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자기를 찾는 깨끗한 긍정의 아름다움이 그리운 시대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소월의 강변살자
천진난만한 시절의 활동사진을 주마등이 되어 한참 돌려본다
신발을 벗고 추억의 강물에 잠시 발을 담가본다.
그렇게 발을 담그고 있는데, 문득 내가 좋아하는 옛 그림 하나가 떠오른다.
조선시대 이경윤이라는 화가의 ‘고사탁족(高士濯足)’이란 그림이다.
옛 선비가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명상에 잠겨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상투를 틀어 뒤로 넘긴 선비가 허벅지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다리를 꼰 채 발을 물에 담그고 있다.
옆에 술병을 든 사동 하나가 서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아마도 선비는 술 몇잔을 기울였으리라.
온몸에 퍼지는 취기와 발을 간질이는 물의 혀로부터
애무를 받으며 선비는 무아지경 속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 초나라 시인 굴원의 ‘초사’ 어부편(漁夫篇)에 보면
“어부가 빙그레 웃고 노를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을 것이다’
사라지니 다시 더불어 말을 하지 못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창랑의 물이 맑다는 것은 도의와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말함이고
창랑의 물이 흐리다는 것은 도의가 무너진 어지러운 세상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다’는 것은 세상이 올바를 때면 나아가 벼슬을 한다.
‘발을 씻는다’는 것은 풍진에 찌든 세상을 멀리하고
은둔해 초연한 삶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설명이 좀 길어졌지만,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습을 그린 ‘고사탁족’은 속세로부터 초연하게 살아가는
옛 선비의 은일 사상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그림이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긴 하지만 그림의 깊은 뜻은 사라져가고 있는 듯싶다.
어린 시절 물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조잘대던 벌거숭이 소년들의 그것이
‘천진’을 간직한 순수한 놀이였다면
옛 선비의 ‘탁족’은 풍진에 찌든 세상을 멀리하고
참 자기를 찾고자 하는 삶의 적극적 긍정은 아니었을까.
오늘 모처럼 고향 강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던 나는 문득 내 발을 내려다본다.
잠들 때를 제외하곤 끊임없이 움직이던 발,
그 발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발가락 사이의 때도 씻었다.
그 순간 물속에 둥둥 뜨는 때를 먹이로 알고 온 것일까.
송사리 떼가 우르르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