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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가운데 앉은 여인
슥 5:5-11
5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6 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그가 이르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이니라 하시고 또 이르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7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니 그 때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8 그가 이르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귀 위에 던져 덮더라
9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오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10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니
11 그가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슥 5:5-11 / [일곱째 환상] 설명해 주는 천사가 앞으로 와서 내게 말하였다. `어서 눈을 들어 저기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지 보시오!' 6) 내가 물었다. `도대체 저것이 무엇입니까?' `저기 나타나는 것은 큰 통입니다. 그 속에는 이 땅에 만연된 죄악이 가득 차 있습니다.' 7) 그런데 그 통의 둥근 납 뚜껑이 갑자기 벗겨져서, 나는 그 속에 한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8 천사가 설명해 주었다. `저 여인은 이 땅의 죄악을 나타냅니다.' 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그 여인을 통 속으로 밀어 넣고, 납으로 된 그 무거운 뚜껑을 본래대로 다시 닫았다. 9) 그런 다음에 내가 다시 눈을 들어 살펴보니 두 여인이 황새 날개와 비슷한 두 날개를 바람이 부는 힘에 따라 활짝 펴고 날아와서, 그 통을 양쪽에서 붙잡아 들고 공중으로 멀리멀리 날아갔다. 10) 나는 또 천사에게 물었다. `저 여인들이 그 통을 어디로 가지고 갑니까?' 11) 그가 대답하였다. `그 여인들은 ㄱ) 시날 땅으로 가서 통 속의 여자를 위하여 신전을 지어 주려고 합니다. 신전이 완성되면, 그들은 그 통 속의 여자를 그곳에 모실 것입니다. 그곳이 본래 그 여인이 살던 고향입니다.' (ㄱ. 바벨론. 바벨탑이 세워졌던 곳이며, 온 세계의 우상숭배와 죄악의 중심지를 상징한다)
스가랴는 일곱 번째의 환상으로 두 가지의 일을 보았습니다. 먼저는 에바 가운데 앉은 여인에 대한 환상을 보고, 이어서 날개가 있는 두 여인이 에바를 옮겨가는 환상을 봅니다.
에바 가운데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5-8) 스가랴는 일곱 번째 환상으로 에바를 봅니다. 에바는 곡식들의 부피나 양을 측정하는 용기로서, 약 22리터짜리 도량형 양동이입니다. 이 에바의 뚜껑을 여니 그 안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고 둥근 납이 한 조각 있었습니다(7). 천사는 여인이 악이라고 말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악으로 상징되는 이 여인이 에바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퍼져나가지 않도록 납 조각으로 에바의 뚜껑을 덮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악에 물들지 않고, 악에 전염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 환상이 의미하는 것은 에바 속에 든 여인은 악을 상징하고, 악이 담겨 있는 에바는 범죄 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 모든 것이 양동이 속에 갇혀 있으니 하나님께서 이미 백성들의 죄에 대해서 행동을 취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오는데(9-11) 새롭게 나타나는 두 여인은 학의 날개와 같은 날개를 달고 있고, 악으로 칭했던 여인이 담겨 있는 에바를 들고 공중으로 날아갔습니다. 두 여인이 에바를 들고 날아가자 스가랴는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물었습니다(10). 천사는 시날 땅으로 간다고 합니다(11). 그리고 거기에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완성되면 그 안에 둘 것이라고 합니다. 시날 땅은 바벨론이 유다를 쳐들어와 다니엘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을 끌고 갔고, 성전 기물도 탈취하여 자신들의 신전 보물을 둔 장소입니다. 또 온 세상의 언어가 하나였을 때, 교만이 극에 달했던 사람들이 벽돌로 성읍과 탑을 하늘까지 건설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고 바벨탑을 세웠던 곳 또한 시날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이 이스라엘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악을 죄악과 심판의 땅으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이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는 재건된 성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말고 죄악 가운데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주부를 대상으로 한 어느 강의 시간, 교수가 한 여성에게 칠판에 아주 절친한 사람 20명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곤 교수는 이 중 덜 친한 사람의 이름을 순차적으로 지우라고 했습니다. 칠판에는 단 네 사람만 남았습니다. 부모와 남편 그리고 아이. 교수는 다시 한 명을 지우라고 했고 그녀는 망설이다가 부모의 이름을 지웠습니다. 또다시 한 명을 지워야 할 때,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 각오한 듯이 아이의 이름을 지웠습니다. "남편을 지우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울먹이는 그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부모님은 세상을 떠날 것이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가정을 만들어 나를 떠날 것입니다. 일생을 함께 지낼 사람은 남편뿐입니다.“
< 설 교 >
에바 속의 여인과 다른 두 여인
스가랴 5장 5~11절 / 김철한 목사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을 보고 말씀의 영원성을 제시한 스가랴는 또 다시 에바 속의 여인을 보게 된다. 에바는 곡식의 양을 재는 그릇으로써 쌀과 보리를 담는 뒤주통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그 에바 그릇 안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고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려있다. 이것을 본 스가랴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고 말하면서 나아오는 천사에게 에바 환상에 대해 묻는다.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그랬더니 슥5:6에서 천사가 말하길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고 하였다. 그들의 모양이란 무엇인가? 칠 십인 역에서 그들의 모양이란 ‘죄악’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죄악은 이 땅에 사는 세상 사람들의 죄악을 가리키는 것이다. 에바 안에 앉아 있는 여인이 세상 악의 모양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에바 안에 세상 죄악이 들어 있는 이 여인의 뜻은 무엇인가?
1. 사람의 마음 그릇 안에는 죄악성이 여인처럼 앉아 있다.
사람은 어떤 면에서 그릇이다. 바울은 고후4:7에서 “질그릇”으로 말했고 딤후2:20에서도 “각종 그릇”으로 인생을 말하였다. 그런데 이 땅에 사는 만인들의 마음의 그릇 안에는 선한 요소도 있지만 악한 죄성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죄성은 아무리 멋진 옷을 입고 깨끗한 몸가짐으로 단장을 해도 죄에 빠뜨리는 요염한 여인처럼 버티고 있다.
은혜를 받고 중생을 체험한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 마음의 뚜껑을 열고 보면 역시 죄에 대한 본성이 남아 있어 기회를 엿보고 있다. 목사가 되고 수도사가 되어도 악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50년 목회를 해도 그릇으로 비유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악을 상징하는 여인네가 앉아 있다. 이것을 외면하면 안된다. 이 앉아있는 여인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여인이 일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이 여인은 타락하게 만드는 음녀이다.
2. 죄성을 뜻하는 여인이 나오려고 꿈틀거린다.
슥 5:7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고 한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고 하였다. 둥근 납 조각은 무거운 물체다. 금속 중에서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이 납 조각이다.그런데 납 한 조각이 들린다는 것은 그릇 안에 있는 여인이 일어서서 에바 밖으로 나오려고 꿈틀거리는 모습이다. 아! 정말 여인이 밖으로 나오면 다시 그릇 안으로 집어 넣어두기가 어렵다. 에바 입구에 이 무거운 납 조각을 둔 것은 여인을 그릇 안에 가둬 둠으로 활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여인이 나오려고 하므로 납 조각이 움직인다는 것은 죄성의 발현이다. 꿈틀거리는 욕망과 탐욕의 죄성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다.
그런데 왜 여인인가? 죄성, 죄악을 왜 여인으로 보여주시는가? ①악이라는 히브리어는 여성 명사이기에 여인으로 상징했다. ②여성의 유혹성 때문이다. 슥5:9을 보면 날개를 가진 두 여인이 나타나는데 분명코 이 두 여인은 에바를 들고 있는 여인이다. 그러므로 에바를 들고 있는 여인이 선의 여인이라면 에바 속의 꿈틀거리는 여인은 악한 여인이다. 여인은 선할 때 매력적이다. 여인은 지혜로울 때 아름답다. 여인은 어머니가 될 때 희생적이다. 그런데 세상의 악으로 비유된 이 여인은 꿈틀거리는 인간 내면의 죄성으로서 죄성이 이끄는 힘이 지남철처럼 강하다는 것으로 여성의 끄는 힘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니까 여인이 음녀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악한 여자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해서 일을 그르친다. 거룩한 사역을 그르치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천사처럼 여인의 감미로움, 여인의 아름다움, 여인의 부드러움으로 미혹하므로 뿌리치지 못한다. 죄악이 여자의 유혹과 같다는 뜻이다. 보기에 달콤하니 분별을 못하고 따라간다.
잠5:3~4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라고 하였다. 잠6:26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고 하였고 잠7:25~26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되지 말지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잠23:27 “대저 음녀는 깊은 구덩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악을 여인으로 그렸다.
오늘 날의 많은 크리스챤들도 속수무책으로 이 음녀의 꾀임에 빠져 죄를 짓고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릇에서 나오려는 여인이 우리 안에 꿈틀거리는 음녀와 같음을 알고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3. 그릇을 밀봉하여 여인을 가두어야 한다.
슥5:8 “그가 이르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귀 위에 던져 덮더라.” 그렇다. 무거운 납 조각으로 덮어야 한다. 마음의 그릇을 열고 나오기 전, 그릇 밖으로 악이 분출되지 않도록 여인이 세상 전역으로 활보하지 않도록 완전히 덮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이 여인이 그릇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힘과 그 힘을 내리눌러서 밀봉시켜 버리는 힘과의 대결이다. 신앙 생활은 어떤 면에서 영적 전쟁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거듭나고 중생했더라도 죄악은 다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죄성이 활동을 못하고 있을 뿐이지 이제 기회를 엿보고 은혜의 힘, 찬송의 힘, 말씀의 힘이 약해지면 에바 통 밖으로 죄악이 튀어나온 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힘을 구하고 말씀의 힘을 구하고 은혜의 힘을 구하는 생활을 계속해야 여인의 활동을 묶어둘 수 있다. 내 마음 속의 음녀를 가두라. 이것이 신앙 생활이다. 내 안에서 죄악이 움직이더라도 어떻게든 나오지 못하게 하라.
그런데 스가랴가 에바 통을 환상으로 볼 때 에바 통을 들고 있는 날개 달린 두 여인이 보였다. 스가랴가 이 장면을 슥5:9에서 보고 슥5:10에서 천사에게 묻는다.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스가랴가 본 두 여인은 에바 그릇을 옮겨가고 있었다. 날개에 바람이 있는 학의 날개 같은 날개를 지닌 이 여인, 이 여인의 하는 역할을 보면 슥5:11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짓는다. 그리고 그 에바 통을 그 처소에 머물게 한다. 다시 말해 시날은 바벨론이다. 에바 통이 바벨론 제국으로 보내어져 거기서 바벨론의 숭배 대상이 된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죄를 멀리 추방했다는 환상이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 옮겨버리는 두 여인은 특별한 여인이다.
이 여인이 누구인가? 죄를 진멸시킬 수는 없으나 죄를 시날로 보내버리는 이 여인들은 거룩한 선민, 예루살렘의 특별한 사명자들이다. 다시는 여자 음녀의 유혹에 빠져 거룩을 망가뜨리지 않으려는 사명자, 증인으로서의 선민들이다. 그들에게 날개가 있고 바람이 있다. 에바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예루살렘 선민의 땅에서 바벨론 먼 이방의 땅으로 옮겨 보내는 것은 사명이지만 날개와 바람이 없이는 안된다. 에바를 들어서 옮기는 것은 하늘을 나는 날개의 힘이 있어야 한다. 그 날개는 선민의 확고한 비전이다. 비전의 힘으로 멀리 날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이 환상을 보면서 우리는 이 시대의 악, 이 세상의 악이 만연함을 본다. 우리가 에바 통을 옮기는 자가 되려면 우리의 힘으로는 안된다.
첫째, 날개를 구하자. 그 동안 날개가 없었다면 다시 날개를 구하자. 부러진 날개가 있었다면 다시 회복되자. 우리가 비전 없이, 목적 없이 지내왔다면 아무 것도 안된다. 다시 날개를 달자. 어느 시대든지 비전의 날개가 있는 자는 더 이상 죄 아래 방황하지 않는다. 옮겨야 할 에바 통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스가랴 시대의 사명자들, 구약의 선민들에게만 날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비전의 날개는 오늘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꼭 필요하다. 날개가 없으면 에바 통을 들고 있을 생각도 못한다. 들어서 바벨론으로 옮겨가기는커녕 죄성의 꿈틀거림 앞에서 아무 일도 못하는 사명자가 되고 만다. 날개가 있기에 산을 넘는다. 언덕을 넘는다. 날개가 있기에 사명자가 에바 통을 시날로 가져간다.
둘째, 바람을 일어나게 하자. 바람은 여러 가지 종류의 바람이 있다. 산들 바람, 서늘한 바람, 매서운 바람, 훈훈한 바람, 폭풍우 바람 등이다. 그러나 에바 통을 바벨론으로 옮겨버리는 바람은 비전을 성취하는 보혜사 성령의 바람이다. 성령의 바람은 거룩을 꿈꾸게 한다. 선민답게 살아가는 영혼의 부흥을 일으킨다. 성령의 바람이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불어오면 모든 일이 쉬워진다.동서남북이 막혀도 하늘은 열려 있다. 바람을 타고 나르는 사명자가 되면 에바 통의 여인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된다. 에바 그릇이 옮겨지고 나면 선민의 땅은 깨끗해지고 부흥이 일어난다.땅이 회복되고 땅이 고쳐질 것이다.
이 시대에도 교회가 여인과 같다. 복음을 위해 거룩한 나라, 거룩한 도시를 꿈꾸는 교회는 두 여인과 같다. 그 교회 뒤에 성령의 바람이 일어나면 술집이 줄고 죄수가 줄고 살인과 마약, 폭력의 수가 줄어들고 거룩한 땅이 될 것이다. 스가랴는 자기 시대의 에바 그릇이 죄악의 처소인 바벨론,귀신의 처소인 바벨론, 바벨론으로 가게 되는 환상을 보았다. 오늘 우리는 에바 속의 여인과 그 에바 그릇을 들고 있는 두 여인이 날개와 바람을 일으키는 환상을 다시 바라보며 교회가 더러운 죄악을 밀봉하여 세상으로 내다버리는 역할을 해야 됨을 꿈꾸자.
에바 속에 있는 여인
슥 5:5-11
스가랴가 아홉 가지 비젼을 보는 가운데 오늘 본문은 일곱 번째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에바 속에 있는 여인’ 이란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면 ‘a wo-man in basket’으로 에바란 곡식을 담아 분량을 재는 용기를 말합니다.
우리 한극에서는 되, 말이라는 것이 가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바라는 용기를 가지고 분량을 잽니다.
한 에바는 우리의 되 분량으로 치면 약 15되 가량을 담을 수 있는 용기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에바가 하나 나타나고 그 에바 안에 한 여인이 깊숙히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앉아 있는 모양이 난폭하게 던져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납덩이가 들려져 곧 닫혀진 상태입니다.
여인이 그 속에 앉자 있는 순간에 에바의 입구를 덮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기 속에 여인이 던져지고 그 위에 납덩이가 덮어 여인은 이제 옴짝달싹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날개 달린 두 여인이 나타나서 에바를 띄어서 시날땅으로 옮겨 준비된 집에 안치해 놓고 영원히 그 곳에서 머물게 합니다.
1. 심판의 신속성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슥5:7)
스가랴에서는 특별히 해석이 난해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에바 속의 여인도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추측할 수도 없고 다만 많은 학자들의 공통적인 해석을 보면 이 환상은 백성들의 악의가 에바 속에 꽉 채워지면 심판은 더이상 지체하지 않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바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측정하는 기구로 삼으셔서 죄가 에바의 입구까지 차 오르면 납덩이가 그것을 덮어 버리고 그 다음엔 지체없이 정한 곳으로 날아가서 영원히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가득 채워지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심판의 순간인 것입니다.
2.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슥5:11)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우리는 종종 급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왜 이런 죄악을 가만히 보고만 계신가 악한 사람을 빨리 처치하지 않으시고 가만히 계시는가’ 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상하게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바꾸어 생각하면 하나님이 만일 지체하지 아니하고 심판하셨다면 그 심판은 나부터 시작해서 우리 가족, 우리 이웃, 우리 교회가 망해도 폭삭 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에바에 가득 채워지는 날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에바의 입구를 덮어 버린 납덩이는 무거운 심판을 의미합니다.
또 에바 속의 여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일 것이라고 해석을 하지만 이것은 유대인만이 아니고 악한 자 모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한 대명사가 에바 속에 던 지움을 받은 여인인 것입니다.
날개 달린 두 전령은 하나님의 전령입니다.
3. 세 가지 교훈
첫째,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포함한 모든 개인과 사회, 혹은 국가에 죄의 측정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저울로 달아보시고 줄자로 재어 보시며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에 가까워졌는지를 측정하십니다.
그런데 그 죄악의 측정기가 가득 체워지면 우리는 별 수 없이 하나님 앞에 심판 감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까지 참으시고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재어 보실 것입니다.
올림픽을 주셨는데 올림픽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게 했는지 하나님께서는 재어 보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가정과 훌륭한 직장과 교회 그 많은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어떤 영광을 돌린 지를 재어 보십니다.
둘째, 죄인 위에 떨어지는 심판은 불가항력적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올 때에는 그것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에바의 입구에 납덩이가 덮어 버리니까 에바 속의 연인은 살아나 올 길이 전혀 없습니다.
에바의 입구에 납덩이가 덮어 버리니까. 에바 속의 여인은 살아나 울 길이 전혀 없습니다.
대개 에바를 덮을 수 있는 납덩어리의 무게는 45Kg 정도 됩니다.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
스가랴 5:1-11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5:11)
앞선 다섯 번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약속하는 은혜로운 환상이었다. 여섯째 날아가는 두루마리와 일곱째 에바의 환상에선 인간의 죄악을 하나님이 엄히 심판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두루마리는 율법을 상징하고, 그것이 날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모든 이들의 죄를 살피고 율법에 비추어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그 많은 죄 중에 특별히 도둑질 하는 죄와 거짓 맹세하는 죄를 예로 들었다. 십계명의 여덟, 아홉 번째 계명일 만큼 위중한 죄다. 죄에 경중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그보다 더 중해 보이는 살인 간음 대신 이 두 죄를 거론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성경말씀의 세부적 해석은 전체 주제에 맞춰야 한다. 스가랴에게 주신 계시의 초점은 성전재건을 완성하여 영적부흥을 이루라는 것이다. 거기다 그 죄들을 지은 자들의 “집에 들어가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는”(4절) 심판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 심판의 원칙은 그 행한 대로 갚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전재건과 관련하여 도둑질하고 거짓 맹세한 죄들을 꼭 집어낸 셈이다. 예컨대 성전재건에 소요되는 자재들을 직접 도둑질하거나 그 양을 속여 납품했고 그러면서도 정량이라고 맹세한 죄일 것이다. 성전이 결코 완공되지 못한다고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사기를 떨어트린 죄도 포함될 것이다. 이어지는 일곱째 환상이 곡식을 재는 에바이므로 개연성이 충분한 추측이다.
두루마리가 하늘을 날았다면 하나님이 이 두 죄만 심판할 리는 없다. 다른 죄는 다 용서할 수 있어도 이 두 죄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전재건, 요즘 식으로 바꾸면 교회건축에 적극 동참하지 않거나 훼방하는 죄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성전재건과 스가랴의 첫 메시지를 연결해 봐야 한다.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여호와도 돌아온다고 약속했다. 여호와가 돌아올 장소가 성전이다. 성전 완성은 이스라엘이 신령과 진정으로 여호와를 만나고 싶다는 소원의 완성이자 영적부흥의 상징이다. 범사가 성전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구약시대 이스라엘에겐 성전재건이 되어야 실제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예수님도 다른 죄는 다 용서해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 즉,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 복음이 전파되는 일을 방해하는 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고 선언했지 않는가?
일곱 번째 에바를 먼 시날 땅으로 옮겨버리는 환상은 죄의 심판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에겐 아주 큰 위로가 된다. 시날은 바벨탑을 건축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곳이다. 지금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과 인간 죄악의 도성을 극적으로 대조한다. 성전재건을 훼방하는 자들의 죄악을 제거한 후에 악을 에바 속에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아귀 위에 덮어 시날 땅으로 던져버렸다. 대속죄일에 아사셀 양에게 백성의 모든 죄를 안수 전가한 후에 죄의 근원 사탄이 거주하는 광야로 돌려보내는 원리와 같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전이 정화되어 속죄제를 제대로 준행하면 당신께서 백성에게 돌아오신다. 예수님도 강도의 굴혈로 바뀐 성전을 정화하여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이 두 환상은 스가랴시대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더 엄격히 선포하신 것은 아닐까? 겉으론 장엄한 예배당인데 그 안에는 시날 땅에 가있어야 할 악들이 만개하고 정작 성령의 역사로 선포해야 할 십자가 복음은 실종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