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나혜석 121주년
'최초의 여성' 타이틀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
몇 년 전, 그러니까 혜리가 덕선이로 승승장구하기 전의 일이다.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고 있었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이제 여자분이신데 뭐가 그렇게 소심해 왜 안 해? 여자가 먼저 키스하면 잡혀가는 건가? 그 애에게 다가가 이제 그래도 돼 네가 먼저 시작해’ 포부에 가득 찬 걸스데이의 신곡 제목은 <여자 대통령>이었다. 걸스데이가 치명적인 눈빛으로 춤을 췄지만 내내 노래가사만 생각이 났다. 아직까지도 인기인 여자 아이돌의 노래가 마냥 신나지 않았던 것도 ‘여자는 쉽게 맘을 주면 안 된다’는 가사 때문이었다. 여자는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먼저 해서 안 되는 것도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처음엔 반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좀 씁쓸했다.
최초라는 말이 유독 여성에게 붙게 된 때가 언제부터인지, 어째서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더 대단한 수식어처럼 보이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타이틀을 모두 가진 인물이 한 명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 바로 화가 나혜석이다. 그녀는 일본유학부터 서양화가, 전업 유화가, 페미니스트, 작가 등 많은 일을 ‘최초의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해냈다.
나혜석의 인천 풍경. 합판에 그린 유화로 제작시기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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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당시 몇 안 되는 유학생들 중 하나였고, 그림을 배우러 온 학생 중에서는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성실한 학생이었던 그녀는 동경 여자미술학교에서 많은 작품을 그리며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당시 동경 미술학교에 다녔던 학생들의 졸업 작품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동경예술대학 자료관에 소장되었다. 때문에 나혜석 보다 앞서 동경 미술학교에 다녔던 김찬영, 고희동의 작품은 자료관에 남아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여자미술학교를 다닌 나혜석의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식 장면,
나혜석 가족사진, 1920년대. 왼쪽부터 나혜석, 남편 김우영, 친구 허영숙, 오빠 나경석, 동생 나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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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한국 유화를 정착시킨 최초의 전업 유화가이자 여성 서양화가였다. 시대적 한계에 부딪혀 화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붓을 놓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그녀는 서울에서 최초로 서양화 전시회를 개최한 작가였다. 특히 남편인 김우영과의 세계일주에서 총 7~80여 점의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나혜석의 화풍이 큰 변화를 맞게 된 것도 이즈음인데, 그녀는 파리 체류기간 중 머물렀던 곳에서 나비파(Les Nabis)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비파의 화가인 랑송(Paul Ranson)이 1908년 파리에서 설립한 사립 미술학교 랑송 아카데미(Academie Ranson)에서 그림을 배웠던 시간은 그녀의 화가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의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그녀는 나비파의 독특한 색채와 필법으로 개화기 조선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녀의 작품에서 묘하게 모딜리아니의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이유는 아마 이 두 화가의 예술 활동에 파리라는 공간이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만 그림을 배웠던 국내 화가들과는 달리 나혜석은 유럽에서의 시간을 통해 인상파의 표현법과 목판화, 조각 등 조형적 실험을 과감하게 실현한 근대 한국 미술의 선구자였다.
나혜석이 그린 김우영, 출처: 서울신문 |
나혜석의 나부, 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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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뛰어난 글 솜씨도 겸비한 작가였다. 당시 그녀가 쓴 소설이나 기고문을 살펴보면, 페미니즘적인 화풍이라 평가받는 자신의 그림을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나혜석은 당시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정조와 가사노동, 현모양처, 모성애에 대해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외교관의 아내, 잘 나가는 화가로서 꽤 괜찮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항상 조선 여성이 가진 억압에 대해 폭로하고 권리 향상에 힘쓰는 당찬 신여성이었다.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全 人類)의 여성이다. 이철원 집 부인의 딸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딸이다. 여하튼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의 형상이다. 그 형상은 잠깐 들씌운 가죽뿐 아니라 내장의 구조도 확실히 금수가 아니라 사람이다.
오냐, 사람이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험한 길을 찾지 않으면 누구더러 찾으라 하리! 산정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것도 사람이 할 것이다. 오냐, 이 팔은 무엇하자는 팔이고 이 다리는 어디 쓰자는 다리냐?
경희는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두 다리로 껑충 뛰었다.
- 소설 <경희> 中
그러나 우리가 아는 그녀의 삶은 일명 ‘나혜석 콤플렉스’로 불리는, 시대를 앞서간 여성의 비참한 최후로 소비되어 왔다. 나혜석은 결혼 후 당시 여성으로서 도달할 수 없는 정점에 있는 작가였다. 그러나 최린과의 스캔들을 계기로 남편과 헤어지게 되고 이후 그녀는 이혼여성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홀대받는 존재인지 스스로 증명하게 되었다. 최초의 이혼여성이 된 그녀는 여성보다 사람으로 살고자, 원치 않던 이혼의 전말을 밝히고자 <이혼 고백서>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회로부터 완전히 외면당하면서 나혜석은 전업화가로서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렇게 그녀는 사회의 외면과 홀대, 가난에 시달리다 불우한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좀 더 사회인으로, 주부로 사람답게 잘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함에는 경제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하고 노력도 필요하고 근면도 필요하였습니다. 불민한 점이 불소하였으나 동기는 사람답게 잘 살자는 건방진 이상이 뿌리가 빠지지 않는 까닭이었습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중략)...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 <이혼고백서> 中
나혜석은 누군가의 도움과 관심, 동정과 연민으로 특별한 ‘무엇’이 되려고 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가고자 하는 길이 있고 얻고자 하는 것이 있을 때 가진 것들을 손에 꼭 쥐고 목적을 향해 당차게 걸어 나간 사람이었다. 다만 당시 사회에서 그런 시도를 했던 여성이 나혜석 뿐이었고, 그래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을 뿐이다. 생각대로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점이 그녀를 최초의 여성이자 선구자로 만든 셈이다.
인계동 나혜석 거리 입구 기둥에 새겨져 있는 나혜석의 글, 출처: 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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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나혜석은 잡지<여성계>에 소설<경희>를 발표한다. 소설에는 “계집애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니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이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에 문득 소름이 끼쳤다. 그저 여자가 사람답게 살길 원했던 나혜석의 행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왜 파격적인 무엇이 되는 걸까. 수전증을 앓으면서도 나혜석이 두 손으로 간절하게 잡았던 것은 붓이었다. 사랑에 목마르고 괴로울 때 오로지 위안을 준 것은 그림이었다. 그녀는 죽기 전까지 800여 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이승만/박정희 정권 당시 미풍양속을 해치며 개인주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나혜석에 대한 연구가 탄압당하는 바람에 그녀의 묘소나 흔적을 찾는 일은 더욱 불가능해졌다.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나 이제 깨도다
-인형의 가(家) 中
‘시대를 너무 앞서간 여자’였다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과연 지금은 그녀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일까. 조선 여성이 처한 반인륜적인 현실을 변화시키기에는 나혜석 역시 한계를 지닌 ‘조선 여성’이었다. 양귀자의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는 ‘아직도 나혜석을 매도하는 시대에서 한걸음도 진보하지 못했음을 슬퍼한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흡연 여성에 대한 학보 기고 글을 쓰고 있던 주인공은 ‘흡연이 문제가 된다면 인간의 흡연이지 여자의 흡연은 아닐 것’이라고 덧붙인다. 여전히 여자에게 지옥 같은 지금의 헬조선에서, 나혜석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기에는 아직도 이르다. 참고로 양귀자의 소설은 24년 전에 출간되었다.
글. 정미
추억의 영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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