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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 마지막 부분에는 프랑스 혁명기의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억압과 모멸 속에서 자라난 그녀는 마침내 군중의 분노를 이끄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디킨스가 가장 무섭게 그린 것은 그녀의 잔혹함이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에게조차도 동정심이 없는 여자였다.”
이 문장은 분노의 종착지가 어디인가를 보여줍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이 사라지는 것도 위험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마저 소멸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고통을 느끼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기능, 곧 원한을 수행하는 장치가 됩니다. 그때 원한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자아의 형식’으로 굳어집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오가는 언어를 보면, 정당성의 이름으로 분노가 점점 고착됩니다. 상대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 되고, 제거는 정의의 실현으로 오해됩니다.
문제는 시비를 가린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시비가 존재 전체를 규정해버리는 방식입니다. 한 번 죄인으로 호명되면 그는 더 이상 변화 가능성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영원히 동일한 속성으로 고정된 존재가 됩니다.
이 지점에서 ‘유마경’ ‘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숱한 보살들이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선과 악’의 차별을 넘어서는 길을 설합니다. 그러나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묻자, 그는 끝내 침묵합니다.
그 침묵은 단순한 중립이 아닙니다. 선(善)과 악(惡)을 화해시키겠다는 절충도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악을 둘로 나누고 그 한쪽에 자기를 고정시키는 마음의 구조 자체를 놓아버리는 사건입니다. 불이(不二)는 선악의 부정이 아니라, 선악을 성립시키는 분별의 틀을 비추는 자리입니다.
선과 악은 서로 독립된 두 실체가 아닙니다. 조건과 인연 속에서 의존적으로 드러나는 연기(緣起)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그 둘을 절대화하고 고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둘 가운데 한쪽에 갇히게 됩니다. “나는 의(義)롭고 너는 악하다”는 확신이 굳어질수록, 타자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개념으로 환원됩니다.
서양 중세 문학에서 지옥은 종종 영원한 단죄의 공간으로 묘사됩니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는 ‘신곡(神曲)’에서 지옥문 위에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묘사합니다. 지옥은 희망의 소멸이며, 도덕적 판결이 존재를 영원히 고정시키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지옥은 영원한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업(業)과 인연이 빚어낸 하나의 국면일 뿐이며, 조건이 다하면 다른 국면으로 전환됩니다. 설령 무간(無間)지옥에 떨어진 존재라 하더라도 그의 본성까지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성(佛性)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업이 소멸될 때까지 가려질 뿐입니다.
이 차이는 형벌의 강도 차이가 아니라, 존재를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입니다. 인간을 ‘영원히 규정되는 존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지금은 어둠 속에 있으나 궁극적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볼 것인가의 차이입니다.
‘법화경’에서 상불경(常不輕) 보살은 모든 사람에게 절하며 말합니다. “그대는 장차 부처가 될 분입니다.” 그것은 현재의 행위를 승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존재의 궁극적 가능성을 지워버리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존재를 하나의 행위로 환원하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정죄(定罪)가 필요합니다. 잘못은 분명히 판단되어야 하고, 책임은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정죄가 존재를 영원히 고정하는 낙인이 될 때,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됩니다. 정죄가 존재의 고정을 뜻한다면, 정죄(淨罪)는 업의 정화를 뜻합니다. 하나는 낙인을 남기고, 다른 하나는 조건을 소멸시킵니다.
디킨스가 그린 여인은 원한과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동일시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 원한이 ‘나’라는 형식으로 굳어졌을 때,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동정심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불이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자아와 분노가 둘이 아니라 하나로 응결된 상태, 그 응결(凝結)이 타자를 가두고 결국 자기 자신까지 가두는 구조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분노 그 자체가 아닙니다. 분노와 자아가 동일시되어,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의의 화신이라 믿고 타자를 절대 악으로 고정시키는 순간입니다. 그 구조는 결국 자기 자신도 하나의 개념으로 굳혀버립니다. 원한은 타인을 파괴하기 전에 먼저 그 원한을 품은 주체를 경직시킵니다.
불이는 모호함이 아닙니다. 불이는 책임을 회피하는 중립도 아닙니다. 불이는 정죄(定罪) 속에서도 존재의 가능성을 지우지 않는 시선입니다.
지옥을 말하되 영원을 선언하지 않는 태도, 잘못을 묻되 존재를 폐기하지 않는 태도.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분노가 아니라, 자기 분노를 비추어볼 수 있는 침묵일지 모릅니다. 유마거사의 침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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