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13일 오후 8시 30분, 미 육군 제4 보병 사단(4th Infantry Division) 소속의 제1 여단 전투팀과 121 특수임무대(Task Force 121)로 이루어진 병력들이 이라크의 티크리트(Tikrit) 남쪽 15㎞ 쯤 떨어진 아드와르(ad-Dawr) 마을의 한 농가를 포위했다.
병사들은 안으로 진입하여 농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벽돌과 쓰레기로 교묘히 위장된 곳을 삽으로 파내려가자 2m 깊이의 작은구덩이가 발견됐다. 한명이 가까스로 누을수 있는 이 공간에 3명의 사나이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미군은 그들중 지저분한 머리에 수염이 희끗희끗한 한 장년 남자를 주목하였다.
2006년 12월 30일 새벽 바그다드의 크로퍼 교도소...
모직 스카프와 모자에 검은 코트를 입은 한 사나이가 검은 두건을 쓴 3명의 남자들에게 붙잡힌채 천천히 걸었다. 이들은 곧 어두침침하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한 건물로 들어섰다. 사형집행장이었다.
집행관은 사형수에게 머리에 쓸 두건을 건넸지만, 사나이는 그것을 거부했다. 집행관은 조여드는 올가미에 목이 잘릴 수 있다며 두건을 목에 감게 했다. 사형수는 교수대 위에 올라가고 노란색 밧줄로 만들어진 올가미가 그의 목에 걸렸다. 곧 사형을 당할 운명의 사나이는 평온해 보였다.
집행인이 말을 걸었다.
"후회나 두려움은 없는가?”
“없다. 나는 한평생 지하드를 위해 싸워 온 군인이다. 이 길을 걷는 자는 그 누구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사나이는 손에 꼭 쥐고 있던 코란을 반다르에게 전해달라며 입회인에게 건넸다. 반다르는 그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은 이복 동생의 아들이었다.
사형수는 자신의 앞에 다가온 성직자를 따라 짧은 기도를 하고, “나 없는 이라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읊조렸다.
다음 순간 그의 다리를 지탱하던 발판이 꺼졌다.
사담 후세인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어린 시절 -
사담 후세인 아부드 알 마지드 알-티크리트(Saddam Hussein Abd al-Majid al-Tikriti)는 1937년 4월 28일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1백마일 떨어진 티크리트 외곽의 한 시골마을의 후세인 알 마지드 알 티크리트와 수브하 탈파 알 무살라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티크리트와 그 주변 지역의 주민들은 수니 이슬람의 소수 부족인 알부 나세르(Albu Nasser)족에 속한다. 그들은 교활하고 까다로운 사람들로서 오랜 가난으로 거짓말과 도둑질, 폭력을 일삼았다. 사담의 아버지인 후세인 알 마지드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언제 죽어서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았다. 사담이 태어나기 얼마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고, 강도를 당했다는 설도 있다.
알 마지드와 알 무살라트 부부는 4촌간이었다. 너무나 가난하여 지참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종종 사촌간에 혼인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남편이 사라지자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사담의 어머니는 하지즈 하산 이브라힘(Hajj hassan Ibrahim)과 재혼했는데, 그들 역시 사촌간이었다.
사담의 새로운 아버지인 하산 이브라힘은 게으른 자로서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가족은 가난한 부족 내에서도 더욱 비참한 삶을 살아갔다. 어린 사담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집밖을 떠도는 아이가 되었다.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닭이나 달걀을 훔쳤고, 모술에서 바그다드로 가는 기차가 잠시 정차한 사이에 수박을 팔기도 했다. 또한 쇠파이프로 개를 때려죽였다거나 불량 소년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산은 여섯살의 어린 사담을 농장으로 보내 일하도록 했다. 사담은 신발조차 없어서 맨발로 들판을 헤매고 다녀야했다. 그는 늘 자신의 모습을 창피하게 생각했고 학교를 다니는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사담의 영웅은 외삼촌인 카이르알라 탈파였다. 그는 이라크 육군 소위 출신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서양옷을 입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신사였다. 그는 후일 후세인의 장인이자 조언자가 되었고, 이라크 군대의 명예 장군과 바그다드 시장이 되기도 했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친영 정권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라크에 잠시 친독정권이 수립된 적이 있었다. 카이르알라는 이때 반란에 참가했기 때문에 면직되어 5년간이나 투옥되었다. 카이르알라는 어린 사담의 정신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947년의 후세인
사담은 1947년 외삼촌과 함께 살기 위해서 집을 떠났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1950년대 초반 카이르알라는 바그다드로 이사하였고, 후세인도 그를 따랐다. 그들은 하층민 중에서 중간 정도의 계층이 모여사는 알 크하르크에서 살았다. 후세인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 돈을 벌기 위해 막노동을 했다.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사담은 학교에 다닐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또한 사담에게는 장래 자신의 아내가 될 카이르알라의 어리고 아리따운 딸이 있었다.
- 이라크와 아랍의 정치 상황 -
이 시기 이라크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1947년 12월 이라크 역사상 첫번째로 시아파 수상이 된 살레 자베르 정부는 종주국이던 영국과 포츠머스 협정 체결을 진행하였다. 이 협정은 영국인들의 우월적인 권리를 그대로 인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사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자 자베르가 사임하고 협정이 무효화될때까지 수주간의 봉기가 일어났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48년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통치를 끝내자마자 유대인들은 이 땅에 이스라엘을 건국하였고 원주민인 팔레스타인인들은 쫓겨났다. 이에 아랍인들은 분노로 끓어올랐고, 아랍국가들은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라크도 이 전쟁에 참가했는데 결과는 아랍의 참패였다. 이라크인들은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을 내주기 위해 정부가 영국과 공모했다고 비난했다.
Gamal Abdel Nasser
1952년 이집트에서는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는 전아랍이 단결하여 이스라엘과 맞서야한다고 주장한 열혈 아랍 민족주의자였다.
친영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이라크는 나세르에 대항하여 1955년 터키와 이란 그리고 파키스탄을 포함하는 반 공산주의 동맹 - 바그다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이라크 국민들의 격렬한 항의를 촉발하였고, 청년 사담 후세인도 시위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1956년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하였다. 이라크 정부는 침략자들을 암암리에 지원하여 다시 국민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거리에서는 엄청난 시위가 일어났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시기부터 사담 후세인은 1940년경 시리아에서 창립된 바트당 소속 학생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바트당은 아랍 통일이라는 강령을 내세우며 여러 국가에 지부를 두고 있었다. 당원은 보통 대학생이나 지식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후세인은 1959년까지 바트당원이 될 수 없었다. 당원이 될 수 있는 자격조건이 매우 엄격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나세르는 수에즈 분쟁을 이겨내어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아랍 세계의 영웅이 되었다. 이라크를 포함한 아랍인들은 거리에 몰려나와 나세르에의 충성을 다짐하였다. 나세르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여 통일아랍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라크 정부는 요르단과 아랍연맹을 구성하여 이에 대응하였다. 통일아랍공화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모든 아랍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반면 아랍연맹은 서방의 지원을 받았다.
Abdel karim kassem
1958년 7월 14일 바그다드에서 압델 카림 카셈(Abdel karim kassem)준장과 압델 살림 아레프(Abdel Salam Aref)대령이 이끄는 '자유 장교 위원회'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라디오에서 영국이 만들어놓은 군주제가 종식되었다는 방송이 나오자 백만명의 군중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약탈과 학살로 이 소식을 축하했다. 왕의 섭정이던 압둘 일라흐는 반군에게 살해되어 왕족들의 시체더미 속에 던져졌다. 군중들은 그의 시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국방부 건물 앞에 구경거리로 전시하였다. 누리 사이드 수상도 이틀뒤 군중에게 붙잡혀서 살해되었다. 바그다드 호텔도 습격당하여 아랍연맹 결성과 관련된 작업을 위해 머물던 요르단 장관이 살해되었다.
이 쿠데타는 주변 아랍국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바그다드 조약으로 이라크와 동맹 관계를 유지해왔던 이란과 터키는 자신들의 정권이 위태로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라크와 아랍연맹을 결성했던 요르단도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사람들은 곧 정권이 나세르주의자들에게 넘어가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서방은 나세르주의의 확산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미 해병대는 친서방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레바논에 상륙했고, 영국 해병대는 요르단에 상륙하여 후세인 국왕의 정권을 지켜주었다.
그러나 쿠데타의 주동자인 카셈 준장은 결코 나세르의 통일아랍공화국에 가담할 생각이 없었다. 카셈은 국민들의 예상과는 달리 친서방주의자였으며 결코 영국과 미국에 맞설 생각이 없었다. 1958년 7월 16일, 나세르는 모스크바에서 흐루시초프와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바그다드에 들르려 하였다. 그러나 카셈은 나세르의 착륙을 거부하였다.
쿠데타의 또다른 주동자인 아레프 대령은 아랍 통일의 열렬한 신봉자였으며 이라크가 당장 통일아랍공화국에 가입하기를 원했다. 카셈과 아레프의 견해 차이는 내전의 위기로 이어졌다. 두 사람 사이의 경쟁은 결국 어리석고 서투른 아레프의 패배로 끝났다. 후세인을 포함한 이라크 국민들의 기쁨이 일시에 분노로 다시 바뀌게 되었다.
1958년 10월부터 바트당은 카셈이 반대파를 저지하기 위해 만든 '인민 저항'과 맞서기 위해 후세인과 같은 불량배들을 모집하였다. 인민 저항은 "우리에게 카셈 이외의 지도자는 없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으며 바트당은 "무궁한 뜻을 지닌 하나의 아랍", "통일과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후세인을 비롯한 바트당의 행동조직은 인민저항 조직원들을 습격하거나 학생들의 봉기를 선동했다.
1958년 11월, 후세인은 한 티크리트인을 살해한 혐의로 6개월동안 투옥되었다.
1959년 3월 6일 카셈의 지원에 힘입은 공산주의 조직 '평화 파르티잔'이 모술에서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의 거친 행동에 분개한 지역 군사령관인 압델 와하브 알 샤와프 대령은 집회 지도자이던 변호사 카밀 알 카잔지를 처단하였다. 이 경솔한 조치로 이라크의 온갖 종족과 분파가 참여한 심각한 충돌이 벌어졌다.
모술 반란이라 이름붙여진 이 사건은 결국 카셈과 공산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고, 친나세르 측 장교들과 상당수의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사망했으며 많은 수의 자유 장교들이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과정에서 규모는 작지만 튼튼한 조직을 갖춘 바트당이 떠오르게 되었다. 아랍 통일을 주장하던 친나세르 세력 중 반란에서 큰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바트당 뿐이었던 것이다.
- 카셈 암살 음모 -
1959년 4월, 바트당은 카셈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고 행동대원 후세인도 여기에 참가하게 되었다. 카셈은 매일 오후 별다른 경호 없이 바그다드 중심가인 아르라쉬드 거리를 지나갔다. 7명으로 구성된 암살조에 포함된 후세인의 역할은 카셈을 암살한 동료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엄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카셈이 몇분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암살자들은 매우 긴장했고, 차가 나타나자마자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카셈은 팔과 어깨에 부상을 입었고 운전기사는 사망했다. 작전은 완전한 실패였다. 엉성한 계획으로 암살대원끼리 서로 총을 쏘아댔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명이 사망했고 후세인도 다리에 총을 맞았다. 암살자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보안대의 추격을 받는 가운데, 후세인은 티크리트를 거쳐 시리아로 도주하였다. 국경 마을인 아부 카밀에서 미리 탈출해있던 바트당원들이 후세인을 따뜻하게 맞았다.
이때 후세인은 20세의 애송이에 불과했다. 부상에서 회복하는 동안 후세인은 이라크 망명자들과 시리아 바트 당원들의 모임에 참석했지만 특별히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후세인은 여기서 바트당의 공동설립자인 마첼 아플라크(Michel Aflaq)를 만날 수 있었다. 아플라크는 과묵한 후세인을 좋아했고 그를 정식 당원으로 승진시켜 주었다.
시리아의 바트당은 500명에 달하는 이라크 출신 젊은이들을 모두 이집트의 카이로로 보내 교육시키기로 결정했다. 후세인도 카이로로 떠났다.
1960년의 후세인
- 망명 생활 -
카이로의 후세인은 도키 지역의 카스르알 닐 고등학교에 다녔다. 1959년부터 1961년 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본국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마음을 빼앗긴 채, 통일아랍공화국 정부에서 지급해주는 지원금에 의존해 살아야했다. 이 시기 후세인은 독서에 열중하였다. 특히 그는 스탈린에 대한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법률 공부를 하기 위해서 카이로 대학에 등록하였지만, 학업보다는 정치에 관심이 앞서 결국 중퇴하고 말았다.
카이로에서 망명중이던 청년 후세인은 너무 외로웠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살던 건물의 경비원과 친하게 지냈다. 친절한 경비원은 후세인의 기억에 영원히 남았다. 사담은 1991년 걸프전이 벌어질 때까지 이 경비원에게 정기적으로 선물을 보내주었다.
카이로 시절의 사담 후세인 - 오른쪽에서 두번째
한편 1959년 7월, 이라크에서는 키르쿠크에서 발생한 또다른 반란에 동조한 장교들을 대상으로 공개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재판정에 선 장교들은 매우 당당하였다. 그들은 카셈이 혁명 정신과 아랍의 통일을 배반했다고 비난하며 의연하게 총살당했다. 바트 당원들 또한 카셈이 아랍 민족주의를 멀리하고 공산주의자들과 동조하였기 때문에 죽여야만 한다고 진술했다.
아랍 통일이라는 이념을 위해 기꺼이 죽겠다는 이들의 태도가 사람들의 정신을 고양시켰다. 재판을 받은 바트당원과 다른 아랍 민족주의자, 자유 장교들의 수는 57명이었으며 이중 17명이 처형되었다. 카이로의 후세인도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1960년까지 이라크는 불안정한 가운데 체제를 유지해나갔다. 영국은 원래부터 이집트의 나세르를 반대하였다. 소련은 중동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였고, 나세르보다는 카셈이 다루기 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나 공산주의를 첫번째 위협으로 생각했던 미국은 이라크의 카셈 정권을 새로운 볼셰비키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나세르와 미국간의 미묘한 동맹관계가 형성되었다. 바트 당원들은 나세르를 추종했다. 그러나 이런 지정학에 변화의 지진을 몰고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1961년 7월, 카셈은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쿠웨이트의 보호자인 영국과 이라크의 불화로 이어졌다. 카셈은 또한 영국의 주도하에 조성된 석유 채굴 컨소시엄(IPC)이 이라크 땅에서 석유를 채굴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라크가 영국에 맞서자 아랍국들도 분열되어 쿠웨이트의 독립을 지지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후세인은 이것을 이라크에 대한 배반 행위로 받아들였다.
1962년초, 여전히 망명중이던 후세인은 동료들을 초대하여 사촌 사지다와 약혼식을 치뤘다. 이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약혼을 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후세인은 사지다에게 편지를 보내 이 사실을 통보했다. 약혼식이 끝나자 후세인은 바트당 활동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바트당의 학생 활동가들은 후세인을 지부의 중앙위원으로 선출했다.
1963년의 사담 후세인
- 권력 장악 -
1963년 2월 8일, 이라크에서는 아마드 하산 알 바크르 장군과 카이르알라, 그밖의 바트당원들에 의해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카셈 정권이 카셈 정권이 전복되었다. 카셈은 "이라크 민중들이여, 영원하라!"라는 말을 남기고 명예로운 최후를 맞이했다.
이집트의 후세인은 약 2주간 쿠데타의 진행 상황을 지켜본후 다마스커스를 통해 바그다드로 돌아왔다. 쿠데타의 주동자이던 바크르 장군은 압델 살림 아레프(Abdel Salam Aref)를 대통령으로 추대했으며 자신은 수상의 자리에 앉았다.
후세인은 대통령의 정무와 관련된 모호한 직책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바트당의 하급 멤버들을 조직하고 당원의 숫자를 늘리는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이 시기 후세인은 카스르 알 니하야 궁전에서 개인적으로 죄수들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 그는 또한 특수조사국이라 불린 특별 보안기구의 창설을 주도했는데, 이 조직은 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결정하는 곳이었다.
"사람이 있는 곳에 문제가 있고,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라는 스탈린의 명언을 후세인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고한다.
그러나 쿠데타가 일어난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바트당원들 사이에 이념 투쟁이 시작되었다. 바크르가 이끄는 우익과 사디가 이끄는 좌익들이 사사건건 충돌하였다. 1963년 11월, 바트당 지도부가 회합중일 때 후세인과 그의 수행원들이 총을 휘두르며 회의장에 난입하였다. 후세인의 협박으로 사디는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타야했다.
바트당이 내분으로 지리멸렬한 사이 꼭두각시 대통령 아레프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바크르는 잠시 부통령에 임명되었다가 해임되어 가택연금을 당했다. 후세인에게도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사담은 다시 지하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연금중인 바크르와 카이르알라와 접촉했으며, 군부 조직과 접선하는등의 일로 여념이 없었다.
행동파 후세인은 역쿠데타를 모의하였다. 그는 대통령의 경호대장인 마지드 중위와 공모하여 각료회의때 국회로 잠입하여 거사를 치르기로 했으나, 최종 순간에 마지드가 전출가는 바람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얼마후 후세인은 시장에서 구입한 폭탄으로 대통령궁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또한 사전에 발각되어 보안군에 체포되었다. 사담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몰려온 보안군들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친구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기관총이라니! 이 나라는 정부도 없나?"
사담은 이번의 투옥중에 바트당의 중량급 인사로 떠올랐고 1967년에 탈옥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1년 후, 나예프 대령을 중심으로한 일부 장교들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바트당의 군부 담당자이자 쿠데타 주동자중 한명이던 하단 알 티크리트 장군이 아레프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했다. 아레프는 곧 이 제의를 수락하고 런던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아흐메드 하산 알-바크르가 이라크의 새 대통령이 되었으며 나예프가 수상으로 등극하였다. 후세인은 바트당의 사무부총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료 임명에서는 제외되었다. 후세인이 제외된 것은 그가 아직 젊은 것과, 바트당원이 아닌 쿠데타 참여자들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후세인은 정부의 직책없는 실권자였다. 새 정부는 역대 정권 내내 존속되어온 일반 보안국을 확대하여 일반 사무국이라는 이름으로 개편하였다. 누구도 보안 업무를 담당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조직은 후세인에게 떨어졌다.
후세인은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 사무실을 마련해 두고 항상 바크르와 접촉했다. 사담은 쿠데타가 일어난지 불과 14일만에에 벌써 수상과 국방장관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바크르와 수상이 오찬을 하는 중에 후세인이 총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바트당이 피로 이룩한 혁명을 방해했다며 수상을 차에 태워 비행장으로 데려갔다. 사담은 나예프를 모로코로 쫓아내버렸다.
몇시간 후, 바크르 대통령은 국민들을 향해 혁명이 완수되었다고 선언하고 나예프가 외세와 결탁하여 국익을 저버렸다고 비난했다. 연설후 바크르는 스스로 수상과 군 최고사령관 직책을 겸임했다.
후세인은 이제 정부의 2인자가 되었다. 보안기관의 책임자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농업부의 책임자 역할도 맡고 있었다. 그는 곧 정부 산하 교육기관과 선전기관도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1969년 1월에 후세인은 혁명지휘위원회(RCC)부의장을 맡았으며, 몇달후에는 부통령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 시기 후세인은 하루에 14~16시간씩 일했다.
1970년의 사담 후세인
- 통치 -
후세인은 자신의 우상인 스탈린의 선례를 따랐다. 1968년 11월, 16명의 유대인을 포함한 바스라 출신인 30여명이 이스라엘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다음해 1월, 기소된 30명중 14명이 사형을 언도받았다.
1969년 2월에는 이라크 공산당의 지도자중 한명인 아지즈 알 하즈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심한 고문을 당한 그는 공산당의 음모를 인정하였고 연루된 20여명이 사형을 당했다.
그외에도 후세인의 반대파나 정적들은 가차없이 숙청을 당했다.
후세인은 또한 이라크의 역대 통치자들 중 서민들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는 지도자였다.
티크리트 지역의 주요 가문이었던 오베이드 부족의 쉐이크 흐마예스 형제가 후세인의 형제중 한명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쉐이크 가문은 살인자가 후세인의 혈육이기 때문에 체포되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들은 형제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후세인을 살해하기로 결심하였다.
후세인은 이 소식을 듣고 성급한 행동을 자제하며, 자칫 부족간의 유혈로 이어질뻔한 이 위기에 현명하게 대처했다. 바크르의 중재로 후세인은 자신의 가족이 살인에 연루되지 않았음을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결국 오해는 풀릴 수 있었다.
후세인과 바크르
이 시기 후세인은 대단히 겸손하며 현명한 처신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상관인 바트당의 창립자 아플라크와 대통령 바크르를 극진히 깍듯하게 모셨다. 후세인은 두사람을 만날 때마다 늘 상의 단추를 꼭꼭 채웠으며, 사진을 찍을때도 항상 그들보다 반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심지어 그는 그들이 대화를 끝내거나 의견을 물을 때까지 절대로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바크르의 집무실에는 항상 미리 방문을 알린 후에 들어갔다. 후세인의 이런 예의바름은 아랍의 전통과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1971년에는 나임 타위나라고 하는 한 유대인이 스파이 혐의로 투옥되었다. 그는 자신이 처형당할 것으로 확신했으나 천만다행으로 무사히 풀려났다. 타위나가 심문을 받고 있을때 후세인이 감옥을 방문하였다. 후세인은 그에게 손을 대지 말도록 명령했고 그는 무사히 석방될 수 있었다.
타위나는 후일 어느 잡지에 실린 후세인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고난 후에야 자신이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바그다드의 거리에서 담배를 팔던 한 소년을 기억해냈던 것이다. 그는 담배를 살 때마다 그 소년에게 항상 팁을 얹어 주었다. 그 행동이 바로 자신의 생명을 살렸던 것이다.
사담의 통치기간중 가장 큰 위업은 석유를 국유화한 조치이다. 누구도 쉽게 생각할 수 없었던 이 조치로 엄청난 부가 이라크 정부에 쏟아졌다.
1975년 OPEC 정상회담에 참여한 후세인 - 가운데는 알제리 대통령 Houri Boumedienne, 좌측은 이란 국왕 Shah Mohammed Reza Pahlevi
이를 발판으로 사담은 경제 개발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그는 먼저 군수산업을 일으켜 이라크군을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로 육성하려 하였다.
70년대 후반까지 후세인은 이라크의 모든 문제에 관여하였다. 그는 방풍창이나 샌들을 만드는 공장을 비롯하여 가급적 많은 물품을 국내에서 생산하고 싶어했다.
뇌물을 받고 부패한 자들은 공개 처형되었다.
사담은 병원시설을 개선시키고, 여성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허용했으며, 국가적인 문맹퇴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후세인은 이라크에 학교를 짓는것이 그치지 않고 모든 문맹이 퇴치되기를 바랐다.
사담은 1977년에 깨달음의 날을 선포하여 15세부터 45세까지의 남녀는 모두 의무적으로 읽고 쓰는 법을 배우도록 했다. 18개월동안 계속된 이 사업에 62,000명의 관료와 교사들이 투입되었다. 아랍의 다른 나라에서도 많은 교육 전문가들이 초빙되었다. 후세인의 이 노력은 유네스코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전세계적인 문맹 퇴치 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크로페스카(Kropeska)상을 받았다.
유네스코는 이라크의 문맹 퇴치 운동을 지구상의 다른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유사 사업의 모델로 삼기도 했다. 이 거창한 계획은 1982년 200만명의 이라크인이 프로그램의 모든 과정을 통과한 것으로 종료되었다.
후세인의 통치 기간 학교에 입학한 여성의 숫자가 기존에 비해 3배로 늘어났다. 여성 교사의 숫자는 전체의 46%에 달했으며, 의사는 29%, 치과의사는 46%가 여성이었다.
사담은 이라크의 사회간접시설 확충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외딴 지역에 전기와 깨끗한 식수를 공급하고 새로운 도로를 만들어 나갔다. 비료와 철강, 화학단지와 석유 운송 파이프라인이 각지에 구축되었다. 그는 곳곳에 시장을 만들어 기초 생활용품의 질을 높였고, 4천개의 마을에 전력을 공급했다. 전국 각지에 냉장고와 텔레비전이 무상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1979년의 후세인 - 오른쪽은 리비아의 지도자 Moamar Khadafi
후세인은 전세계 국가들과 실용주의에 입각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에 의해 양분된 지배가 제3세력의 출현으로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랍이 전세계에서 하나의 축을 이뤄야 하며, 그것은 철저하게 자주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후세인은 1973년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대통령을 살해했던 외부세력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 바크르 제거 -
후세인의 초기 통치기인 1968년부터 1978년까지 이라크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였다. 당시 이라크는 주변 아랍국들 뿐만 아니라 소련과 서방 세계에서까지 높은 평가를 받는 복지국가였다. 그러나 후세인은 대단히 엄격한 독재자였다.
한편 후세인에게 모든 권력을 넘겨주었던 허수아비 대통령 바크르는 차츰 부통령의 질주를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1978년 9월 17일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맺어 이스라엘과 화해했다. 이 기회를 맞아 바크르는 이라크와 시리아의 바트당을 통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0월 26일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이 바그다드를 방문했고 바크르, 후세인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Ahmed Hassan al-Bakr
바크르는 자신의 영도하에 아사드를 2인자로 하는 새로운 단일국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아사드는 이라크의 실권을 장악한 후세인이 결코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바크르의 제안을 따르면 오히려 후세인에게 제거당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우려하였다.
결국 아사드는 바크르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후세인의 입지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이라크인들과 RCC는 후세인을 희생해서라도 시리아와 통합해야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의 후세인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왔다. 이란에서 혁명이 발생하여 호메이니가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호메이니는 이라크 정권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리아에는 호의적이었다.
후세인은 이런 상황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였다. 그는 보안기관과 인민군, 정규군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통해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거나 의심스러운 모든 자들을 제거했다. 수천명의 공무원과 당원들이 해고되었다.
후세인은 시리아의 아사드에게 즉각적인 통일이 아니면 모든 협상을 중지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아사드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후세인은 즉각 통일 문제를 다루던 여러 위원회에서 이라크 관계자들을 철수시켰다. 이제 후세인이 바크르를 제거할 때가 왔다.
일단 사담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대통령궁을 포위했다. 그리고 요르단을 방문하며 바크르 제거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요르단의 후세인왕은 사담의 제안에 동의했고, 스스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후세인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주었다. 사담은 또한 요르단의 암만에서 CIA요원들과도접촉했다.
항상 아랍국가들간의 통합에 반대하는 입장이던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후세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1979년 피곤한 모습의 바크르가 이라크 텔레비전에 등장하여 은퇴 의사를 발표했다.
- 대통령 취임 -
사담 후세인은 1979년 7월 28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취임 전후 그는 스탈린식의 대숙청을 벌였다.
자신을 타도하기 위한 시리아의 음모를 적발했다고 발표한 사담은, 음모 가담자들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바트당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어졌다. RCC 멤버중 1/3이 총살되었다. 당, 보안기관, 정규군, 인민군, 노동조합, 학생조합, 직능별 단체 등등.. 모든 조직을 대상으로 의심의 여지가 있는 모든 자들이 숙청되었다.
이날 행사는 모두 녹화되었으며 66명이 체포되어 그중 22명은 즉시 처형되었다.
Ruhollah Musavi Khomeini
대통령이 된 후세인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이란과의 관계였다. 호메이니는 이라크의 시아파들에게 바트당 정권을 전복하라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내의 시아파 지도자인 알 사드르는 "이란의 국왕을 포함한 모든 폭군들은 최후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라고 이에 응답했다.
후세인은 시아파들에게 텔레비전과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을 보급함으로서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려했다. 또한 알 사드르에게는 국가보다 종교를 우선하는 처사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며 되도록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려고 했다. 나자프를 비롯한 이라크의 여러 도시에서 시아파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호메이니와 사드르여 영원하라. 신앙이 넘칠 것이다."
후세인에게는 연일 시아파들의 폭동과 심지어 이들이 이란의 지원으로 소화기를 이용한 훈련까지 받는 중이라는 보고가 이어졌다. 결국 그는 칼을 빼들었다.
91명의 성직자를 비롯하여 수백명이 체포되고, 94명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사담도 알 사드르에게는 손댈수가 없었다.
1980년 4월 1일, 사드르의 행동대원들이 부수상인 타레크 아지즈를 암살하려했다. 아지즈가 무스틴시리야 대학에서 열린 전국학생연합에 참석할 때 폭탄이 터졌고 부수상은 경상을 입었지만, 다른 사상자 숫자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4월 5일, 이 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장례식장에서 또다른 폭탄이 터졌다.
격노한 후세인은 다시 수백명의 알사드르 추종자들을 처형했다. 또한 그가 파견한 특공대가 나자프에서 알 사드르와 그의 여동생 아미나를 체포했다.
4월 9일, 두사람은 처형되었다.
- 이란 이라크 전쟁 -
아랍국가 중 시아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는 이란과 이라크 두나라 뿐이다. 그러나 이라크의 권력은 역사이래 항상 수니파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후세인의 이라크와 호메이니의 이란 사이에는 항상 위기가 감돌았으며, 결국 사담은 이란을 침공하여 호된 교훈을 안겨주기로 결심하였다. 이 결정이 후세인의 몰락으로 가는 첫번째 길이 되었다.
양국이 전쟁으로 돌입하게된 직접적 원인은 샤트 알 아랍 해역과 걸프만에 위치한 두개의 섬을 둘러싼 영유권 분쟁이었다. 전쟁에 돌입하기 11일전 이라크의 외무장관 아지즈는 "우리는 이란을 파괴하거나 점령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9월 23일 이라크의 기갑부대는 이란 영토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UN 안보리는 즉각 양측에게 군사 행동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이란은 안보리의 결정을 거절했으며, 이라크는 안보리의 요청을 수락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라크는 자국민과 아랍국들, 외부 세계에 각각 다른 말을 하면서 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군사행동은 계속되었다. 2,000대가 넘는 이라크 기갑부대는 이란 남서부로 줄기차게 진격해 들어갔다. 이라크와 이란 모두 양국의 석유 생산 시설을 목표로 공습을 가했다.
후세인은 곤란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이 전쟁이 국제사회의 중재를 통해 며칠안에 종결되리라예상했다. 그러나 사담은 호메이니를 잘 몰랐다. 이란은 어떠한 중재 노력에도 응하지 않았다. 호메이니에게 이 전쟁의 승패는 알라에게 달린 문제일 뿐이었다.
사담은 라디오를 통해 전의를 돋우는 연설을 하고, 전선을 예고없이 방문하고는 했다. 대통령궁 지하의 벙커에는 지휘소가 차려졌으며, 소대 단위의 움직임까지 후세인에 의해 결정이 내려졌다.
1981년의 후세인
일찌기 미국이 훈련시킨 이란의 공군은 막강했다. F-4와 F-5 전투기는 이라크의 미그기보다 우수했다. 이라크 공군은 숫적으로 우세했지만 고가의 항공기 손실을 염려한 후세인의 축차 투입으로 번번히 전투에 실패했다.
지상전에서는 이라크의 기갑 부대들이 막강한 위력을 뽐내고 있었다. 호메이니는 이에 대항해 이라크보다 3배나 많은 인구를 이용하였다. 젊은 이슬람교도들로 구성된 혁명군이 열성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였고, 이라크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10월초에 이란 제2의 도시인 아바단이 이라크군에 포위되었다. 그러나 이란군은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 후세인은 인구 100만명의 도시로 돌격해갈 것인지, 포위상태를 유지할지를 결정해야했다. 스탈린에 대해 공부했던 후세인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처한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일단의 병력이 포위를 유지하고 나머지는 계속 공격에 나섰다.
사담이 이란과의 전쟁에 여념이 없던 1981년 6월 7일, 이스라엘의 전투기 편대가 사우디아라비아 상공을 통해 오시리크의 이라크 원자로를 파괴했다. 후세인은 분노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이라크의 경제 상황도 악화되었다. 석유 매출은 1980년 260억 파운드에서 이듬해 106억 파운드로 급감했다. 반대로 수입은 216억 파운드로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이란군이 강력한 반격을 해왔다. 1981년 3월이 되자 이라크군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후세인은 이란의 도시들에 미사일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1982년 3월 후세인은 각료회의 도중 보건장관 리야드 이브라힘을 옆방으로 불러내어 직접 총살하였다. 이브라힘은 영국의 업자들과 결탁하여 유효기간이 지난 페니실린을 수입했고, 수십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도처에 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후세인은 수백명의 사람들을 투옥하고 살해했다.
그러나 후세인의 부인 사지다는 1981년초, 런던으로 건너가 에르메스 매장에서 수백만 달러어치의 호화 쇼핑을 했다. 3월에는 이라크 정부 소유의 보잉747을 타고 뉴욕으로 건너갔다. 여기서도 그녀는 블루밍데이즈 백화점에서 수백만달러 어치의 쇼핑을 했다. 장인 카이르알라도 많은 회사를 설립하여 부패를 일삼고 있었다. 후세인의 아들인 우다이도 이렇게 부패하고 사치스러운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1982년 5월, 이란은 막대한 병력을 동원하여 대반격을 벌였고, 1만이 넘는 이라크 병력들이 포로가 되었다. 후세인은 책임을 물어 살레 카디 장군과 자와드 아사드 준장을 처형하였다.
1983년이 시작되자 이란은 공세를 더욱 가열차게 진행하였다. 후세인은 이에 심리전으로 맞섰다. 그는 방송을 통해 이란내의 반호메이니 세력에 호소하였고, 8대의 항공기가 이라크로 넘어오는 전과를 거두었다.
전쟁은 지지부진한 소모전으로 이어졌으며, 이라크의 국력을 계속 좀먹어갔다.
사담 후세인을 보호하고 그의 권력을 유지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비밀경찰이 이라크를 이끌고 있었다.
1990년대 내내 사담후세인과 UN은 이라크의 화학, 생물학, 핵 프로그램에 대한 제재 조치로 신경전을 거듭했다. 유엔 이라크 특별위원회(UNSCOM)의 고위급 인사였던 찰스 듀엘퍼에 따르면, 1993년부터 유엔특위가 임무를 끝냈던 2000년까지 이라크는 사찰단을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고 국가 기밀과 관련된 건물에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등 도움을 주기보다는 방해를 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사담 후세인은 90년대를 국제사회의 제재 가운데서도 근근히 버텨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뒤바꾼 사건이 지구 반대편 미국의 뉴욕에서 벌어졌다.
George Walker Bush
조지 W. 부시는 엘 고어와의 치열한 선거와 법정 다툼 끝에 백악관에 입성했다. 그러나 임기를 시작한 지 8개월 22일 만에 그는 완전히 돌변했다. 뉴욕의 세계 무역센터 빌딩에 9.11 테러 공격이 감행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힘센 사나이가 격노했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테러 혐의자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넘기지 않는다면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직접 빠르고 확실한 처벌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자유와 불안이 서로 다투고 있다고 말하며, 문명을 위한 싸움을 선포했다.
탈레반이 통첩에 응하지 않자 즉각 전쟁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막강한 화력앞에 원시적인 아프가니스탄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다음 타겟은 이라크였다. 2002년 1월 부시는 연두교서에서 북한과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그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여 미국을 보호하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2003년 3월 20일 오전 5시 30분, 전쟁을 개시하였다. 작전명은 이라크의 자유(Freedom of Iraq)였다.
미국의 공격은 가차없었다. 3월 22일, 이라크 남동부의 바스라가 점령당했고 4월 10일에 바그다드가 완전히 함락되었다. 4월 14일에는 사담 후세인의 고향이자 바트당의 마지막 보루인 티크리트까지 점령당하여 26일 만에 전쟁은 끝이 났다.
미군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하던 독재자는 결국 2003년 12월 13일 티크리트에서 사로잡혔다.
- 후세인에 대한 평가 -
이라크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위치한 비옥한 땅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고대 문명이 싹텄으며 옛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수메르, 아카드,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후리아, 카시트, 엘람, 앗시리아, 페르시아, 오스만 등등 여러 왕국들이 태어났고 멸망했다. BC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은 바빌론을 점령하였다. 5세기에는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이 다시 이 땅을 정복했다. 이들은 바그다드에 아바시드 왕조를 수립했다. 이 왕국은 92명의 칼리프 중 80명 이상이 권력 계승 와중에 살해당했다.
13세기에는 몽골이 다시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이들은 아바시드 시절의 문화유산 대부분을 파괴했다. 17세기에는 오스만 투르크가 페르시아와 이 지역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영국이 이 땅을 다시 차지했다.
지배 세력이 바뀔 때마다 벌어진 살육은 이라크의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AD694년 나자프에 입성한 정복자 알 하자즈 빈 유수프 알 타카피는 이라크인들을 위선적인 분파주의자라고 비난하며 "베어버리기에 알맞은 머리들이 눈앞에 보이는데 내가 바로 그 일을 할 적임자다!"라고 선언했다.
1258년 칭기스칸의 손자인 훌라구는 바그다드를 포위하고 도시를 초토화시킨 후 티그리스강의 둑을 무너뜨려 주민들을 수장시켰다.
훌라구 칸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역사상 첫번째 독재자는 아니다. 그는 분열과 폭력의 아레나와 같은 이라크에서 나름대로 뿔뿔이 흩어진 국민들을 하나로 통일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초심을 잃어버리고 가족들의 부패를 묵인하였으며 이웃 국가와 전쟁을 일삼아 자신과 국가를 몰락의 길로 내몰았다.
사담 후세인의 우상인 스탈린은 잔혹한 통치로 지탄받지만 또한 소련을 세계 초강대국으로 일으켜세우는 위업을 남겼다. 그러나 스탈린의 제자인 후세인은 전쟁과 폭력으로 폐허가된 조국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역사는 그를 실패한 인물로 냉혹하게 기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