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uture Walker - 퓨처워커
--------------------------------------------------------------------------------
1999/06/02(00:23) from 210.97.162.155
작성자 : 이영도 (jin46@hitel.net) 조회수 : 2744 , 줄수 : 330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1
번 호 : 21359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6-01 19:39
제 목 : [F/W]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1
Future Walker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1.
"저는 죽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돌아가겠다고 말할 줄 알았다."
도르네이는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죽을 겁니다."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밭에 주저앉아 있던 도르네이는 빙
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역시 눈밭 위에 앉거나 드러누워있던 다른
일행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도르네이는 일행을 가로막고 있는 크레바스
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길게 갈라진 틈바구니는 시야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를 관통하
고 있었다. 그들이 과연 땅 위에 서있는지 바다 위에 서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크레바스의 바닥이 바다일지 육지일지는 역시 짐작할 수 없
었다. 하지만 도르네이는 태연히 걸어가 크레바스의 끄트머리에 섰다.
아래를 잠깐 내려다보았지만 이미 지독한 설맹에 걸린 도르네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별로 없었다. 도르네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신스라이프의 굳은 얼굴이 있었
다. 설맹에 걸린 그의 시야에서도 신스라이프의 얼굴은 잘 보였다. 당
연하지. 도르네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뜻하신 바를 이루기 바랍니다."
신스라이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르네이는 몸을 돌려 크레바스 속으
로 뛰어들었다. 그의 모습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 아무도 크레
바스로 다가가지 않았고, 그래서 그의 마지막을 본 사람도 없었다.
신스라이프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외쳤다.
"난 더이상 이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우울한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수
염과 눈썹에 붙은 흰 눈덩이가 그들의 표정을 상당히 제약하고 있었지
만 신스라이프는 그들의 표정 속에서 더이상 좌절할 수도 없는 자의
평온함을 보았다. 그의 격렬한 고함소리도 그들에게서 어떤 극적인 반
응은 이끌어내지 못했고 그 무관심함은 신스라이프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너희들 마음대로 해!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던지, 아니면 도르네이를
따라 저 속으로 뛰어들던지. 뛰어드는 녀석은 죽을 수 있을 거라고 보
장한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놈에게는, 그래. 나는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맹세하겠다. 하지만 그건 너희들 마음대로 정해. 내 앞에서는
더이상 자살하거나 하지는 마!"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콜리의 프리스트들에게는 시선도 보내지 않은
채 크레바스의 반대쪽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프리스트들은 우울
한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충분한
거리가 되자 신스라이프는 멈춰섰다.
"나는 가겠다."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몸을 돌려 크레바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크레바스의 끄트머리에 닿기 직전 신스라이프는 땅을 강하게 찼다. 하
얀 눈보라가 폭발하듯 솟구치는 가운데 신스라이프의 몸이 위로 날아
올랐다.
크레바스 상공을 그렇게 날아간 신스라이프는 크레바스의 건너편에
부드럽게 내려섰다. 신스라이프는 잠시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등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후 쥬블킨의 다
급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봐! 이보게들!"
신스라이프는 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애썼다. 쥬블
킨도 곧 고함지르는 일을 그만뒀다. 등 뒤로부터 눈더미가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가 둔하게 들려왔다. 한번인가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왔
다. 신스라이프는 모진 결심을 한 끝에 간신히 발을 뗄 수 있었다.
등뒤로부터는 더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신스라이프
는 고개를 돌려 누가 남아있는지 확인하기를 거부했다. 일행을 막은
크레바스는 이제 그들과 신스라이프를 가로막고 있었고 앞으로의 길은
그 혼자 걸어가야 할 것이다.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그의 말은 진심
이었다. 하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 신스라이프는 누구를 만나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신스라이프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은청색 하늘과 하얀 눈. 신스라
이프는 갑자기 진저리를 쳤다. 홀로 걸어가야 할 그 거리가 무시무시
한 압박감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아냐. 신스라이프는 부정했다. 혼자
가 아니지.
파는 갑자기 말했다.
"그들은 알아버린 것이죠."
신스라이프는 앞으로 걸어가려 애쓰며 말했다.
"뭘…… 말이냐."
"그들이 자신의 시간을 다른 이에게 위탁하고 있었음을."
단 한번도 사람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았던, 아니 다른 어떤 동물의
발자국도 찍힌 적이 없던 설원 위에 다시 발걸음을 내디디며 신스라이
프는 파의 말을 생각해보았다.
"도르네이는 돌아가겠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죽겠다고 말했죠. 그 차
이는 뭐죠."
"말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닥치고 있어."
"도르네이는 돌아가지 않았어요. 다시 그의 삶을 살겠다고 하지 않았
어요. 당신을 위해 살았던 삶이 아닌 그만의 꿈, 그만의 행복을 추구
하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그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이 뭐죠."
"닥쳐."
"그의 죽음이죠."
신스라이프는 이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 역시 침묵을 지켰다.
절대로 밤이 찾아오지 않는, 하지만 환한 낮도 찾아오지 않는 불투명
한 하늘과 눈부신 설원 사이를 걸으며 신스라이프는 머릿속으로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저건 뭐지?"
아일페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크게 떴다. 그리고는 당황하
며 다시 가늘게 떴다. 무시무시한 백색광이 동공을 찌르듯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후작아, 저거 뭐인 거 같아요?"
할슈타일 후작은 깊숙이 내려쓰고 있던 후드를 걷어올리며 아일페사
스가 가리키는 것을 찾았다. 넓디넓은 설원 위에 하나밖에 없는 검은
점이었기에 놓칠 리는 없었지만, 후작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
었다. 하지만 짐작할 수는 있었다.
"사람이겠지요."
"사아아람?"
"우리가 쫓는…… 그 외에 다른 무엇이 이곳에 있겠소."
아일페사스는 눈을 깜빡이다가 앞으로 달려갔다. 눈 위를 달리는 아
일페사스의 모습은 마치 단단한 땅을 달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후작
과 미는 그렇게 뛸 수 없었기에 아일페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천
천히 뒤따라갔다. 어차피 뛰려고 해도 뛸 힘조차 없기는 했지만.
아일페사스는 마지막 몇 발자국을 달리는 대신 왼발을 앞으로 내밀며
주욱 미끄러졌다. 눈을 멋지게 튀어올린 아일페사스는 거대한 크레바
스 옆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사내의 옆에 멈춰섰다.
하지만 사내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있었다. 아일페사스는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썹과 수염, 머리카락 등에 매달린 얼
음덩이는 사내의 얼굴을 거의 다 가리고 있었다. 털옷 위에 떨어진 눈
들도 딱딱하게 얼어서 사내의 모습은 조각처럼 보였다. 얼어죽은 건
가? 아일페사스는 사내의 눈을 보았다. 그 눈은 크게 벌어진 채 크레
바스 너머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꺼풀은 움직이지 않았
다. 속눈썹에까지 자잘한 얼음들이 매달려있었다.
아일페사스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죽었니? 대답하지 않으면 살아있는 걸로 간주하겠다. 음하하."
자신의 농담에 스스로 질려버린 아일페사스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미
와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직 충분히 멀리 있었고 아일페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호아……"
"만약 대답한다면 논리가 엉망이 될 것 같군, 그래."
와당탕 하는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눈이기 때문이다. 그래
서 아일페사스는 그런대로 고요하게 엉덩방아를 찧고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사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대, 대, 대답했어! 죽었나봐."
"……그만하지. 넌 이사의 처녀인가."
"아닌데. 넌 누구세요?"
우드득! 얼굴과 목 주변에 붙어있던 얇은 얼음조각이 깨지고 얼어붙
어있던 옷들이 바스락거리며 아우성을 질렀다. 그리고 사내는 조그만
얼음조각을 무수히 떨어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이렇게나 거창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입을 벌
렸다. 고개를 돌린 사내는 먼저 눈 주위에 매달린 얼음들을 문질러 떼
내었다. 그리고는 바라보고 있던 아일페사스가 정서불안에 걸릴 정도
로 눈을 격심하게 깜빡거리고난 후에야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잘 안보이는군. 설맹인가."
"전 설맹이 아니라 펫시야."
"내가 설맹에 걸린 것 같다는 말이야. 너무 오랫동안 흰 지평선을 바
라보았기 때문에. 펫시라. 이 땅에 사람이 살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
넌 사람이 아니겠군. 어떤 신인가? 글쎄. 그런 농담을 하는 것을 보니
신인 거 같기도 하군."
"전 신이 아닌데. 그건 그렇고 넌 누구세요?"
"난 발레드 신스라이프라고 하는 사람이지. 아니, 사람이었지."
아일페사스는 이마에 세로주름을 만들어보이며 말했다.
"사람이었다는 말은 지금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겠네? 그럼 뭔데
요?"
"모르겠어…… 아직 그에 해당하는 말이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말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를 상상할 수 있겠나."
"음. 있어. 손톱에서 살과 붙어 있는 빨간 부분과 살과 떨어져 있는
하얀 부분 사이의 경계선 같은 거. 그건 가리키는 단어가 없으니까 이
렇게 길게 말해야 되죠. 이런 거 말이야?"
"쉬운 예를 잘 찾아내는군. 현명한 아이로구나."
"그건 옳은 말이야. 그런데 네가 그런 것이라고요?"
"그런 거 같아. 나를 설명할 하나의 단어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 많은 사람들의 문제거리이긴 하지. 하지만 내 경우는 그게 더 극
적이군."
"어떻게 극적인데, 발?"
발? 발레드는 피식 웃고 싶었지만 그 동작에 필요한 근육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만큼 얼굴이 굳어있었다. 그래서 발레드는 조용히 말했
다.
"이 앞의 크레바스가 보이나. 내겐 이제 잘 보이지 않지만."
"응. 보여요. 저 길게 갈라진 것이 크레바스라면."
이 아이는 도대체 뭘까. 왜 이런 장소에 있을 수 있는 거지. 발레드
는 생각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을 느꼈다. 또한, 이 아이의 정
체를 내게 해명해야 할 필요는 뭔가. 아직까지도 추위를 느낀다는 것
이 신기한 몸을 한 채 뭘 더 따질 것인가. 발레드는 무의식처럼 말했
다.
"그곳에 수십 명의 프리스트들이 뛰어들었단다."
"왜요?"
"왜라고 물었니? 나는 바로 그걸 확신할 수가 없단다."
"확신할 수 없다면 추측할 수는 있는 거겠네?"
"그래."
"말해봐요."
"그들은 한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시간을 위탁했었단다."
"자신의 생애나 자신의 충성이라고 말해야 할 거 같은데. 그러면,
짠! 기사도가 되잖아."
"아니, 시간이야. 생애라고 말했을 땐 살아가는 모습이지. 충성이라
고 말했을 땐 살아가는 의미이고. 하지만 그들은 시간을 바쳤단다."
"설명, 설명, 설명해라. 시간, 시간, 시간이 뭔데?"
"세상에 대한 자기만의 기만이지."
아일페사스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지만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제리도
그렇고 나이드도 그랬어. 기다리면 알아서 말할 거야. 사람은 그렇더
라고. 과연 발레드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일페사스가 기
대하던 말은 아니었다.
"왜 조용한 거니? 보이지 않는데 말도 없으니 불안하구나."
아일페사스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기다리면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그러잖아."
"그래? 그걸 알고 있는 걸 보니 너도 내 말을 이해하고 있구나."
"속이 안좋아요?"
"뭐?"
"아무리 그래도 말을 해요! 말처럼 들리는 트림은 그만하고! 브레스
를 확 뿜어버릴까 보다."
내 말에 대해 이토록이나 통렬한 비평을 받아본 건 평생 처음인걸.
발레드는 기어코 웃고 말았다. 그 얼굴을 보던 아일페사스가 겁에 질
려 '아니에요, 아니에요. 브레스 뿜는다는 거 농담이야. 히이잉!' 하
고 울먹거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기로 한다면, 어쨌든 웃을
수는 있었다.
"시간은 순서란다."
"좋아요."
"순서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거란다."
"키스할 때 누가 누구의 입술에 먼저 닿았는가 하는 순서가 없는 것
처럼?"
발레드는 다시 아일페사스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즉, 웃었다.
"그렇구나…… 그래. 거기엔 순서가 없단다. 순간만 있지."
"그런데?"
"잠깐 이야기를 접어두고 한 삶을 보자. 어떤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어서, 안락하게 산다면 그 사람은 노후에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내 시간에 후회는 없었다. 혹은 나는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열심히 살았다. 이런 말들은 자서전 같은 걸 뒤져보면 얼마든지 발견
할 수 있단다. 네가 그런 걸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베고 자기는 했어. 아일페사스는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순결의 방에
있는 책더미를 떠올리고는 작게 진저리쳤다.
"그리고 그 말을 드는 사람들은 그가 지나온 시간을 계획적으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가 과연 시간을 순서대로 살아
온 것일까, 펫시?"
아일페사스는 발레드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펫
시라고 불러주었다. 그리고 아일페사스는 그 쉰 목소리로 불리워질 때
자신의 이름이 근사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일페사스는 부
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이니, 발?"
"그는 열심히 일할 땐 안락하게 사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안락하게 살게 되었을 땐 고생스러웠던 지난 날을 생각
하고 있겠지. 그 사람은 사실 거꾸로 살아온 거야."
"거꾸로?"
================================================================
흐음. 절 무섭게 보시는 분이 좀 계신 것 같군요. 저도 알고 보면 부
드러운 남자 어쩌고 하면서 여러분들을 계명구도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타자는 그 정도로 터프한 작자는 아니랍니
다. (그렇게 무섭게 말하지 마세요… 라는 메일 좀 그만 받았으면. 흑
흑.)
--------------------------------------------------------------------------------
(c) Nobreak Technologies, Inc.
Future Walker - 퓨처워커
--------------------------------------------------------------------------------
1999/06/02(00:25) from 210.97.162.155
작성자 : 이영도 (jin46@hitel.net) 조회수 : 2528 , 줄수 : 335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2
번 호 : 21360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6-01 19:40
제 목 : [F/W]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2
Future Walker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2.
"그래. 열심히 일할 땐 안락해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상상을
즐기지. 이건 신용대출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안락하게 되었을
땐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면서도 과거를 생각하지. 이건 빚갚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 즐거움은 미리 배당받았기에 더 이상 받을 수 없고, 과
거에 빚갚음하며 살다가 죽는 거야."
"아아, 그렇네요. 맞아요. 그렇구나. 응응. 저 아는 척하고 있어. 똑
똑해보이죠? 비참해라……"
"순서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보자꾸나. 인과라는 말을 쓰고 싶은 유혹
을 느끼지만…… 좋아. 인과라고 해두자.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겠
지. 여기엔 순서가 있다. 결과가 먼저 발생하진 않아. 원인이 먼저 발
생하지. 그렇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일어날 테니. 아까 말했던 한
사람의 삶의 모습 같은 것도 이와 같지. 열심히 일한 것이 원인이고
안락한 노후생활이 그 결과일 거야. 알겠니?"
"좋네요. 이해해."
"하지만 사람의 마음 속의 흐름을 보면 그 순서가 이상하게 바뀌어있
는 것을 알 수 있단다. 그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행위를 하
고 있을 때 그는 그 결과를 즐기고 있단다. 근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예상되는 결과가 시원찮군. 관두는 것이 낫
겠어. 잘 보렴. 이 때 그 사람은 행위에는 관심이 없어. 결과에만 관
심이 있을 뿐이야. 아직은 존재하지도 않는 그 결과를 사람은 앞당겨
서 즐길 수가 있어."
"아아."
"그리고 결과가 일어났을 때를 보자꾸나. 그는 이제 행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야. 그것이 뉘우침이든 즐거운
회상이든 상관없어. 그는 결과가 아닌 행위를 생각하고 있지. '젠장,
그 때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되는데.' 혹은 '만약 그 때 이러했다면.'
'그렇게 했기에 가능했지.' 등의 말들이 그것인데, 이런 말 속에 담
겨있는 감정은 좀 다를지 몰라도 행위를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는 차이
점이 없단다. 이젠 존재하지 않는 그 때의 그 행위를 즐기고 있는 거
지."
"아아. 그렇네."
"순서가 바뀌어있다는 것을 알겠니?"
"으으응. 하지만 행동하면서 동시에 즐거워하는 경우도 있잖아. 춤을
춘다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도 그렇고,"
"키스도 그렇고?"
"까르르륵!"
"그래. 하지만 그건 시간이 아니지."
"응?"
"그럴 때 쓰는 말 하나를 들어볼까? '시간가는 줄 모르고' 라는 말이
있겠구나."
"음음. 좋아요. 실제의 시간과 사람 마음 속의 시간이 서로 다르다고
쳐. 그런데?"
"사람은 언제나 시간과 떨어져 있다는 거지. 시간과 함께 있지 않아.
주어진 시간을 열심히 산다는 말은 사실 불가능하지. 그는 언제나 시
간과 별개의 존재였으니까. 그것이 인간에게 자존심을 주지. 부모와
떨어져있는 꼬마가 느끼는 자존심과 비슷한."
"별개의 존재라고?"
"그래야만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그래야만 만든다고?"
"그래. 서로 별개여야 하지. 한 여자가 이 세상의 어떤 남자와 결혼
하든, 설령 그녀의 아버지와 결혼한다고 해도 그녀 자신을 낳을 수는
없는 것처럼. 사람은 시간과 별개여야 한단다. 그래야만 시간을 만들
어낼 수 있으니까."
"흐응. 괴팍한 논리다. 용서해줄게요. 그런데 왜 프리스트들은 구덩
이 속으로 들어간 거야?"
"신스라이프라는 사람이 있었단다."
"흐음. 그런데?"
"그는 시간과 하나가 되어버리려고 결심했단다. 영원히 살기로 한 거
지."
"그가 마지막 순간에 한 행동이 뭐였지?"
딤라이트는 무스타파를 흘끔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지팡이를 버렸지."
"그래."
"그게 대답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무스타파."
"잊지 말게. 난 자네에게 그걸 선물했네."
딤라이트는 저 먼 성벽 아래에 서있는 키티 데시의 가슴에 안겨있는
거대한 백파이프를 바라보았다. 키티는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열심히 연주해보려고 애쓰면서 켄턴의 시민들을 웃기고 있었다. 삐이
엑, 뿌에엑.
무스타파는 단조롭게 말했다.
"그건 일종의 테스트였지. 나는 솔로쳐의 말을 시험해보았네. 과연
그리움으로 과거를 불러낼 수 있는 것인지. 가능했네. 난 자네에게 그
걸 주었지. 생성에 성공한 만큼, 이제 소멸도 가능할 거라고 봐. 그
소멸의 열쇠가 무엇인지를 찾아낸다면 말이지. 내 안타까움의 닻이 무
엇일지…… 그런데 말일세. 아무래도 우린 하나였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 같더군."
딤라이트는 다시 무스타파를 바라보았지만 무스타파는 저 멀리 지평
선을 뒤덮고 있는 검은 안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솔로쳐는 차라리 쉬웠을 거야. 지팡이를 버린다는 것은 퍽이나 상징
적인 행동이지. 어쨌든 그는 솔로쳐라는 한 명의 마법사만을 정리하면
그만이었고, 그래서 그는 우리보다 먼저 떠났지. 하지만 우리는 서로
에게 묶여있다네, 딤라이트. 천공의 기사들. 자네가 죽는다면 나와 그
레이가 자네를 부를걸세. 내가 죽는다면 자네와 그레이가 그럴 테고,
그리고 그레이는……"
무스타파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말했다.
"그가 죽는다면 우리 손에 의해서일 테고, 그리고 우리에 의해 되살
아나게 될 테지. 짝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기막힌 노릇이지 않은가.
우리는 하나일세. 우리는 서로의 그리움이고 서로의 안타까움일세. 서
로의 열쇠란 말일세.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납득할 수는 있는 말인데,
우리들은 이루지 못한 약속이나 패배한 전투 때문에 되살아난 것은 아
닐 걸세. 기사로서 낙제감이군. 우리는 서로를 부활시킨 것일 거야.
그런 우리들이 다시 사라져가기 위해선 이 땅과 이 시간 위에서도 우
리는 다시 하나여야 하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적이 되어 갈라졌네."
딤라이트는 고개를 숙였다. 무스타파는 흉벽 위로 눈물을 떨구며 말
했다.
"우리는 끝장일세. 딤라이트. 아니, 말이 잘못되었군. 우리는 결코
끝장날 수 없게 되었네."
"여기서는 그렇겠지요."
딤라이트와 무스타파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적어도 켄턴
에서는 그들만큼이나 이질적인 사람이 서있었다. 무스타파는 눈을 훔
치며 딱딱하게 말했다.
"무슨 말인가, 에카드나."
천공의 기사들인 그들이었지만 에카드나의 모습 앞에선 위축되는 감
정을 느껴야 했다. 투쟁의 증거인 이빨로서 비롯되고 투쟁으로서 태어
나는 용아병은 켄턴의 성벽 위에 가져다 놓은 석상 같은 모습으로 그
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에카드나를 향해 딤라이트는 재촉하듯이 말했다.
"여기서는 그렇다는 말은……"
"이 땅은 천공의 기사들이 죽을 수 있는 장소는 아닌 것 같다는 말입
니다."
"뭐라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과 말을 꺼내는 입술 이외에 에카드나의 모습
에선 미동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글쎄요. 제 생각으로 천공의 기사들이 쓰러져가야 할 장소는 이 땅
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천공의 기사들이 마지막으로 서있어야 하는
장소는……"
뿌와아악!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딤라이트는 기겁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성벽 아래에서는 키티가 가슴에 맨 백파이프가 출렁거릴 정도
로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소리 났어! 소리 났어! 들었지요? 내가 소리를 냈어요!"
딤라이트는 그만 미소짓고 말았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무스타
파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무스타파는 에카드나에게 배운 듯한 무표정
한 얼굴로 그를 마주볼 뿐이었다. 딤라이트는 겸연쩍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다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에카드나. 하지만 가능할까."
에카드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무스타파가 먼저 말했다.
"뭐라고? 딤라이트. 무슨 말인지 알겠다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자네가?"
"이봐, 딤라이트.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네만……"
"그가 원하는 것이 이 성 안에 있습니다."
"그런가. 그것 말이군. 하지만 데스나이트는 어쩌지?"
"그라니? 자네들 도대체 무슨 말을 나누는 건가……"
"제가 담당해야하겠지요. 그것을 목적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솔로쳐는 역시 대마법사였군. 그는 떠났지만 자네를 남겨둔 것이었
군. 계획을 말해보게."
"딤라이트!"
무스타파는 벌컥 고함을 질렀다. 대화를 나누던 딤라이트와 에카드나
는 입을 다물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무스타파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는 건가! 뭐야? 천공의 기사가 마지막
으로 서있어야 되는 곳이라니! 일스를 말하는 건가?"
딤라이트는 다시 웃음을 띄었고 에카드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
었다. 하지만 무스타파는 에카드나의 얼굴에서 더 화가 나는 것을 느
꼈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무스타파를 향해 딤라이트는 조용히 말했
다.
"일스라고. 아닐세. 조금 전 자네가 말했듯이 우리는 기사로서는 낙
제감이지. 우리는 우리의 충성이 가리키는 그 땅에서 부활하진 않았
네. 일스가 아냐."
"뭐? 그럼 켄턴인가? 하지만 조금 전 이곳이 아니라고…… 설마 콜로
넬 계곡인가?"
딤라이트는 다시 웃었고 에카드나는 진저리쳐지도록 무표정한 얼굴이
었고 무스타파는 이제 에카드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무스타파의 옆얼굴을 향해 말해야 했다.
"하늘일세."
킨 크라이는 사납게 날뛰었다. 쇠사슬이 춤을 추며 요란한 소리를 울
려퍼지게 했고 매섭게 부딪히는 부리가 끔직한 음향을 만들어내었다.
그 머리와 목, 어깨에 돋아있는 깃털들이 모두 뻣뻣하게 곤두서서 킨
크라이의 모습을 두 배 쯤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켄턴의 억센 병사들
은 완전무장을 하고 킨 크라이에게 도전했지만 킨 크라이는 맹수와 맹
금이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횡포를 그들에게 저질러놓았다. 머
리를 쪼이고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병사는 주위의 동료들이 재빨리 끌
어낸 덕분에 간신히 복부가 난자당하는 꼴은 면하게 되었다. 병사는
박살난 자신의 투구를 아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것을 옆으로 집어
던졌다.
네 다리에 묶인 쇠사슬에 세 명씩의 병사가 매달린 모습으로 킨 크라
이는 넓은 마당으로 끌려나왔다. 킨 크라이는 그야말로 입체적으로 날
뛰었다. 전후좌우에 덧붙여 킨 크라이는 하늘로 날아오르려 들었던 것
이다. 하지만 도합 12명의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매달려서는 그 비행
을 저지했다.
딤라이트는 슬픈 눈으로 킨 크라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
다. 에카드나는 묵묵히 킨 크라이를 바라보다가 앞으로 걸어갔다. 킨
크라이는 부리를 딱딱 부딪히며 사납게 으르렁거렸고 쇠사슬에 매달린
병사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킨 크라이는 충분한 거리에 들어오면 언
제든지 앞으로 달려나가겠다는 태도를 확고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누
구의 눈에도 그의 신념은 확고해보였지만, 그러나 에카드나만은 아무
런 표정없이 킨 크라이를 향해 걸어갔다.
에카드나는 멈춰섰다.
"일자이신 왕으로부터 너에게 말한다."
"크아각!"
킨 크라이는 대답 대신 사나운 포효소리를 선사했다. 얼굴이 헬쓱해
진 다이앤은 구경하고 있던 키티를 끌어안았지만 키티는 버둥거리며
얼굴을 내밀었다. 에카드나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단숨에 짜내듯
이 말했다.
"내게 복종하라!"
킨 크라이의 태도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딤라이트는 킨 크라이가 기겁하며 솟아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세
는 그러했지만, 대신 킨 크라이는 몸을 아래로 낮추었다. 목과 어깨의
깃털들이 도로 드러누우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킨 크라이는 아랫
부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낮춘 채 이상스럽다는 듯이 에카드나
를 바라보았다.
넌 누구냐. 왜 땅을 디디고 걷는 자와 바람을 타고 나는 자들의 왕의
이름으로 내게 명령하느냐. 너는 왕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킨 크라이는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카드나는 그런 의
심에 대해서도 무표정한 얼굴만을 보내었을 뿐이었다.
"내게 복종하라." 설명하지 않고 해명하지 않는다. 명령할 뿐이다.
나는 왕이니까.
"크르르르……" 내겐 주인이 있다.
"내게 복종하라." 그래서?
킨 크라이는 똑바로 섰다.
에카드나는 킨 크라이의 장구들을 들고 있는 경비대원에게 다가가 그
안장과 고삐 등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주저없는 걸음걸이로 킨 크라
이에게 다가섰다. 킨 크라이는 에카드나가 고삐를 채우고 안장을 얹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딤라이트는 그 모습을 보며 기사 서임식을
떠올렸다. 어깨를 펴고 꼿꼿하게 서있는 기사와 검을 하사하는 군주.
에카드나는 안장을 다 채운 다음 천천히 물러났다. 그가 킨 크라이의
목 갈기라도 쓰다듬지 않을까 걱정하던 무스타파는 작게 안도의 한숨
을 내쉬었다. 에카드나는 친밀감을 나타내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것은 무관심으로도, 그리고 무스타파가 생각하는
것처럼 킨 크라이의 자존심에 대한 경의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
다. 어쨌든 기사의 목을 쓰다듬는 것은 군주답지는 않은 행동이다.
에카드나는 부드럽다는 것 이외엔 어떤 호감도 찾을 수 없는 그 목소
리로 말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으로 무엇을 원하십니까."
무스타파는 칼자루 끝의 폼멜을 잠깐 쓰다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
했다.
"내 마지막 술잔과 내 마지막 노래는 이미 300년 전에 즐겼어. 미련
은 없군."
================================================================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다가 엄한 일 당할 뻔했습니다. 밤바다를 찾
아 술 마시던 도중 후배 한 녀석이 갑자기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평
소엔 점잖은 녀석이었는데 갑자기 자살하겠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뛰어
들더군요. 같이 마시던 사람들 모두 기겁해서 바다로 뛰어들었는데 하
필이면 뻘바닥이었습니다. 제 한몸도 추스리기 힘든 뻘에서 술에 떡이
된 녀석, 게다가 저 먼 수평선이 자기를 부른다고 주장하는 녀석을 끌
어내는데 정확히 한 시간이 걸리더군요. 으으윽. 다 꺼내놓는 순간 해
가 떠오르더군요. 일출보러 간 것이었거든요. 해가 뜨고 보니 모두 몰
골이 사람 몰골이 아니더군요. 모두들 옷입은 채로 머드팩을 해가지고
서 시이커먼 것이… 낄낄낄.
온몸에 뻘칠을 하고 해변에 주저앉아 씩씩거리며 바라본 태양은 아름
다웠습니다. 하하하.(흉내내지 맙시다. 그 꼴로 집에 들어왔던 타자는
사망진단서 발부할 뻔했습니다. 으윽.)
좋은 밤 되세요.
--------------------------------------------------------------------------------
(c) Nobreak Technologies, Inc.
Future Walker - 퓨처워커
--------------------------------------------------------------------------------
1999/06/07(01:57) from 210.115.123.112
작성자 : 이영도 (jin46@hitel.net) 조회수 : 2190 , 줄수 : 308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3
번 호 : 2167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6-07 01:28
제 목 : [F/W]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3
Future Walker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3.
그러나 딤라이트에게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랬기에
그는 성벽 아래에서 그의 백파이프를 가슴에 안고 씩씩하게 행진하고
있는 키티를 찾아갔다.
키티 데시는 백파이프에 의해 상체를 거의 가리워진 모습으로 행진하
고 있었다. 그녀는 두 볼이 발갛게 물든 모습으로 있는 힘껏 취입구를
불어대고 있었고, 자신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에 황홀해하고 있었다.
비록 그녀 주위의 경비대원들과 시민들은 그들의 비극에 치를 떨고 있
어야 했지만. 그렇게나 열중하고 있었기에 키티는 딤라이트가 한참 동
안 제자리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헛기침을 몇 번 했
을 때야 간신히 그가 온 것을 알아차렸다.
"딤라이트 경! 선물 너무너무 고마워요!"
딤라이트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백파이프를 선물했던 기억이 없었지
만 그녀의 눈 속에서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는 의미로 파악
되는 도발적인 눈빛이 번득이는 것을 보고는 나오려던 말을 도로 집어
삼켰다.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니 제 마음 또한 행복합니다."
키티는 헤죽 웃었고 딤라이트는 퍽이나 전격적으로 강탈당한 백파이
프를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오른쪽 무릎을 꿇었다. 키
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딤라이트를 보다가 메고 있던 백파이프를
내려놓았다.
"딤라이트 경?"
"레이디 케이트 데솔로.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인사라니오, 무슨?"
"저는 떠나갈 것입니다."
"떠나…… 떠나요? 어디로?"
딤라이트는 어머님이 계셨던 곳 말입니다. 라고 말하고픈 유혹을 억
눌렀다. "하늘입니다."
키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이해시키고자 찾아온 것이 아니었기에 딤라이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떠나기 전에 꼭 당부드릴 말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키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전혀 도와주지 않았기에 원래
도와줄 때에만 대화를 잘 할 수 있는 딤라이트는 퍽이나 힘들게 말을
이어나갔다.
"모친께서 돌아오신 것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예……"
키티의 어눌한 대답을 들으며 딤라이트는 자신의 불길한 추측이 맞아
떨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더욱 힘들게 말해야
했다.
"모친께서 돌아와서 행복하시지요?"
"행복해요, 예." 라고 말하는 키티의 목소리는 시큰둥했다. 딤라이트
는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키티는 잠시 그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그 손 위에 자신의 왼손을 얹었다. 하지만 딤라
이트는 키티가 기대하는 것처럼 그 손등 위에 키스하거나 하지는 않았
다. 대신 딤라이트는 그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키티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달라요."
"다르다고 하셨습니까."
"예. 응, 그러니까 달라요."
"그렇습니다. 레이디 케이트 데솔로.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것이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키티는 고개를 갸웃했다. 딤라이트는 우울함을 떨치려 애쓰며 말했
다.
"저에겐 하나의 추측이 있습니다. 어느날, 레이디 케이트가 귀가하셨
을 때 모친께서 부재중이실지도 모릅니다."
"우리 엄마가 어디 간다고 했어요?"
아니오. 당신이 보낼 것입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요……"
당신이 불렀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과거의 어머니를 부른 것입니다.
현재의 어머니가 아니라. 결국, 당신이 주문한 것이 잘못 배달된 것이
지요. 당신은 짜증을 내며 반환해야 할 것입니다. 솔로쳐가 그 자신을
반환시킨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를 반환시키려 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특별히 말하고픈 이유는, 솔로쳐와 우리들의 경우와는
달리 이것은 당신의 모친이 아니라 당신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딤라이트는 수십 마디의 말이 머릿속에서 회오리바람처럼 몰아치는
것을 느꼈지만 그의 입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
을까. 그레이, 자네가 있었다면.
"레이디 케이트 데솔로."
"예."
"레이디 케이트 데솔로."
"말씀하세요, 딤라이트 경."
"슬픈 추억은 발바닥에 꽂힌 가시 같은 것입니다."
다행히도 키티는 폭소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불행히도, 키티
가 폭소를 터뜨리지 않았기에 딤라이트는 끝까지 말할 자신을 얻었다.
딤라이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뽑기 힘든 가시 말입니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으면 아프지 않습니
다. 괜스레 건드리면 아프지요. 조심스럽게 걸으면 아프지 않습니다.
끝까지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딤라이트 경…… 가시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가시를 빼서 어깨 너머로 집어던지고 끝까지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으시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
가시마저도 사랑하기에 뽑지 못합니다. 그럴 바에는,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발이 아파서 중간에 주저앉는 것
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키티의 눈망울이 아롱거렸다. 이 커다란 남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딤라이트는 눈을 내리감으며 말했다.
"레이디 케이트 데솔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딤라이트는 손을 폈다. 그의 커다란 손에 쥐어있던 키티의 작
은 손은 발갛게 물들어있었고 그 손등 위로 땀방울이 몇 개 반짝이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 손등에 얼굴을 가까이 가
져갔다. 소금기와 옅은 먼지 냄새가 풍겨왔다. 딤라이트는 키티의 손
등에 키스했다.
키티는 일어서는 딤라이트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리가 긴
남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딤라이트가 일어나는 동작은 빨랐다. 같은
속도로 움직여도 빠르게 느껴지는, 그래서 쉽게 떠나버리는 것처럼 보
이는 모습으로 딤라이트는 일어섰다. 그리고 그가 몸을 돌리면서 살짝
일어난 커다란 망토가 키티의 시야를 가득 메워버렸다. 한 순간 그녀
의 시야 속엔 물결치는 망토만이 자리했다. 그래서 키티가 딤라이트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되었을 때 그가 한참이나 먼 곳을 걸어가고 있었
다.
키티는 까닭없이 울고 싶어졌다. 그리고 아직 자제력을 배우지 못한
소녀답게 키티는 마음놓고 울었다.
"내가 누구냐!"
"대장입니다!"
"너희들 목숨은 누구 것이냐!"
"대장님 것입니다!"
"너희들 목숨은 내가 맡았다. 따라서 너희들은 내 허락 없이는 죽지
않는다! 나를 믿어라, 아무 걱정말고 달려라! 대왕이여,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켄턴, 루트에리노!"
"켄턴, 루트에리노!"
로터스 경비대장의 호령 하에 켄턴 경비대원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전
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대열의 오른쪽에 서있던 아이라의 거대한 몸
위에서 무스타파 하빈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정의가 닿는 그 어느 곳에서라도 피어오르는 장미를. 장미를……"
무스타파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땅의 가장 외지고 쓸쓸한 어디라도 좋으니…… 내 정의로 붉은
장미 한 송이를 피울 수 있을까. 아이라?"
아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스타파는 혁대에 꽂아두었던 장
갑을 뽑아들며 말했다.
"나는 그것이 피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라. 정의를 지키기 위
해서라면 그 어느 곳에서라도 내 피를 흘릴 수 있다는 말로. 하지만
이젠 좀 다르구나."
무스타파는 고개를 돌렸다. 켄턴의 성벽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아이
라의 등 위에 올라타고 있었기에 그의 시야는 퍽이나 높았고 성벽 위
에 서있는 쥬리오 시장과 히든보리 사집관의 얼굴도 잘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무스타파의 시선을 발견하고는 열띤 동작으로 손을 흔들어대었
다. 무스타파는 목례해보이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내가 정의를 가졌을 때,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가장 아름답다는 의
미였다. 내가 정의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 어느 곳에 있더라도 나는
기괴한 세상을 바라보게 될 거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런데, 아이라.
이상하구나. 나는 이 시간에서 정의롭지 못한 존재일 테지. 이 시간과
는 상관없는 존재란 말이야."
무스타파는 장갑을 힘있게 당겼다.
"그런데 왜 이 세상이 이렇게도 아름다운 거지?"
딤라이트 이스트필드는 대열의 반대편에서 헐스루인의 갈기를 쓰다듬
고 있었다. 헐스루인은 눈 위로 거칠게 흘러내린 갈기를 흔들며 푸르
릉거리고 있었다.
"긴 시간 동안 내게 봉사해왔고, 그리고도 다시 시간을 뛰어넘어서
내게 봉사해왔던 것에 대해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헐스루
인. 이젠 내가 네게 봉사해야할 차례겠지."
딤라이트는 머리에 쓴 투구를 벗었다. 투구는 곧 그의 손에서 떨어져
땅바닥을 뒹굴었다. 딤라이트는 고개를 숙여 헐스루인의 목에 얼굴을
가져가며 말했다.
"가자, 헐스루인. 우리의 시간으로. 우리의 하늘로. 이 시간과 이 땅
은 우리의 쉼터가 아니다. 우리의 과거 속에서 우리의 하늘을 마음껏
날아보자."
딤라이트는 헐스루인의 목에 뺨을 댄 채 웃었다. 밝은 웃음이었다.
"내가 너를 위해 그 하늘과 그 시간을 만들겠다."
그 모든 대열 앞에 에카드나가 땅바닥에 앉아있었다.
한손엔 거대한 검을 짚고 다른 손엔 킨 크라이의 고삐를 쥔 채 에카
드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는 지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 안개
가 이제는 익숙해진 모습으로 검은 산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에카드나
는 말없이 기다렸다.
두두두두두.
에카드나의 밝은 귀에는 말발굽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후 검은 안개는 천천히 켄턴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
다. 이윽고 검은 안개 아래 어둠 속에서부터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
트트의의 율율법법!"
전의를 복돋우고 있던 켄턴 경비대원들의 목소리가 낮아지기 시작함
과 동시에 로터스 대장의 미간도 찌푸러졌다. 로터스는 씁쓸해진 입안
을 핥으며 생각했다. 내 인생 최대의 이야깃거리이긴 한데 말이야, 이
왕이면 그 이야깃거리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도 있으면 더 좋겠군.
에카드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소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촌부의 모습이 되어, 에카드나는 킨 크라
이를 끌며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교적 맑은 하늘과 비교적 적
당한 기온 속에 에카드나는 비교적 평온한 걸음걸이를 유지하고 있었
다.
그리고 비교를 거부하는 데스나이트들 속에서 그레이는 에카드나의
모습을 보았다. 정확하게는 그의 손에 이끌려 걸어오고 있는 킨 크라
이의 모습을 본 그레이는 곧 돌진을 멈췄다. 그러자 데스나이트들 전
체가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들의 하나의 목소리처럼 하나의 동작으로.
데스나이트들은 지평선 위에 늘어선 공포의 숲이 되었다.
에카드나는 걸어가면서 고함질렀다.
"요구대로 그리폰을 데려왔다! 그레이 휠드런은 앞으로 나와라!"
데이든 평원은 마치 그 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해졌다. 비록
100여기의 데스나이트와 그 몇 배에 달하는 켄턴 경비대원들이 삼엄한
대치를 이루고 있었지만 들려오는 소리라곤 말들의 콧김소리와 거친
바람소리 뿐이었다. 그래서 에카드나는 자신이 홀로 이 평원에 서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고고삐삐를를 놓놓고고 돌돌아아가가라라, 용용아아병병."
에카드나는 씩 웃었다.
"싫다. 땅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식인가? 기사답게 걸어와 내게서 직
접 받아가라. 이곳엔 네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다시 고요만이 흘렀지만 그 고요는 데스나이트들과 켄턴 경비대원들
만을 괴롭히고 있었다. 에카드나는 데이든 평원 위에 지나치게 많이
떠다니는 고요로부터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안개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켄턴 경비대원들은 주춤하며 무기를 꼬나들었다. 데스나이트들의 머
리 위를 감돌던 안개가 서서히 하늘을 가리며 번져나오기 시작했다.
위압적인 모습이었지만, 경비대원들은 신음을 내지르기 전에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안개 뿐이라는 사실을 간신히 깨달았다. 데스나이
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검은 안개만이 데이든 평원을 검게 물
들이며 다가왔다. 에카드나는 햇빛이 가려지자 미간을 조금 찌푸렸지
만 아무 동작없이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터걱, 터거걱.
거대하고 불규칙적인 발자국 소리와 함께 데스나이트들의 무리 가운
데서 그레이가 걸어나왔다. 그레이가 타고있는 괴수는 정상적인 동물
에게 허락된 숫자보다 더 많은, 게다가 정상적인 동물보다 훨씬 불규
칙하게 배열된 다리 때문에 비척거리며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서 그 괴수의 등에 올라탄 그레이의 몸 역시 좌우로 불규칙하게 움직
였다. 하지만 그레이의 얼굴은 전혀 흔들리지 않은 채 에카드나를 향
해 고정되어 있었다.
에카드나의 머리 위까지 확장된 검은 안개 때문에 데이든 평원은 검
게 물들어 있었다. 에카드나는 문득 덥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럴
까. 감각들을 하나씩 확인해본 에카드나는 잠시도 쉬지 않고 불어대던
바람이 어느새 멎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 평원 위로는 한 점의 바
람도 불지 않았다. 하지만 풀들은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
고 그레이는 그 무풍의 검은 평원 위를 기억하기 싫은 악몽처럼 걸어
오고 있었다. 킨 크라이는 다가오는 괴수의 모습에 목의 깃털을 모두
곤두세운 채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터걱, 터거걱.
그레이는 에카드나 앞에서 멈췄다.
================================================================
으윽… 늦었습니다.
--------------------------------------------------------------------------------
(c) Nobreak Technologies, Inc.
Future Walker - 퓨처워커
--------------------------------------------------------------------------------
1999/06/07(01:58) from 210.115.123.112
작성자 : 이영도 (jin46@hitel.net) 조회수 : 2319 , 줄수 : 407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4
번 호 : 21677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6-07 01:29
제 목 : [F/W]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4
Future Walker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4.
그레이를 태운 괴수는 목뼈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어대었다. 그래서 그
목뼈에 너덜너덜하게 매달려있던 힘줄과 신경줄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폐가의 거미줄처럼 정신 사납게 너풀거렸다. 왼쪽 세번째 다리는 허공
에 뜬 채 경련을 계속하고 있었고 가슴에 달린 두번째 입에선 기이한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던
에카드나는 이 괴수가 어떤 상태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괴수
의 상태를 짐작한 그레이는 무거운 투구 저편으로부터 낮게 말했다.
"드드래래곤곤 피피어어 같같은은 것것이이냐냐."
"그 이름이 좋다면 그렇게 불러라.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항상 그러하듯이."
"무무지지에에서서 공공포포를를 느느끼끼는는 인인간간으으로로 취
취급급할할 생생각각인인가가? 나나는는 공공포포, 절절망망, 어어둠
둠의의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 내내가가 바바로로 공공포포다다."
"네 공포가 너를 절망시켜 모든 것을 어둡게 만들겠지. 그 어둠 속에
서 네가 찾는 유일한 빛을 가져가라, 멍청아."
에카드나는 고삐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킨 크라이의 고삐가 땅에 부
딪혀 작은 소음을 만들어내는 동안 에카드나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
다. 킨 크라이는 고개를 조금 돌려 에카드나를 보았다가 다시 괴수를
경계했다. 그레이는 그런 에카드나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켄턴의 자유와 안녕에 대한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는다, 그레이."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레이는 한쪽 다리를 들어 괴수의
등으로부터 내려섰다. 그레이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괴수는 비명을
지르며 앞다리 세 개를 쳐들었다.
"캬아아악!"
에카드나는 상체를 낮추었고 킨 크라이는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폈다. 하지만 괴수가 처절한 비명소리로 토해내고 있는 감정은
고통이었다. 그 때 괴수의 몸 아래쪽부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에카
드나는 어두운 조명 때문에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라보았지만 괴수는 분명 사라지고 있었다.
"캬아아가각!"
괴수의 몸은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연기처럼 서서히 사라졌다. 마지
막으로 머리가 사라지기 적전, 괴수는 그 입을 열어 굉장한 포효소리
를 토해놓고는 사라졌다. 그 비명의 여운은 잠시 괴수가 있던 자리를
배회하며 떠돌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그동안 그레이는 한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킨 크라이는 가득 펼쳤던 날개를 접고 머리를 꼿꼿이
세워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킨킨 크크라라이이."
저런 목소리로 불렀다간 아무리 킨 크라이라고 해도 상대가 그레이라
는 것을 못알아들을 거야. 라고 생각했던 에카드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킨 크라이는 펄쩍 뛸 듯이 기뻐하면서 뒷다리로
번쩍 일어났다. 커다란 앞발 두 개를 그레이의 어깨에 얹은 킨 크라이
는 그레이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부리를 부딪혀대었고 에카드나는 그
레이가 뒤로 쓰러지지 않은 것에 놀랐다.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거대
한 목을 끌어안으며 껄껄거렸다. 그래서 에카드나는 이 광경에 대해서
는 딱 한 마디의 논평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공포, 절망, 어둠의 데스
나이트라고?
"재회의 기쁨은 천천히 나누지, 그레이. 이제 데스나이트들과 함께
이곳을 떠나주면 좋겠는데."
"약약속속은은 지지킨킨다다, 용용아아병병. 이이 세세계계가가 모모
두두 파파괴괴된된다다 하하더더라라도도 켄켄턴턴만만은은 안안전전
할할 것것을을 보보장장하하겠겠다다."
에카드나는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이 세계는 네 생각보다는 더 넓은 곳이다."
"그그러러나나 날날개개 얻얻은은 기기사사에에겐겐 그그리리 넓넓지
지 않않다다."
에카드나는 입을 다물었고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안장 위에 올라탔
다. 그레이는 익숙한 동작으로 킨 크라이의 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조조언언하하지지. 네네 인인생생이이 아아직직 끝끝장장나나기기엔
엔 너너무무 짧짧았았다다고고 생생각각된된다다면면, 켄켄턴턴에에
머머물물러러라라."
에카드나는 묵묵히 그레이를 쏘아보았다. 그레이는 몸을 돌려 에카드
나에게 등을 보이고는 킨 크라이에게 익숙한 명령을 보내었다. 킨 크
라이는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강인한 네 개의 다
리에 의해 인도되던 그 몸이 곧 희고 거대한 두 날개에 의해 인도되었
다. 그레이와 킨 크라이는 땅을 박차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곧 그 둘
은 지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한없이 자유로운 모습이 되어 하늘을 비행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데스나이트와 켄턴 경비대원들은 똑같은 심정
으로 탄성을 질렀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에카드나의 손이 배웅이라도 하려는 것처
럼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벽력처럼 튀어나온 말
은 배웅이 아니었다.
"일자왕의 명령이다, 킨 크라이! 네 주인을 그 마음의 고향으로 인도
하라!"
그레이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에카드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킨 크
라이의 몸이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고 저 멀리서 탄
성을 보내던 데스나이트들 가운데서 신음과 비명이 동시에 터져나왔
다. 그레이는 뒤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고삐를 당기며 뜻없는 말을 외
쳤다.
"이이게게 무무슨슨……? 킨킨 크크라라이이!"
그레이는 노성을 지르며 킨 크라이에게 명령을 보내었지만 킨 크라이
는 그 날렵한 상승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분노하던 그레이는 문득 불
안함을 느꼈다. 그의 머리가 위로 쳐들렸다. 그레이의 투구 속에서 그
두 눈이 시퍼런 불길을 뿜어내었다.
"안안개개……!"
그는 어느새 검은 안개 속을 날고 있었다. 그레이는 이 안개가 얼마
만큼의 높이인지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이
안개 위쪽으로 빛나고 있을 태양이 그의 관심을 완전히 집중시키고 있
었다.
"킨킨 크크라라이이! 멈멈춰춰!"
더 이상 고삐를 잡아당기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 그레이
는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하지만 킨 크라이는 멈추지 않았다. 그레이
는 검을 뒤로 잡아당겼다. 날개에 상처를 입힌다면 내려갈 수밖에 없
을 것이다. 그레이는 자신의 옆에서 퍼덕거리고 있는 킨 크라이의 날
개를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운 날개는 검은 안개 속에서 희끗희끗하게
보였다. 검을 쥔 그레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그의 손을 멈추게 한 것은 킨 크라이와 보냈던 지난 날의 추
억도 아니고 그에 대한 동정심도 아니었다. 그를 멈추게 한 것은 그
용아병의 말이었다. 그레이는 당장이라도 검을 내려칠듯이 팔을 긴장
시키고 있었지만 자신이 검을 쥐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린 채 생
각에 빠졌다.
네 주인을 그 마음의 고향으로 인도하라.
하늘로 올라가라고 하지 않았다. 그 용아병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찬란한 햇빛 아래로 치솟아 올라 네 주인을 파멸시키라고 말하지 않았
다. 그리고 그 명령에 따라 킨 크라이는 이렇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킨 크라이가 생각하는 나의 마음의 고향은……
"어어리리석석은은 녀녀석석. 넌넌 내내가가 생생각각했했던던 것것
보보다다 더더 멍멍청청했했군군."
그레이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킨킨 크크라라이이. 너너는는 네네 주주인인을을 죽죽이이고고 있있
단단 말말이이다다. 아아무무리리 네네 주주인인이이 그그걸걸 원원한
한다다고고 해해도도, 주주인인에에게게 이이런런 짓짓을을 하하는는
그그리리폰폰이이 세세상상에에 어어디디 있있단단 말말이이야야?"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비행에 몸을 내맡겼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검
은 안개가 조금씩 회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안개의 윗부분에
도달한 모양이다. 그레이는 안개 저편으로 흰 동그라미가 나타나는 것
을 보았다.
"그그래래. 나나를를 데데려려가가다다오오, 킨킨 크크라라이이. 내
내 마마음음의의 고고향향 죽죽음음으으로로."
그레이는 눈을 감았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킨 크라이의 날개
소리가 삽시간에 사방을 메웠다. 그 요란한 소음 속에서 그레이는 터
무니없는 고요함을 느꼈다. 고삐를 놓은 그레이의 두 팔이 좌우로 펼
쳐졌다. 그레이의 입술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좋아, 찾았다!"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그레이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경악으로 팽
창된 그의 동공 가득히 검은 날개가 들어왔다. 강맹한 힘이 꿈틀거리
는 날개와 거대한 몸, 길다란 꼬리. 안개 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
던 것이 분명한 모습을 보며 그레이는 신음처럼 외쳤다.
"이이건건…… 무무스스타타파파!"
무스타파는 그레이를 선도하듯이 날고 있었다.
아이라의 넓고 거대한 날개가 옆으로 죽 펼쳐진 채 그레이에게 도달
하는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라의 목 위에서 무스타파
는 아예 일어나 있었다. 두 발로 아이라의 등을 밟고 일어선 무스타파
는 왼손에 쥔 고삐로 몸을 지지시키며 등 뒤를 보며 날고 있었다. 데
이든 평원에 늘어선 데스나이트들과 켄턴 경비대원들이 티끌처럼 보이
는 수만 큐빗의 상공에서, 천공의 기사 무스타파는 300년 동안 잊혀져
왔고 그 누구에 의해서든 상상조차 시도되지 않았던 묘기를 부리며 그
레이를 햇살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말문이 막힌 그레이는 눈만 커다
랗게 뜬 채 역광으로 시커멓게 보이는 무스타파의 그림자를 바라보았
다. 그 때 그의 등 뒤, 저 아래쪽으로부터 역시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
려왔다.
"그레이 휠드런!"
그레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헐스루인에 올라탄 채 그의 아래쪽
으로부터 날아오르고 있는 딤라이트를 발견했다. 딤라이트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레이 휠드런! 아무 소리하지 말고 내 말을 들어! 우리는 천공의
기사다. 우리는 이 시대로 돌아와서는 안되는 것이었어. 싸움과 증오
로 돌아와서는 안되는 것이었어. 우리는 전투 인형이 아니야. 우리는
바람이다!"
그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딤라이트
는 얼굴이 붉어지도록 목청껏 고함질렀다.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그레이, 그렇잖은가? 우리는 때이른 죽음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었어! 졌던 대상을 상대로 다시 한번 싸워보
기 위해 돌아온 것이 아니었어! 우리의 그리움은 그것이 아니었어! 우
리는, 우리는 다시 한번 더 날아보고 싶었던 것이었어!"
"한한번번더더…… 날날아아본본다다고고."
"우리는 그걸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고? 그건 우리들만이 가질
수 있는 소망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저 지혜로운 솔로쳐조차 우리의
소망을, 우리의 애닳음을, 우리의 그리움을 알려줄 수는 없었어! 그리
고 우리 스스로도 알 수 없었어! 우리와 같은 일로 고민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였기 때문에!"
그런가. 그레이는 펄럭거리는 자신의 소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
람이 옷을 스치며 일으키는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 온몸에 와 부딪히
는 바람을 느꼈다. 이것이었다고?
"그그렇렇다다면면 자자네네들들은은…… 어어떻떻게게……"
딤라이트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레이 역시 그 대답을 알 수 있었기에
질문을 멈췄다. 하나였던 우리가 둘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킨 크라이
를 요구하는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딤딤라라이이트트……"
"우리는 이 하늘로 돌아왔어야 했다, 그레이!"
이 하늘.
그레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는 그의 발 아래로 깔리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이 높은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환상적인 선, 푸른 하늘
과 붉은 땅이 맞닿는 곳에 생긴 보라색의 선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허
리 같은 산맥과 반짝이는 강, 형형색색의 무늬로 가득 메워진 들판을
보았다. 그의 발 아래로 희게 꿈틀거리며 포근히 춤추는 구름을 보았
다.
그레이는 두 손을 들어 투구를 붙잡았다.
그의 두 손이 투구를 붙잡는 순간 그 저주받은 투구 속인지 그의 마
음 깊숙한 곳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곳에서부터 떨리는 듯한 작은 느낌
이 전해져왔다. 그레이는 잠시 투구를 붙잡은 채 눈을 감고 그 느낌에
다가섰다. 그러자 그 느낌은 보다 명확해진 형태로 그레이에게 다가왔
다.
그것은 모습이었다.
"형형제제여여."
그 때도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위로 보이
는 것이라고는 켄턴의 불빛 뿐인 완전한 암흑 속에서 칠흑의 갑옷을
걸친 데스나이트는 또렷하게 보였다. 그레이는 휘몰아치는 바람과 투
구 속을 울리는 그의 호흡소리마저 잊은 채 고요 속에서 데스나이트를
응시했다.
데스나이트의 손이 허리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칠흑의 검이 뽑혀나
왔다. 그레이는 그 검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이유
를 원하지도 않았다. 데스나이트는 검을 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검끝이 데스나이트의 허리 옆으로 완전한 반원을 그리며 올라갔다.
"검검을을 뽑뽑아아라라, 형형제제여여."
그레이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손에 쥔 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는 몸 앞으로 팔을
들어올렸고 정점에 선 검끝은 데스나이트의 가슴을 겨냥하고 있었다.
데스나이트는 싱긋 웃었다.
"오오라라. 드드래래곤곤 솔솔져져의의 의의식식처처럼럼."
데스나이트는 검을 어깨 위로 높이 들어올린 자세로 그레이를 기다렸
다. 그레이는 아무 말 없이 땅을 박찼다.
그리고 그레이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데스나이트의 모습이 발 아래로 쑥 내려갔다. 여전한 암흑과 한결같
은 어둠 속에서도 그레이는 데스나이트의 표정을 볼 수 있었고, 그래
서 히죽 웃었다. 데스나이트는 멍한 표정으로 그레이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미칠 것 같은 유쾌함을 느꼈다.
"하하하하하!"
그리고 그 순간 그레이는 투구를 벗어던졌다. 암흑과 데스나이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늘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바람이 다시 그
에게로 불어오기 시작했다. 너무나 두꺼운, 거칠 것 없이 휘몰아치는
바람.
그레이는 투구를 놓았다.
바람은 그레이의 손으로부터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앗아갔다. 그레이
의 손을 떠난 순간 데스나이트의 투구는 확 불타올랐다. 투구 주위로
솟아오른 검은 불길은 바람에 흩날리며 불티를 휘날렸다. 그것은 마치
낮의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검은 유성처럼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레이는 보지 않았다.
"그레이!"
딤라이트의 목소리가 울림을 담은 채 등 뒤로부터 들려왔다. 그레이
는 고개를 돌려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익살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이젠 그 칼자루 좀 놓지 그래? 손등이 하얗게 변했군."
딤라이트는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해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힘껏 움켜
쥐고 있던 칼자루를 놓았다. 그리고는 헐스루인을 몰아 그레이에게 다
가서며 말했다.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해 사과하겠다."
"으윽. 그런 사과는 안하는 편이 훨씬 사과다운 거야. 내가 사과하지
않는 것처럼. 도대체 죽었다가 살아나도 바뀌지가 않나, 이 친구야!"
딤라이트는 멍한 얼굴로 그레이를 바라보았고 그래서 그레이는 더이
상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때마침 무스타파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담 끝났나?"
잡담이라고? 그레이는 위쪽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그래! 불필요했던 내 이야기는 이제 끝났어. 완전히!"
"알았어. 그럼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지……"
무스타파는 조금 기다렸다가 말했다.
"인도하게, 대장."
그레이는 씩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곤 킨 크라이의 머리 옆으로
입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귓속말이라기엔 너무
컸다.
"킨 크라이. 너도 나처럼 무스타파를 존경하지? 저렇게나 묵직하게
'대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내는 흔치 않단 말이야."
무스타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딤라이트는 환하게 웃었다. 다시
똑바로 안장에 앉은 그레이는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힘차게 말했다.
"자!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가 썼던 이야기, 우리의 그리움,
가자!"
"캬아아아악!"
킨 크라이는 포효하며 단숨에 솟아올랐다. 그렇게 세 기사는 하늘의
끝의 끝까지 날아오를 기세로 솟아올랐다.
에카드나는 싱긋 웃었다.
"난 약속을 모두 지켰다. 그에게 킨 크라이를 돌려줬지. 그러니 이젠
그쪽에서 약속을 지킬 차례이지 않은가? 어둠에서부터 달려온 기사들
이여. 그대들이 수호해야 하는 어둠의 명예를 거론해야 하나."
데스나이트들은 끔찍한 기세였지만 불평만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
결같은 눈길로 에카드나를 쏘아보았지만 달려나오지는 않았다. 데스나
이트는 말없이 뒤로 물러날 차비를 갖췄다.
"아, 잠깐. 내 말은 끝나지 않았다."
"뭔뭔가가, 용용아아병병!"
"비록 악연이라지만 인연은 인연이고, 따라서 나로선 그대들이 봉착
한 문제점을 상기시켜줘야 할 의무감 비슷한 것을 느낀단 말이야."
"우우리리가가 어어떤떤 문문제제점점에에 봉봉착착했했는는가가."
"그건 말이야…… 응?"
에카드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켄턴 경비대원들과 데스나이트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에카드나를 보았고, 곧이어 하늘을 보았다. 에
카드나가 그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쉬이이이이웅.
꼬리를 길게 끄는 소리가 하늘 저편으로부터 들려왔다. 그러나 충격
음은 좀 늦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아무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래서 충격음이 좀 늦게 다가온 것처럼 느
꼈다. 하지만 에카드나는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하늘로부터 굉장한 속도로 내리꽂히는 그것은 불타는 데스나이트의
투구였다. 검은 불길을 뒤로 길게 끌며 쏘아져내린 투구는 그 높이에
서 야기된 무서운 속도로 대지에 충돌했다. 그리고선 데스나이트와 켄
턴 경비대원들 모두를 기겁하게 만든 끔찍한 소리를 만들어내었다.
콰아앙!
경비대원들과 데스나이트들 모두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검은 불티
와 흙먼지가 위로 솟아오르며 작은 구름을 만들어내었다. 타오르고 있
던 투구는 땅에 부딪혔을 때와 거의 같은 속도로 튀어올라서는 몇 번
이나 더 되튕긴 다음에야 엉망진창으로 우그러진 모습이 되어 땅을 굴
렀다. 데스나이트들은 아연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았고, 그것이 무엇인
지 확인하게 된 경비대원들의 얼굴엔 기쁨이 솟아올랐다. 그 때 에카
드나가 말했다.
"흐음. 좋은 본보기로군."
"본본보보기기라라고고?"
"자네들의 앞날에 대한."
데스나이트들은 분노했지만 뭐라고 말할 틈이 없었다. 에카드나는 그
의 거대한 검을 들어올려 그들을 겨냥하며 외쳤다.
"자네들은 켄턴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나는 그에 상대
될만한 약속을 한 기억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싸움이 될 것
같지 않나? 때리면 맞기만 해야 되는 상대와의 싸움 말이야. 하하하!"
================================================================
좋은 밤 되세요.
--------------------------------------------------------------------------------
(c) Nobreak Technologies, Inc.
Future Walker - 퓨처워커
--------------------------------------------------------------------------------
1999/06/10(02:09) from 210.115.123.111
작성자 : 이영도 (jin46@hitel.net) 조회수 : 2124 , 줄수 : 272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5
번 호 : 21863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6-10 00:35
제 목 : [F/W]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5
Future Walker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5.
아일페사스 역시 다른 이들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행동이 이해에 도
움이 될 거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
다.
"시간과 하나가 된다고?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발?"
"시간은 멈추지 않아. 멈추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지. 그렇다면, 시간
과 하나가 된다면 신스라이프 역시 멈추지 않게 될 테지. 아까 인간이
시간을 만들어낸다고 말했지?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시간과 하나가 되
려고 하는 거지. 그는 모든 인간들의 아이가 되려는 거지. 어떤 인간
의 부모도 되지 않은 채."
"부모가 되지 않는다고……"
"그는 여자의 몸이 되었어. 그 정신은 남자지. 그는 단일체고 자기완
결단위이고 생식을 거부해. 그래. 그는 영원한 아이가 되는 거야. 그
의 부모인 모든 인간이 시간을 만들어낼 때 아이인 그는 시간을 만들
지 않겠다는 거지. 모든 인간들이 결과를 위해 행위를 할 때, 그는 부
모의 재산을 받는 자식처럼 그 결과를 상속하겠다는 거지."
"울 거야. 모르겠어."
"미안하구나. 하지만 난 말하련다. 그는 인간들이 행위할 때 즐겨야
할 결과를 혼자 가져가버릴 거야. 그래서 시간이 멈추는 거야. 결과가
오지 않는 거지. 그것은 모두 신스라이프에게 돌아가버리거든. 인간은
영원히 시간을 만들어내고, 그 시간은 신스라이프에게 상속될 거야.
인간 스스로에게 돌아갈 시간은 남지 않게 될 거야."
"그럼 왜 프리스트들은 구덩이 속으로 자기 몸을 던진 건데요?"
"행위와 동시에 결과를 받을 수 있는…… 자살이란다. 키스와 춤과
노래와 마찬가지야. 웃기지? 사람이 거꾸로 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
인데, 그들은 자기 시간을 되찾기 위해 자기의 삶을 정지시켰단다. 그
들은 스스로를 정지시킴으로서 신스라이프에게 위탁했던 자신의 시간
을 되찾게 된 거지. 그게 내가 말했던 추측이란다."
"내 추측으로도 그래."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돌렸다. 느릿하게 걸어온 후작과 미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할슈타일 후작은 다듬지 않아 덥수룩해진 수염 속에서
입술을 꿈틀거렸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
발레드는 고개를 조금 들어 할슈타일 후작을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당신은 그 때의 그 자……"
"그래."
"무엇을 찾아온 건가?"
"신스라이프를 죽이기 위해서."
"불가능해. 조금 전 이 소녀에게 말했던 바고, 당신도 동의한 결론에
따른다면 신스라이프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지."
"그건 내 취미생활이야.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
"농담할 기분인 것 같군."
"농담이 아냐."
발레드는 다시 힘들게 고개를 들어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할
슈타일은 메마른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시간을 만들어왔다. 항상 그래왔어. 그렇기에
난 자살한 프리스트들처럼 될 수는 없다. 말해봐라. 그들은 자살했으
되 너는 아직 자살하지 못한 까닭을."
발레드는 말없이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속삭이듯 말했다.
"신이지."
"그래. 콜리…… 그들에겐 콜리가 있었지. 내겐 없어. 그래서 난 확
신이 없어."
할슈타일 후작은 손을 내밀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발레드는 그 손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기
만 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고, 오랜 시간이 지
난 후 발레드는 그 손을 마주잡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발레드를 일으
켜세웠다.
"내가 잠시 네 신이 되어주지."
발레드는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며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와
아일페사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후작을 바라보았다.
"내게 경배하고 내 말을 믿도록. 네 추측은 맞아."
"정말……이오?"
"확신해도 좋다. 그러니 신스라이프에게 위탁했던 네 시간을 되찾아
라. 그것은 네 것이다."
발레드는 형형한 눈길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할슈타일 후작
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눈길을 마주보았다. 그 눈길은 질문이었고 요
구였지만, 동시에 부정이기도 했다. 발레드는 말을 뱉어낸다기보다는
구토하듯이 말했다.
"난…… 죽고 싶지는 않소."
할슈타일 후작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발레드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억울하단 말이오!"
"그럼 네 시간을 신스라이프에게 계속 바치겠다는 건가."
"그렇게라도 해서 살 수 있다면…… 젠장! 그럼 나 또한 영원히 살
수 있단 말이오. 왜 그러면 안된단 말이야!"
발레드는 갑자기 뒤로 몇발자국 물러났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던 발레
드는 눈에 미끄러지며 주저앉았다. 할슈타일 후작과 미, 그리고 아일
페사스는 각자 다른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길, 제길, 제길! 그럴 수 있어. 그만의 영생이 아니야! 그가 내
시간을 다 가져간다면, 난 시간이 가져올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잖아!"
할슈타일 후작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그럴 경우 너는 영원히 시간을 만들기만 해야 된다는 것을 지적해주
고 싶군. 넌 불모의 들판에 영원히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이다."
"댓가가 영생이야!"
"……난 지금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할슈타일 후작은 발레드에게서 몸을 돌려 크레바스를 바라보며 말했
다.
"네게 신이 되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거부하고 있군. 거
기서 계속 네 고민을 끌어안고 있어라. 난 가서 신스라이프를 지금의
시간과 분리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의 원래의 시간으로 돌려보낼 것이
다. 그렇게 되면 네겐 영생은커녕 1분의 생명도 남지 않겠지. 이 땅
위에서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넌 땅에 쓰러지기도 전에 이미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선행이라고 생각하겠다."
발레드는 입을 딱 벌린 채 후작을 바라보았지만 후작은 아일페사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길을 부탁하오, 골드드래곤 아일페사스."
"후작아, 제발! 펫시라고 불러줘도 되잖아요?" 라고 항의했지만, 아
일페사스는 곧장 몸을 돌렸다.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부족한 것은 아
니다. 항의를 받아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 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잠시만."
미는 발레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는 당신에게 제안하겠어요. 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볼 생각이
있나요?"
"무슨 말이오?"
"당신은 턴빌에서부터 신스라이프를 따라나왔지요. 그 전까지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을 거에요. 그러니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를 삭제한 다음 다시 시작해볼 생각은 없나요. 그 때 턴빌의 시청에
서, 당신은 신스라이프를 따라나오지 않은 것으로 하고 말이에요."
발레드와 할슈타일 후작은 일란성 쌍생아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놀
라운 표정의 일치를 보여주었다. 경악에 빠진 두 사람 중 발레드가 먼
저 입을 연 것은 그가 질문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해요. 왜냐하면 당신은 그 시점부터 당신이 만들어낸 시간들을
모두 신스라이프에게 위탁했으니까요. 따라서 그 시간은 당신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당신은 그 시간을 살지 않았어요. 그것은 모
두 신스라이프에게 갔지요. 그러니 당신은 그 시간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도 없어요. 어쩌시겠어요?"
발레드는 혼란스러워했고 말을 극심하게 더듬었다.
"당신, 당신들이…… 정, 정말로 신스라이프를 죽인다, 다면 나, 나
는……"
"그렇게 하세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 거에요."
발레드 신스라이프는 생각했다. 반쯤 미쳐버린 늙은 아내와 그를 멀
리하는 정부에게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살다가 몇년 쯤 후
에 고통속에 죽어가야 하는가. 문득 발레드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
다.
그가 없다면 늙은 아내는 슬퍼할 것이다.
"하겠소. 어떻게 하면 되오?"
미는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발레드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지 않았
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의 모습은 넓은 설원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심지어 눈밭에는 발자국도 남아있지 않았다. 미는
생긋 웃고 고개를 돌렸으며, 할슈타일 후작의 복잡무쌍한 표정을 마주
대하게 되었다. 후작은 신음하듯 말했다.
"나도…… 그것이 가능한가, 무녀. 아니, 관두지. 불가능하겠군."
그리고 후작은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을 향해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미는 그의 등 뒤를 향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후작의 등을 보면서 미는
문득 그녀를 강간하려들던 후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미는 입을
열었다.
"당신을 존경하게 된 것이 퍽 우스워요."
후작은 몸을 돌리지 않았지만 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신을 처음 알게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신은 한결같군요. 분노
의 대상을 명확하게 정할 줄 알고 모든 힘으로 분노하고 그 분노를 해
결하기 위해선 모든 것을 이용해버리는,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이용
해버리는 모습. 당신에겐 분노가 제일 순위고, 자신의 보전은 순위가
좀 낮군요. 어이없고, 경멸스럽기도 하지만, 존경스럽기도 하네요."
"그건 내 취미생활이야."
"그리고 그것뿐이죠."
"누구는 안그런가. 아일페사스! 준비는 언제 시작되오?"
갑자기 사라진 발레드에 대한 어떤 종류의 설명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지금껏 입을 다물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아일
페사스는 당연히 분노했다.
"이것봐! 설명을 해요! 제가 저기 있던 목소리 근사한 아저씨는 도대
체 어디간 거냐고 질문하기 전에 먼저 제게 그 목소리 근사한 아저씨
가 어디로 간 건지 설명해주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일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아?"
할슈타일 후작은 이 기나긴 문장에서 그가 알고 있는 모 부류에 속하
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마법사와 사귄 적이 있소?"
"으어? 너, 어, 어떻게? 무슨 마법이에요?"
"……관둡시다. 그는 지금쯤은 턴빌의 어느 주점에서 친구들과 모여
앉아 그 날의 희한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듯하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자신이 만들어낸 시간을 자신이 가지기로 했기 때문이오."
아일페사스는 이 말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
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일페사스
는 단념하고 골드 드래곤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했다.
================================================================
박찬호는 날라차기 한 방에 7게임 출장정지 먹고 울산 앞바다에서 천
연개스가 솟아오르고 법무부는 쑥밭이 되고 서해상에선 남북한의 배가
박치기를 하고 노동계는 파업 조장건 때문에 분노 게이지 상승 중인데
다이옥신은 어쩌자고 저렇게 난리며 거제 앞바다에선 3조원 상당의 황
금이 실린 보물선 이야기… 이거야말로 팬터지군요.
팬터지 좋아하세요? 신문을 보세요. 바다에서 천연개스도 나오고 황
금도 나오니 조금 있으면 아틀란티스 제국의 고대 병기가 부활할 차례
입니다. (지누션을 보내서 막아야겠군요. 우리의 태권V로.)
정보과잉, 정보공해 등의 말이 더이상 SF의 소재가 아니군요. 정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음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즐겁게 삽시다, 여러분.
--------------------------------------------------------------------------------
(c) Nobreak Technologies, Inc.
Future Walker - 퓨처워커
--------------------------------------------------------------------------------
1999/06/10(02:11) from 210.115.123.111
작성자 : 이영도 (jin46@hitel.net) 조회수 : 2280 , 줄수 : 359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6
번 호 : 21864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6-10 00:35
제 목 : [F/W]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6
Future Walker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6.
창밖으론 흰 눈이 포근하게 내리고 있었다. 난로 위에 올려놓은 주전
자에서는 보골거리는 소리가 기분좋게 들려오고 있었고 벽난로에 장작
을 집어넣는 엑셀핸드의 모습도 안온하게 보였다. 엑셀핸드는 다시 장
작 하나를 던져넣은 다음 다른 사람들처럼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프라임 미팅이오?"
제레인트는 팔짱을 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머리와 어깨는 약간 높
이하고 두 눈은 감고 있었기에 누가 본다면 그냥 생각에 잠긴 모습이
라고 판단하기 좋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호비트와 갈림길의
신 테페리의 총본산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랬기에 아프나
이델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에델린을 돌아보았고 에델린 역시 입을
벌린 채 놀라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제레인트는 실눈을
떠서 방안의 면면을 죽 돌아보고는 히죽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하하. 이건 대륙을 공포에 몰아넣을 소식인 걸요. 테페리의 프리스
트가 모두 한 자리에 모인다면 나라도 그 주위 5펜큐빗 이내에는 접근
하고 싶지 않을 텐데요."
"적극적으로 찬성이야." 엑셀핸드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근엄하게 말
했다. "그리고 그 미치광이들의 모임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로 두각을 드러낼 녀석을 꼽아보라면 난 주저없이 제레인트를 들겠
어."
제레인트와 이루릴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엑
셀핸드를 즐겁게 했다. 제레인트는 저 먼 곳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있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건 찬성할 수 없어요. 나만 얌전히 있으면 된다니…… 대륙의 어
느 도시의 어떤 길이든 막고 물어보라고요. 테페리의 프리스트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아프나이델은 잠시 식은땀을 흘렸고, 이루릴은 참 복된 일이라고 생
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류반입 금지라니. 그걸 저한테 그렇게 강조해봐야 무슨 소용
이 있습니까. 테페리의 이름을 걸고! 나 아니라도 술병 들고 찾아갈
도반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맹세하겠습니다. 나는 악기를 준비해갈
생각…… 으윽! 고함지르지 마세요. 글쎄 아무리 술판 같은 것이 벌어
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강변하신다고 해도…… 아아, 그
런데 이 이야기는 자꾸만 가이너 카쉬냅의 다섯번째 바퀴 이야기를 떠
올리게 하는군요. ……제가 언제 말을 돌렸다는 겁니까? 어쨌든, 우리
종단으로서는 이게 두번째로군요. 그렇죠? 아, 예. 음. 그럼 프라임
미팅의 목적은 뭐죠?"
그리고나서 제레인트는 방안에 있던 이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아, 예…… 음, 예…… 오, 예…… 아니? 예…… 그런? 예…… 하!
예…… 어, 예…… 휴, 예……"
잠시 후, 엑셀핸드는 어떤 의심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고 그 의심
속에서 제레인트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
을 간파해내었다. 그래서 엑셀핸드는 노호성을 지르며 도끼를 들어올
렸다.
"이놈!"
쿠당탕! 제레인트는 엑셀핸드가 도끼를 들어올리자마자 침대 옆으로
몸을 날렸고 그래서 잠시 침대 저편으로부터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
다. 턱이 빠진 채 바라보고 있는 일행들의 시선에 정수리를 문지르면
서도 히죽히죽 웃고 있는 제레인트의 얼굴이 침대 저편으로부터 올라
오는 것이 보였다. 엑셀핸드는 그 얼굴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언제 끝난 거냐!"
"헤헤. 아마 세번째인가 네번째일 겁니다."
그란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이루릴을 돌아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이루릴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란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설명
했다.
"제레인트는 대화가 이미 끝났으면서도 우리들을 약올리기 위해 계속
대화하는 척한 거요. 그렇잖다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몸을 날렸겠소."
"아, 예……"
이루릴의 특별한 의미 없는 대답에 돌맨은 배를 붙잡고 웃어대었다.
그란은 그런 돌맨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지만 네리아는 입술을 비죽
거리며 말했다.
"자, 제레인트.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인지 말해봐요.
대답에 따라 들을 준비를 하거나 고문할 준비를 해야 하니까."
제레인트는 반색하며 말했다.
"말할 수 있는 겁니다만, 어, 고문 종류는 뭡니까?"
네리아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레인트라면 고문에도
호기심을 가질 것이라는 점을 왜 깨닫지 못했지?
"제레인트……!"
"아아, 알겠습니다. 사실 별 것 없습니다. 합창단 조직이라고나 할까
요."
"합창단이오?"
"테페리가 대답이 없으시답니다."
제레인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하지만 에델린은 가슴이
철렁하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대, 대, 대답이 어, 없어, 없다고요?"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예?"
"바이서스 임펠에 있을 때 기억나십니까? 엑셀핸드께서 하이 프리스
트를 만나고 싶다고 하시자 도스펠 씨는 하이 프리스트께서 몹시 중요
한 종단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하셨지요. 기억나십니까?"
"아, 예…… 기억납니다. 그러고보니 저 역시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하
이 프리스트를 뵙지 못했습니다."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 에델브로이를 불러내기 위한 것이었나 봅
니다.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작금에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에 대해 여쭤
보고자 주위를 모두 물리치고 밀실에서 몇날며칠을 에델브로이를 불러
내고 계셨나 봅니다. 하지만 독대하는 데는 실패하신 모양입니다."
"예?"
제레인트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오른손으로 얼굴을 바친 채 제
레인트는 불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어느 신께서 최초였는지야 모르겠습니다. 신들께서 대화에 응하시지
않은 거죠. 그런 대화가 자주있는 일이 아닌 만큼 더더욱 어느 신부터
그랬을 것이라는 점은 알 수 없죠. 어쨌든 에델브로이께서는 비교적
빠른 축이었던 것 같습니다. 폭풍은 강력한 만큼 의외로 약하기 때문
에 가장 먼저 고요해진 걸까요."
에델린의 얼굴은 트롤의 얼굴이 허락하는 한도를 조금 넘어서면서 파
랗게 질렸다. 제레인트는 머리를 떨군 채 계속 말했다.
"저희쪽에서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는 꽤나 여러번 시도했나 봅니다.
하지만 테페리께서는 방문객 사절의 현판을 내거신 것 같다는 결론만
얻어내었죠. 우리야 한적한 이 북쪽에 있어 모르지만 지금 저 남쪽에
서는 난리도 아닌 모양입니다."
"그런…… 황당한 일이……"
엑셀핸드는 신음하듯 말했다. 운차이는 빠르게 말했다.
"시간 때문이군?"
"그렇겠지요. 시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존재의 원인이니만큼. 결
국 이 사건에는 신들도 손을 댈 수 없게 된 모양입니다. 아까 대화 중
에는 말하지 않았지만 저는 알 수 있군요. 프라임 미팅으로 한 자리에
모여 고래고래 고함질러 도움을 청해도, 우리를 도와줄 신은 이제 남
지 않았다는 것을."
"그림 오세니아를 마지막으로."
이루릴의 말에 제레인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루릴은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
보았고, 그녀가 레드 서펜트호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운차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루릴은 조용히 말했다.
"최후의 헬카네스. 그분일 수밖에…… 당연하죠. 그리고 그 분도 끝
까지 함께하지는 못하고 중간에 돌아오셨군요. 이제야 이해되는군요.
왜 아일페사스인지……"
제레인트가 그 말을 받았다.
"드래곤 로드이기 때문이군요."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돌려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차분
한 태도로 설명했다.
"아일페사스는 드래곤 로드의 후계자이며 드래곤 로드께서 대미궁에
칩거하시고 계시는 이상 그녀가 실질적인 드래곤 로드의 자격을 가집
니다. 드래곤, 신을 갖지 않은 자들의 수장인 거죠. 이 사건의 결말이
무엇이든 간에 거기에 입회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자는 인간과 드래곤
뿐이겠군요. 신과 다른 모든 종족은 제외됩니다. 시간의 장인인 인간
과 그 시간으로부터 비롯되는 신들과 관련이 없는 드래곤만이 이 사건
의 결말을 지켜보게 될 겁니다. 드래곤의 대표는 아일페사스. 그럼 인
간의 대표는……"
"할슈타일 후작?"
운차이의 질문에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차이는 다리를 꼬며
팔짱을 꼈다.
"그럼 미와 신스라이프, 파의 역할은 뭔가."
"과거, 미래, 교차점."
"젠장…… 신학이 동원되어야 설명할 수 있는 거라면 설명을 듣는 영
광은 포기하지."
제레인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운차이의 투덜거림에 대해 미소
를 보내었다.
"신학? 글쎄요. 신이 모두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신학을 말한다는 것
은 우습군요. 멸종한 것들에 대한 학문은 고고학 아닙니까."
운차이는 자신도 모르게 팔짱을 풀었다. 제레인트의 미소 뒤에 숨어
있는 무섭도록 처연한 감정을 바라본 운차이는 침을 삼켰다.
"뭘하고 있나요, 파하스?"
"대개 사용되지 않는 질문이지만, 지금 이 광대에게는 '무엇을 하지
않느냐' 고 물어주면 좋겠군요. 마이 페어레이디."
"무엇을 하지 않고 있나요?"
"모든 것을."
"엑. 그럼 그냥 아까 질문에 대해 '아무 것도'라고 말했어도 되잖아
요."
"그 질문을 받은 순간 이 광대의 입술은 '아무 것도'라는 발음보다는
'모든 것을' 이라는 말을 발음하고 싶어졌기 때문이지요. 어휘의 노예
인 시인의 괴벽 정도로 이해해주셨으면 하외다."
"흐음. 내가 사실을 말해볼까요."
네리아는 가슴 위로 두 팔을 단단히 팔짱끼고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
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내 질문을 받는 순간 당신이 뭔가 하고 있긴 했는데 정확하
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생각해보
기 위해 시간을 끌고 싶었고, 그래서 시간을 끌면서 생각한 끝에 자신
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린 거죠. 자기변호의 기회
를 드릴 시간인 것 같군요?"
파하스는 껄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합니다."
"그럼 내가 가르쳐드리죠. 당신은 허밍하고 있었어요."
"허밍? 제가요?"
"예. 모르는 노래라서 정확하게 되풀이할 수는 없지만, 무슨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어요."
"음. 그랬군요. 그래서 뭔가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뭘 하고 있었는
지 떠올리지 못한 것이었군요. 그런데 이 외진 곳까지 거동하신 이유
가 이 외로운 광대를 달래주고자 하는 이유에서일 거라고 제 마음대로
추측해버려도 될까요?"
"그러세요."
네리아는 아무렇게나 대답하며 파하스가 앉아있던 바위에 앉았다. 그
리곤 파하스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말했다.
"와! 재주좋네요! 이 바위에 앉으니까 바다가 보이는군요. 주위가 온
통 숲인데도. 어떻게 찾아낸 거에요?"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수평선에 감탄하고 있는 네리아의 옆얼굴을 향
해, 파하스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뭘 걱정하고 있습니까?"
네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웃음기가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파하스가
정확하게 꿰뚫어본 것처럼, 거짓 명랑함을 만들어내던 네리아는 풀죽
은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것도 당신이 말해봐요."
"영광스럽게도, 저에 대한 걱정이겠지요."
"음음."
"동료들을 피해 언덕 위나 숲 속으로 숨어다니는 슬픈 얼굴을 한 소
심한 광대에 대한 염려가 당신의 심사를 어지럽게 한 것이겠지요. 그
래서 손수 이 미천한 시인을 찾아나선 것일 테고. 동정심은 그 어느때
라도 변치않을 아름다움을 가진 마음의 모습이며, 네리아양의 동정심
에 감사드립니다."
"자아아알 알고 있네요. 그렇게 잘 알면서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뭐죠? 식사 때 당신을 찾는 것도 지겹고 차마실 때 있지도 않은 당신
잔까지도 준비해야 되나 고민하는 것도 지겨워요. 우리는 조만간 떠날
텐데 당신은 아직도 여기서 엉덩이를 붙인 채 아무런 계획이 없는 것
처럼 구는 것도 보기 싫고."
"곧 떠난다고 하셨습니까."
"예. 에델린이 그랜드스톰으로 연락했고 카알로부터 귀환 명령이 돌
아왔어요. 아, 카알 모르시죠? 바이서스 임펠에 있는 우리 친구에요.
제레인트는 테페리의 프리스트들의 프라임 미팅에 참석해야 하고……
어쨌든 우리들은 돌아가야 돼요. 그리고 난 당신을 찾아나온 거구요."
파하스는 갑자기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저 남자가 보입니까."
"쳉 말이군요. 왜요?"
"저…… 아무리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짐작된다고 하시더라도 제가
이렇게 손을 들었으니 한번쯤 저 방향을 봐주시면 좋겠군요."
네리아는 혀를 조금 낼름한 다음 고개를 돌려 파하스가 가리키고 있
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언덕 위의 돌집은 이제 눈에 익은 모습이었고
그 앞에는 쳉이 뛰고 있는 모습이…… 응? 뛰고 있어?
네리아는 눈썹 위에 손바닥을 세운 다음 언덕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쳉은 언덕 위를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있었다. 왜지? 자세히 본 네리아
는 그가 아달탄과 함께 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둘은 저 헐
벗은 언덕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 목
적을 알기 어려운 동작들이었다. 네리아는 저들이 뭔가 위험에 처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저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하지만
파하스는 핏 웃었다.
"정말 재미나게 놀고 있군요."
"놀고? 어, 놀고 있는 거에요?"
"그렇습니다. 쳉은 이제 거의 짐승 비슷한 꼴이 되어있으니 저건 두
마리 짐승의 즐거운 놀이라고 해야겠군요. 두 마리의 강아지가 그러듯
이 그냥 유쾌하게 뛰어다니고 있는 겁니다."
네리아는 긴가민가하는 심정으로 다시 언덕 위를 주시했다. 그리고는
파하스의 말이 옳다고 느꼈다. 쳉은 아달탄을 껴안고 땅을 구르고 펄
쩍 뛰어오르고 한 순간 아달탄을 추적했다가 곧 아달탄으로부터 도망
쳤다. 아달탄은 꼬리를 마구 흔들며 그런 쳉에 호응하고 있었다.
정말 놀고 있네?
네리아는 갑자기 겁을 집어먹었다.
"서, 설마…… 이런! 제레인트를 불러오겠어요. 에델린도. 아아, 아
프나이델도! 모두들 끌고와야겠어요. 어서 일어나서……"
"아니, 괜찮습니다. 미친 건 아닙니다."
"하, 하지만 쳉이 저런 짓을 할 리가……"
"할 리가 없다고요? 왜 없습니까. 그는 지금 즐거울 텐데. 저 아무
것도 없는 언덕 위에서도 자신의 즐거움을 표현할 방법이 있으니 그렇
게 하는 겁니다."
네리아는 당황해서 파하스를 보다가 이번에는 수평선을 보았다. 파하
스는 다시 웃었다.
"아니, 미 양이 돌아오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쳉은…… 미 양을 기다리는 것이 즐거운 겁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쳉을 보고 있는 것이 즐겁군요."
================================================================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기대, 기대.
좋은 밤 되세요.
--------------------------------------------------------------------------------
(c) Nobreak Technologies, Inc.
Future Walker - 퓨처워커
--------------------------------------------------------------------------------
1999/06/17(00:11) from 210.115.123.111
작성자 : 이영도 (jin46@hitel.net) 조회수 : 1999 , 줄수 : 344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7
번 호 : 22173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6-16 00:42
제 목 : [F/W]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7
Future Walker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7.
쳉은 달리고 뛰어오르고 넘어져 뒹굴었다. 갑자기 일어나는 쳉의 모
습은 사람들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앉아있던 야수
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처럼, 쳉은 누워있다가 다음 순간엔 이미 서있
었다. 땅을 짚거나 허리를 일으키는 동작은 없었다. 그리고 쳉은 함성
을 지르며 몸을 회전시켰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원심력에 의해 떠오른 두 팔과 커다란 손은 쳉의 몸 주위에 원을 만
들었다. 아달탄은 황홀경에 취해서 컹컹거리며 그런 쳉의 주위를 따라
돌았다. 결국 눈이 홱 돌아버린 아달탄은 개는 그러지 않음에도 불구
하고 뒤로 걷기 시작했다. 그 동안에도 쳉은 계속해서 돌았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쳉은 어느새 춤을 추고 있었다. 생에 한두번,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해
잊고 순수하게 하늘을 경배하게 된 인간이 그럴 때의 모습으로 쳉은
두 팔로 하늘을 받치고 춤을 추었다. 쳉의 춤은 느리고 둔탁했다. 하
지만 거친 힘으로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회전의 끝에서 쳉은 땅바닥에 몸을 던졌다. 뒤로 걷고 있던 아달탄은
쓰러진 쳉에게 달려들었고 잠시 쳉과 아달탄은 서로 부둥켜 안은 채
서로의 몸을 핥아대며 낄낄거렸다. 쳉은 아달탄의 귀를 살짝 깨물며
으르릉거렸고 아달탄의 꼬리는 금방이라도 뽑혀나갈듯이 빙글빙글 돌
았다.
"도대체 무엇을 저렇게 즐거워하고 있을 수 있는 걸까요? 누구를 기
다리는 일이 흥분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해요. 하지만 저
건 그 정도의 흥분이 아니라 미칠 정도로 기분 좋다는 것이잖아요. 더
군다나 쳉은 감정결핍이라고요."
네리아의 이상스러워하는 표정을 대하며 파하스는 잠시 황홀한 느낌
을 받았다. 네리아는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작은 턱을 쓸어만지며 생
각에 잠겼다. 이완된 얼굴근육은 네리아의 얼굴 윤곽을 부드럽게 만들
었고 생각에 잠긴 두 눈은 깊어보였다. 파하스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
무 한숨처럼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말했다.
"타오르는 머릿결의 레이디. 이 미련한 광대의 머릿속으로 모든 선한
신들이 보내온 예지의 빛이 번득였고, 그래서 저는 그가 왜 즐거워하
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리아는 다시 파하스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기대감에 부푼 눈으로
파하스를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 파하스는 고개를 돌려 나무 옹이를
쏘아보며 말했다.
"쳉은 감정결핍이며 그가 좋아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퍽 드뭅니다.
좋은 술, 흥미진진한 이야기, 즐거운 노래, 나들이옷으로 성장하고 거
리를 걷는 발랄한 아가씨들…… 보통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 쳉을 즐겁게 만들지는 못할 겁니다. 그의 감정은 전부 미에게
보내어져 있죠."
"그건 여러번 들었어요. 그런데?"
"그래서 저는 저것은 서글픈 노력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감동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저것은 한 사나이가 가장 아름다워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즐겁습니다."
"아, 가설이 하나 떠올랐어요. 당신은 마법사에요."
"……저는 룬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가 안되니 내겐 룬이나 마찬가지에요. 쉽게 말해봐요."
"쉽게 말하죠. 그는 미 양을 돕고 있는 듯합니다."
"미를?"
"끝까지 그녀와 함께 걷지는 못했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와 끝까지
함께 걷겠지요. 그래서 쳉은 지금 한없이 즐거워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마법사 맞아. 쳇. 네리아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주책없는 태양은 지금도 저 하늘 어딘가를 비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일몰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태양과 함께 걸었으므로 신스라이프는 해가 졌을 거라는 생각은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햇빛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위를 가득 메운 것은 숨막
힐 정도로 많은 월광과 월광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암흑뿐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암흑도 당당한 빛의 한 가족이었다. 공간 속을 춤
추는 무수한 빛들은 암흑을 조금 별스러운 자신의 형제로 취급하고 있
는 듯했다.
이 전후관계는 어쩌면 사실과 반대일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빛이
암흑의 조금 독특한 한 형태일지도.
신스라이프는 자신의 속눈썹에 맺히는 무수한 월광의 편린들을 떨쳐
내려는 것처럼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빛살은 끈질기게 달라
붙어 아롱거렸다. 신스라이프는 포기하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회오리치며, 터져나갈듯이 몸부림치지만, 그 터져나가려는 힘으로 오
히려 자신을 단속하며, 빛은 기둥을 이루고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시간의 바늘을 떠올렸다.
이것은 눈 앞에 있는 사물을 어떻게든 자신이 알고 있는 무엇인가와
연관짓고 싶어하는 사람의 가소로운 노력이 가장 희극적으로 발휘된
모습이다. 지금 신스라이프의 눈 앞 암흑 속에서 춤추고 있는 시축은
시간의 바늘과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지도제작자들이 좋아하는
기호를 사용한다 해도 시축과 시간의 바늘이 비슷한 상징으로 표현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시축을 표현할 상징이 있을 수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어.
신스라이프는 자신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축은 그 자체로 상
징이고 기호였으며 의미였다. 동그라미와 화살표만 가지고도 남성을
표현할 수 있건만, 시축을 표시할 기호만은 만들어질 수 없을 것 같았
다.
신스라이프는 두 팔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의 가슴이 부풀어오르며
빛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왔다가 내뿜어져 주위를 어지럽혔다. 그는 빛
을 호흡하고 있었다.
"시축이여, 내가 될 너여."
신스라이프는 파의 언어로 말했다. 휘몰아치던 빛은 신스라이프의 입
으로부터 나온 빛에 놀라 주춤하며 물러나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다가
섰다. 빛은 신스라이프의 얼굴을 만지고 그 목을 만지고 몸의 가장 민
감한 부분들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차라리 기절해버렸으면 좋겠다
는 헛된 소망을 뿌리치며, 신스라이프는 격정적으로 말했다.
"나는 이곳에 왔다. 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나는 운명의 마지막에
서는 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무 아래 드러누워서 익은 과일이 떨어지기만 기다리시겠다
는 거지."
갑자기 들려온 비아냥거림에 신스라이프는 흠칫하며 몸을 돌렸다. 빛
과 암흑 이외에 다른 것이 그곳에 서있었다. 낮으면서도 정확한 발음
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딜 가도 사다리가 뭐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는 작자들이 있더라
고."
"네가…… 왔느냐. 어떻게? 너는 이곳에 올 수 없다."
신스라이프는 정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상대
방은 신스라이프처럼 빛 속에서 빛이 되어 있었고 빛을 호흡하며 빛으
로 말하고 있었다.
"난, 마법사거든. 저울눈 속이는 것이 취미야."
"이상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죠."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던 상대방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아, 이번엔 그 꼬마 아가씨인가? 그래요, 파. 이 아저씨 이름 기
억하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죠, 레이저씨?"
"꼬마 아가씨가 보고 싶어져서 마나라는 이름의 바람에 올라탔지."
레이저는 말을 맺으며 윙크했다. 신스라이프는 멋진 윙크라고 생각했
고, 파는 못말리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 온 이유가 뭐지?"
"어라? 다시 바뀌었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방이 과연 누군인
지 명확하게 모른다는 것은 매일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이 인간이라는
우주적 희극배우의 슬픈 숙명이긴 하지만, 지금의 내 경우는 그 숙명
의 무게가 보다 해괴한 형태로 어깨를 짓누르는군."
"용건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다급한 용건은 아닌 모양이군."
"그럴 수도, 아닐 수도. 그러고보니 당신은 다급하다라는 말의 의미
도 재해석하려고 들지 않나?"
신스라이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저는 두 손바닥을 가볍게 들어올
리는 매우 전통적인 제스춰를 취하고서 말했다.
"그래그래. 이곳까지 날아온 이유 중 한 가지는 이미 말했어. 꼬마
아가씨가 보고 싶어서. 나머지를 말할 차례지. 난 어떤 입장에 서고싶
어하고, 그것이 어떤 입장인지는 아직 모르고, 그래서 정보를 좀 알고
싶은 거야."
"……정보에 따라 내 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그래."
"안됐군. 내겐 협조자가 필요없는데."
"생각해봐. 힌트 한 가지. 난 협박을 사양하는 타입이 아냐."
신스라이프는 레이저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레이저는 빛으
로 휘파람을 불며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신호를 보내어왔다. 신스라이
프는 그 신호에 찬성할 생각은 없지만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레이
저는 바로 그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해내었다.
"일단 내 사정을 설명하지. 내겐 친구가 하나 있어. 나크둠이라는 이
름을 가지고 있고 그 이름을 상대방에게 각인시켜주는데 어려움을 별
로 느끼지 않는 멋진 친구야. 최근 그 친구에게 인상적인 사건이 있었
고 나는 그 사건들이 그 친구의 가녀린 정신에 어떤 상처라도 주지 않
을까 염려하고 있지."
"무슨 사건인가."
"죽었다 살아났지."
"그래……?"
"응. 당신이 선도했고 요즘의 대륙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유
행이 그 친구에게도 찾아든 거지."
"그런데?"
"그래서, 난 당신이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 관심이 생겼단 말이야."
"내가 하려는 것?"
"지금부터 당신이 시간과 하나가 되려는 것은 알고 있어. 조금 전에
들었으니까. 정확하게 말해주면 좋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시간과
하나가 되려는 거지?"
시축은 차라리 으르렁거리고 있는 듯했다. 혼돈스러운 빛과 암흑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스라이프와 레이저는 그림자가 없는 상대방을 물끄
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신스라이프가 말했다.
"질문의 이유는? 네 친구라는 그 자가 도로 죽게 되는 거냐고 묻는
거라면 아니라고 대답해주겠다.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한 인
간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끝이자 최종결과지. 그러나 이제 끝은 인간에
게 찾아들지 않는다."
"아, 말을 안했군. 그게 문제인데, 사실 그 친구 인간이 아냐."
"뭐라고?"
"나크둠은 오크지. 그 친구의 문제이자 내 문제의 시작이 바로 거기
인데, 인간은 죽지 않겠지만 오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영원에 필적하는 순간이 흘렀다. 이 가공할 아름다움 속에 서있으면
서도 레이저는 맥주 한 잔과 다리를 던질 수 있는 테이블 하나가 있으
면, 그리고 손에 카드들을 모아쥐고 그 너머로 상대방의 눈을 비웃듯
이 바라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물론 소매 속에 숨겨둔
한 장은 그를 황홀하게 만들 것이다. 레이저는 마른 입술을 조심스럽
게 움직여 말했다.
"나는 쓰레기였어. 지금까지도 나는 많은 시간들을 당신이나 당신 선
임자들에게 보내어왔어. 따라서 또 그런 상황에 빠진다고 해서 그렇게
괴로워할 것 같지는 않군. 내 사부는 나를 가르치면서 올로레인의 부
활을 꿈꾸어왔고 난 사부의 비위를 맞추어주는 데서 약간의 흥미도 느
꼈지. 하지만 사부님이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없었지. 그래. 나 자신의 비위도 맞추고 싶지 않았어. 쓰레기
로 살았지. 아마 당신이 가장 좋아할 타입의 인간이 아닌가 생각되는
데."
신스라이프는 미소지었다. 레이저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따라서 당신이 내 시간을 가져가겠다고 해서 신경질날 것 같지는 않
아. 하지만 친구의 경우는 달라. 우습지만, 난 그들을 만났을 때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런 감정들은 누가 뭐래도 소중한
거야. 그 작은 감정에 목숨도 집어던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예를 들 필
요까지는 없겠지."
레이저는 자주빛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잖아. 인간들 따위,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냐. 하지만
오크의 문제로 넘어가면 내 입장에도 극적인 변화가 생길 수 있어."
"웃기는 녀석이군."
"고마워. 내 입장에 동조해줘서. 시간과 여건이 괜찮다면 당신과 함
께 레이저를 비웃어주고 싶지만 여건이 좋지 못하군. 자, 말해줘."
"뭘 말이냐."
"인간들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시간을 모조리 당신에게 보내게 될 거
야. 그렇지? 그들 어리석은 종족에게 묵념을. 이 멍청한 종족은 괴물
을 낳아버렸어. 당신을 낳았다는 것만으로 인간은 깡그리 멸망해도 좋
아. 그리고 그 멸망 방식이 영생이니 가장 어울리는 형벌이기도 하고.
하지만 오크는 어떻게 되지?"
"네 예상이 맞을 것이다."
"더불어 영생이란 말이군."
"그래. 시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존재 원인이다."
"삼라만상의 원인이란 말이지. 당신은 삼라만상의 끝을 모조리 챙겨
가고. 흐음."
"오크는 죽지 않는다. 네 친구라는 그 오크 역시 죽음을 무서워할 필
요가 없다. 그의 죽음도 내가 가져갈 테니. 이제 안심인가."
레이저는 고개를 두번 끄덕인 다음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늘어진 앞
머리카락들이 빛 속에 흔들리며 반짝거렸다. 레이저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싫어."
신스라이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레이저는 아래
를 내려다본 채 말했다.
"내 친구 이야기만 자꾸 해서 미안한데, 내겐 최근에 생긴 친구가 하
나 있어. 그 친구 역시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 때 어
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매우 인상적인 친구지."
"이젠 네 친구가 인간인지부터 묻고 싶군."
"거인이지."
"……그덴산의 거인?"
"그래."
"올로레인, 정말 해괴하군."
"그래. 그래서 좋은 점도 있어. 사람들에게선 절대로 구할 수 없는 답
을 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거든. 계속 말하지. 거인은 휴식을
원하고 있더군. 대왕의 말을 빌리자면 약속된 휴식 말이야."
레이저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결정했어."
"뭘 결정했나."
"인간은, 이 빌어먹을 종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소중함
을 모르고 제멋대로 낭비하며 살아오다가 결국 당신 같은 괴물을 낳은
인간은, 그래, 홀라당 망해버려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이 인간들은, 그
래도 한 가지 받아마땅할 선물을 가지고 있어. 유피넬과 헬카네스가
시간 대신에 인간에게 주었던 바로 그 선물. 절대로 양도될 수 없고
양도할 수도 없는 선물."
레이저는 팔짱을 꼈던 두 팔을 천천히 벌렸다.
"인간은 시간을 만들어내는 일을 중지하고 쉬고 싶을 때 쉬게 해주어
야 해."
================================================================
흐음. 서해상의 교전에 대해 친인척들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이 라면
몇 박스 사둬야되는 것 아닐까. 라는 말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웃고 있
습니다. 물론 농담이긴 했지만 역시 우리나라는 분쟁지역이군요. 타자
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실이오? 멕시코, 크로아티아, 이집트 선수들이
불안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죠. 공차러 왔다가 엄한 전쟁에 말려들
게 되었다고 징징거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알려줬을까?)
--------------------------------------------------------------------------------
(c) Nobreak Technologies, Inc.
Future Walker - 퓨처워커
--------------------------------------------------------------------------------
1999/06/17(00:13) from 210.115.123.111
작성자 : 이영도 (jin46@hitel.net) 조회수 : 2117 , 줄수 : 377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8
번 호 : 22174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6-16 00:42
제 목 : [F/W]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8
Future Walker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8.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휙 쳐들었다. 그녀의 굳은 얼굴을 보며 미와 할
슈타일 후작은 당혹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떠오를 수 있을지조차 의심
스러운 표정이었다.
엄격한 얼굴로 북쪽을 바라보던 아일페사스의 입매에서 희미한 미소
가 떠올랐다.
"마법사……"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일페사스?"
할슈타일 후작이 조용히 물었지만 아일페사스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
다. 그녀는 시선을 북쪽에 고정시킨 채 황홀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마법사였나. 그런 것이었나. 이것은 모든 신들도 나도 알 수
없었다. 당연하지. 이것이 바로 인간의 수법이니까 우리로서야 알 수
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행하여지고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이해되는
군."
아일페사스는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마법은 드래곤의 것이었으나, 드래곤은 마법을 창조한 것에 대해 자
랑스러워할 수 없다! 드래곤이 자랑스러워해야하는 것은 그가 올바른
제자를 찾아낸 사실이다! 그가 만들어내었으나 그의 것일 수 없는 것
을 올바로 배워 익히고 자신의 것으로 오롯이할 유일하고 정정당당한
제자를!"
"아일……페사스?"
할슈타일 후작은 주춤거리며 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미의 얼굴에도
똑같은 당혹감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후작은 다시 아일페사스를 돌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일페사스는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와 후작을 돌아보았다.
"인간들아."
"예?"
"아름답고, 착하고, 추악하고, 사악한 인간들아. 선량한 마음으로 사
악을 행하고 지독하게 못된 손길로 한 떨기 꽃을 쓰다듬는 이 배은망
덕하고 사랑스러운 종족들아. 제기랄 것들. 도대체 너희들은 뭐냐. 뭐
때문에 이다지도 지독한 증오와 사랑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종족이
세상에 발 디디고 걷게 된 거냔 말이다."
미와 할슈타일 후작은 얼어붙은 모습으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는 흐느끼며 말했다.
"너희들을 좋아해."
"아일페사스?"
"가자!"
할슈타일 후작은 멀미가 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눈 앞의 아일페
사스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의 모습 그대로 어린 소녀였다. 하
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녀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
을 정도로 거대했다. 빌어먹을, 이것이 드래곤인가? 아일페사스는 어
깨로 숨을 쉬며 격정적으로 외쳤다.
"가겠어! 드래곤이 간다. 드래곤의 제자의 모습을, 드래곤의 후계자
의 모습을, 드래곤의 자식의 모습을 똑똑히 보아주겠다! 너희들은 드
래곤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드래곤은 인정받는데 관심없지만,
그래도 드래곤은 간다. 미! 할슈타일! 가자! 모든 드래곤과 드래곤의
친구 드래곤 라자여! 가자!"
현재 대륙에서 드래곤을 가진 유일한 드래곤 라자 레니는 당황한 표
정으로 조금 전까지 옆에 앉아있던 사내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쓰고
있던 모자가 날아올라 방파제 위를 데굴데굴 굴러갔지만 레니는 그에
신경쓰지 않았다. 델하파의 항구. 아름다운 항구 도시의 어느 곳에도
심상치않은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내는 무엇에 찔린 것
처럼 벌떡 일어나서는 북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레니는 조심스럽게 사
내를 불렀다.
"지골레이드?"
지골레이드의 낚시대는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더이
상 레니와 함께 델하파의 방파제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는 평범한 낚
시꾼이 아니었다. 언어와 표정이 전달할 수 없는 감정들도 주고받는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였기에 레니는 지골레이드의 격렬한 감정 변화에
놀랐다. 하지만 겁내지는 않았다. 지골레이드의 감정 중에 분노는 전
혀 존재하지 않았다.
블루드래곤 지골레이드의 악물린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 같은 목소리
가 울려나왔다.
"왕이여……! 나는 함께 갑니다!"
"드래곤!"
돌맨 할슈타일은 튕기듯 솟아올랐다. 그란은 기겁했고 운차이는 벌떡
일어섰다. 돌맨은 방 한가운데 똑바로 선 채 눈을 허옇게 뒤집고 있었
다. 그의 주위에 있던 모든 자들이 저마다 무슨 말들을 외쳤지만 돌맨
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평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고 느
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감각의 엄습에 돌맨은 기절할
것만 같았다.
"으아아아!"
돌맨은 문쪽을 향해 돌진했다. 앞을 가로막는 의자를 걷어차고 문을
향해 몸을 날리는 그의 모습에 엑셀핸드는 어이가 없는 얼굴이 되었
다. 하지만 운차이는 어느새 그 뒤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미끄러지
듯 움직인 운차이는 돌맨의 오른쪽 어깨를 잡아채었다.
"이봐, 왜이래!"
다음 순간 운차이는 하늘과 땅의 극적인 위치이동을 목격하게 되었
다. 돌맨은 왼손으로 운차이의 손을 붙잡으며 몸을 뒤틀었고 운차이는
그대로 허공을 날아 벽에 부딪혔다. 운차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
력은 공중에서 몸을 웅크려 충격을 줄이는 것 뿐이었다. 운차이를 그
런 식으로 집어던진 돌맨은 문짝을 허공으로 날리며 밖으로 뛰쳐나왔
다. 그러나 돌맨은 더이상 달려가지 않았다. 부서진 문을 통해 달려나
온 사람들은 눈밭에 무릎을 꿇은 채 북쪽을 쳐다보고 있는 돌맨의 뒷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버려진 아이, 슬픈 방랑자 돌맨이 더이
상 존재하지 않았다. 돌맨은 두 팔을 들어올리며 드래곤 라자로서 외
쳤다.
"드래곤이여, 드래곤이여!"
카르 엔 드래고니안. 대미궁의 가장 깊은 호수 속에서, 드래곤 로드
의 거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자유롭고 광대한 사유는
거세게 맥박치고 있었다. 가장 어둡고 가장 깊은 그 물 속에서 드래
곤 로드는 말했다.
"거침없이 가라. 너는 나다."
폭포수 같은, 그러나 폭포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물이 치
솟아올랐다. 대미궁 전체가 전율하는 가운데 대미궁의 호수는 폭발하
는 기세로 갈라졌고 그 속으로부터 황금의 거체가 솟아올랐다. 비산하
는 물방울들이 대미궁의 벽을 때리고 엄청난 공명음을 만들어내었다.
그 물보라의 한 가운데서 당당하게 일어선 드래곤 로드는 힘있게 외쳤
다.
"아일페사스! 드래곤! 드래곤 로드여! 가라!"
허공으로 솟아오른 레이저는 공간을 부유하는 빛을 박차며 다시 몸을
뒤집었다. 눈 바로 옆을 지나쳐가는 무수한 빛의 탁류에 눈이 멀어버
릴 것 같았지만 레이저는 정신을 집중하며 신스라이프의 궤적을 추적
했다. 레이저는 떠다니는 무수한 빛 사이에서 신스라이프의 모습을 가
까스로 발견했고 그 방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레이저의 손이 아래로 조금 내려갔다.
"파이어볼!"
레이저의 손으로부터 튕겨져나온 불덩어리는 신스라이프의 몸을 비켜
갔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눈덮인 땅바닥을 후려쳤다. 콰과과과광!
얼음이 박살나며 집채만한 얼음덩어리들이 수증기와 얼음의 화살들과
함께 치솟아올랐다. 이 아래는 바다였던 것이다.
시축을 휘감고 돌며 그 자체로 시간이었던 빛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
방을 휘저어대었다. 그 사이로 날아오른 얼음조각들은 하나하나가 최
고로 연마된 보석인 양 빛을 뿜어대며 모든 공간을 유린했다. 신스라
이프는 빙긋 웃었다.
"얼간이! 넌 네가 원하는 것을 이웃의 이름으로 걷어차는 보편적인
비겁자야!"
얼음바닥이 갈라지며 곳곳에서 바닷물이 치솟아올랐다. 신스라이프는
갈라지는 얼음과 빙산을 밟으며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하늘을 날고
있던 레이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얼음 조각들은 미친듯이 허공을
질주하고 있었고 신스라이프의 몸 주위에도 사정없이 날아다니고 있었
지만 그 몸에 접촉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신스라이프는 바다 속으
로 가라앉는 거대한 얼음덩어리의 첨단부를 밟으며 치솟아올랐다. 레
이저는 눈 앞으로 다가오는 신스라이프의 손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커어억!"
파리를 잡아채듯이 레이저의 목을 잡아챈 신스라이프는 그대로 그를
아래로 내리밀기 시작했다. 레이저는 신스라이프의 손을 부여잡고 다
리를 힘없이 버둥거렸지만 그의 목을 움켜쥔 신스라이프의 손은 꼼짝
도 하지 않았다. 신스라이프는 그대로 레이저를 얼음바닥에 메칠 기세
였다.
"으아아아아!"
얼음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레이저는 신스라이프의 손 안에서 사라졌
다. 신스라이프는 맨주먹으로 얼음바닥을 치게 되었고 얼음은 그대로
파괴되었다. 신스라이프는 이를 갈며 몸을 날렸다. 그가 서있던 자리
에서 바닷물이 치솟아올랐지만 신스라이프는 조금 떨어진 곳의 얼음을
밟으며 섰다. 사방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 저멀리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는 레이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다리는 힘없이 떨리고 있었지만
레이저는 웃고 있었다.
"지금의 네…… 모습을 봐, 신스라이프."
신스라이프는 씩 웃으며 레이저를 향해 걸어갔다. 다가오는 신스라이
프를 쳐다보며 레이저는 다급하게 말했다.
"생각해! 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넌 지금 무의미한……"
"행동을 하고 있지!"
대답과 함께 신스라이프의 다리가 날아왔다. 레이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날아가서 눈더미 속에 파묻혔다. 하얀 눈 위로 선혈이 길게 직
선을 그었다. 레이저는 온몸을 불타게 만드는 고통과 차가운 얼음의
감각 속에서 유형당하며 헐떡였다.
"당연하잖아! 난 바로 시간이 될 것이다. 결과가 될 것이다! 허무함,
아쉬움, 애닯음이 될 것이다! 그런 내 행동에 의미가 있을 턱이 있나!
하하하!"
레이저는 몸을 일으키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일어설 수야 있겠지만,
일어서자마자 기절해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이저는 돌
아누운 자세가 되려 애썼다. 고통은 초당 수십회의 비율로 레이저의
몸을 난타해대었고 레이저는 비명과 욕설을 내지르며 간신히 돌아누웠
다. 신스라이프는 그런 레이저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하지만 레이저
의 입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신스라이프는 더이상 웃을 수
없었다.
"꼬마 아가씨."
"뭐라고? 너!" "날 불렀나요. 수줍음 많은 늙다리 아저씨?"
신스라이프는 급격히 정지하는 자신의 몸에 대해 욕설을 퍼부어댈 수
도 없었다. 입술의 움직임까지도 제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는
표면으로 떠올랐고 신스라이프는 저주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파는 레
이저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레이저는 폐가 박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해하며 말했다.
"그렇게 쉽게…… 나설 수 있는 것을 보니…… 꼬마 아가씨는 저 천
치에게 찬성하고 있는 듯하군."
"반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지금의 무엇을 증오……하는 건가…… 무엇에 대한 증오가…… 너의
개체성을 포기하게까지 만들었나."
"증오? 없어요."
"그……럼?"
"난 잃어버린 시간들 속에 준비되어있었고 허무함으로서 태어났어요.
내 개체성이 원래 그렇죠."
"왜……"
"왜라고 물었어요? 그 질문을 당신에게 돌려주겠어요. 당신은 왜 그
랬죠?"
레이저는 힘없는 눈으로 파를 올려다보았다. 파는 흥분하는 기색없
이, 하지만 또박또박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조금 전 자신의 입으로 말했어요. 당신이 쓰레기였다고. 그
리고 당신은 도박사에요. 그럼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충 짐작
할 수 있어요. 뻔하죠. 숙취에 찌든 머리를 흔들며 늦으막하게 일어나
요. 눈을 뜨고 가장 먼저 찾아오는 감정은 가야할 곳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당혹과 낭패감이죠. 해야할 일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도 함
께 찾아올 테고. 그리고 당신은 마법사더군요. 습관적으로 마법을 메
모라이즈하는 일을 하겠군요. 어디에 쓰일지도 모르면서. 그리고는 스
스로 비참해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믿는 것처럼,
혹은 누구나 다 그렇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처럼 음식을 찾아요. 구할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을 먹는 일에 모든
관심을 쏟아요. 구하지 못했을 경우 공복이 당신의 머리를 설령 맑게
해줄 수는 있곘지만 그 맑아진 머리로 할 일은 없어요. 그 때부터 당
신이 해야 할 일은 저녁의 도박판이 벌어질 때까지의 시간들을 어떻게
든 치워버리는 것이겠죠."
고통과 부상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지만 레이저는 박수를 치고싶었
다. '정말 정확해!' 그리고 레이저는 그런 자기기만을 생각하는 자신
에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싶을 거에요. 그 지루한 시간들을 누가 치워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루 왼종일 도박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
죠? 그리고 다른 도박사들도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고 있을 거에요. 가끔은, 아주 가끔은 비슷비슷한 작자들을 모아놓고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도박만 칠 때도 있을 거에요.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죠. 대부분의 나날에서 당신은 지루함과 심심함에 몸부림치
며 저녁 시간을 애달프게 기다리고 있었을 거에요. 그리고 마침내 지
쳐빠진 정신으로 도박판에 끼어들게 되는 거죠. 술에 좀 취했을 수도
있고. 그리고는 그 지긋지긋한 도박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도박을 하는 거죠. 카드 한 장을 잡을 때마다 자신을 기만하
면서."
"이봐, 꼬마 아가씨……"
"무슨 변명거리를 생각해내었는지 모르겠지만 조용히 있어요. 말해봤
자 난 듣지 않을 테고, 당신에겐 말하는 것이 너무 힘든 일이겠군요.
도박판의 그 초조감, 숨막히는 느낌, 긴장감, 담배연기, 뒤섞여 춤추
는 카드들이 정말 재미있고 자극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도박판이 끝나고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일어나야 할 때, 당신은
가끔은 생각하겠죠.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러면서 쓰러져 잠드는 거죠. 다시 처음부터 시작될 것을 알
면서."
파는 슬픈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당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의 시간들을 누군가에게 보내고 있었
죠?"
"그래."
레이저는 이상할 정도로 명확한 자신의 발음에 놀랐다. 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나날들이 결국은 시시하게 끝날 것도 알고 있었죠? 도박
판에서 사는 만큼, 언제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거나 혹은 당신 스스로
자신을 죽이게 될 것을 알고 있었죠? 혹은 늙어죽을 수 있을지도 모르
지만, 살해당하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겠
죠?"
"그래."
"나도 그래요."
"꼬마야…… 넌 아냐. 넌 그렇지 않아. 나는 인생의 쓰레기고 네가
말한 것과 똑같은 버러지이지만 넌, 그처럼 빛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
는 넌 아냐."
파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레이저를 내려다보았다. 레이저가 그녀의 눈
이 반짝인다고 생각했을 때, 파는 뒤로 물러나며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이 본 것은 당신의 눈 안에 있는 것이겠죠."
"아, 아냐. 파! 기다려……!"
"미안하게 됐군, 올로레인. 네가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서."
레이저는 이를 악물었다. "신스라이프."
"그래. 나다."
대답하며 신스라이프는 무릎을 굽혔다. 레이저의 옆에 무릎을 꿇은
신스라이프는 오른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네 괴상한 친구들은 죽지 않겠지만, 넌 죽여주겠다. 네게 약속되었
던 휴식으로 가라."
레이저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공포가 다가와야 당연하겠지만
레이저는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그의 가슴 속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안타까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레이저는 신스라이프의
미소를 보면서도 아무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 때 천지를 진동시키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심판하겠다!"
아일페사스의 호령소리에 신스라이프는 몸을 돌렸다. 그리곤 암흑 속
에 떠오른 골드 드래곤의 모습에 주춤했다. 암흑 속을 배회하던 무수
한 빛들은 골드 드래곤의 황금의 몸 위에 현란한 무늬들을 만들어내었
고 그래서 아일페사스의 몸은 초현실적인 빛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아
일페사스는 신스라이프를 향해 다시 외쳤다.
"심판하겠다!"
"네가 무엇을!"
"너와 모든 인간을!"
신스라이프는 몸을 뒤로 날려 다가오는 아일페사스에 대한 대응자세
를 갖추었다. 암흑 속에 떠오른 황금의 산 같은 모습으로 아일페사스
는 신스라이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거대한 몸 아래에서 신스라
이프는 두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다.
"미!"
미는 슬픈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안녕, 파."
================================================================
(서해안에 사시는 분들은 더욱더) 좋은 밤 되세요.
--------------------------------------------------------------------------------
(c) Nobreak Technologies, Inc.
Future Walker - 퓨처워커
--------------------------------------------------------------------------------
1999/06/21(02:46) from 210.115.123.112
작성자 : 이영도 (jin46@hitel.net) 조회수 : 1924 , 줄수 : 312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9
번 호 : 22362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6-20 02:52
제 목 : [F/W]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9
Future Walker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9.
파는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곳엔 냉엄한 얼굴을 한 신스라이프만
이 있었다. 미의 두 눈이 투명하게 변했다.
미의 옆에 서있던 할슈타일 후작은 불타는 눈동자로 신스라이프를 바
라보다가 천천히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달려나가는
대신, 후작은 검을 땅에 세우고 그 폼멜 위에 두 손을 얹은 채 기다렸
다.
드래곤 로드. 말하시오.
아일페사스는 그런 후작을 내려다보며 그가 드래곤 라자임을 확실히
깨달았다. 당신이 내 라자가 되어주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할슈타일
후작. 짧은 상념은 찾아왔던 것처럼 빠르게 사라져갔고 아일페사스는
저 아래의 신스라이프를 향해 말했다.
"심판에 앞서 변론을 듣겠다. 네게 말할 기회를 주겠으나, 먼저 드래
곤의 말을 들어라, 신스라이프."
"말해보시지."
아일페사스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고 그래서 그 거대한 머리는
까마득한 저 하늘 위쪽에서 신스라이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생각하고 대답하라. 나는 이곳에 내 의지로서 서있는 것이 아니
다. 나는 모든 드래곤으로서 이곳에 서있다. 개체로서의 나였다면 이
곳에 오지도 못했을 터. 따라서 내가 내리는 심판에 하나의 개체인 드
래곤 아일페사스, 어떤 증오와 어떤 열망을 가진 자의 의지는 개입하
지 않는다. 또한 이곳엔 모든 신의 의지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 이유
는 너 스스로도 잘 알고 있겠지."
"물론. 필멸자들이 부활한 것의 역전된 상황이지."
"그래. 저 불멸자들께서는 사망하셨다. 사망이라는 단어는 사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단어이지만 이 경우엔 그 이외에 다른 말을 사용할
수 없다. 그렇지만 드래곤은 그것만을 말한 것은 아니다."
"아아, 그래. 드래곤이기 때문이지. 만일 이곳에 엘프가 있었다면 그
랑엘베르의 뜻이 개입될 테지. 호비트가 있었다면 테페리의 뜻이 개입
되겠지. 하지만 이곳에 있는 건 당신 드래곤 뿐이지."
"그렇다. 그러므로 너는 다른 어떤 의지의 개입도 없는 상태에서 공
정하게 네 행동을 심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저 무정한 시축과 드래곤
에 의해."
"잘 이해했어. 하지만 한 가지 이해가 안되는 사소한 문제가 있는데.
심판받아야할 내 행동이라는 것이 뭐지?"
"너의 존재."
신스라이프는 왼손을 옆으로 홱 뿌리며 외쳤다.
"그것은 시간이 심판할 일이다. 멍청한 드래곤 녀석아! 나는 너희들
빌어먹을 시간바퀴 속의 다람쥐에게 심판받고 자시고 할 자가 아니다!
어떻게 네가 나를 심판하겠다는 건가! 너는 시간 속의 존재고 나는 시
간 밖의 존재다! 모든 신들조차도 결국 시간 속의 존재이기에 나에게
개입할 수 없음은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감히 어떻게……"
"시간은 누가 만드는가."
아일페사스는 화내지 않았다. 다만 엄격한 어조로 말했을 뿐이다. 그
리고 신스라이프는 입을 다물었다.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는 신스라이
프를 향해 아일페사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인간이 시간을 만든다. 그처럼 건방진 네녀석이라 해도 이것은 부인
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야말로 시간의 장인이다. 그리고 시간의 부
모다. 너는 그 시간 자체가 되기 위해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렇다
면 너는 모든 인간들의 자녀가 되려는 것이다."
잠깐 멈추었던 아일페사스의 목소리가 다시 흔들림없는 울림으로 다
가왔다.
"이 점에서 다른 모든 종족들과 드래곤, 그리고 신들마저도 개입할
수 없는 이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시간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들의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그 시간들을 그들 모두의 후계자인 너
에게 주고싶어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신스라이프는 도발적인 눈으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너의 심판이라는 것이 모호해지는군. 내 부모로부
터 그들의 창조물을 상속받겠다는데 네가 무엇을 심판하겠다는 거지?"
"네가 과연 인간의 올바른 후계자인가 하는 것을. 그것은 인간도 아
닌, 너도 아닌 다른 자, 모든 신들과도 관련없는 자, 바로 드래곤의
몫이다."
신스라이프는 잠시 침묵하며 아일페사스를 올려다보았다. 아일페사스
의 거대한 모습은 바라보고만 있어도 외경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
지만 신스라이프의 마음 속에서 그런 감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후 신스라이프는 웃으며 말했다.
"흥미롭군."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돌려 뒤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시축은 암흑 속
에서 휘황한 도도한 회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뒤틀려 흐르고 산산이
비산하는 빛들은 공간 속에서 끊임없는 윤무를 계속하고 있었다. 신스
라이프는 다시 아일페사스를 보았다.
"흥미로와…… 그래. 심판이 끝나고 내 존재를 인정하면 너희들은 정
해진 운명 속으로 순순히 사라지겠다는 건가?"
"그렇다."
아일페사스는 드래곤으로서 대답했다. 신스라이프는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아일페사스를 보았다.
"그렇다. 드래곤은 객관적으로 심판할 것이고 드래곤의 심판이 네 존
재를 지지한다면 드래곤은 멸망을 받아들이겠다."
할슈타일 후작의 악문 턱이 떨렸다. 시간을 만들어내는 인간이 그 시
간을 신스라이프에게 준다면, 이제 다른 존재들과 신에게는 시간이 주
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영생할 것이며 영생은
다른 의미에서 멸망이다. 그러나 드래곤은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겠다
고 말한 것이다. 시간을 창조해내는 것은 인간이기에. 그러나 아일페
사스는 조금 전과 똑같은 엄격함으로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만, 드래곤의 심판이 너를 지지하지 않을 경우 넌 300년만에 처음
으로 골드 드래곤의 공격을 받는 자가 될 것이다. 아니, 이런 비유도
옳지 않다. 너는 신들이 이 세계를 떠난 이후 드래곤 전체의 공격을
한몸에 받게 되는 최초의 존재가 될 터이다."
"그거 영광스럽겠군, 껄껄껄."
신스라이프는 저 가공한 위협이 전혀 근심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호방하게 웃었다. 아일페사스는 자신을 억제하며 질문했다.
"드래곤은 묻겠다. 너는 인간의 적자인가?"
신스라이프는 폭발하듯 외쳤다.
"멍청한 도마뱀 녀석, 그렇다! 인간들이 내 존재에 동의하지 않았다
면 나는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연한 질문을 왜 한단 말이
냐! 인간들이 원했기에 내가 태어나게 된 것이란 말이다!"
아일페사스는 찌푸린 눈으로 신스라이프를 내려다보았다. 신스라이프
는 갑자기 몸을 돌려서는 땅바닥에 쓰러져있는 레이저를 향해 걸어갔
다. 그의 손이 눈더미 속에 쑤셔박혀있던 레이저의 뒷덜미를 붙잡아
들어올렸다. 레이저는 마치 가벼운 손가방이나 되는 것처럼 들어올려
져 허공에 대롱거리게 되었다.
"이놈에게 물어봐라! 이놈에게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팽개쳤는지 물
어보란 말이다! 이 덜떨어진 도박사놈이 그가 만들어낼 수 있었던 시
간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물어봐!"
설령 아일페사스가 그런 질문을 했다 하더라도 레이저는 대답할 상태
가 아니었다. 레이저를 쥐고 흔들던 신스라이프는 그를 앞으로 내던졌
고 레이저는 흰 눈밭 위에 혈흔을 남기며 다시 쑤셔박혔다. 이건 어쨌
든 타인에게도 권장하고픈 체험은 아니군. 하지만 이런 체험을 나 대
신 경험하게 하고픈 녀석들이 몇몇 있기는 하지. 졸도하고픈 고통 속
에서도 레이저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신스라이프는 레이저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피에 젖은 손을 들어 할슈타일 후작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놈에게 물어봐라!"
할슈타일 후작의 눈이 번득였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저놈은 죽었지만 되살아났다! 저놈뿐만이 아니야. 무수한 죽었던 인
간들이 되살아났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가?"
아일페사스는 천천히 대답했다.
"네가 시간을 멈췄다는 것을 의미하지."
"질문을 똑똑히 이해하고 대답하기 전에 생각을 해라, 멍청아. 그들
이 무엇때문에 부활했는가?"
"아쉬움과 그리움과 슬픔. 남겨진 hjan 때문이지."
"그래. 그들은 시간 대신에 주어진 선물에 만족하지 않았어! 그들이
원했던 것은 시간을 만들어내는 거야. 너 드래곤이나 다른 무수한 신
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를 위해! 그들은 시간을 만들길 원하
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영생이야! 왜 죽기를 원하는 자가 없지? 왜 자
살을 죄악으로 보지? 그들은 시간을 끝없이 만들어내길 원하고 있어!
그리고 그것을 만족시켜주는 존재는 지금까지는 없었어. 왜 허무함을
느끼지? 왜 태어날 때부터 슬픈 거지? 왜 죽을 때까지 결여감을 느끼
며 무엇인지도 모를 것을 찾아 끝없이 헤매는 거지? 그들을 만족시켜
줄 것이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왜 끝없이 이 황량한 세상을,
그들이 찾는 것이 없기에 황량한 세상을 방황하는 것이지? 그들을 만
족시켜줄 것이라고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어!"
신스라이프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이젠 내가 있다. 그리고 나뿐이다. 유피넬과 헬카네스가 멍
청하게 주었던 죽음 따위는 그들이 원하는 선물이 아니야! 나다. 나야
말로 인간이 가장 깊은 마음 속에서부터 원하는 그들의 소망이란 말이
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시간을 영원히 가져가주는 자. 그것이 나다!
그리고 내가 있으므로 그들은 영원히 자신이 바라는 일, 시간을 만들
어내는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일페사스는 침울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신
스라이프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인간이 원하지 않았으면 태어날 수 없었고 인간이 원했기에 태
어났으며 그러므로 나는 인간의 적자다. 그것도 단 하나뿐인 적자다.
자, 오만한 드래곤 녀석아. 심판인지 뭔지를 해보시지? 내가 인간의
적자임을 선언하라!"
입을 다문 아일페사스 대신, 신스라이프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할슈
타일 후작이었다.
"넌 내 적자가 아니다."
할슈타일 후작은 땅에 세워두었던 검의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단단히
쥐며 말했다.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내려 할슈타일 후작에게 말했다.
"적자가 아니라고? 다른 자도 아닌 네가 그렇게 말한다는 거냐? 내
부활의 마지막 제물이었고 내 재탄생의 유일무이한 원인이었던 네가?"
할슈타일 후작은 신스라이프의 말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에
든 검을 옆으로 비스듬히 들어올렸다.
"네가 부활했기에 나는 이 몸과 결합할 수 있었다! 너는 죽음으로써
나를 살려내었고 살아남으로써 나를 탄생시켰다! 그런 네가 나를 부정
하겠다는 건가?"
"내가 네 탄생의 원인이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너를 내 적자로서 인지하지 않는다."
후작이 말한 '인지'라는 단어에 신스라이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태
어나되 인지하지 않는 자식이란…… 할슈타일 후작은 웃음기도 없는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군. 내 자식이여. 그러나 너는 내 비뚤어진 욕망과 시간 사이
의 사생아일뿐이다."
"아버지. 웃겨주시는군요. 당신이 원한 구원을 이렇게 부정하시나이
까? 아버지도 이웃의 이름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보편적인 얼간이셨습
니까?"
신스라이프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할슈타일 후작은
그 차가운 입술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웃기는군. 나는 자녀를 가지고 싶었지만 한번도 가질 수 없었
다. 그런 내가 만들어낸 유일한 자식이 이런 괴물이라는 건, 게다가
나 스스로 그를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은 상당한 아이러니로군. 그들,
내가 냉대와 악의만을 보내었던 내 양자들이 내 유일한 피붙이라는 사
실을 이제서야 깨닫게 되는군."
잠시 말을 멈추었던 할슈타일 후작은 낮게 속삭였다.
"돌맨. 용서해다오."
차가운 맨땅에 무릎 꿇은 돌맨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쥔 채 부르르 떨
고 있었다. 그란이 그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이루릴의 손에 가로막혔
다. 그란은 이루릴에게 묻는 눈길을 보내었지만 이루릴은 그저 고개만
가로저을 뿐 설명하지 않았다. 돌맨 할슈타일의 볼 위로 어느새 차가
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돌맨은 부를 수 없었고 부르지 않았던 이름
을 불러보았다.
"아버님……"
할슈타일 후작은 다시 고개를 들었고 그 움직임과 함께 검을 들어올
렸다. 곧게 겨누어진 검끝은 신스라이프를 겨냥하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스라이프를 쏘아보며 말했다.
"네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스라이프. 그뿐만 아니라, 나는 너를
제거하고 내 멸망을 받아들여 나를 완성하겠다."
"완성하겠다? 네가?"
"그렇다! 골드 드래곤 아일페사스, 말하시오! 당신은 길짐승과 날짐
승의 왕. 부활했던 자들은 어떻게 되었소?"
아일페사스는 의아했지만 아무 말 없이 머리를 들어올렸다. 하늘을
찌를 듯한 모습으로 머리를 곧추세운 아일페사스는 곧 자신 속으로,
그리고 모든 세계로 들어섰다.
눈을 어지럽히는 검광 속에서 칼날 하나 들어갈 빈틈을 찾아낸 에카
드나는 주저없이 그곳에 검을 꽂아넣었다. 데스나이트는 비명을 지르
며 도끼를 휘둘러내렸지만 이미 그 팔에는 힘이 없었다. 에카드나는
몸을 앞으로 숙여 도끼자루를 어깨로 받아낸 다음 그대로 데스나이트
의 턱을 들이받았다. 데스나이트는 폭발하는 검은 연기와 함께 무너져
내렸고 에카드나는 자신의 검을 회수하며 조금 전부터 들려오던 목소
리에 대답했다.
"예, 아버지! 그들은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쁘니 그만 부르십
시오! 목 떨어지겠습니다!"
드래곤 솔져 에카드나는 그렇게 속삭인 다음 다시 눈앞으로 다가드는
데스나이트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대륙의 동안을 가로지르던 지골레이드는 저 아래
희고 작은 점으로 반짝이고 있는 론리 시걸의 갑판을 흘깃 내려다보았
다. 그의 경이적인 시각 속으로 갑판 위의 해적들이 굳어버린 채 자신
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잘 들어왔다. 지골레이드는 잠시 론리 시걸의
주위를 맴돌며 망자에게 참배한 다음 자신 속을 향해 속삭였다.
"그는 그의 복수심과 함께 돌아갔습니다. 드래곤 로드."
================================================================
코리아컵 축구대회에서 한국대표팀은 기어코 불패 신화를 만들어내더
군요. 경탄할만한 일입니다. 하하하. (이렇게라도 웃자, 웃어.)
불패도 대단한 일입니다만, 다음엔 이겨주면 더 좋겠습니다. 흐음.
--------------------------------------------------------------------------------
(c) Nobreak Technologies, Inc.
Future Walker - 퓨처워커
--------------------------------------------------------------------------------
1999/06/21(02:47) from 210.115.123.112
작성자 : 이영도 (jin46@hitel.net) 조회수 : 2200 , 줄수 : 372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10
번 호 : 22363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6-20 02:53
제 목 : [F/W]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10
Future Walker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10.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아일페사스는 전 대륙의 곳곳을 향해 질문들
을 보내었고 일자왕의 질문에 '대륙은 대답했다.' 그덴산은 말도 의미
도 아닌 굳건하고 진중한 산의 언어로 자신이 그의 진정한 주인의 죽
음에 대해 복상하고 있음을 알려왔다. 졸란을 내려다보던 카레한 탑은
그 탑신을 휘감아도는 거친 바람을 빌려 베이론 코다슈의 죽음을 알려
왔다. 그외에 무수한 대답들이 돌아왔다. 대륙은 모든 언어와 의미와
느낌을 통해 아일페사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꼿꼿이 세운 머리를 내린
아일페사스는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는 부활과 영생
을 포기하고 표표히 죽음으로 돌아간 그 많은 자들의 모습에 목이 메
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말은 필요없었다. 아일페사스가 받아들
인 모든 대답들은 그대로 할슈타일 후작과 신스라이프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남겨두었던 콜리의 프리스트들도 모두 돌아갔다. 신스라이프!
그들은 너를 기다리는 대신 크레바스 속으로 몸을 던졌지. 그들은 영
생을 원하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도 잘 알겠지."
신스라이프는 창백해진 얼굴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
다.
"그들은 시간의 장인으로 살기보다 그들 자신으로 살기를 원했다. 멸
망은 참으로 완성의 귀결, 죽음은 시간의 장인인 그들의 최후의 작품.
그들은 그들 자신을 완성하고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들의 죽음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너를 인정하지 않았다!"
신스라이프는 길게 심호흡했다. 나부끼는 빛살들이 그의 모습을 잠시
어지럽혔다.
"그런 것 같군…… 그래서?"
"뭐라고?"
"그래서? 과거의 망령들이 과거로 돌아간 것이 뭐 어쨌다는 거냐. 그
들은 현재가 아니며 처음부터 이 시간과는 관련없는 자들. 그리고 이
시간의 모든 자들은 나를 지지한다. 나는 이 현재와 하나가 될 뿐이지
망령의 과거와 하나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네가 원하는 시간이었나. 자신이 시체라고 주장하는 듯한 모
습으로 눈더미 속에 틀어박혀 있으면서도 오가는 대화를 모두 듣고 있
던 레이저는 생각했다. 네가 하나가 되려는 시간은 바로 이 현재였나.
하긴, 그것이 당연하지.
"그리고 이 시간의 모든 자들은 나를 지지한다. 그들에게 물어보라.
죽고싶은 자 누구냐고. 이미 죽었던 자가 아니라, 지금 시간을 만들어
내는 자들 말이다. 지금 저기서 벌레 같은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저 도박사 놈이 가장 가까이 있는 본보기인 것 같군. 저 놈이 살기 위
해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란 말이다!"
치밀어오르는 모욕 속에서도 레이저는 이것이 오기로 대답할 성질의
질문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질문했다. 너는 정말 죽고
싶은가. 그리고 레이저는 다시 생각했다. 이런. 바보 다된 모양이군.
할슈타일 후작은 이마를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신스라이프는 앞으
로 걸어오며 말했다.
"그렇잖은가?"
"그럴 테지. 되살아난 자가 아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 중에
서 죽고 싶어하는 녀석은 없겠지. 그 버러지들은 영웅으로 죽는 것보
다는 거지로라도 사는 것이 낫다고 말할 테지. 특별히 비난받을 말도
아니고."
그 순간 할슈타일 후작은 검을 옆으로 뿌렸다.
"하지만, 난 아니다!"
고함소리와 함께 할슈타일 후작은 앞으로 달려나갔다. 미는 뜻없는
소리를 지르며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이 상황의 어떤 국면에라도 영향
을 주기에는 너무 늦은 행동이었다. 눈보라를 일으키며 달려간 후작은
어느새 신스라이프와의 거리를 모두 지워버린 다음 난폭한 내려베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휘둘러진 롱소드는 신스라이프가 서있던 자리를 지나 얼음바닥에 꽂
혔다. 강력한 타격의 충격을 손목에서 지우고 있던 할슈타일 후작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발을 보았다. 제길! 뒤로 슬쩍 물러나 후작의 검
을 피했던 신스라이프는 가볍게 발을 들어 후작의 손목을 내려밟았다.
꽈광!
후작은 속수무책으로 무릎 꿇었다. 후작의 두 손과 칼자루를 한꺼번
에 내리밟아 얼음바닥에 고정시켜둔 신스라이프는 후작의 정수리를 내
려다보며 말했다.
"넌 아니라고?"
눈과 얼음 속으로 움푹 들어간 자신의 두 손을 보던 후작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래."
신스라이프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영웅으로 죽겠단 말인가? 악당 신스라이프를 처단하는 것이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처단하고 장엄하게
죽겠다는 건가?"
"아니."
"아니라고?"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돌아온 후작의 대답은 그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후작은 흡! 하는 낮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신스
라이프의 발을 붙잡아 위로 집어던진 것이다.
맙소사! 레이저는 자신이 본 광경에 놀라 혀를 깨물 뻔했다. 할슈타
일 후작이 밟혀있던 두 손을 만세라도 하듯이 위로 쳐올리자 신스라이
프는 쏘아진 화살처럼 위로 튕겨올라갔다. 재빨리 검을 집어든 후작은
하늘을 날고 있는 신스라이프의 몸을 겨냥하여 달리며 외쳤다.
"장엄함 따위 개나 줘버려! 죽음을 제외시킨 반쪽 삶을 치장하는 말
같은 건 내겐 필요하지 않아! 나는 내 온전한 삶을 원할 뿐이다!"
무한한 명암 사이를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던 신스라이프는 간신히 몸
을 제어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제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었고 후작
은 저 아래에서 그가 떨어질 위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신스라이
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에게 날개가 없는 이상 신스라이프는
무력한 모습으로 후작의 검에 몸을 던져야 했다. 신스라이프는 다급하
게 외쳤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소망을 파괴하겠다는 거냐!"
"그 놈들이 내 소망을 파괴하려든다면, 난 그 놈들 전부를 파괴하겠
어!"
설원을 치달리는 후작의 뒷모습을 보며 미가 안타까이 외쳤다.
"안돼요, 후작님! 파를……!"
"받아라!"
마지막 순간, 할슈타일 후작은 몸을 날렸다.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신스라이프의 목이 그의 목표였고 그의 검은 주위를 떠도는 빛을 무수
히 되튀기며 공간을 잘라들어갔다. 신스라이프의 눈이 극도로 커졌다.
그 순간 시축이 진동했다.
회전하고 있던 시축이 다음 순간 수백배로 넓어졌다. 시축을 형성하
며 그 자체로 시축이던 빛들이 무섭도록 회전하며 그 중심부로부터 튀
어나왔다. 그 빛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지만 그 중 가장 강력하
고 가장 빠른 빛들은 할슈타일 후작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시야의
모든 부분을 신스라이프로 채우고 있던 할슈타일 후작과 미는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아일페사스와 레이저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마법
의 이름 아래 사부와 제자인 그들은 동시에 외쳤다. "조심해!"
검끝이 신스라이프의 목을 꿰뚫기 직전, 할슈타일 후작은 자신과 신
스라이프를 감싸는 빛무리를 느꼈다. 그리고 손아귀로부터 전해져온
감각은 그를 절망으로 빠트렸다.
이럴 수 없어. 할슈타일 후작은 소리없이 절규했다. 검끝은 분명히
신스라이프의 목젖을 향하고 있었고 겨냥에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었
다. 하지만 빛들이 그들을 감싸는 순간 그것은 '빗나갔다.' 그리고 신
스라이프의 몸은 검 아래로 떨어져 뒹굴었다.
바닥에 떨어진 신스라이프 역시 낙하의 충격보다 할슈타일 후작의 검
이 빗나간 것에 더 경악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신스라이프는
그의 몸을 뛰어넘은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
고 서서는 다시 검을 돌려 신스라이프를 겨냥했다. 의아한 눈으로 후
작의 검을 보던 신스라이프는 시선을 들어 할슈타일 후작의 얼굴을 보
았다. 그러나 그 시선은 그 얼굴을 지나 더욱 올라갔다. 신스라이프는
후작의 등 뒤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시축을 보았다.
조금 전, 그 빛은?
신스라이프를 노려보던 후작은 그의 등 너머를 향하고 있는 신스라이
프의 시선을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할슈타일 후
작 역시 의혹이 가득 담긴 눈으로 시축을 보았다. 조금 전, 저 빛이
우리를 감쌌다. 그리고 검은 빗나갔다……
자각은 두 사람에게 동시에 찾아들었다.
"크하하하하!"
신스라이프는 온몸으로 웃었다. 그리고 할슈타일 후작의 얼굴은 일그
러질대로 일그러진 채 웃고 있는 신스라이프를 향했다.
"벌써 여러번 말했잖아?"
신스라이프는 후작을 향해 두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그들이 나를 만들었어. 그들이 나를 원해. 그렇기에 그들이 나를 지
킨다. 알겠나. 그들이 내게 시간을 보내어오고 있단 말이다!"
할슈타일 후작은 호흡을 가누며 생각했다. 그들…… 죽기를 원하지
않는, 죽음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 그렇
군. 저 시축은 지상의 모든 인간들이 만들어보내는 시간들의 축이지.
할슈타일 후작은 시축을 바라보았다. 어떤 말로도 설명될 수 없는 모
습으로, 어떤 규칙성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모습으로 회전하고 있는
광륜은, 어쩐지 그의 눈에 나무처럼 보였다. 가지도 잎사귀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상록수이자 유일한 나무였다.
할슈타일 후작은 갑자기 피로감을 느꼈다. 너무 길고 너무 황당한 넌
센스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배역을 맡았어.
"나도 이미 말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검을 좌우로 몇 번 흔들며 말했다.
"그들이 나를 거부하겠다면, 나는 모든 인간들을 상대로라도 싸울 것
이라고."
"아아. 자네는 모든 인간들의 의지를 꺾으려 들 필요는 없어. 나의
의지만을 상대하면 되. 내 의지가 곧 모든 인간들의 의지거든."
"그렇다면 이 검을 받아라!"
할슈타일 후작은 노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하지만 신스라이프는 허리
에 두 손을 얹은 채 히죽 웃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축이 다시 거
센 회전을 시작했다. 뿜어져나온 빛의 파도는 할슈타일 후작과 신스라
이프를 감쌌다. 조금 전과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단 한가지만 제외하고.
할슈타일 후작은 생애 동안 수천, 수만번도 넘게 검을 휘둘러왔다.
하지만 지금의 공격처럼 휘두른 적은 한번도 없었다. 후작의 공격은
엄밀한 의미에서 공격이 아니었다. 공격은 두 사람의 상호작용이다.
공격자와 방어자가 있는. 하지만 할슈타일 후작의 공격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었고 공격을 받을 대상 같은 것은 고려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순수한 움직임. 단일한 의미였다.
신스라이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런!"
마지막 순간 신스라이프는 옆으로 쓰러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채
몸을 뒤틀었다. 그래서 신스라이프는 호되게 땅에 부딪히는 대신 자신
의 목을 구해낼 수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의 칼끝은 신스라이프의 옷
깃만을 잘라내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다시 검을 회수하며 무거운 눈길
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고 신스라이프는 땅을 굴러 저편에서 일어나
며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노려보았다.
"이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할슈타일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아
일페사스는 알 수 있었다. 키스할 때 누가 누구의 입술에 먼저 닿았는
가 하는 순서가 없는 것처럼?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행
동하며 동시에 결과를 가지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후작의 공격은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단일한 동작 속에 단일한
의미가 단단히 응결되어 있는 행동이었고 그것이 목표를 맞췄는가 맞
추지 못했는가, 즉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하는 것은 애초부터 의미를
따질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완성된 것이기에.
그 때 후작이 천천히 발을 들어 신스라이프와의 거리를 밟아들어갔
다.
그 걸음 하나하나는 지상의 어떤 발달린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
는 동작이었다. 굳이 찾는다면 차라리 춤과 비슷했다. 목적지를 위한
걸음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목적인 걸음걸이. 그것은 이미 끝났기에 중
단될 수 없는 연속이었고 그 자체로 결말인 원인들이었기에 거칠 것이
없는 걸음이었다. 신스라이프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후작이 전혀 속도를 높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스라이프
와 후작의 거리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신스라이프는 괴성을 지르며 주
먹을 들어올렸다.
"바다 속으로 꺼져라!"
신스라이프는 몸을 솟구쳤다. 그의 작은 주먹이 얼음바닥을 후려치는
순간 아일페사스의 몸을 그 위에 얹고도 꿈적하지 않았던 얼음이 날카
로운 비명을 토하며 갈라졌다.
콰- 드드드득!
얼음이 길게 갈라지며 바닷물이 위로 치솟았다. 검은 바닷물은 현란
한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할슈타일 후작은 가볍게 몸을 띄웠지만 신
스라이프는 뒤로 물러나며 계속해서 얼음바닥을 내리쳤다. 주먹이 내
려꽂힐 때마다 산사태에 준하는 굉음이 울려퍼지는 모습은 아일페사스
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신스라이프는 바닥을 내려치고 뒤로 뛰고 다시 바닥을 내려치는 행동
을 반복했다. 갈라진 얼음들은 스스로의 무게에 의해 서로 부딪히며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다. 비산하는 얼음조각들이 눈이 멀 정도의 빛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신스라이프는 유빙과 지독하게 차가운 바닷물이 부
딪히는 호수를 만들어내었다. 마지막 타격이 끝나자 신스라이프는 피
가 흐르는 주먹을 감싸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헉헉거렸다. 하지만
그 눈은 경멸을 담은 채 할슈타일 후작을 보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
은 신스라이프를 보며 으르렁거리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일페사스! 심판하시오!"
그러나 아일페사스의 거대한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인간이 그를 인정했다. 할슈타일."
"아일페사스!"
"네가 공격했을 때…… 너도 알지 않느냐? 그것은 그의 힘이 아니라
그를 원하는 인간들의 힘이었다. 그 힘은 네 검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너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잠시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일페사스를 올려다보던 할슈타일 후작은
갑자기 몸을 돌렸다. 후작은 괴성을 지르며 저편에 앉아있는 신스라이
프를 향해 롱소드를 집어던졌다. 하지만 롱소드는 충돌하며 치솟아오
르는 얼음덩이와 물보라에 휘말려 바다 아래로 사라졌다. 신스라이프
는 피맺힌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며 힘겹게 일어났다.
"그, 그래. 후, 후후후. 드래곤이여. 겨, 결정하라. 나는 누구인가."
아일페사스는 무력한 표정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너는…… 인간의……"
"적자가 아닙니다."
아일페사스와 할슈타일 후작,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동시에 고개를 돌
렸다. 그곳에는 쓰러진 레이저가 물속으로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의 몸을 붙잡고 힘껏 끌어당기고 있는 미의 모습이 있었다. 미는 끙
끙거리다가 할슈타일 후작을 보며 말했다.
"저, 후작님. 미 좀 도와주세요."
할슈타일 후작은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왜
놀랐는지 알 수 없었다. 후작은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어 레이저의 몸
을 들어올렸다. 미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건
너편에 있던 신스라이프가 외쳤다.
"무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눈과 얼음에 노출된 자신의 손을
호호 불면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 후 미는 곧 얼음이 갈라진
가장자리에 서게 되었다. 미는 얼음덩이와 바닷물이 춤추는 광경을 바
라보며 조금 머뭇거렸다. 레이저의 몸을 안아든 할슈타일 후작과 아일
페사스는 그런 미의 모습에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기대감을 동시에 느
꼈다.
미는 자신에게 말하듯이 낮게 속삭였다.
"왠지…… 될 거 같아. 응. 될 거야."
미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리누르고는, 그 자세 그대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컹컹거리며 달려드는 아달탄을 힘겹게 밀어낸 쳉의 손이 셔츠 속으로
들어갔다. 쳉은 셔츠 속에서 목에 걸어두었던 작은 주머니를 꺼내었
다. 쳉은 땅바닥에 누운 채 그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쳉은 언
덕 위를 휘몰아치는 바람이 그 주머니의 내용물을 휩쓸어갈까봐 조심
했다.
그리고 쳉은 자신의 오른손에 휘감긴 미의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언뜻 보기에 무표정한 쳉의 얼굴엔 형언할 수 없이 많은 감정이 담긴
두 눈이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시야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들었고 시축을 휘감아도는 빛살들이 갑자기 움직
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았다. 저건 뭐지? 신스라이프가 또 무슨 장난
을 치는 건가? 그러나 신스라이프도 당황한 모습으로 시축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축을 휘감아도는 빛 중 하나의 빛이 맹렬히 움직였다. 갑작
스럽게, 빛은 쏘아지듯 튕겨나와 미를 향해 날아왔다. 할슈타일 후작
은 당황하여 외쳤다.
"조심해, 무녀……! 어엇?"
미는 물을 밟고 섰다.
그녀의 왼손은 마치 댄스 신청을 받는 레이디의 그것처럼 앞으로 살
짝 뻗어져있었다. 그리고 그 손은 시축으로부터 튕겨져나온 빛 위에
얹혀 있었다. 청년의 손을 붙잡고 무도회장 한가운데로 걸어가는 처녀
처럼 미는 빛살에 손을 맡긴 채 물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광포하게
포효하던 바닷물은 미의 걸음걸이에 따라 차츰 고요해졌다. 미는 거울
처럼 고요한 수면 위를 빛의 인도를 받아 걸어갔다.
"누군가가……"
할슈타일 후작은 귓가에 들려오는 아일페사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거의 전율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
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고개를 들어 아일페사스를 보았다.
"누군가가…… 그의 시간을 신스라이프가 아닌 미에게 주고 있어……
그녀에게 보내고 있어……"
================================================================
F/W에 대한 재미있는 평을 들었습니다. 한국의 한 위대한 아티스트가
오래전에 F/W의 중요한 오류를 지적했다고 하더군요.
결코! 시간은 멈춰질 순 없다, 요! - TAIJI & BOYS
하하. 좋은 밤 되세요.
--------------------------------------------------------------------------------
(c) Nobreak Technologies, Inc.
Future Walker - 퓨처워커
--------------------------------------------------------------------------------
1999/06/27(17:32) from 210.114.32.61
작성자 : 이영도 (jin46@hitel.net) 조회수 : 2451 , 줄수 : 483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11. 끝.
번 호 : 22704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6-27 06:45
제 목 : [F/W]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11
Future Walker
10. 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11.
미는 창백한 월광과 현란한 암흑 속을 걸어갔다. 그녀의 발이 닿을
때마다 건조한 수면 위에 일어나는 파문은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방
식으로 빛을 반사했다. 허공으로 떠오른 빛들은 미의 볼과 팔, 그 몸
에 부딪히며 미의 몸 주위에 아스라한 빛의 안개 같은 것을 만들어내
었다. 하지만 그 안개 속에서도 시축으로부터 뻗어나와 미를 인도하
고 있는 광선은 또렷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당혹에서 깨어난 것은 신스라이프였다. 신스라이프의 얼
굴, 파의 얼굴, 그 작고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져 거멓
게 죽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던 신스라이프의 두
팔이 서서히 올라갔다. 그 팔의 움직임은 미의 가벼운 걸음걸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딱딱하고 거칠었지만 할슈타일 후작은 섬뜩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자매였던가. 아냐.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저것
은……
"가라, 내 이름이여!"
격노한 신스라이프의 외침에 호응하여 시축이 크게 울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천둥이 울렸다고 생각했지만 곧 자신이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
한 것을 깨달았다. 아무 소리도 없이, 단지 거대한 느낌과 함께 시축
은 포효했다. 그리고 시축은 조금 전처럼 폭발했다. 허공을 소용돌이
치는 월광들이 거대한 해일처럼 일어나 미를 향해 덥쳐왔다.
"왕이여!" 저 머나먼 일스의 바다 위에서 지골레이드가 하늘을 갈라
놓을 듯한 포효를 토한 순간, 북해의 얼음 위에 있던 아일페사스의 몸
위로 타오르는 은청색이 번득였다. 아일페사스는 몸을 앞으로 날렸고
그 빠른 움직임보다 더 빠르게 벽력을 뿜어내었다. 입이 아니라 온몸
으로 토해낸 벽력은 노도같은 기세로 월광의 해일에 부딪혀들어갔다.
할슈타일 후작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월광과 벼락은 미의 머리 위에서 부딪혔다. 빛은 차라리 암흑이 되었
고 형언할 수 없는 충돌음은 정적이 되었다. 칠흑같은 빛과 귀가 멀어
버릴 듯한 정적 속에서 몸부림치던 후작은 간신히 눈을 떠 미를 찾았
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죽을 것 같은 위
압감이 있었다. 미는?
월광이 다시 시축 주위를 맴돌고 벽력의 잔재들이 암흑의 공간 위를
미끄럼질치는 가운데 미는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었
다. 증오어린 눈으로 미를 보던 신스라이프는 아일페사스를 향해 외쳤
다.
"드래곤! 왜 끼어드는가! 이곳엔 네게 할당된 권리 같은 것은 존재하
지 않는다! 이것은 너 따위가 감히 간섭할 수 없는 시간과 인간의 일
이다!"
아일페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때 할슈타일 후작은 엉뚱한 것을
느꼈다. 후작은 그의 품에 안겨있던 레이저를 내려다보았고, 그의 눈
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열리는 것을 보았다.
"자, 이젠 108년만에 시인이 부활할 차례인가?"
"네?"
파하스는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으로 네리아의 질문에 대답했다. 10
점 만점에 9점 주겠어요. 네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지만 파하스
는 자리를 박차며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기에 안타깝게도 그녀의 미소
를 보지 못했다. 네리아는 생각했다. '만일 봤다면 그 자리에서 멈춰
섰을 텐데.' 자신의 생각에 히죽 웃던 네리아는 파하스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파하스는 지면 1큐빗 상공을 나는 바람처럼 가볍게 달려 언덕을 치달
아올라갔다. 땅에 누워있던 쳉은 고개만 옆으로 돌려 파하스를 보았
다. 언덕 정상을 향해 솟아오른 파하스는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
덕여주고선 그 옆을 지나쳤다. 쳉은 그만이 취할 수 있는 완만함으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파하스는 해안 절벽가장자리에 서며 왼손을 어깨쪽으로 가져갔다. 민
첩한 손놀림으로 망토 고정쇠를 푼 파하스는 절벽을 치달아오르던 바
람이 그 망토를 가져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파라락! 펄럭거리며 날아오
른 망토는 영원을 향한 손짓처럼 수평선을 향해 날아갔다. 절벽 끄트
머리에 꼿꼿이 서서 불어닥치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던 파하스는 이윽
고 화려한 동작으로 어깨에 매어두었던 하프를 들어올렸다.
파하스는 하프를 정성스러운 동작으로 안아든 다음 잠시 오른손을 아
무렇게나 집어던진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허공을 나부끼던 망토는 이
제 한 마리 나비처럼 춤추고 있었고 그의 머리카락들은 모든 방향을
향해 흩날렸다. 그리고 파하스는 기다렸다. 하나의 노래를.
순간보다 길고 영원보다 짧은 기다림은 시작되지 않았던 것처럼 끝났
다. 파하스의 손가락들은 어느샌가 하프의 현 위에 얹혀있었고 그의
입술은 허공에 키스하듯 꿈틀거렸다.
하지만 노래는 불리워지지 않았다.
열리는가 싶었던 레이저의 눈은 다시 무겁게 닫혔고 그 몸은 할슈타
일 후작의 팔 안에서 축 늘어졌다. 할슈타일 후작은 잠시 자신이 시체
를 껴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레이저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이를 악문 채 수면 위의 미를 바
라보았다.
미는 수면 위에 서있었다. 그녀는 두 발을 붙인 채 꼿꼿이 서있었지
만 단순히 멈춰서있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나아가
지 않는 모습으로 멈춰서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
을 느끼며 그 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후작은 미를 이끌고 있던
빛이 깜빡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 빛이…… 그녀를 이끌고 있지 않는 건가?
물결치는 월광 속에서도 환히 빛나며 미를 인도하고 있던 빛은 이제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고 있었다. 빛은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 같았
고 미의 손가락들은 갈피를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 그 빛이 가물거리
는 것에 반비례하여 시축을 휘감아도는 빛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시축은 이제 타오르는 나무처럼 소리없이 포효했다. 그리고 그 아래
서있던 신스라이프의 얼굴에는 야수와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은…… 안돼!"
안돼? 아직은 안된다니, 뭐가? 할슈타일 후작은 신스라이프의 수수께
끼 같은 말에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나 신스라이프는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고개를 들어올려 미에게로 향하고 있는 광선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그 감정결핍자의 시간인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군.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하나되어 움직이지 않는 시간. 다른 자들의 욕망과
꿈에 당혹을 느끼는 자의 시간. 그래. 그가 너를 거기까지 인도할 수
는 있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나에게까지 올 수 없다."
미는 소리없이 흐느끼며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그런 미를 비웃으
며 신스라이프는 말했다.
"그는 이 시축으로, 그리고 나에게로 올 수 없단 말이다! 퓨쳐 워커,
넌 어디로도 걸어갈 수 없다!"
"아냐."
할슈타일 후작은 하마터면 레이저를 떨어뜨릴 뻔했다. 할슈타일 후작
은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레이저를 보았고 그의 똑똑히 열린 두 눈을
보고 다시 놀랐다. 레이저는 분명한 목소리로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반
복했다.
"아냐. 하나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둘, 셋일지도 모르지. 하지
만……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할슈타일 후작은 잘 열리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어 말했다.
"있다니, 뭐가 있단 말인가."
"나를 내려줘요. 괜찮으니까."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으려다가 다시 한번 레이저의 눈을 들여다보았
다. 그리고는 레이저를 땅에 앉혔다. 레이저는 두 손을 땅에 짚고는
두 다리를 앞으로 마음껏 뻗은 채 미를 바라보았다.
"나는 믿어. 분명히 있을 거야."
파하스의 손은 애처롭게 허공을 긁고 있었고 그 입은 숨결 이외엔 아
무 것도 내놓지 않았다. 파하스는 진저리를 치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에게 다가가던 네리아는 갑작스럽게 자신을 노려보는 파하스의 눈길
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파하스는 말했다.
"이젠 내 차례입니다. 부탁이니……"
"예?"
"내 이름을 불러요."
네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파하스를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
고 그런 자신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지? 내가 왜 이러지? 그까
짓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뭐 어렵다고.
파하스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발, 네리아. 내 이름을 불러줘요. 부디."
네리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되어 파하스를
보았다. 왜 이럴까. 그저 그의 이름을 불러달라는 것인데…… 네리아
는 자신의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왜 안아달라고, 하나가
되어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걸까?'
파하스의 다리는 언제부터인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주저
앉을 것 같았지만 간신히 쓰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파하스는 네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입
에서 무의미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
"부탁입니다."
금방이라도 뒤로 돌아서서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고 싶었지만 네리아
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자제력이 강한 것은 아니었다. 도망조차 칠
수 없었다. 네리아는 그대로 졸도하거나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거나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거나 파하스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다는 생각들을
동시에 느끼며 그 생각들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매길 수도 없었다. 네
리아는 자신의 몸에서 솟아오르는 열기에 헐떡이며 파하스를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파하스는 이제 시체보다도 더 생기없는 얼굴로 비틀거리
고 있었다. 네리아는 왈칵 울고 싶은 것을 참으며 파하스의 이름을 불
러보려 했다.
"아, 어……"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말이라기보다는 그냥 소리였다. 네
리아는 다시 한 걸음 더 물러났고 파하스는 당장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네리아는 지독하게 뜨거운 자신의 몸 한 곳에서
갑작스럽게 찾아드는 시원함을 느꼈다. 네리아는 힘들게 고개를 돌렸
고 자신의 오른쪽 어깨 위에 올려진 크고 두툼한 손을 보았다. 고개를
더 돌려 손의 주인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네리아는 그 손들에 감겨
있는 머리카락을 본 순간 다시 고개를 돌려 파하스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하스, 나의 시인."
삭풍이 휘몰아치던 황량한 절벽 위에서 불꽃 같은 노래가 터져나왔
다.
레이저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걸어가! 퓨쳐워커!"
레이저의 외침소리와 함께 미는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동시에 미를
인도하던 광선이 다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월광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고 신스라이프는 격노하여 외쳤다.
"불가능하다!"
가능했다. 미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걸음걸이 아래에서 월광에
번득이는 수면은 단단한 길로 바뀌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귓전에 시끄
럽게 울리고 있는 소리가 자신의 호흡소리라는 사실에 놀랐다. 신스라
이프는 다시 외쳤다.
"멈춰! 넌 걸을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다! 네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들고,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고 있다! 너는 그
럴 수 없어!"
미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원해요."
"닥쳐!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지마! 내 이름으로, 가라!"
신스라이프는 다시 두 팔을 휘둘렀고 시축은 전율하며 빛을 토해내었
다. 조금 전에 일어났던 빛의 파도가 무색해질 만큼 거대한 빛이 솟아
올랐다. 할슈타일 후작은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하
늘의 상당 부분 역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빛은 시야의
끝에서 끝을 가득 채운 채 미를 향해 덥쳐왔다. 아일페사스는 날개를
한껏 펼치며 포효했다.
"크롸롸롸롸!"
아일페사스의 몸 전체가 눈깜짝할 사이에 황금의 불꽃으로 달아올랐
다. 온몸을 감싼 그 불꽃은 아일페사스의 몸을 급속히 타고올라 그 머
리를 향해 집중되었다. 그리고 아일페사스가 입을 크게 벌린 순간, 백
열하는 화염이 월광의 파도를 향해 뿜어져나갔다.
화르르르르! 화염의 궤적을 따라 빙판이 폭발했다. 박살난 얼음들은
부서지거나 녹을 사이도 없이 수증기가 되었고 사방은 거칠게 피어오
르는 증기들의 폭풍으로 가득 찼다. 수천가지의 빛이 폭풍을 물들이는
가운데 화염은 그 모든 폭풍을 앞질러 날아가 미를 엄습하는 월광에
부딪혀 들어갔다. 소리없는 충격은 할슈타일 후작과 레이저를 뒤로 날
려버렸다.
"크우우욱!"
허공을 날아가면서도 할슈타일 후작은 레이저의 몸을 잡으려 애썼다.
저 녀석은 죽었던 녀석이 아냐, 젠장! 하지만 그 스스로가 가랑잎처럼
나부끼는 상황에서 레이저를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욕설로 점철된 비명을 토하며 자유낙하의 상황에 빠져들어갔다.
신스라이프의 공격과 아일페사스의 공격이 맞부딪히며 야기된 모든
종류의 빛을 아우르는 폭풍 속에서, 그러나 미는 자신의 손에 닿은 광
선을 놓치지 않았다. 할슈타일 후작과 레이저를 날려버릴 정도로 물리
적인 힘을 행사하는 빛의 폭풍은 설원과 암흑의 하늘 전체를 찢어 모
든 것을 혼돈으로 몰아가려들었지만 미는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
젠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앞으
로 걸어가는 걸음 그 자체였고 그 이외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걸어가고 있는 것을까.
'나'는 누구인가.
목적도 없었고 출발도 없는 걸음 속에서 미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갑자기 그녀의 눈 앞에서 그녀를 이끌고 있던 빛이 변화했다. 미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다시 가늘게 떠서 보았다. 하지만 빛은 분명히 그
형체를 바꿔가고 있었다. 먼저 손가락들이 보였다. 그리고 따스하고
커다란 손이, 굴강한 팔이, 그리고 미의 눈에 익은 어깨가 나타났다.
미는 키 큰 남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머리를 조금 들어올려야 했다.
그리고 그 얼굴, 그녀를 향해 조용히 웃고 있는 얼굴을 향해 미소지었
다.
"쳉."
웃음짓고 있던 쳉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쳉은 미가 했던
말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아이를 가지자.
"그래."
우리를 향해 칭얼거리고, 우리를 배우고,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떠날 아이를 만들어서, 미. 그 아이를 사랑해주자. 바보처럼 사랑해주
자. 그러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 것처럼, 헌신적으로 사랑해주자.
"그래."
내가 보지 못할 아이를.
"그래."
네가 안아보지 못할 아이를.
"그래."
너무 빨리 자신의 시간을 끝내야 되는 아이를.
"그래, 쳉. 그래."
빛이 모여들었다.
노도 같은 빛살들의 무리 가운데서 하나 둘 빛들이 미를 향해 서서히
그 궤적을 비틀었다. 모닥불에서 튀어오르는 불티같이 작은 빛들이었
지만 그것은 거센 빛의 파도를 조용히 무시하며 미를 향해 흘러들었
다. 그리고 그 다음 빛이, 그 다음 빛이. 빛은 허공에 온갖 종류의 거
대한 곡선을 만들어내며 미에게로 수렴되었다. 부드럽게 날아온 빛은
미의 주위에서 주저하듯 잠시 맴돌았고 미는 그 빛들을 향해 비어있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빛은 나뭇가지를 찾아드는 작은 새처럼 미의 오
른손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빛이, 그 다음 빛이. 빛은 미의
두 손과 그 팔과 온몸에 휘감겨들었다.
아일페사스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리고, 웃는 거지."
광풍(光風)에 휘날리며 기절했던 할슈타일 후작의 귀에 무수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빛은 깔깔거리고 껄껄거리고 미소짓고 폭소하고 홍
소하고 히죽거리고 헤죽거리고 빙글거리고 싱글거리고 웃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힘들게 눈을 떴고 사방에 가득 메우고 있는 빛에 놀
랐다.
화려하던 암흑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위도 빛이고 아래도 빛이
모든 방향이 빛이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벌떡 일어났고 자신이 일어났
다는 사실에 다시 놀랐다. 몸이 박살나지 않았나? 그 때 저쪽이자 이
쪽이며 그쪽인 곳에서 레이저가 빛에 둘러싸인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얼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방식으로 합시다. 난 당신이 살아있다고 말해줄 테니, 내가 한
것만큼만 당신도 내게 해줘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그걸 못
하긴 하지만."
"당신은 살아있어."
레이저는 히죽 웃었고, 그 웃음은 강력한 전염성으로 할슈타일 후작
을 엄습했다. 그래서 할슈타일 후작은 도리없이 웃어버렸다.
망막을 통해 쏟아져들어오는 지독한 빛은 아예 동공을 안와 안쪽으로
밀어붙일 것만 같았다. 온몸이 그대로 사그라들 것만 같은 빛 속에서,
신스라이프는 한결같은 걸음으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미를 보며 온
몸이 떨리는 분노를 느꼈다. 그 때 그의 속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가 들려왔다.
보고 있나요, 신스라이프.
신스라이프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고함질렀다. "파!"
인간은 미에게도 시간을 보내고 있군요. 쳉이 그녀를 안내했고, 그리
고 인간이 그녀를 이끌고 있어요.
신스라이프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비웃는 거야? 그들이 나를 포기했다는 건가? 좋아! 이런, 빌어먹을!
몇몇 얼간이들이 그에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직
나는 존재하고 있어! 제기랄, 그건 나를 원하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는……"
아니오.
"아니라니, 뭐가 아니라는 거야? 나를 원하는 놈은 없다는 거냐?"
아니오. 그들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뭐야?"
미를 보세요. 신스라이프.
신스라이프는 어깨로 숨을 쉬며 외쳤다. "오래 보고 있을 수는 없을
거야. 곧 없애버릴 테니까!"
미를 보세요. 부정하지 말고. 그녀는 당신에게 오고 있어요. 뒤로 돌
아가고 있지 않아요. 당신을 버리지 않아요.
"그거야 너 때문이겠지! 어리석게도 너와 내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라고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가 모를까요.
신스라이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속에서 무엇인가가
조용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신스라이프는 기도를 타고넘어가는 빛
의 질감을 아프게 느꼈다. 신스라이프는 손을 들어올렸다. 두 볼을 타
고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기 위해서. 파는 더욱 낮게 속삭였다.
인간은 정말 당신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나에게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모를까요.
신스라이프는 목구멍을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
았다. 그의 속에서부터 시작된 부서짐은 이제 눈물이 되어 샘솟았다.
신스라이프는 도르네이를 생각했다.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알아. 그래. 그들은 알아."
네. 신스라이프. 고마워요.
"……파. 너는……"
같이 가요.
"난, 난……"
가요. 신스라이프. 나와 같이. 그녀에게 걸어가요.
신스라이프는 앞으로 걸었다.
얼어붙은 대지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광선들이 춤추는 하늘도 존
재하지 않았다. 사위를 메운 빛 속에 시축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남겨진 타성이 걸음으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들은 걷고 있
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향해 걸아갔다. 미는 미소지었다.
선망은 인고를 수놓는 장식이었고 희구는 과거를 위한 이름이었다.
미는 걸어갔다.
신스라이프는 걸어갔다.
파하스는 기어코 하프현을 다 끊어놓았다.
네리아는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머뭇거리는 쳉의 손을 잡고 미
친듯이 춤추고 있었다.
신차이는 수평선을 향해 파이프 연기를 날려보내었다.
에카드나는 자신의 몸을 꿰뚫는 데스나이트의 검을 향해 욕설을 퍼붓
고는, 그 검의 소유주를 향해 부러진 칼을 힘겹게 휘두르다가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카알은 술잔을 들어올려 샌슨의 잔과 부딪히며 껄껄거렸다.
함은 눈앞에 펼쳐진 사막을 향해 희열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시오네는 울었다.
이루릴은 모든 정령을 향해 웃음지었다.
엑셀핸드는 운차이가 자신을 끌어안으려드는 줄 알고 기겁했으나, 운
차이의 목적이 단지 그의 허리에 매달려있던 담배쌈지에 있었다는 것
을 알고는 격노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운차이는 제레인트의 팔
을 조용히 끌어당겨 엑셀핸드의 주먹을 침착하게 막아내었다. 제레인
트는 졸도했다.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를 생각했다.
돌맨은 그란의 품에 안겨 숨이 막히도록 울고 웃었다.
궤헤른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북쪽을 바라보았다. 가이버가 그를 불
렀지만 궤헤른은 듣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다시는 부르지 않으려 했
던, 그리고 부를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름이 흘러나왔다."후
작님."
미는 멈춰섰다.
신스라이프는 멈춰섰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왼손을 내밀던 미는 푸훗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고 그런 미를 보며 신스라이프는 미소띤 얼굴로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c) Nobreak Technologies, Inc.
첫댓글 불만이 있길래 살포시 [... 삭제 요청 5개 'ㅅ' 오면..
삭제 요청
ㅇㅂ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