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장 15절에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라고 증거된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듯이 로마의 군대 백부장인 고넬료의 가정에서의 성령님의 강렬한 역사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과 함께 성경 전체에 있어서 가장 뜨겁고 강력한 성령님의 임재와 충만, 역사와 실제의 사례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인데..
아래 본문은 이방인들임에도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근거와 이유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선 그렇다고 결코 오해하거나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은 그러한 성령님의 역사, 성령님의 실제적인 일하심이라는 것이 그렇듯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이나 고넬료의 가정에서와 같이 충만하고 강렬하며 불길 같이 임재하시고 주장하시는 것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인 것인데..
물론 구주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의 약속과 예언과 계시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며 실제로 십자가를 지셨고 사흘 째 부활하셨으며 40일간 남은 사역을 다 행하셨고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마찬가지로 약속과 예언과 계시에 따라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께서 급한 바람 같이, 불의 혀 같이 뜨겁고 강렬하게 임재하신 것이 모든 역사 상, 진정 우리 인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실제들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것이고 최고로 적극적인 것임은 분명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그러한 것만이 우리 인생들과 관계되고 누릴 수 있는 성령님의 역사들에 있어 전부일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실상 그러한 성령님의 역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섭리들, 시간과 계획들에 따라, 또한 영성과 믿음들, 여건과 상황들에 따라 그 정도와 강도들, 모양과 방식들 등이 다를 수 있으나 어쨌든 모든 시대에 걸쳐서 어떤 식으로든 실제와 경험과 나타남과 성취들에 있어 하나 하나 모두 다 반드시 관계있고 연계되며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출애굽기 35장 30~31절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라고 증거되어 있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는 것이듯이 모세를 통한 출애굽 후의 시기에 회막을 만들었던 수많은 자들 중 중심 일꾼이었던 브살렐도 성령님으로 충만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역대상 12장 18절에서 “그 때에 성령이 삼십 명의 우두머리 아마새를 감싸시니 이르되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으리니 원하건대 평안하소서 당신도 평안하고 당신을 돕는 자에게도 평안이 있을지니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한지라 다윗이 그들을 받아들여 군대 지휘관을 삼았더라"라고 증거되어 있듯이 다윗의 용사인 아마새도 성령님의 권능에 감싸인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기 전의 사울까지도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 앞에 겸비했을 때 사무엘상 10장 10절에서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라고 증거되어 있듯이 성령님께서 크게 임하신 것을 볼 수 있는 것이고, 특히 구약의 말씀을 기록함에 있어서 도구로 쓰인 선지자들마다 직접적, 실질적으로 성령님의 강권하심이 아닐 수 없었던 것으로 그러한 성령님으로 인한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하늘의 힘과 권능이 없이는 완전 불가였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창세기 1장 1~2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고 증거되어 있듯이 무에서 유로의 천지창조야 말로 직접적, 경험적인 면에 있어서 성령님과 어떤 식으로든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사실은 성령님께서 제 삼 위격으로 하나되시어 함께 역사하심이 포함된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나 개념 자체가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더 나아가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일 수가 없는 의미인 것이기에 그 가운데에서의 성령님께서는 모든 시대와 나라들, 시간과 공간들 속에서 함께 하시고 하나되어 역사하시는 분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바로 그러한 성령님께서는 단적으로 말씀의 영이신 것이고, 조금만 통찰해 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세상 가운데 기록될 수 있게 하시고 우리 인생들이 접할 수 있게 하신 직접적, 실질적인 하늘의 힘과 권능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우리 인생들이 그러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깨달으며 믿고 행하며 누리고 증거하며 성취되어 지게 하시는 현실적, 경험적인 하늘의 힘과 권능이신 분 또한 아닐 수 없는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바로 그 자체가 말씀이신 것이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고 다 이루시는 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령님의 충만하심, 더 나아가 불길과 같이 뜨겁고 강렬하게 임하심에 있어서 결코 아무나에게, 아무렇게나 일수는 없는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말씀,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 치열하고 절실한 말씀의 열정과 별개일 수가 없는 것이며, 실상 생각 이상으로 깊이 직결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아래 본문은 그러한 고넬료 가정에서의 성령님의 최고로 강력한 역사에 있어서 그 한가운데 있었던 고넬료가 어느 정도까지 말씀의 신앙이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래 본문 당시의 고넬료는 그 땅을 식민 통치하는 최강 로마의 군대에서 100명의 군병들을 거느린 고위 장교와 같은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따지고 보면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의 일개 촌부와도 같았던 베드로에게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라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도 엎드리어 절하며 맞이했을 정도로 겸비하고 간절하며 전적인 말씀의 신앙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게다가 사도행전 10장 2~4절에서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고 증거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기억하실 정도까지의 말씀과 기도와 구제 등과 같은 경건의 신앙, 본질적으로는 말씀대로의 믿음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행전 10장 44절에서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증거된 말씀과 그 전후에서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듯이 본질적으로는 그렇게까지 말씀의 신앙이었던 고넬료 뿐 아니라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모하고 행하며 증거하는 등에 있어서 목숨까지 걸었을 정도의 말씀의 열정이었던 베드로를 통해, 무엇보다 말씀의 자리, 말씀의 시간에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그렇게 까지나 강력하게 역사하신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전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제자들이 모였고 주로 전심으로 기도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때에도 다른 그 무엇보다 사도행전 1장 4~5절에서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라고 증거되어 있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는 것이듯이 자신들이 예수님처럼 얼마든지 위기를 당할 수 있고 죽임도 당할 수 있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오직 구주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의 약속, 말씀대로의 믿음으로 전적으로 기도했을 정도의 말씀의 신앙,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말씀의 열정과 함께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그 정도로까지 충만케 되고 강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그토록 사모하는 성령님의 충만하심과 불길 같은 역사들에 있어서도, 특히 성도들, 직분자들, 목회자들, 교회들, 연합, 교계, 가정, 학교, 일터, 영역, 지역, 나라, 열방, 세대 등에서의 영적 대각성과 부흥에 있어서도 본질적으로는 다른 그 무엇보다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더 이상의 내 힘과 의, 세상적 능력과 방법들 등이 아닌..
순간순간마다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떤 식으로든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죄악들과 싸우고 범한 죄악들은 즉시로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다른 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해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하며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들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살아 있는 믿음이 될 수 있는가, 본질적으로는 어느 정도로까지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 될 수 있는가가 모든 실질적이고 현실적이며 경험적이고 절대적인 전제와 기준, 관건과 방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사도행전10:24~25)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4월 1일(월)1/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