慈殿)을 호위하여 강도(江都)로 나누어 들어갈 것을 명하였는데, 장차 떠나려 할 즈음에 공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주상께서 자전과 분조(分朝)하셔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동의하고 양궁(兩宮)이 마침내 같은 일행으로 떠나 공주(公州)에 머물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이괄이 부하에게 죽임을 당해 그 머리가 묘(廟)에 바쳐지자 예관이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니, 공이 헌의하기를,
“반역한 신하가 서울을 함락시켜 대가가 몽진(蒙塵)하였으니 그것만으로도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축하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환도할 때에 공은 선비를 시험하고 합격자를 발표하라는 명을 받고 공산(公山)에 며칠 동안 머물다가 복명하였다. 상이 호종한 신하들을 책훈(策勳)하려 하자 공이 또 안 된다고 극력 말하니, 이에 중지하였다. 헌부가 자전의 하인을 붙잡아 가두자 상이 진노하여 헌부의 관원들을 모조리 체차시켰는데, 공이 상차하여 너그럽게 용납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인성군 공(仁城君 珙)이 누차 역적의 초사(招辭)에 나왔으므로 시의(時議)가 그도 함께 유배시켜 화의 근본을 없애버리려고 하였으나 상이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공이 요상(僚相)에게 말하기를,
“법대로 집행하려는 조정의 의논이 안 될 것은 없지만 지친을 용서해주려는 것 또한 상의 성덕에 관련된 일이다.”
하였는데, 우찬성 이귀(李貴)가 그 말을 듣고 조정에서 공을 욕하였다. 이에 공이 상차하여 아뢰기를,
“아랫관원이 대신을 욕하다니 이는 국체(國體)를 허물어뜨리는 일입니다.”
하고, 이어 정고(呈告)하면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상이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장만(張晩)과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이광정(李光庭)을 불러 이귀가 조정에서 욕한 상황을 하문하였는데, 장ㆍ가 두 사람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상이 크게 노하면서 하교하여 준엄하게 책망하고 세 사람을 아울러 파직시키는 동시에 누차 사신을 보내 공을 위로하며 머물게 하니, 공이 상차하여 세 신하에 대한 견책을 관대히 해 줄 것을 청하였다. 대사헌 최명길(崔鳴吉)이 능원군 보(綾原君俌)의 불법 사실을 논하니 상이 진노하면서 지극히 준엄하게 분부를 내렸는데, 공이 상차하여 아뢰기를,
“대각(臺閣)을 예우하고 사기(士氣)를 진작시켜 영원히 천명을 받을 수 있도록 도모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옥당이 대사헌 남이공(南以恭)을 탄핵하자 상이 ‘박정(朴炡) 등이 편당(偏黨) 행위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외직에 보임할 것을 명했는데, 공이 또 상차하여 구제하였다. 그런데 이귀(李貴)가 경연에서 박정 등의 말을 논하며 매우 중도에 어긋난 말을 하자, 상이 노하여 박정ㆍ나만갑(羅萬甲) 등을 유배보내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즉시 상차하여 간절히 간하니, 상이 너그럽게 하교하면서 따랐다. 천재(天災)로 인해 사직하면서 언로를 열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극력 진달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아뢰기를,
“성인은 천하의 뜻을 제대로 통하게 해주기 때문에 천하의 일을 제대로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라도 통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이는 마치 사람의 몸이 마비되어 가슴이 막히면서 난치병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을축년 정월에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이 죽었다. 예관이 상례(喪禮)를 의논드리면서 주상에게 기년복을 입도록 하였는데, 상이 삼년상을 행하려 하자 공이 요상(僚相)과 함께 밤낮으로 궐내를 지키면서 강력히 간쟁하니, 상이 마침내 기년복을 입었다. 상이 직접 상주 역할을 수행하려 하자, 정부가 백관을 이끌고 아뢰기를,
“상에는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예문을 보면 ‘초상 때부터 졸곡(卒哭) 때까지는 상주를 세운다.’는 글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계운궁(啓運宮)의 상에 능원군(綾原君)으로 상주를 삼도록 청했는데, 이는 성명께서 이미 종묘의 주인이 되신 까닭에 사친(私親)을 위해서는 상주 역할을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관이 아뢴 대로 따르소서.”
하였는데, 누차 아뢰어서야 비로소 윤허하였다. 흥경원(興慶園)의 호를 세우는 문제로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을 내렸는데, 공이 의논드리기를,
“원(園)이라는 것은 곧 능(陵)의 이명(異名)입니다. 옛 사람의 문자에 원릉(園陵)이니 원침(園寢)이니 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천자와 제후를 통틀어 말한 것으로서, 능의 아래 묘(墓)의 위에 따로 하나의 원자(園字)를 놓아 높이고 낮추는 절목을 삼기 위해 능이라고 하고 원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예관이 공성(孔聖)의 호(號)를 개정할 것과 종사(從祀)하는 선유(先儒)를 승출(陞黜)시킬 것을 청하니, 공이 의논드렸는데, 그 대략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15년에 문묘를 지었는데, 이때 천하 악진(嶽鎭)해독(海瀆)ㆍ성황(城隍)과 전대(前代) 충신 열사들의 봉호를 모두 바로잡으면서도 문선왕(文宣王)의 묘호(廟號)와 종향(從享)의 봉작만은 옛날 그대로 두었으니 지금 섣불리 의논드릴 수 없습니다.”
하여 그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이 철산(鐵山)의 가도(椵島)에 진을 설치한 뒤 위로 명 나라 조정을 속여 강제로 군량을 조달시키고 스스로 봉작을 부여하면서 본국에 폐해를 끼쳤으므로 일대 근심거리가 되었다. 강왈광(姜曰廣)과 왕몽윤(王夢尹) 두 사신이 본국에 조칙을 반포하고 아울러 모병(毛兵)을 사열하려 하였는데, 모장(毛將)이 장차 조사(詔使)에게 이롭지 못한 짓을 행하려 한다는 유언(流言)이 있었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흉흉해지면서 대신 이하가 궐하에 나아와 변을 기다렸다. 그 중 어떤 이는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자고 청하기도 하였으나, 공만은 홀로 아뢰기를,
“모장이 교활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감히 조사를 해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윽고 모장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조사를 대우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병인년 가을에 공이 독권관(讀卷官)으로 별시(別試)전시(殿試)를 관장하였는데, 합격자의 이름을 개봉하고 보니 아들 익전(翊全)과 손자 면(冕)이 모두 끼어 있었다. 이에 헌부가 먼저 시관이 사정(私情)을 따른 죄를 논하면서 모두 파직시킬 것과 동시에 파방(罷榜)할 것을 청하였고, 간원도 잇따라 논하였다. 공이 교외에 나가 대죄하면서 정리(廷吏)에 내려 신문받게 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위유(慰諭)하였다. 공이 재차 시원(試院)의 곡절을 진달하면서 물러가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에 사관을 보내 어비(御批)로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시말을 모두 알았다. 답안지를 추후에 다시 받아들인 것은 조박(趙璞)이 한 짓이지 경의 허물이 아니다. 전일 간원의 계사에 사실과 다른 말이 없지 않았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경은 나의 뜻을 몸받아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서 바로 들어와 나의 서운한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오.”
하였다. 그때 마침 상이 원(園)에 참배하려 하면서 공을 명소(命召)하여 도성에 남아 있도록 하였으므로 공이 마지못해 명에 응하였다. 상이 고관 조박(趙璞)을 ‘시험 답안지를 추후로 받아들여 그 아들이 합격자 명단에 끼게 하였다.’는 이유로 조옥(詔獄)에 내려 국문케 하였는데, 공이 세 차례 상차하여 사직하면서 진달하기를,
“5 축(軸)을 추후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여러 시관(試官)이 공동으로 회의한 결과 나온 것이고, 조전소(趙全素)의 글 또한 여러 시관이 공동으로 고사하여 뽑은 것인데, 조박만 신문을 당하고 있으니, 신이 어떻게 태연히 조정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정고(呈告)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 수비(手批)로 유시하기를,
“경이 조정에 있은 지 40여 년 동안 조그만 하자가 하나도 없었는데, 경의 명성에 대해서는 나도 들어 왔다. 그런데 이번에 억울하기 짝이 없는 말이 뜻밖에 나오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는 경의 불행일 뿐 아니라 국가에 있어서도 불행이라 할 것이다. 설혹 불공정했다손 치더라도 과거 허균(許筠)의 간사한 짓을 예로 들면 그때 상신(相臣)은 눈치를 채지도 못했었는데, 더구나 가부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경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지난날 상신이 그 일 때문에 인퇴(引退)하지 않았었으니 오늘날 또한 근거로 삼을 전규(前規)가 있다 하겠다. 그리고 승출(陞黜)하고 고하(高下)를 매길 때에 경은 참여하지도 않았으니, 시관이 파직당하고 조박이 국문을 받는다고 해서 경이 편안치 못하게 여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경은 나의 뜻을 몸받아 모름지기 고사하지 말고 속히 출사하여 여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재차 승지를 보내 비답하기를,
“경의 말을 보건대 감히 하지 못할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말을 하였다. 아, 경은 아직도 깊이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저 고관(考官)들이 파직당한 것은 취사(取捨)를 불공정하게 했기 때문인데, 가부를 운위하지도 않은 상신(相臣)이 저들에게 무슨 혐의가 있단 말인가. 전일 대간이 일을 서툴게 논한 결과를 면치 못한 것은 전시(殿試)에는 명관(命官)이 없다는 규정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 하는데, 그때 논한 것도 실제로는 경을 직접 언급해서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논계했던 본래 의도가 일단 그와 같다면 국법에 있어 융통성을 부린다고 해서 또한 혐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지금 만약 경의 뜻대로 부응해 준다면 내가 경을 의심한다고 사람들이 말할 것이고 경이 시종일관 물러나기를 구한다면 경이 나에 대해 유감을 갖고 있다고 사람들이 말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내가 전부터 경을 믿고 의지해 오던 것과 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을 바치려 했던 것 모두가 허사로 돌아가는 결과와 비슷하게 되지 않겠는가. 경의 거취가 국가의 안위와 관계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사세가 이미 이와 같으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은 모름지기 나의 뜻을 속히 체득하여 빨리 나와 행공(行公)토록 하오.”
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정언 김광혁(金光爀)이 파방(罷榜)의 당부에 대해 논하였으므로 공이 더욱 강력하게 떠나갈 것을 요청하니, 상이 또 사관을 보내 유시하기를,
“지난번 전시(殿試)에 경이 참여하지 않았고 근일 국사가 날이 갈수록 점점 염려스러워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기를 ‘고관(考官)이 나수(拿囚)당했다 하더라도 상신(相臣)이 그때 담당하지 않았었고 보면 국사를 위해 애써 나오는 것도 의리에 비추어 볼 때 해가 될 것이 없고, 정승의 자리가 모두 비어 있는 상태에서 대신이 마음 속으로 불안하게 여기고 있는 만큼 출사하도록 권면하는 것도 대신을 대우하는 나의 도리에 있어 역시 해가 되지는 않을 듯하다.’ 하였다. 그래서 누차 근신(近臣)을 보내 나의 지극한 뜻을 유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 뜻밖의 논이 나왔는데, 내가 실질적으로 대우하고 있지 않다고 하고, 경을 배척하면서는 그따위 정승을 장차 어디에 쓰겠느냐고 하는 등 나의 마음을 막아 억누르고 경을 낭패하게 만들었으니, 실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신하가 대신을 칭찬하는 것에 대해서는 시왕(時王)의 율(律)이 매우 엄한데 지금 경이 일단 사람으로부터 처음에는 추켜올려졌다가 나중에는 그지없이 헐뜯는 말을 들었으니 필시 출사하는 일을 불안하게 여길 것이고, 나 또한 끝내 형식적으로만 대우한다는 비평이 달갑게 여겨지지 않으니, 지금 우선 경의 요구에 억지로 부응하여 경의 뜻을 편안하게 해 주려 한다.”
하고, 정승의 직위를 해임하고 판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이에 공이 마침내 세상을 담당하려는 뜻이 없어져 장차 일을 모두 그만두고 시골에 돌아가 여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정묘년 정월에 노적(奴賊)이 쳐들어와 의주(義州)와 안주(安州)를 잇따라 함락하자 다시 공을 좌의정과 세자부(世子傅)로 임명하고 상이 분조(分朝)를 배행(陪行)해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명하였는데, 공주(公州)에 머물 때는 상차하여 적을 토벌할 것을 청하고, 전주(全州)에 머물 때는 적이 화약(和約)을 맺고서도 사방으로 군사를 풀어 약탈을 자행한다는 말을 듣고는 또 상차하여 적이 약조를 어긴 사실을 힐난하도록 청하면서 위에 보고해 알렸다. 공이 분조에 있으면서 정성을 미루어 보호하고 일에 따라 규계(規戒)를 올리는 등 무척 많이 보익(補翼)하였으며, 체찰사 이공 원익(李公元翼)과 합심해 경략(經略)하면서 군대를 조발하고 군량을 운송하여 대조(大朝)에 결핍됨이 없게 도와 주는 한편, 남쪽 백성들의 폐막을 조목별로 위에 아뢰어 모두 견감시켜 주었다.
3월에 동궁을 배행하여 강도(江都)에 들어가니 선온(宣醞)하라고 명하고 호피(虎皮)와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간관이 상소하여 상신을 배척하자 공이 요상(僚相)과 함께 소장을 올려 사람의 말에 사과하도록 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4월에 대가가 환도하였다. 영의정이 사직하여 체차되었으므로 공이 좌의정으로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이때 나머지 적들이 청천강(淸川江) 서쪽에 떼지어 머물며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맺었다고 하면서 출몰하여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이에 공이 건의하기를,
“적이 우리 경내에 있는데 장사(將士)가 머뭇거리고 있으니,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을 책려하여 제장(諸將)을 이끌고 안주(安州)와 정주(定州)에 진주(進駐)하게 하소서.”
하고, 간사(間使)를 보내 약조를 위배했다고 꾸짖으니 적이 마침내 거두어 돌아갔다. 적이 물러간 뒤에 유민들이 많이 굶어죽었는데, 공이 곡식을 옮겨서 진구(賑救)해 주고 곡식 종자와 농우(農牛)를 나누어 줌으로써 생업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영장(營將)을 팔로에 설치해 교련(敎練)을 전담케 하는 한편, 안주(安州)의 성지(城地)를 증수하고 황주(黃州)의 성곽을 새로 세운 뒤 곡식을 비축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수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에 대해 의논하는 자들은 자못 의견을 달리 했으나 공의 뜻이 확고부동하여 그 공사가 이내 완결되었다.
7월에 영의정 겸 세자사로 승진하였는데, 상차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너그럽게 권장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겨울에 도제조(都提調)로 세자의 가례(嘉禮)를 주관하였는데, 상차하여 번거로운 형식과 헛된 비용을 생략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또 공경 대부로부터 각자 적든 많든 마음대로 포목을 내어 군비(軍費)를 돕게 하도록 청하자, 사서인(士庶人)들 중에서도 이런 풍도를 듣고 납부하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는데, 대장 신경진(申景禛)과 이서(李曙)에게 나누어 주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나머지로는 서로(西路) 백성들을 진휼케 하였다. 또 관아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각자 옷가지를 내놓아 서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으므로 이 덕택에 살아난 백성들이 많았다.
무진년 봄에 유효립(柳孝立) 등이 모반하여 장차 난리를 일으키려 하였는데, 허체(許䙗)가 그 모의를 알고 홍서봉(洪瑞鳳)에게 이서(移書)하였다. 그런데 홍서봉이 미처 발설하기도 전에 도하(都下)가 흉흉해지자 공이 기미로 그 정상을 눈치채고 묘당에 앉아 급히 대장 신경진과 이서를 부른 뒤 군대를 출동시켜 병기를 싣고 오는 적들을 체포하게 하는 한편, 홍서봉을 재촉해 그 일을 발설하게 하여 적도를 모두 잡아들이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전후로 복주(伏誅)된 자가 50인에 이르렀다. 그리고 적의 공초(供招)에 나온 자라 하더라도 사실과 다른 점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 때마다 의논에 부쳐 상에게 아룀으로써 모두 용서받게 하였다. 밤낮으로 안문(按問)하느라 혹 몇십 일씩 나오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공이 안독(案牘)을 열람하고 허실을 판별하면서 마치 촛불로 비추고 주판으로 계산하듯 명확하고 정밀하게 하였으므로 몇 달 간 옥사가 진행되는 동안 한 사람도 억울하게 죽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없었다. 옥사가 끝나자 녹훈(祿勳)이 추관(推官) 모두에게 가해졌는데, 공은 요상(僚相)과 함께 극력 사양하여 그 공을 차지하지 않고 단지 안마(鞍馬)를 하사받는 정도로 그쳤다.
정묘년 여름에 혜성(彗星)이 북방에 나타났는데 태복(太僕)의 주마관(主馬官)이 죽는다는 점사(占辭)가 나왔고, 금년 봄에는 토성(土星)이 태성(台星)에 들어갔는데 이는 상상(上相)에게 재앙이 있을 조짐이라고 태사(太史)가 아뢰었었다. 그런데 공이 상상(上相)으로 태복시의 제조(提調)를 맡으면서 오래도록 마정(馬政)을 주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걱정하였는데, 6월 11일에 이르러 등에 악창이 발작하였다. 이때 크게 가뭄이 들었으므로 공이 상차하여 인구(引咎)하였는데, 상이 남쪽 교외에서 친히 기도드릴 때에 공이 또 병으로 따라가지 못하게 되자 상차하여 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어비(御批)를 내리기를,
“차자를 보건대 내가 매우 걱정되고 안타까운데, 경이 완쾌되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서 안심하고 조리하라.”
하고 어의(御醫)를 보내 어약(御藥)을 싸들고 가서 곁을 떠나지 말고 병을 보살피게 하였으며, 수라간[御廚]의 일을 중지시키고 액정인(掖庭人)을 보내 병 문안토록 한 것이 두 차례에 이르렀다. 왕세자도 누차 궁관을 보내 병 문안을 하였다. 그러나 29일 무오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영의정 신흠이 선조(先朝)의 구신으로서 정성을 다해 나라를 도왔는데, 국가의 운세가 불행하여 이렇게 훌륭한 신하를 잃었으니, 내가 매우 가슴아파하며 애도하는 바이다. 상장(喪葬)에 필요한 물품들을 해조로 하여금 일체 전례에 따라 상가에 수송하게 함으로써 부족하게 되는 근심이 없게끔 하라.”
하였다. 상이 중사와 예관을 보내 조제(弔祭)를 거행하게 하고 안에서 별부(別賻)를 내리는 한편 특별히 도승지 김상헌(金尙憲)을 보내어 고자(孤子)를 조문하게 하였으며, 자전(慈殿)도 중사를 보내 고자를 조문하게 하고 안에서 별부를 내렸으며, 왕세자 역시 궁료를 이끌고 외당(外堂)에서 거애(擧哀)하고 직접 상가에 가 예에 맞게 곡하고 조문하면서 또 별부를 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실로 세상에 드문 이수(異數)였다.
공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일이 없었지만 겨우 15세 되었을 때에 스스로 학문할 줄을 알았다.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목표로 하고 명예에 관심을 두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평소 엄숙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장중하게 되도록 노력하는 한편 효제(孝悌)를 행신(行身)의 근본으로 삼았다. 책이라면 보지 않은 것이 없고 학문이라면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그 중에서도 정백자(程伯子 정호(程顥))와 소요부(邵堯夫 소옹(邵雍))를 더욱 좋아하여 늘 말하기를,
“백자는 성인의 자질을 지녔고, 요부는 성인의 재주를 가졌다.”
하였다. 일단 전원으로 돌아온 뒤로는 세상 일을 떨어버리고 마음을 고명한 경지에 노닐었는데 일찍이 이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家廟)에 참알(參謁)한 뒤 물러나와서는 분향하고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엄숙한 자세를 견지하였는데, 비속한 언어를 입에 내놓지 않았고 나태한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홀로 된 누님과 30년 동안 같이 살면서 어머니처럼 모셨고, 의지할 곳 없는 조카딸 몇 사람을 집에 데려다 길렀다. 문에는 개인적인 청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내외의 구분이 엄격하였다. 집이 본래 가난하여 1석들이 쌀독도 채우지 못했는데 가끔 빌려 써도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하였다. 집의 거실이 한쪽으로 기울어지자 가인(家人)이 수리하자고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라 일이 아직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집안 일을 하겠는가.”
하고, 방 하나에 거처하였는데 상탑(床榻)이 쓸쓸하기만 하였다. 임종하던 날에는 의금(衣衾)에 여벌이 없었고 쌀독도 비어 제전(祭奠)을 남의 힘을 빌어 마련하였다. 선묘가 일찍이 조신 가운데 염근(廉謹)한 자를 뽑아 정표(旌表)하라고 명하니 조정의 의논이 모두 공에게 귀결되었는데, 공이 대신에게 극력 말하여 중지시켰다. 천성이 세리(勢利)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벼슬 길에 있어서도 대부분 한산한 곳을 청해 거하였다. 그리고 오직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 쉽고 험난한 것을 피하지 않으면서 임명을 받으면 곧바로 떠나곤 하였다. 선묘 말년에 이르러 매우 융숭한 대우를 받았는데, 오래도록 서액(西掖 경연)에 있으면서 진강할 때마다 세세히 분석하고 정미로운 의리를 요약해서 진달했으므로 선묘가 이 때문에 경청하였다. 여러 차례 승정원의 장관이 되고 백사(百司)의 기강을 바로잡았는데 사리에 맞게 진언하여 옛사람이 납언(納言)하던 풍도가 있었다.
그러다가 성명(聖明 인조를 말함)을 만나게 되었는데 아무리 어렵고 걱정스러운 일을 당해도 확고하게 소신을 지키면서 치우침이 없이 자신의 입장을 내세웠으며 진정으로 잠규(箴規)를 올리고 부지런히 큰 계책을 내었다. 그리고 진달한 것이나 주의(注擬)하고 조치한 것들에 대해 일찍이 알려 말하지 않았으므로 자제들이라 하더라도 듣지 못하였다. 인재를 아껴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였으며 후진을 권장해 이끌어 기필코 성취하도록 하였는데, 늘 말하기를,
“전한(前漢)이 융성했던 것은 풍속이 돈후해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사람들이 이익을 따라가고 명예를 좇으며 속된 일을 경영하는 것을 보면 자기 몸까지 더러워지는 것처럼 여겼으며, 늘 후배들이 대부분 방종을 좋아하고 긍지를 지녀 자중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다. 치도(治道)를 논함에 있어서는 어수선하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말하기를,
“조종(祖宗)을 법받기만 해도 다스리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그러다가 조정의 잘못된 거조를 보면 그날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고, 한 가지 좋은 계책을 얻으면 반드시 건의하여 시행하곤 하였다. 기염을 토하며 이야기하는 자와는 같이 따지려고 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일에 당해서는 끝내 가차가 없었으며, 낭리(郞吏)를 만나면 신신 당부하며 가르쳐 단속시켰고 잘못하는 것이 있어도 반드시 덮어주었다.
정묘년 여름부터 국가에 일이 많아 비국의 모임이 없는 날이 없었는데,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였으며, 아무리 병이 들어 피곤해도 억지로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위급한데 우리들이 어떻게 감히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금년 여름에 오랑캐의 사신이 우리 경내에 들어왔는데, 그들의 요구사항이 모두 따르기 곤란한 것들이었다. 이때 공이 악창을 앓고 있었으면서도 병을 무릅쓰고 관아에 나왔는데, 그뒤 병이 위독해졌을 때에도 깊이 염려하며 그 일을 팽개치지 않았다. 비국의 낭관이 상의 분부를 받고 수의(收議)하러 오자 공이 입으로 몇 줄을 불러 주면서 시자(侍者)에게 받아 쓰게 하다가 기운이 떨어져 그만두었는데, 열이 나면서 기(氣)가 장차 끊어지려 하여 목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오랑캐의 사신이 돌아갔는지의 여부를 물어보고, 또 말하기를,
“가뭄의 재해가 이와 같으니 백성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하늘이 재해를 내린 것은 모두 우리들의 죄 때문이다. 내가 죽어 비가 오기만 한다면 유감이 없겠다.”
하였다.
공은 감식안이 탁월하고 추량(推量)을 잘하여 국가의 기의(機宜)와 인물의 종시(終始)에 대해 헤아린 것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붕우와 한 번 친교를 맺으면 흰 머리가 될 때까지 변함이 없었는데, 추포(秋浦)황신(黃愼)과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의 상(喪) 때에는 위(位)를 만들어놓고 곡하며 시간이 갈수록 더욱 마음 아파하였다. 평소 경계를 설정해두지 않고 가슴을 활짝 열어놓았는데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문득 흔연히 같이 어울리면서 점잖고 온화하게 응대하여 마치 봄 날씨와 같은 따뜻한 기운이 애연히 흘러 넘쳤다.
공은 젊었을 때 경당(敬堂)이라 호(號)하고 또 백졸(百拙)이라 호하였으며 어떤 때는 남고(南皐)라 하기도 하고 현헌(玄軒)으로 바꿔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검포(黔浦 김포(金浦)) 상두산(象頭山) 아래에서 농장 생활을 할 때에는 상촌거사(象村居士)라는 하나의 호를 사용하였으며, 만년에는 현옹(玄翁)이라고 호하였는데, 시골에 돌아가 있을 때에는 방옹(放翁)으로 일컫기도 하고, 유배 생활 중에는 여암(旅菴)이라는 편액(扁額)을 걸기도 하였다. 한편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는 희롱조로 현옹(玄翁)이라 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대해 스스로 서술하기를,
“현옹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글로 세상에 알려졌어도 옹은 글을 일삼지 않았고 조정의 높은 관직을 역임했어도 옹은 관직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죄를 받아 외방에 유배되었어도 옹은 그 죄 때문에 동요되지 않았다. 즐기고 좋아하는 것도 없고 경영하는 것도 없었으며 가난해도 부유하게 여겼고 풍요한 환경에 처해도 부족했던 때처럼 지내었다. 남과 교제함에 다른 사람이 친소(親疏)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고 외물(外物)과 접함에 외물이 그를 구속시킬 수가 없었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고 제자 백가에 널리 통했으며 근원에 약간 도달하긴 했으나 아직 완전한 귀결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만년에 《주역》을 좋아하여 소씨(邵氏 소옹(邵雍))가 말한 천지 만물의 도수(度數)에 회통(會通)한 바가 있었으나 그것도 대략적인 면을 통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책이라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서적을 보는 외에는 종일토록 유연히 지내면서 속물(俗物)이 감히 범접치 못하도록 하였다. 한 시대의 승류(勝類)와 모두 교우관계를 맺어 옹을 아는 자가 많았는데 혹 그의 글을 알아주기도 하고 혹 그의 행한 일을 알아주기도 하였다. 백사옹(白沙翁)이란 자가 옹과 이웃에 살면서 옹의 흥취를 알아주었는데 옹도 마찬가지로 백사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백사가 바른 말을 하다가 죄를 얻어 북쪽 변방에 유배되어 죽고말자 옹이 지기(知己)를 잃은 탄식을 금하지 못하면서 인세(人世)에 대한 뜻이 없어졌다.”
하였다.
공은 글에 대해 어려서는 창려(昌黎 한유(韓愈))를 좋아하였고 만년에는 백가(百家)를 출입하여 스스로 깊은 경지를 개척하였다. 문(文)은 서경(西京 전한(前漢)) 이전의 것을 취하고 시(詩)는 당(唐) 나라 사람들의 것을 취하여 꽤나 애송하면서 제가(諸家)의 문체를 수명(修明)하였다. 서법(書法)도 힘이 있고 아름다웠으나 모두 연연해하지는 않았다. 저술로는 상촌고(象村稿) 전집 10권, 후집 2권, 속집 4권, 별집 6권, 내집 1권, 외집 1권, 여집(餘集) 3권, 만집(漫集) 6권과 선천규관(先天規管) 1권, 구정록(求正錄) 1권, 화도시(和陶詩) 2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나는 공보다 세상에 늦게 나와 선배인 제공(諸公)을 통해 나름대로 서론(緖論)을 얻어 들었는데, 그들이 공에 대해 일컫기를,
“재주가 그렇게 뛰어날 수가 없고 학식이 그렇게 넓을 수가 없었으며 그 화려한 문장은 당세의 으뜸이라 할 만하였다. 조정에 선 40년 동안 두루 화현직(華顯職)을 거쳤으면서도 흠잡힐 일이 하나도 없었고 위태로운 상황을 겪었으면서도 명의(名義)를 조금도 더럽히지 않았다. 그가 정승이 되어서는 말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라 일을 걱정하여 부지런히 힘쓰면서 처음 지녔던 마음가짐으로 죽을 때까지 삼가하였으니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이요 사류(士類)가 의지할 분을 꼽는다면 공을 첫째로 일컬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대략 위와 같이 정리하면서 감히 역명(易名 시호(諡號))의 전례(典例)를 청한다.
분충찬모 입기정사공신(奮忠賛謨立紀靖祀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사헌부 대사헌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춘추관사 세자좌부빈객(行司憲府大司憲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春秋館事世子左副賓客) 신풍군(神豐君) 장유(張維)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