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2007년 대선을 통해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을 때만 해도 우리 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공고화 되어 있다는 생각을 의심할 수 없었다. 적어도 한나라당이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통치 방식으로 회귀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무척이나 순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불과 1년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궁금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왜 민주화 세력은 그렇게 쉽게 몰락해 갔을까? 권위주의 세력이 그렇게 쉽게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노무현이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은 무엇이고 빼앗아 간 것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는 지금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그런데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무엇이 위기의 근원인지 무엇이 갈등의 기원인지 눈에 보이는 현상만 가지고 정확히 판단해 내는 것이 어려웠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싶다. 그러나 나의 지식은 짧다. 그래서 여기 예비 언론인 여러분들의 지혜를 빌려 나의 궁금함을 조금이라도 털어내 보고자 이 글을 쓰려 한다. 지금 구상으로는 칠레 좌파의 패배와 노무현 정권의 몰락 과정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비교해 보며 이야기를 끌고 가 보고자 한다. 하필 칠레를 거론하는 이유는 민중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장악한 좌파가 우파의 쿠데타로 붕괴되는 과정이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과 유사한 점을 많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 미약한 능력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이 어지러운 시국에 서로의 지혜를 모아 우리 사회의 미래에 보탬이 되는 "무언가"를 함께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아옌데 정권의 수립과 패배**
살바도르 아옌데는 1970년 칠레 대선에서 좌파의 후보 단일화 과정을 통해 인민연합(사회당+공산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 그 결과 36%의 득표를 획득하며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사회주의 정부의 수장이 된다. 그는 당시 칠레 경제가 미국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칠레의 사회적, 경제적 위기의 근원을 찾았다. 당시 칠레의 주요 은행과 광산의 80%가 미국 자본으로부터 지배받고 있었고 칠레 경제는 "바나나 공화국"(한 가지 주요 생산물에 경제 전체가 좌우되는 경제 구조를 비꼼.)이라 불릴 정도로 구리 수출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았다.
아옌데는 극심한 빈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주요 은행과 국부의 근원인 광산을 국유화 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하는 미국의 대외 정책과 정면충돌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아옌데 당선 직후부터 CIA를 동원해 칠레 군부의 파시스트 그룹을 교육시키고 우파들의 사보타주를 암암리에 지원했다. 그리고 칠레 기득권 세력들은 아옌데의 사회주의적 정책에 위기감을 느껴 조직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한다.
아옌데를 지원하는 그룹은 조직화된 노동자 계급과 사회당, 공산당 같은 좌파 계급 정당이었다. 반면 그를 반대한 쪽에는 우파인 기민당과 극우파인 국민당, 중산 유통업자 계층, 구리 광산 노조 같은 거대 귀족 노조 등이 있었다. 물론 이들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우파는 지속적인 사보타주를 일으켰다. 귀족 노조들은 터무니없는 수준의 임금 인상을 주장하며 수시로 파업을 감행해 국가 경제를 마비시켰다. 극우파는 "조국과 자유"라는 극우 단체를 만들어 수시로 도심에서 폭력 시위를 일으켰다. 카톨릭 대학의 대학생들이 이에 가담했다. "채널 13"과 같은 보수 언론들은 연일 아옌데 정권을 헐뜯는 방송을 일방적으로 내보냈다. 당시 그들은 전체 언론 시장의 70% 정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으로 칠레의 경제는 1973년에 이르러 마비 상태에 빠진다. 연초에 유통업자들이 생필품을 매점매석하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율이 300%까지 치솟았다. 구리 광산의 파업으로 생필품 수입이 어려워져 대중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그런 와중에 1973년 3월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만약 우파가 2/3 이상 의석을 차지하면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었다. 우파는 승리를 확신했다. 공산정권을 합법적으로 축출할 기회가 왔다고 기뻐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예상을 깨는 것이었다. 민중연합은 대선 때보다 더 높은 43% 대의 득표를 얻었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지만 칠레 민중들은 아옌데 정권을 지지해준 것이다. 아옌데의 평등화 정책 결과 칠레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도 끼니 걱정은 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파의 합법적 쿠데타 기회는 일단 그렇게 무산되었다.
우파는 이제 다른 수단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합법적 쿠데타가 안 되면 남은 길은 군사 쿠데타다. 부르주아의 매점매석과 파업이 계속 진행되던 1973년 6월 29일, 소규모 부대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당시에만 해도 칠레 군부의 최상층부는 아옌데 정권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입헌주의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규모 쿠데타는 쉽게 진압될 수 있었다.
국회는 완전히 정지되었다. 기민당과 국민당 연합인 우파가 다수를 장악한 상황에서 아옌데 정권의 어떠한 정책도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옌데가 임명한 장관 15명이 단 열흘 동안에 탄핵되어 쫓겨나기도 했다. 아옌데는 결국 기민당에게 대연정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 역시 우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우파는 아옌데 정권이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는 헌법 파괴 행위를 저질렀다며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보수 매체는 정권의 무능함을 부각시켜 연일 보도했다.
좌파 진영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조직된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데타에 저항할 노동자 군대를 조직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이것은 정부 측과 노동자 측이 갈등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아옌데는 어떻게든 내전만은 막아 보고자 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무장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쿠데타가 닥쳐올 경우, 이를 막을 조직된 대항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옌데의 타협주의 노선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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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너무 힘들어서 ㅡㅜ. 반응 보고 괜찮으면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흥행 안 좋으면 글 내리고 바로 버로우 타겠습니다.
첫댓글 잼있어요.. 계속해 주세요...^^
흥미롭습니다. 잘 읽을께요.
화이팅! ㅋ 다음 편을 기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