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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
슥 5:1-4
1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십 규빗이니이다
3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
4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슥 5:1-4 / [여섯째 환상] 내가 다시 눈을 들어 살펴보니, 돗자리처럼 펼쳐져 날아가는 두루마리 책 하나가 나타났다. 2) 내게 해석해 주는 천사가 물었다. `무엇이 보입니까?' 내가 대답하였다. `길이는 10미터, 나비는 5미터쯤 되어 보이는 두루마리 책 한 권이 돗자리처럼 펼쳐진 채로 공중에 날아가는 것이 보입니다!' 3) 그가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것은 온 세상에 선포되는 저주의 말씀입니다. 한편에는 도둑질하는 자는 모두 이 세상에서 제거될 것이고, 또 한편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팔면서 거짓으로 맹세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제거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 저주의 두루마리는 내가 보낸 것이다. 나는 그 저주가 도둑질한 사람의 집에도 들어가고 내 이름을 팔면서 거짓을 참이라고 맹세한 사람의 집에도 들어가서 묵으면서, 각 집을 모조리 파괴하여 기둥 하나, 돌덩이 하나도 그대로 두지 않도록 하였다.'
본문은 스가랴의 여섯 번째 환상인 날아가는 두루마리에 대한 환상입니다.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1-2) 스가랴는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습니다. 당시의 모든 기록은 양피지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낭독되었습니다. 두루마리가 날아간다는 것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이 실행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천사는 먼저 스가랴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라고 묻습니다(2). 스가랴가 본 두루마리는 길이가 9미터 정도이고, 너비는 4.5미터 정도 되는 큰 두루마리였습니다. 이는 율법이 낭독되었던 솔로몬 성전의 성소 앞의 크기와 같았습니다. 두루마리가 크다는 것은 기록된 내용이 매우 중요하고 글씨가 커서 모든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루마리의 내용이 심판에 대한 내용인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의 메시지는 사람들이 모르게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듣고, 보고 알 수 있도록 선포됩니다. 그렇기에 회개하지 않는 백성은 변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선포되면 죄 지은 자들은 결코 심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3-4) 날아가는 두루마리는 죄악을 범한 자들에게 임할 저주를 의미합니다. 두루마리가 날아가는 것으로 온 땅 위에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선포됩니다. 이 두루마리에 쓰여 있는 글은 여호와의 법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와 관련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법궤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이 있습니다. 스가랴가 본 두루마리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십계명의 근거로 악인들의 죄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저주의 글들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두루마리는 회개치 않는 죄인들을 찾아 두루 다닙니다. 두루마리의 이쪽과 저쪽에 쓰여 있는 두 가지의 글대로 범법사실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도둑질과 거짓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이웃에 대한 죄를 가리키며, 거짓은 맹세하는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입니다. 이 두 가지의 죄가 언급된 것은 그것이 율법 전체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만연한 죄악의 상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심판으로부터 숨겠지만 저주는 그들을 찾아 집안까지 들어갈 것입니다. 저주의 심판으로부터 숨을 곳도, 도망칠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4절의 “머무르며”라는 표현은 계속 남는다는 의미로 죄를 지은 자가 있는 곳은 저주가 임하기까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적용: 하나님은 죄를 찾아 끝까지 심판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인간 앞에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종합잡지 'Saturday Evening Post'는 경제 위기였던 1940년대에 '희망을 주는 잡지'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다른 신문과 다르게 경제공황으로 고통당하는 20여 명의 독자 원고를 가감 없이 보도해 관심을 모았습니다. 이를 본 미국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실패담을 읽으며 성공의 돌파구를 찾기도 하고 서로 돕는 등 긍정적인 영향력을 받았다고도 합니다.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와 여러 국제 사회의 이슈로 경제난을 겪고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위기를 회피하거나 감추는 것이 아닌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설 교 >
날아가는 두루마리와 에바
스가랴 5:1~6 / 피영민 목사
서 론
스가랴 1~6장까지는 스가랴 선지자가 본 8개의 환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날아가는 두루마리와 에바 속에 든 여인은 그 가운데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환상입니다. 이 환상들은 언뜻 보면 두루마리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또 그릇 속에 여인이 들어있고 무슨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말해주는 환상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환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돌아온 유다백성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율법을 재건하고 나아가 예루살렘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유다백성들 5만 명에서 1,003명이 부족한 48,997명이 돌아왔는데 이 사람들은 전부 천국에 갈 사람들입니까?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전부 천국에 갈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에 관해서 정확한 대답을 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유대인들은 민족적으로 선택을 받았지만 유대인들 가운데 각 개인은 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영적인 유대인이 있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육적인 유대인들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스룹바벨 같은 사람은 비록 대제사장이지만 죄가 컸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깨끗한 의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스룹바벨이 그렇게 된 이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스룹바벨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이유밖에는 없습니다. 영적인 유대인이나 육적인 유대인이나 다 죄인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모두 죄인인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하심을 받은 영적인 유대인들에게는 죄 사함을 주시고 의롭다 함의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참된 믿음을 갖지 못한 육적인 유대인들을 어떻게 대할까요? 이것이 스가랴서 5장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백성들 가운데에도 육적인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서 이방인과 혼인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족들에게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녀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느헤미야 시대에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야십이라고 하는 사람은 성벽건축을 온갖 방법으로 방해하던 호론 사람 산발랏과 사돈이 되었습니다. 또 암몬 사람 도비야를 위해서 성전에 큰 방을 마련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 가운데 참된 믿음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육적인 유대인인 것입니다.
스가랴 5장에도 유다백성들 가운데 도적질하는 사람도 있었고 하나님께 거짓된 맹세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슥 5:3). 스가랴 5장에 나오는 두 가지의 환상은 하나님은 개인적인 죄에 대해서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죄에서도 심판을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환상입니다.
Ⅰ. 여섯 번째 환상: 날아가는 두루마리
두루마리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에바라고 하는 그릇 속에 여인이 들어있고 하늘과 땅 사이로 들려서 시날 땅으로 옮겨가더라는 말은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엄위한 심판을 내리신다고 하는 엄중한 메시지입니다. 스가랴가 눈을 들어보니까 두루마리가 날아갑니다. 근데 두루마리가 장이 20규빗이고 광이 10규빗이라고 했습니다. 규빗이라고 하는 것은 손가락 끝에서부터 팔꿈치까지 표준 도량형으로는 45cm입니다. 그러니까 두루마리의 크기는 가로가 20규빗으로 9m, 세로가 10규빗으로 4.5m나 되는 거대한 두루마리입니다. 이 두루마리 안팎으로 글이 쓰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두루마리는 도대체 무슨 책일까요? 열왕기상 6장 3절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성소 앞에 낭실이라고 하는 베란다를 지었습니다. 이 베란다가 성경을 넣는 곳인데 이 베란다의 크기가 장이 20규빗이고 광이 10규빗입니다. 이 두루마리 크기하고 정확하게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루마리는 솔로몬 낭실에서 나온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해서 두루마리로 만들었습니다. 두루마리는 앞뒤로 글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글자의 내용은 율법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자에 대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이란 곧 십계명입니다. 이 두루마리의 한쪽 면에는 도적질하는 자에 대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팔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 후반부를 보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한 사람에 대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거짓 맹세한 것은 삼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즉 이 두루마리의 전반부는 대인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한 저주, 후반부는 대신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큰 두루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두루마리가 워낙 커서 하늘에 있어도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루마리가 바로 십계명을 어긴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런 저주를 내리신다는 내용을 알리는 것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는 저주가 기록된 두루마리 이야기가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에스겔 2장 9~10절을 보니까 에스겔 선지자도 안팎으로 저주와 애가와 재앙의 말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0장 9~10절에도 사도요한이 천사로부터 작은 책을 받아먹었는데 그 책은 입에서는 단데 배는 몹시 쓰더라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는 재앙의 글이 기록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들은 축복된 이야기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도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두루마리에는 저주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자는 대신 계명을 어긴 자나 대인 계명을 어긴 자에게 하나님은 일점일회도 틀림없이 저주를 집행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집으로 가셔서 나무도 불살라버리고 돌도 불살라버려 그 집을 망하게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양날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이 되고 죄 사함이 되고 축복이 되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와 심판의 경고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셔도 자위대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법에 따라서 기록된 죄에 대하여 정확하게 심판하시고 저주를 내리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 가운데 믿지 않는 육적인 유대인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3절에 보니까 이 두루마리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신자들에게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다 지키셨습니까? 한 가지만 어겨도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도적질만 해도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거짓 맹세만 해도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중에서 한 계명만 어긴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저주하시고 그 집에 들어가 나무와 돌을 불살라 버리고 지옥에서 영원토록 벌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이렇게 무섭기만 하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로 택하신 사람은 나이가 많아도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들은 저주의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듣게 되면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율법을 다 어겼는데 나에게 이런 저주가 임한다고? 아이고 무섭구나. 내가 저주에서 어떻게 해방될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기준이 무엇이냐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겨서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택한 사람인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를 들어도 그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한 저주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가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고 죄 사함을 받게 되고 복을 받게 됩니다. 이런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깨달아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불교나 천주교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내가 자유의지로 예수를 택하여 믿었다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건 성경의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에게 죄를 깨닫는 마음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을 주시고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택함을 받은 자는 예수를 믿게 되고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3~14).
인간은 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십계명을 어기지 않고 다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상 아담이 하와와 선악과를 따먹는 바람에 우리 속에 죄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룩한 법을 주어도 지킬 능력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 저주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주 아래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복 좋아하는데 이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복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복은 시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120년입니다. 오래 잘 먹고 잘 살아도 120년이면 끝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약속하는 복은 죽은 후에도 영생의 복이요, 부활의 복이요, 하나님 나라에서 마음껏 축복을 누리는 영원한 복인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의 차이가 있고 질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김없이 율법, 즉 십계명을 어긴 죄에 대한 저주가 그대로 정확하게 집행된다는 것이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의 의미인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의 죄로 인한 저주를 받지 마시고 대신 저주를 받아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저주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Ⅱ. 일곱 번째 환상: 에바 속의 여인
일곱 번째 환상은 에바 속의 여인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다시 환상을 보았는데 에바 속에 한 여인이 들어있습니다. 에바는 큰 그릇입니다. 곡물을 측량하는 기구 가운데 제일 큰 22리터가 들어가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이 그릇 속에 여인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자꾸만 나오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무로 뚜껑을 만들어서 무겁게 만들어서 이 여인이 못 나오도록 뚜껑을 덮어버리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에바 속에 있는 여인은 뭐냐? 히브리어로 '악'이 여성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스가랴에게 말하는 천사가 해석하기를 이 여인은 '악'이라고 했습니다. 독일어나 히브리어 같은 언어는 명사마다 성이 있습니다. 에바 속에 죄와 악이 싸여가는 것을 에바 속에 여인이 들었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졌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 하나하나 쌓여가다가 그릇의 양이 다 차게 되면 그때는 심판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악한 왕입니다. 선지자가 아합과 이세벨의 악에 대해서 저주했습니다. 개가 너의 고기를 먹고 너의 피를 핥으리라. 그러나 이 저주는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실행되었습니다. 선지자가 말한 그대로 아합과 이세벨은 결국 개가 고기를 먹었고 개가 그 피를 핥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물레방아는 천천히 돌지만 확실하게 돈다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양을 그릇 속에다 차곡차곡 쌓아가다가 꼭대기에 닿으면 그때 심판을 내리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5장에 벌써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6).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게 하신 이유는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아모리 족속의 죄악의 분량이 다 차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의 에바가 가득 차는데 400년 걸렸다는 것입니다. 가득 차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내쫓고 애굽의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옮기시겠다는 말씀이 창세기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도 예수님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마 23:32). 너희 조상들이 에바에 많이 채웠는데 조금 모자라니까 바리새인 서기관들 너희가 채워서 심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는 죄를 더하여서 에바 속에 악이 가득 차게 되었고 결국은 A.D. 70년 로마 장군 타이터스에 의해서 100만 명이 죽고 국가는 완전히 멸절 당하고 그들은 다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그가 가로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구리 위에 던져 덮더라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매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슥 5:7~11). 준공되면 그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여기 에바 속에 여인이 들었는데 이 에바 속에 들어있는 여인을 보니까 학 같은 날개가 있고 날개를 가진 두 여인이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어 올렸다고 했습니다. 이 두 여인은 누구일까요? 학자들은 이것이 그리스와 로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라 이름도 여성이기 때문에 두 여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A.D. 70년대 세계를 지배하던 문명은 헬라와 유대문명입니다. 이 두 가지 세력들이 결국 악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늘로 들어 올려서 시날 땅으로 옮겼더라는 것입니다. 시날 땅이라는 것은 창세기 10장 10절에서 니므롯이라는 사람이 바벨론을 만든 땅입니다. 시날 땅은 우상 숭배와 불신앙을 상징하는 땅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재앙이 다 차니까 결국 가나안 땅에서 뽑혀서 우상숭배의 땅으로 다 흩어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 흩어져서 거기다 집짓고 정착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1948년 일부는 돌아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영적으로는 불신앙 시날 땅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유대인의 국가로서 집단적인 죄에 대해서도 그 양을 측정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이든 죄악의 양이 다 차게 되면 나라에 재앙이 오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즉시 오지 않는다고 악을 행하기에 담대한 백성들은 결국은 에바에 악이 점점 빨리 차서 심판도 빨리 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스가랴 5장의 두개의 이야기는 1~5절까지는 개인을 심판한다는 것이고 6~11절까지는 불신앙하는 국가를 심판하신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죄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심판하시고 국가적인 죄에 대해서도 그 양이 차면 심판과 저주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백성들에게는 은혜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함을 주시고 이런 백성들이 많은 나라를 향해서는 축복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많고 기도하는 백성이 많은 나라, 복음이 들어간 나라는 잘 삽니다. 그런데 우상숭배가 심하고 복음이 들어가도 이상하게 변질된 복음이 들어간 나라들은 별로 잘 살지도 못하고 나라에 재앙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이 많은 나라, 기도하는 백성이 많은 나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백성들이 많은 나라에 대해서 복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이것은 다윗의 가지에서 나온 순 일곱 눈을 가진 모퉁이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한 백성들의 죗값을 모두 지시고 저주를 모두 십자가에 지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1920년대 미국의 제 30대 대통령인 켈린 쿨리쉬라는 사람은 말이 짧기로 유명합니다. 어느 날 이 대통령이 교회를 다녀오니까 사모님이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이 무슨 설교했습니까?” 그러니까 “죄” 한마디로 대답하고 더 이상 설명이 없자 또 물어봤습니다. “죄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죄를 반대하신다네.”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가랴 5장은 하나님이 개인적인 죄도 반대하시고 국가적인 죄도 반대하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대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저주에서 해방된 성도들은 개인적으로도 죄를 반대하고 교회적으로도 죄를 반대하고 국가적으로도 죄를 반대하여 개인적으로도 성결을 이루고 교회적 국가적으로도 성결을 이루며 살아야겠습니다.
제가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저주 아래 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누구 공로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때문입니다. 믿으십시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스가랴 4장은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시겠다는 말씀이며 우리가 성결을 이루게 되면 우리 영혼이나 교회나 우리 대한민국에 하나님이 성령을 지속적으로 부어주십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는 위대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날아다니는 두루마리
스가랴 5장 1~4절 / 김철한 목사 오목천교회
오늘의 이야기는 스가랴가 본 여섯 번째 환상의 말씀이다. 천사가 스가랴에게 묻길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스가랴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고 답한다. 슥5:2에 기록한 두루마리의 형태는 어떠한가?
첫째,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았다. - 말씀의 역동성을 뜻한다. (슥5:3)
두루마리는 둘둘 말아서 보관하기에 두루마리다. 그런데 둘둘 말려 있어야 할 두루마리가 날아가고 있다. 그 두루마리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저주의 글들, 계명이 기록되어 있다. 슥5:3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두루마리 이편, 저편에 계명이 기록되었다면 그냥 양가죽 두루마리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본래 종이가 없던 시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기록할 때 돌에다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후 두루마리에 기록하였다. 종이가 없어서 종이 대신 양의 가죽을 다듬어 양피지를 만들었다. 양피지에 말씀을 기록하였으니 말씀을 보관하기 위해서 그 양피지를 둘둘 말았다. 그리고 그 양피지 두루마리를 항아리에 넣어 보관하였으니 두루마리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에스겔 3장에도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말씀이 있고 계10:2, 8, 10에도 두루마리를 먹는 말씀이 있다. 즉, 두루마리란 말씀이다. 그래서 날아가는 두루마리라 하였으니 말씀의 움직임, 말씀의 역동성을 의미한다.
날아간다는 것은 장소가 어디든지, 평지든지, 산악이든지 아무리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일지라도 두루마리가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은 어느 한 장소에, 어느 한 마을에, 어느 한 사람에게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은 꿈틀거리고 움직인다. 선민이나, 이방인이나 온 세상에 살아 움직인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말씀은 날아가는 두루마리다. 어느 누구에게나 역사하고 다가간다. 말씀은 생명이 없는 죽은 말씀이 아니다. 아무 역사도 하지 못하고 아무 능력도 행하지 못하는 화석화된 문자로서의 말씀이 아니다. 말씀은 때론 천천히, 때론 신속하게 심령 위에 다가온다.
나는 말씀이 내게로 달려 나오는 사실적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 10분간 휴식하는 시간에 일어난 사건이다. 군대 훈련 중 담배를 피우는 그 시간을 지내는 것이 어려웠다. 흡연을 하고 싶은 욕구, 또 그 속에서 혼자 가만히, 우두커니 있는 것이 어려웠다. 이미 신학교를 졸업하고 간 군대인지라 훈련병들에게 보급되는 담배가 나오면 훈련생들이 ‘목사님’하고 달려들고 담배를 가져간 후 언제 봤냐는 식이었다. 그때 공허한 시간을 이기려고 일용할 양식을 들고 나가서 그날의 말씀을 읽었다. 그런데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는 마6:34의 말씀이 내 눈 앞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을 비비고 봐도 꿈틀꿈틀거리며 내 앞으로 튀어나오는 말씀은 나를 사로잡았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 아,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말씀의 역동성을 체험하면서 나는 자신감을 가졌다.
둘째, 엄청나게 큰 규모의 두루마리를 보았다. - 말씀의 공개성이다. (슥5:2下)
슥5:2下 “그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십 규빗이니이다.”고 하였다. 1규빗이 팔꿈치에서부터 셋째 손가락까지의 길이니 이 두루마리는 약 10미터 길이에 5미터 넓이인 것이다. 말씀이 두 손으로 들고 펼 수 있는 크기의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것이 일반적인 크기인데 여기 두루마리는 대형 스크린만한 두루마리다. 이것은 말씀이 하나로 펴진 상태를 보여준다. Cotex 같이 묶여진 말씀, 즉 파피루스 종이에 기록된 것은 페이지가 있지만 두루마리는 펴면 하나로 이어져 있다. 이것은 말씀이 모든 사람들이 잘 읽고 볼 수 있도록 공개된 것임을 뜻한다. 이쪽으로 가는 삶이 옳은지, 저쪽으로 가는 삶이 옳은지 한 번에 전체적인 말씀을 보게 되는 공개성을 뜻한다.
지금의 성경은 페이지가 있다. 장이 있고 절이 있다. 이 장의 구분은 1250년 휴고 추기경이 만들었고 절의 구분은 신약만 1551년에 스테판이 만들었다. 1560년 제네바 성경에 전체 절 구분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성경은 장, 절로 나누어 보게 되는데 사실 그것이 통으로 성경을 못 보게 만든다. 말씀은 페이지가 없는 두루마리에 적어둔 것인데 그 두루마리가 대형 스크린만하니 한꺼번에 말씀이 드러나는 말씀의 공개성을 뜻하는 것이다. 말씀이 하나 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면에 공개되어 드러나서 편식되는 말씀이 없다. 오용되는 말씀이 없다. 다 볼 수 있게 나타나게 되어 말씀 앞에 피할 자가 없다. 말씀이 펴지지 않았을 때 말씀에 그런 것이 있었는지 몰랐다. 허나 모든 것이 전체적인 한 면에 적혀 나타나는 말씀 앞에 사람들은 자신을 비추어 보게 된다. 말씀이 공개된 것은 이런 말씀, 저런 말씀, 말씀 앞에 있는 나의 모든 내면이 공개된다. 숨김없이 낱낱이 내가 드러나면서 나는 어떤 모습인지가 보여진다. 내가 구부러졌는지, 내가 더러워졌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삶의 척도와 같고 기준이 되는 말씀을 가져다가 대면 그 순간 저절로 나의 형태가 드러난다. 구부러졌는지, 똑바른지가 드러난다.
두루마리, 그것도 하나로 크게 펴진 두루마리의 환상을 보는 스가랴는 이 세상이 사는 방법대로 사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고 말씀에 적혀 있는대로 사는 것이 요구되는 것임을 느꼈을 것이다. 천사가 스가랴에게 일러주었다. 슥5:3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도둑질을 드러내는 죄는 세상 죄이다.맹세하는 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망령되어 맹세하는 자란 종교적 죄다. 두루마리는 이 땅의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고 계명을 어기고 탐욕에 살고 있는 세상적 죄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짓는 종교적 죄, 거짓말의 죄를 알려준다.
셋째, 보내어진 두루마리를 보았다. - 말씀의 심판성을 뜻한다. (슥5:4)
슥5:4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다.
오늘 하나님께서 꿈틀거리는 말씀을, 만인을 드러나게 만드는 말씀을 이 집, 저 집마다 보내는 이유는 잘못 사는 것을 심판하기 위함이다. 말씀은 강력한 심판성을 품고 있다. 말씀이 삶의 중심이고 삶의 기준이기에 이것을 벗어나면 죄다. 솔직히 이 세상을 사는 모습은 죄악이다. 바벨론 제국이 히브리 백성을 무너뜨렸고 앗수르 제국이 북왕국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바사 제국이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선민의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강력하고 힘센 나라에서 약소 국가들을 지배하고 다스리지만 사실 그들의 제국은 도둑질의 죄에서 세워진 번영과 승리다. 이미 바벨론이 무너지고 바사 제국이 되었지만 그들의 제국이 오래 가지 못하였다. 약소 국가들은 바벨론처럼, 바사처럼 강력한 제국의 힘과 성공, 부요, 위엄, 오만을 갖지 못해서 부러워하지만 제국은 도둑질 위에 세워졌기에 심판을 받게 된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세상 삶을 동경한다. 빼앗고 훔치고 도둑질하고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힘을 가지면 성공자다. 과정이 문제되지 않고 수단이 문제되지 않는다. 너보다 높아지고 너보다 많이 가지고 너보다 부요하면 성공이다. 그래서 영혼이 소생하지 못한 신앙인들이 이 유혹에 빠져 무늬는 신앙인이나 불신앙인으로 사는 이들이 대다수다. 교회는 다니지만 여전히 영원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 땅에 배를 대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져 산다. 그러면 결국 잘되는 것 같으나 심판을 받아 잿더미가 될 것이다.
포로기 시대 이후 말씀의 부흥이 왔다. 말씀을 중요시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보내어지는 두루마리 환상은 사람의 사는 방법을 바꾸어 놓으려 하는 것이다. 이 집, 저 집, 도둑의 집, 거짓 위선의 집에 두루마리를 보내는 것은 말씀 부흥에 대한 환상이다. 심판을 받을 세상은 헛되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들도 모두 다 스가랴의 환상을 가진 자가 되어 이제 가치관을 바꾸자. 강한 제국을 동경하는 삶의 부질없음을 알고 말씀을 따르는 성경적 가치관의 삶을 살자.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 말씀의 두루마리가 영원하다.
세상이 거룩한 것이 아니다. - 말씀의 두루마리가 거룩하다.
세상이 소망스러운 것이 아니다. - 말씀의 두루마리가 쇠하지 않는 소망이다.
세상의 것, 화려하고 멋진 것을 가졌다고 성공한 것이 아니다. - 말씀의 두루마리, 단순하지만 말씀을 가진 것이 성공한 것이다.
날아가는 두루마리
슥 5:1-4 / 이윤재 목사 한신교회
여러분은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가 생각합니까? 아마도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몇 주전 미국에 있는 딸이 공부를 마칠 때 제가 물었습니다. “너 공부마칠 때 까지 너에게 힘을 준 일등 공신이 누군지 순서대로 말해봐”. 그랬더니 1위가 엄마랍니다. 엄마는 아침 저녁으로 통화하며 딸을 격려했으니 누가 봐도 1위입니다. 2위는? 했더니 놀랍게도 고양이랍니다. 친구가 주고 간 “쭈쭈”라는 고양이가 매일 집에서 자기를 기다려주고 외로울 때 함께 있어줘서 큰 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양이에게 밀린 것은 서운했지만 그래도 3위는 되겠지 하고 물었습니다. 3위는? 그때 딸이 천천벽력같은 말을 했습니다. “방탄소년단”. 적적할 때 노래로 힘을 주고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았답니다. 저는 졸지에 고양이에게 밀리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방탄소년단에게까지 밀려 4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기호 4번 인사드립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 인생의 힘은 사랑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시인 하이네가 말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그것이 인생의 최고의 일이다” (하이네)
그런데 우리를 힘있게 하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사용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이 노래를 심지어 아프리카에 갔더니 거기 있는 교인들도 불렀습니다. 어디서 배웠느냐고 하니까 한국선교사가 가르쳐 주었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노래를 싫어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사랑받아야 살아가는 존재로 태어난 한 이 노래를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랑만 받으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어쩌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뜻과 계획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보내신 그 분에게 사용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2절을 제가 작사했습니다. “당신은 사용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사랑받고 사용받고”,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두 가지 힘입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이 어느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답니다. 설교를 듣고 예배를 마친 후 보좌관이 물었답니다. “대통령님, 오늘 목사님의 설교가 어땠습니까?”. 링컨이 말했습니다. “음, 웅변적으로 잘 전달된 설교라고 생각하네”. 보좌관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훌륭한 설교였다는 말씀이군요?”. 그때 대통령이 정색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아니, 실패한 설교라고 생각하네”. 보좌관이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실패라구요? 왜죠?”. 링컨이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은 하나님이 위대하시다고 설교했지만 우리에게 어떤 위대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지. 위대한 헌신이 없는 데 어떻게 하나님이 위대하게 되겠는가?” 저는 링컨의 이 말을 자주 묵상합니다. 오늘날의 설교가 너무 사람들을 의식하여 사람의 축복과 행복을 강조한 반면,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헌신은 강조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묵상합니다.
오늘 스가랴 세 번째는 그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지지난 주 우리는 스가랴의 첫 번째 환상을 살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옷을 깨끗케 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앞에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는 일곱 등잔과 두 감람나무 환상이었습니다. 이 환상은 성전에 있는 일돕 등대에 부어질 감람나무 기름에 관한 환상이었습니다. 문제는 능력의 문제입니다. “모든 노력은 우리에게서 나오고 모든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은 모든 능력의 원천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됩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을 향해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앞에 평지가 되리라”를 외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환상입니다. 1절 보시겠습니다. 슥5:1,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오늘 스가랴는 새로운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두루마리 환상입니다.스가랴가 보았던 세 번째 환상은 두루마리 환상이었습니다. 그 두루마리가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환상은 당시 성전을 재건하고 있던 스가랴의 상황에 어떤 메시지입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메시지입니까?
두루마리
스가랴가 눈을 들어 보았더니 두루마리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두루마리가 무엇입니까? 옛날 성경은 두루마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두루마리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시40: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겔2:9,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래서 두루마리는 곧 성경을 의미합니다.
두루마리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옛날 책만드는 법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옛날에는 책을 만드는 데 주로 두 가지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파피루스이고, 또 하나는 가죽종이였습니다. 파피루스는 이집트의 나일강 삼각주 습지에 자라는 수생식물이었습니다. 그 풀이 자라면 잘라서 누르고 다지고 말려 종이형태를 만듭니다. 거기에 글을 써서 책을 만듭니다(그림1). 이보다 더 질기고 오래 가는 것은 가죽이었습니다. 염소, 양, 송아지, 기타 동물의 가죽으로 만드는 데 동물이 어릴수록 가죽의 질이 좋고 특히 송아지 가죽이 최상품이었습니다. 먼저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털을 뜯은 다음 그 표면에 글을 쓰는 것입니다. 파피루스나 가죽을 재료로 하되 그것으로 책을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파피루스나 가죽 종이들을 꿰매거나 풀로 붙여서 길게 늘어 뜨린 후 양쪽 끝에다가 나무나 뼈나 쇠붙이로 된 둥근 막대기를 붙여 들고 읽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두루마리 방식입니다. 또 하나는 오늘날 책과 같이 파피루스나 가족을 포개서 접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코데스라고 불렀습니다. 두루마리는 대개 한쪽만 쓰고 코덱스는 양쪽 다 씁니다. 그래서 코데스방식이 더 좋지만 만들기는 두루마리 방식이 더 쉬어서 두루마리가 더 많이 쓰였습니다. 잉크도 아무 것이나 쓰는 것이 아니라 가죽 종이에 오배자로 만든 잉크를 사용했고 후에는 거기에 황산철을 섞고 또 여러 가지 색깔을 내기 위하여 화학물을 첨가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에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두루마리는 주전 715년경에 살았던 히스기야왕 시대의 두루마리입니다(그림2). 2015년 고고학자 에일랏 마잘이 예루살렘 ‘다윗의 도시’(오펠)에서 발굴한 이 두루마리는 속에 성경 말씀이 씌여있고 원통형으로 둘둘 말아서 끈으로 묶은 다음 겉표지에 왕의 인장을 찍었습니다(그림3). 학자들이 그 인장을 보니까 “유다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의 인”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주전 715년이니까 지금부터 약 2,800년전 이스라엘 사람이 쓴 두루마리 성경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되었어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첫째로 이스라엘의 날씨가 비가 없고 건조하기 때문이고, 또한 왕이 읽는 성경이기 때문에 최상의 재질에 최고의 서기관이 정성껏 썻기 때문이고 마지막에 왕궁에 잘 보관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두루마리에 인을 치는 것에 대해서 자주 말합니다. 계5장입니다. 계5:1-3,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두루마리에 찍은 인은 두루마리의 비밀을 보장하는 권위였습니다. 인을 떼기 전에는 두루마리를 펼 수 없고 인은 떼야만 두루마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 인은 왕이 찍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말세의 비밀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의 인은 어린양 예수님이 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5:7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여러분은 성경의 모든 비밀은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고 증거되고 해석된다는 것을 믿습니까?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도장찍은 책이 성경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두루마리 성경이 대량으로 발견된 것이 1947년 쿰란입니다, 한 베드윈 목동이 저녁에 양을 찾는 과정에서 동굴이 이런 항아리가 있었고(그림4), 그 항아리 속에 구약 이사야 성경이 나왔고, 그 후에 이루어진 발굴에 따라 대부분의 구약성경이 다 나왔습니다. 그래서 스가랴가 보았던 환상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날아가는 두루마리
문제는 이 두루마리가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1절을 보겠습니다. 슥5:1-2,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두루마리의 모습은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크기가 나타나는 데 길이가 이십규빗, 넓이가 십 규빗이었습니다. 옛날 도량형으로 1큐빗은 45.5센티였습니다. 그렇게 계산하면 두루마리의 길이는 20x45.5=9미터 10센티입니다. 넓이는 10x45.5=4미터 55센티입니다. 어떻습니까? 아무리 성경책이 커도 길이가 9미터, 넓이가 4.5미터인 성경이 있습니까? 이 크기는 성경의 크기가 아니라 성전 제단의 크기였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제단이 이 크기였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두루마리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예,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두루마리의 크기나 움직임은 실제 성경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갖는 특징을 말해 줍니다. 성경은 곧 제단입니다. 제단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제사장이 동물의 피를 뿌려 백성의 죄를 사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제단은 곧 하나님의 임재요 하나님 자신입니다.하나님의 임재요 하나님 자신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대할 때 하나님 자신을 대하는 것 같이 합니까? 말과 인격은 하나입니다. 말은 존재의 집입니다.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 말을 하고 그 말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입니다. 시4:4,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사람은 누구나 심중에 있는 것을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도 심중에 있는 말을 성경으로 말씀합니다.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여전히 성경입니다. 미국에서만 매년 60억 달러어치의 성경이 팔리고 있습니다. 평균 10가구당 9명이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과 성경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도 다릅니다. 성경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성경을 잃어버리면 곧 하나님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 보면 주인공 크리스쳔이 두루마리를 잃어버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크리스천이 시온성을 향해 재를 넘어 가다가 정자를 만납니다. 큰 재를 넘느라 피곤해서 쉴 겸해서 앉았다가 품안에 있는 두루마리 성경을 꺼내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피곤에 지쳐 깜빡 졸다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자는 사이에 자기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가 떨어져 나간 것도 몰랐습니다. 한참 자는 데 누가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깜짝 잠에서 깻는 데 문제는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두루마리가 어디 갔나 찾는 데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겁쟁이와 의심입니다. 먼저 겁쟁이가 말합니다. “크리스쳔, 당신같이 겁많은 사람이 시온성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얼마나 가는 길이 험한지 아시오? 차라리 이쯤해서 포기하시요”. 또 한 사람 의심이가 나타나더니 말합니다. “당신이 간다는 시온성, 한 번도 안 가보았잖아요? 이 길로 가는 것이 맞긴 맞는 거요?” 그러면서 의심을 조장합니다. 크리스천이 대꾸하지 않고 잃어버린 두루마리를 찾았더니 저 골짜기 밑에 있습니다. 그것을 주어 다시 품안에 넣고 오니 겁쟁이와 의심이가 사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루마리 성경이 없으면 당장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겁과 의심입니다. 겁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의심은 우리에게 불확성을 조장합니다. 그래서 가는 길을 중단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두루마리 성경을 품에 품어야 합니다. 이것은 스가랴가 주전 6세기, 이스라엘에 성전재건할 때 그 백성에게 준 메시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성전을 지어도 그 성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소용없다”. “하나님의 말씀인 두루마리를 품에 품어라”. 그래야 행20:32,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아멘.
그런데 두루마리의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예,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았습니다. 여기서 “날아간다”고 할 때 문법적 형태는 분사형입니다. 히브리어 분사는 영어의 진행형과 같습니다. 한번 날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나는 것입니다. 조금 날고 마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날아갈까요? 목적이 무엇일까요? 3절입니다. 슥5:3-4,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두루마리가 날아가는 방향이 있습니다. 도둑질하는 자에게로 날아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의 집에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두 마디입니다. “끊어지리라”. “사르리라”. 새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말끔히 없어지리라”로 번역했습니다. 공동번역은 “제거하리라”로 번역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슥5:3, “그가 내게 말했다. ‘이 책은 온 세상 모든 도둑과 거짓말쟁이들에게 내려지는 판결이다. 책의 처음 절반은 도둑에 관한 말씀이고 나머지 절반은 거짓말쟁이에 관한 내용이다. 내가 이것을 보냈다. 만군의 하나님의 포고다. 이 판결이 모든 도둑과 거짓말쟁이의 집에 빠짐없이 날아들 것이다. 집하나 하나에 내려 앉아 기둥과 돌을 허물어뜨릴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임을 아십니까?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의 세 가지 특징, aliving, 살아 있고, moving, 움직이고, transforming, 변화시키고, “살아 있고, 움직이고, 변화시키고”,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성전에서 선포되지만 성전에 속박되지 않고 moving, 성전밖으로 날아갑입니다. 그 말씀은 도둑질하는 사람과 거짓말하는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두 종류의 죄는 인간이 짓는 두 가지 대표적인 죄입니다. 도둑질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 거짓말은 인간에 대한 범죄입니다. 도둑질은 자기가 주인이 아닌데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을 제 것이라 우깁니다. 도둑질입니다. 거짓말은 다른 사람을 지배할 목적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죄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두루마리 말씀이 날아가서 이 두 가지를 끊어버리고, 살라 버립니다. 끊어 버리고, cuttung, 구별입니다. consuming, 태우는 것입니다. 없애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칼처럼 우리를 세상과 구별해 내고, 하나님의 말씀은 불처럼 우리를 태웁니다. 두 개의 유비입니다. 칼처럼 자르고, 불처럼 태우고, 칼처럼 세상과 단절시키고, 불처럼 우리 죄악된 존재를 불태우고. 두가지 유비입니다. 칼처럼 찌르고, 불처럼 사르고. 그래서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이 말씀이 교회안에 있어야 합니다. 스가랴는 주전 6세기,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면서 이 두루마리 성경이 새로 지어진 성전안에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에게도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에게도 이 말씀이 있느냐? 칼과 같고 불과 같은 말씀이 너희 심령에 있느냐? 만일 없다면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다”. 하나님의 두루마리 말씀이 우리 안에, 우리 교회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선교하는 교회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환상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너희안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세상에 전하고 있느냐?” 소위 선교적 질문입니다. 스가랴가 보았던 두루마리는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출발하여 도둑질하는 사람과 거짓말 하는 사람들에게도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을 끊고 살라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하나님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옛날 광야에 세웠던 성전은 moving temple, 움직이는 성전이었습니다. 한군데 정착해 있지 않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법궤에도 바뀌가 달려 있었습니다. 에스겔에 보면 하나님은 바뀌로 나타납니다. 에스겔이 환상을 보았더니 불타는 바뀌가 움직였습니다. 그 바뀌에 일곱 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움직이고 계십니다.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환상은 하나님이 한 군데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따라서 교회도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적 사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선교적 존재입니다. 교회는 선교사를 보내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했기 때문에 선교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처음 교회를 세상에 보낼 때부터 선교적 존재입니다. 선교를 하면 좋은 교회고 선교를 안하면 나쁜 교회가 아니라 선교를 안하면 아예 교회가 아닙니다. 에밀 부른너의 말대로 불이 타야 불인 것처럼 교회는 선교해야 교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선교합니까? 우리가 선교하면 떠오르는 것이 선교사입니다. 목회자인 선교사가 비행기타고 아프리카가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교의 본질은 하나님이 보낸 곳으로 가서 하나님 대리하여 사는 것입니다. 선교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말은 하지 않지만 삶으로 선교하는 선교가 있습니다. 오래전 어느 교회가 중국 무슨 대학에 영어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임기가 되어 돌아오는 데 공산당원인 총장이 물었습니다. “당신들 영어 교사들은 모두 크리스천들입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정체가 탄로나지 않았나 염려했습니다. 그래도 거짓말은 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그러더랍니다. “그런줄 알았습니다. 당신들과 같은 사람들을 보내주세요. 우리는 당신들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중국인 총장은 한국에서 보낸 교수들이 선교목적으로 보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도 열심히 가르치고 착해서 똑같은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삶으로 보여준 선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렇게 선교할 수 있습니다.
둘째 일과 함께 말하는 선교가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직장선교입니다. 제가 아는 안산의 한 의사는 치료받으러 온 환자들에게 자기가 교회 장로임을 밝히고 늘 기도로 치료를 시작합니다. 환자가 오면 묻습니다. “자녀분이 있으신가요?” “네, 둘 있습니다. 큰 아이는 아들인데 고1이고 작은 아이는 딸인데 중2입니다.” “혹시 자녀들이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큰 아이는 수학을 아주 잘 합니다. 그래서 과학자로 키우고 싶습니다. 딸아이는 운동을 잘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운동선수로 키우는 것이 꿈입니다.” “아! 그러세요. 자녀에 대해서 아주 좋은 꿈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혹시 아버지로서 자녀들의 꿈을 위해 어떤 일을 하시는지 물어도 될까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는 아버지에게 J장로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는 안산교회 장로인데 저는 매일 아침마다 교회에 가서 새벽예배를 드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혹시 제가 두 자녀분의 꿈을 위해 아침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해도 될까요?” 며칠 후 장로님은 다시 아버지를 만나 대화를 나눕니다. “제가 지난 3주동안 두 자녀를 위해서 아침마다 기도했습니다. 혹시 그동안 자녀분들과 어떠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이렇게 해서 장로님은 1년에 100가정을 전도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직장생활하면 전도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일하는 직장 선교사입니다.
세 번째가 말로 선교하는 선교사입니다. 이 선교사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교사라 부릅니다. 우리는 실력있고 전문적인 많은 선교사를 훈련해서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다 목회자여야 합니까? 다 신학교 나와야 하겠습니까? 21세기는 평신도 선교시대라고 말합니다. 세계적 추세는 전통적인 목사중심의 교회 선교사에서 평신도 중심의 직업 선교사로 바뀌고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선교사는 90%이상이 이미 평신도 선교사인데 한국은 아직 30%이하입니다. 우리 나라가 세계 선교 2위인데 3만명 가까운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다 목회자 선교사가 아닙니다. 대학생 성경읽기에서 피송한 선교사 1,722명은 모두 평신도입니다. 사도행전도 목회자와 평신도의 팀을 이루어 선교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대표적입니다. 이번 8.12일, 우리 교회는 20주년 기념 선교사를 파송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꼭 목회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꼭 다른 교회 다니는 분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교인가운데 평신도로서 헌신할 수 있으면 그가 바로 선교사입니다. 물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9월부터 우리 교회안에 선교학교를 두려고 합니다. 훈련받으면 누구나 훌륭한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선교는 목회자든 평신도든 한국이든 외국이든 하나님이 보낸 곳으로 가서 하나님을 대리하여 사는 것입니다. 최근 저는 우리 교인들이 보여준 신앙적 삶에서 아주 훌륭한 선교의 모델을 많이 봅니다. 지난 주에는 어떤 집사님이 신발 30켤레를 교회로 가지고 나왔습니다(사진9). 그래서 이것이 무엇입니까? 했더니 자기가 하나님의 교회 리모델링하는 데 헌신하고 싶어도 어려워서 못했는 데 기도하다가 자기가 파는 신발이라고 드리면 되지 않겠느냐 해서 신발을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가정 형편이 어렵고 딸도 몸이 아픈 분입니다. 이것을 여신도가 팔아줘서 건축헌금으로 냈습니다. 선교는 먼 나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낸 곳에서 하나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이번 6월에 쉬는 날이 두 번 있었습니다. 6.6, 현충일, 6.13, 투표일, 그 쉬는 날을 이용하여 병원 문닫고 가족과 함께 선교를 다녀온 사랑하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사진10). 누군들 쉬는 날 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보내심에 순종하여 시간을 내고 물질을 냈습니다. 참 아름다운 선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20주년을 맞아 이 선교에 집중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세한 계획은 곧 말씀드리겠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시카고에 가서 어느 목사님께 들은 말입니다. 이분이 시카고 오기전에 테네시 어느 교회에서 목회했는 데 그 동네에 어느날 흑인들이 많이 일하는 공장이 들어섰답니다. 목사님은 전도의 때가 왔다며 교인들에게 전도하자고 호소했는 데 교인들은 흑인들 전도하면 교회가 더러워진다며 전도하기를 거절했답니다. 할 수 없이 목사님은 그 교회를 떠나 시카고로 왔는 데 이번에 한 10년만에 테네시에 갈 기회가 있어 교회 근처를 지나갔는 데 자기가 목회했던 교회가 없어졌더랍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이 근방에 교회가 있는데” 했는데 자세히 보니 술집 하나가 눈에 띄더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술집이 바로 옛날 교회였습니다. 전도하라고 공장까지 보내주었더니 흑인이라고 전도하지 않다가 교회가 점점 어려워 술집에 판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탄식하면서 선교의 기회를 잃어버린 교회가 어떻게 되는지를 본 것 같다며 지금도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환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스가랴 시대나 우리 시대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움직이며 변화시키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때를 잃지 말고 선교해야 합니다.
두루마리와 에바
슥 5:1~11 / 석기현 목사
미국에는 도로 표지판들이 참 잘 설치되어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미국에 가서 운전을 하며 다니게 되었을 때, 길을 찾아 가는 표지판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가지 '주의'나 '경고'의 표지판들이 참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가 있으니 천천히 가라는 표지판, 사슴이 잘 건너다니는 길목이니 조심하라는 표지판을 비롯하여, 이 동네에는 귀먹은 어린이가 살고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표지판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운전자의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 곳마다 정말 자세하게도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주한미군들에게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가장 불편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도로 표지판들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그 첫 번째로 꼽는다고 하는데 저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제가 알게 된 것은, 그런 경고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바로 그 경고 내용에 해당되는 사고를 일으켰을 때에는 그 벌도 과중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비슷한 정도의 사고를 내거나 위반을 하더라도 그런 경고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일으켰을 때에는 평소보다 갑절의 벌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제가 살던 동네에서 언젠가 '공사중'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골목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미 도로공사용 차량 한 대는 길가에 세워져 있었지만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고 또 이미 퇴근했을 만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냥 평소의 제한속도 그대로 통과해 버렸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어떤 교통경찰이 제 집에 찾아와서 전날 저녁에 그 공사 차량의 뒤쪽에 앉아서 쉬고 있던 인부들이 제 차가 감속하지 않고 지나갔다는 신고를 해 왔다고 하면서 위반딱지를 떼어주는 바람에 꽤 많은 벌금을 물어내야 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경고가 확실하면 할수록 그 경고를 어겼을 때에 받는 벌은 더 중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 사회에서는 아주 당연한 원칙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중에도 그와 똑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의 인생길에 큰 경고판을 하나 세워 두고 계시며, 그것을 어겼을 때에는 당연히 중한 벌을 받도록 정해 놓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구나 볼 수 있게 세워진 하나님의 경고 표지판, 그리고 그것을 보고도 위반하면 필연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중벌이 과연 무엇인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하고자 합니다.
1. 성경은 하나님의 경고를 인생들에게 명백히 보여 주는 '두루마리의 표지판'입니다(1-4절).
제1차 바벨론 포로 귀환 유다인들을 향하여 '선민의 회복'과 '열방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선포해 주고 있던 선지자 스가랴는 이 5장에서 이제 '다섯 번째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내가 다시 눈을 든즉"이란 말은 바로 지금 스가랴 선지자의 눈앞에 나타나는 환상의 장면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는 "날아가는 두루마리" 하나를 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루마리'란 바로 구약 성경을 기록했던 책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의 책이란 좌우로 길게 연결된 양피지에다 내용을 기록한 후에 둘둘 말아서 보관했던 것이었고, 성경 역시 그런 '두루마리'에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스가랴가 환상 중에 본 두루마리는 상당히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선 그 크기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광이 십 규빗"이요 "장이 이십 규빗", 즉 폭이 거의 5미터이고 길이가 10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두루마리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큰 두루마리가 말려져 있지 않고 펴져 있었으니, 실상 이것은 무슨 두루마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엄청나게 큰 플래카드와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그 두루마리는 "날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구약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는 보관장 속에 안치하고 문을 닫아 두는 법인데, 그 두루마리는 하늘 위로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큰' 두루마리가 '펼쳐진 채로 날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그것이 모든 사람의 눈에 '분명하게 보이고 정확하게 읽혀질' 수 있게 나타났음을 뜻합니다.
즉 그 두루마리에 기록된 사실은 무슨 숨겨진 비밀이거나 스가랴 한 사람에게만 몰래 알려진 사실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든지 다 알 수 있는, 공개된 진리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내용이 그 '공중에 날아가는 대형 두루마리'에 씌어 있었습니까?
스가랴에게 그 환상의 의미를 해석해 주고 있던 천사는 3절 말씀에서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온 세상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저주'가 바로 그 두루마리에 적혀 있다는 뜻입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 저주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각각 그 두루마리의 "이편"과 "저편" 즉 양쪽 면에 하나씩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무릇 도적질하는 자"와 "무릇 맹세하는 자"들은 "끊쳐질 것이라"는 저주들로서, 바로 십계명의 제8계명과 제3계명에 해당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즉 "도적질하는 자"에 대한 저주는 바로 십계명의 후반부인 '이웃에 대한 계명'을 범하는 죄들에 대한 저주를 대표하는 것이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에 대한 저주는 십계명의 전반부인 '하나님에 대한 계명'을 어기는 죄들에 대한 저주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스가랴가 본 그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은 바로 율법 전체를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며,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큰 글자로 씌어 있었기 때문에 십계명을 다 들어가지 못하고 그 두 가지 계명들만 대표적으로 기록된 것이었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서 '율법'이 특별히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죄악을 저지른 자는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범죄자는 "끊쳐지는" 벌, 즉 이스라엘의 신앙 공동체에서 끊기어지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쫓겨나가게 되는 벌이 반드시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4절 상반절의 "내가 이것을 발하였다"라는 하나님의 선언에서 "이것"이란 바로 '죄에 대한 저주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며, 범죄자를 반드시 벌할 것은 당신께서 스스로 천명하시고 공언하신 사실로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이루고야 마실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 "이것"은 곧 이어지는 4절 하반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면서"라는 말씀의 주어에도 해당되는데, 이것은 그런 범죄자에게 형벌이 내릴 때 바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그 형벌의 집행자처럼 작동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의 사법 제도에서는 여전히 미해결의 범죄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심증이 확실하여 체포는 했지만 물증이 부족하여 처벌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허다하며, 어떤 범죄는 아예 아무 단서도 없이 그냥 오리무중에 빠져서 영원히 '풀지 못할 미스터리(unsolved mystery)'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니 미국의 유명한 은퇴 풋볼선수처럼 자기의 전처를 살해하고도 비싼 변호사만 잘 쓰면 아무 탈 없이 무죄방면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로 크나큰 오산입니다.
하나님의 정확하고 공의로운 법 아래에서는 그런 '증거 불충분의 불기소 처분'이나 흐지부지한 판결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의 '백(白)보좌 심판대' 앞에서는 그 어떤 인생도 자기가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 저지른 죄들을 두고 적당히 변명하거나 부인하여 어물쩍 넘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 표지판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일단정지' 신호를 지키지 않고 그냥 지나가다가 교통경찰에게 잡혔을 때에 "나는 표지판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빨간 팔각형 모양으로 돋보이는 그 표지판이 그 교차로를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의 눈에라도 금세 들어오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세워져 있는데 어떻게 그런 핑계를 둘러댈 수 있겠습니까?
'제한속도'를 초과하여 달리다가 감시카메라에 찍혀서 벌금딱지를 받게 되었을 때에 "그 도로의 제한속도가 얼마인지 몰라서 그랬습니다."라는 변명이 통할 수 있겠습니까?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 제한속도 숫자가 뚜렷이 적혀 있는 표지판이 바로 그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같은 자리에 항상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못 보았다는 것이 어떻게 핑계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꼭 마찬가지로 이 성경 말씀은 '날아가는 큰 두루마리'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보고 읽을 수 있도록, 즉 아무도 나중에 핑계를 댈 길이 없도록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필연적인 징벌을 명백히 경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운전면허 시험을 볼 때에는 반드시 시력검사도 같이 받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운전 중에 전방에 멀리 있는 표지판을 읽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 교통 표지판들을 읽지 않고 그냥 운전하면 반드시 사고를 낼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본인도 다치지만 타운전자나 보행자에 대한 인명 피해를 내게 될 것이며 또한 전체 교통질서에 크게 방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해서, 교통 표지판을 읽지 못하면 자동차 운전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의 경고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사실상 아예 인생을 살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기 인생을 망칠 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와 국가에 피해를 끼칠 '범법자'요 '악인'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지 아니하고 '사람 앞에서 악인'이 되지 아니하도록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위에 '큰 두루마리의 경고 표지판'으로 나타난 성경 말씀 한절 한절을 늘 눈여겨 읽고 마음에 깊이 새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저주에 스스로 사로잡히게 만드는 '에바의 함정'입니다(5-11).
이제 하나님께서는 두루마리의 경고를 받고도 지키지 아니한 자들이 어떻게 되고야 말 것을 곧 이어지는 "에바"의 환상을 통하여 보여 주고 계십니다.
'에바'란 당시 곡식을 잴 때 쓰던 용기로서 약 22리터 정도의 양을 담을 수 있는 광주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의 '에바'는, 아까 두루마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통의 것보다 훨씬 큰 것으로서 "한 여인이 앉을" 만한 크기로 나타났습니다.
그 "에바"를 가리켜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양'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눈'이지만, 본문에서는 눈이 '사람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마음의 창'과 같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의역을 했으며, 이 번역을 따른다면 그 '에바'가 바로 '불경건한 자들의 사는 모습'과 같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혹은 이 '모양'이라는 단어를 직접 '불법' 혹은 '죄악'으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은, 그 에바 한가운데 앉아 있는 여인을 가리켜 "이는 악이라"고 그 천사가 해석을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처럼 '죄악'을 어떤 여자로, 특별히 '음녀'라는 단어로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여자가 남자보다 죄가 더 많다는 뜻에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비유하는 이유는, 죄가 사람을 유혹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마치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는 경우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죄란 것은 본능적으로 마음이 절로 끌려가고 또한 좀처럼 헤어나기 힘들 정도로 달콤한 꿀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죄란 것은 어느 누구라도 '참 짓고 싶은' 것이며, 한번 빠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함정'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처럼 죄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면 그 다음은 끝장일 뿐입니다.
8절 하반절에 보면 "그 여인을 에바 속에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구리 위에 던져 덮더라"고 했습니다.
즉 그 여인이 에바에서 나오려고 기를 쓰고 있을 때 그 입구를 눌러 덮고 무거운 납 뚜껑을 얹어서 완전히 가두어 버리는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여인은 그 에바 속에 갇혀서 하나님의 심판의 날만 기다리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에바는 "학의 날개 같은 날개"를 가진 두 여인에 의하여 "천지 사이에" 즉 하늘 위로 들려서 "시날 땅"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 '시날 땅'이란 바로 바벨론 제국의 주요 도시들이 세워져 있던, 즉 온갖 종류의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악명 높던 지역이었습니다.
그 에바 속의 여인은 바로 그 시날 땅으로 옮겨져서 거기서 그녀를 위하여 지어지게 될 "집이 준공되면 그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집"과 "처소"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준비하시는 처소'와는 대조되는 것으로서 바로 '악인을 징벌하기 위한 처소'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 '악의 상징인 여인'이 있어야 할 곳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신앙 공동체 안이 아니라 바로 우상숭배하는 불신자들의 공동체 안이며, 그런 악한 불신자들의 종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저주의 집'인 지옥에 감금되어 영원히 "머물게" 되는 것밖에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조심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몸은 바벨론에서 해방을 받고 돌아왔지만, 영적으로는 여전히 바벨론의 악한 잔재에 물들어 있을 위험이 다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어떤 악의 요소라도 이 새 예루살렘 안에서는 깨끗이 구별해 내고 하나도 남김없이 그 악의 고향인 '시날 땅'으로 쫓아내 버리는 것이 실로 중요했던 것입니다.
아마 귀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부분은 바벨론 제국을 생각할 때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지른 악한 일에 대한 분노심만 가득했을 것이며 따라서 바벨론 제국이 그들에게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언제 갚아 주실까 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은, 바벨론 제국이 당연히 받게 될 벌이 언제 내려지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바벨론 제국의 죄악의 잔재를 조금이라도 본받거나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바 속에 악의 상징인 한 여인을 가두어서 바벨론의 시날 땅으로 쫓아내 버리는 환상을 통하여, 바로 이 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일본을 생각할 때에도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는 것을 두고 분노하며, 정신대의 피해자였던 할머니들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치를 떨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일본을 볼 때 아직도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죄 그것만 보고 있지만, 그 죄에 대한 징벌은 그저 하나님의 공의에 맡겨 두기만 하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나라가 그 일본이 남겨 준 나쁜 잔재를 빨리 버려야 한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폭음을 하고 술주정을 하는 이 대표적인 악습이라든지, 중고등학교 안에서부터 시작하여 군대에 이르기까지 무슨 조직만 되면 그 안에서 후배를 구타하면서 기합을 주는 못된 전통 등, 우리는 아직까지도 일본에게서 배웠던 이런 '악습의 광주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일본은 세계에서 미신이 가장 많은 나라로 악명 높습니다.
그 중에 하나인 신사참배로써 우리 조국의 기독교를 그토록 무자비하게 박해했던 일이 바로 엊그제인데,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죄악까지도 모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소위 '단군 숭배'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따져 보아도 아무 변변한 철학도 윤리도 사상도 없으며 정말 허황된 전설 하나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서 온 국민들의 정신을 하나로 묶는 지주로 삼겠다고 하고 있으니, 시급히 '시날 땅'으로 내쫓아야 할 '죄악의 광주리'를 오히려 수입하려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망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모두들께서는 새를 잡을 때 쓰는 아주 간단한 올무를 잘 아실 것입니다.
'바구니' 한 개를 기다란 '줄'이 달린 짧은 '막대기'에 걸쳐서 한 쪽을 세워서 엎어 놓고서 그 밑에다 모이를 뿌려 놓으면 됩니다.
그리고 새가 와서 그 바구니 밑에 있는 미끼를 먹을 때 막대기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기면 간단하게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빠지는 것도 똑같습니다.
일단 유혹의 미끼에 대하여 마음이 끌리고 거기에 탐닉하게 되면 바로 '에바의 광주리'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며,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그러하니라"는 말씀대로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 대부분의 불신자들의 '인생 모양'인 것입니다.
'매주일 교회에 나가는데 가끔 가다가 한 주일 쯤 빠지는 것 정도야 어떨라고.'라고 하면서 주일을 빼먹고 산으로, 바다로 놀러가고 싶은 마음, 그것이 바로 자신을 유혹하는 마귀의 미끼인 줄을 정말 모르겠습니까?
'요즘 경기가 너무 나빠서 밥 먹기도 힘든데.'라고 하면서 아주 당연한 듯이 십일조를 내지 않고 그러면서도 주일헌금은 내고 있다고 자기 스스로 합리화시키는 생각, 그것이 바로 제 발로 '에바의 광주리' 안에 들어가려 하는 천하의 바보짓인 줄을 정말 모르겠습니까?
'일단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그때부터 열심히 교회생활하자.'라고 하면서 고3이 되면 아예 교회와는 잠시 담을 쌓고 공부만 하겠다는 계획, 자신의 전 인생이 죄악의 도성 '시날 땅'으로 아예 완전히 이주해 버리게 될 것이 뻔히 보이는 무서운 함정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고 그러는 것입니까?
이런 것들을 끝까지 모르겠다는 사람, 바구니 밑에 있는 미끼를 먹겠다고 그 안에 들어가는 어리석은 새들과 아무 다를 것이 없는 인생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성경은 우리에게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라고 엄히 경고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죄악은 그 모양이라도 즉시 버리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악의 광주리' 속에 갇히게 되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심판의 날까지 가두어 놓으시는 '납 뚜껑'이 덮이게 되면 다시는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 '세상과 짝하려는 유혹'을 제거하고 '불신자와 자리를 같이 하게 되는 함정'을 철저히 피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도로에 경고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그 경고 내용을 가능하면 많은 운전자들이 어기고 그래서 많은 벌금을 부과하고 많은 위반자를 감옥에 집어넣고자 하는 것이 그 원래의 목적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가능하면 그 표지판의 경고를 잘 지켜서 어찌하든지 안전하고 쾌적한 여행길이 되게 하고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 역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어기고 지옥의 형벌을 받도록 만들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 말씀의 경고는 우리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라는 장애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고를 예의주시하고 순종하여 참으로 평안하고 복된 금세와 내세를 달려가도록 인도하시기 위하여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크고 높이 걸린 플래카드'처럼 누구나 다 보기 쉬운 것이며 '간단명료한 교통표지판'처럼 누구나 다 지키기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성경의 '두루마리'만 보고 따라가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 복스러운 목적지에 안전히 도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도로의 표지판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결국 법에 의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벌금형 정도로 끝날 수도 있지만 음주운전으로 수차례에 걸쳐서 적발되거나 사람을 치어 죽이게 되면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벌을 받아도 아무 변명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는 사전에 이미 충분한 경고가 주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이것을 발하심" 즉 '명백한 저주를 미리 선포하심'으로써 그 법을 어기는 자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게 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손에 들고 언제든지 읽을 수 있는 성경, 여러분이 매주일 듣고 있는 강단의 말씀, 여러분이 주말마다 구역예배를 통하여 나누고 있는 성경공부, 기독교인이 아니라 해도 텔레비전만 틀어도 들을 수 있는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들, 정말 이 시대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큰 글자로 기록된 '두루마리'가 온 천지에 '날아다니는' 때가 언제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명백한 '두루마리의 경고'를 보고도 지키지 않는 자는 '에바의 심판'을 결코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시편 기자가 고백하며 찬양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우리 인생길을 이처럼 밝고도 분명하게 비춰 주시는 '두루마리'의 지시와 '에바'의 경고를 따라서, 좌로나 우로나 조금도 치우치지 않고 아무 사고나 파선을 당하지 않는 가운데 끝까지 신앙의 대로를 안전하게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말씀을 바라봅니다
슥 5:1-4
서 론
세상 속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너무다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갱신 운동들이 일어나고 곳곳에 많은 몸부림이 있습니다. 스가랴서도 회복과 부흥의 약속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는 약속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부흥하기 위해,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잘 분석해야 우리는 바른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능력없는 삶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를 말씀에 대한 경외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성도들처럼 열심있고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많은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정말 말씀에 대한경외심이 상실한 것이 맞을까요? 좋은 설교자들 찾아다니고 방송도 많이 듣고 훈련도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요즘은 이것도 예전보다는 열정이 떨어지긴 했습니다. 정말 문제는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는 훈련이 부족한 것입니다. 말씀처럼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제가 우리 아내가 어떤 말을 할 때 모르는 척 피할 때가 있습니다. 뱃살이 나오니까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내 입맛에 맞는 좋은 말씀만 골라먹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은 모르는 체하면서 어느새 영적인 비만에 걸려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은 들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하나님은 경고의 말씀으로 다가오고 계십니다. 스가랴서의 처음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8가지 환상으로 시작합니다. 8가지 환상 중 앞의 5가지 환상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중심으로 한 회복의 약속과 격려의 메시지입니다. 남은 3가지 환상은 심판의 경고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각 개인으로부터, 이스라엘, 온 세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가랴가 본 것은 날아가는 두루마리 였습니다.
()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
“내가 다시” 라는 말은 원어상 가던 방향을 돌이켜 반대 방향으로 가는 행위가 담겨져 있습니다. 1절을 직역하면 “그리고 나는 돌이켜서 나의 눈을 들었고 나는 보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위치에서 주어지는 환상을 보고 주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루마리는 구약 시대에 성경을 기록한 양피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펼쳐져서 날아가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자들에게 말씀대로 심판하실 것을 경고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 재건과 회복의 비전을 주시지만 죄를 방관하시면서 약속을 이루어 가시지 않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는다. 스가랴서에서는 회복의 비전을 주시는 것은 결국 거룩의 회복,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겠다는 것도 거룩함의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성취하시지만 그 약속은 순종하는 백성을 통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의 비전을 받고 출애굽한 백성이 믿음이 없어 불평과 불순종할 때 그 1세대가 모두 죽고 2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택한 제사장 나라 이스라엘이 계속되는 범죄가운데 있을 때 이방 민족에게 쫓기며 유리하는 포로가 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순종의 준비가 될 때까지 빚어지는 과정이 분명히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말씀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죄를 향한 심판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용서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하는 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능력이 있는 지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1. 말씀은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2)
()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십 규빗이니이다”
두루마리가 날아간다는 것은 살아 역사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속히 이루어 질 것임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운 능력은 무엇보다 우리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능력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 보기 어려운 것은 말씀대로 살지 않아 말씀의 능력을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능력있다는 경외감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들고 다니는 것이 무거운 것이 더 크게 느껴지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겠다는 사모함은 크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이 말씀하실 수 있도록 말씀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하나님의 일들을 발견할 수 있고 그 일에 동참하는 특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를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해 질 수 있습니다.
2. 말씀은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3)
스가랴가 환상으로 본 이 두루마리의 크기는 길이가 20규빗, 너비가 10규빗입니다. 1규빗은 팔꿈치 크기로 약 45cm입니다. 즉 이 두루마리는 길이가 약 9미터, 너비가 미터 정도의 엄천난 크기입니다. 9m 되는 긴 두루마리는 흔했지만, 폭은 보통 30cm 정도인데 스가랴가 본 것은 4.5미터로 매우 드물며 비례가 맞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 성전의 낭실의 크기와 일치합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이 크기가 두루마리로는 어색한 이 크기이기에 그들은 바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낭실은 제사장이 율법책을 낭독하던 곳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먼저 말씀을 맡은 교회와 성도에게 주어질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점검하고 바로 잡아야 합니다. 율법은 축복의 말도 있지만 저주의 말도 있었습니다. 오늘 환상으로 본 두루마리에는 저주의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사랑과 위로의 말씀뿐만 아니라 우리를 바로잡아주는 하나님의 쓴 소리도 들을 수 있어 합니다.
()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하나님의 말씀이 놀라운 것은 말씀대로 살기위해 정직하게 자신을 대면할 때 나의 숨은 모든 문제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날아다니는 두루마리에 적힌 심판의 메시지는 3절에 나옵니다.
()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
여기에 ‘저주’라는 말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백성이면 누구나알아야 하는 ‘그 저주’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고 우리도 알고 있는데도 살아가지 않고 있는 삶에 대해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십계명의 제 8계명에 해당되는 것이고, 헛된 맹세는 십계명의 제 3계명인 “네 하나님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두계명이 특별해서 언급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두 돌판이라면 각각 그 가운데 기록된 것으로 모든 율법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띈 것입니다.
포로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재건을 하다가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서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생존에 치우치며 살게 되면서 이러한 도둑질과 거짓 맹세 같은 율법과 멀어지는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사명을 떠나서 생존에 치우치게 되면 우리의 도덕성은 무감각해지게 되어 버립니다.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고 자신을 돌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려다가 엄청난 징계를 받은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어 우리의 죄를 깨달아 돌이키도록 사역하십니다.
()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님은 우리의 죄를 폭로함으로 심판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 이유는 죄 없으신 예수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분의 의로 나아오게 돕기 위해서 입니다. 교회가 죄에 대한 깨어짐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에 깨어진 세상을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게 안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말씀앞에 자신을 비추며 성령님께서 깨우치시는 죄에 민감해야 합니다. 교회의 교회다움, 성도의 성도다움이 회복되기 위해선 말씀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는 늘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가 죄에 대한 깨어짐이 있어야 세상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게 될 수 있습니다.
3. 말씀은 온전히 이루어집니다(4)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는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끊어지리라’는 단어의 원어는 '나카'인데 ‘깨끗이 쓸어버리다’, ‘흔적도 남김없이 없어질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4절에서 하나님은 친히 각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머물며 말씀으로 심판의 역사를 온전히 이루어 가실 것을 말합니다
.()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머무르며'의 원어는 ‘투숙하다. 밤을 새우다.’로 목적을 이룰 때까지 체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습니다.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는 것은 건축 재료까지 모조리 불태워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서 썩어질 것들을 모두 끄집어 내어 태워버리실 것입니다. 오직 말씀만이 영원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하나님의 심판은 기준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약속과 심판의 약속을 같이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구원을 온전히 이루듯이 심판도 온전히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통스러운 죄의 심판의 과정을 주신 이유는 다시 '제사장 나라'로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죄를 끄집어 내는 고통스러운 이유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우리를 말씀이 심판하시는 것은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 가게 이끄실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바라볼 때 이 놀라운 성화의 사역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결 론
오늘날 교회가 영향력이 없는 것은 능력있는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말씀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적용시키는 성령님을 무시하며 말씀에 대한 경외감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시 말씀을 바라볼 때 이 말씀이 나와 우리 교회의 능력이 될 줄 믿습니다. 말씀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말씀은 나의 숨은 문제와 죄를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이 말씀앞에 정직하게 대면하며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을 때 우리는 점점 더 온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 이상 경건의 모양만 가진 자들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가지게 되어 세상 속에 영향력있는 성도, 교회가 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