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그의 집으로 연이를 데리고 온 은혁은 괜히 어색한 느낌에 잠시 헛기침을 흠흠, 했다. 그날의 ‘그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든 스킨쉽을 해보려고 시도했을 은혁이었겠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연이가 원치 않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려 세수하고 오겠다고 화장실로 들어간 그는 자신의 건강한 젊음의 욕구를 속으로 나무라며 문을 열고 나왔다. 원룸의 부엌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연이가 갈증이 났는지 냉장고 속에 있던 오렌지 주스를 꺼내 따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다른 컵을 내밀었다.
“남자 혼자 살아서 밥이나 제대로 챙겨먹는지 걱정했는데, 냉장고 속에 있을 건 다 있구나? 집도 깔끔하고..”
은혁의 집이 신기하다는 듯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말하는 연이의 귀여운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건네받은 오렌지 주스를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곳으로 오기 전 함께 비디오 가게에서 고른 영화를 기계에 넣고 재생시켰다. 비디오 앞에 으레 녹화되어 있기 마련인 다른 영화 광고들이 돌아갈 동안 연이를 편히 앉혀두고 은혁이 사과를 깎아 접시에 담아왔다. 혼자 사는 탓에 남자치고는 살림이 어느 정도 익숙한 그이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놀러 온 연이를 대접한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는지 사과는 다른 때보다 더 이쁘게 깎여 있었다.
헐리웃의 로맨스 영화. 제목이 뭐더라. 사실 은혁은 같이 골랐던 영화의 제목조차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연이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욕구, 남자에게 이 욕구가 좀 덜 주어졌다면 괴로울 일도 반으로 줄텐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텔레비전 속에서는 막 잘생기고 아름다운 남녀 주인공이 키스를 하며 껴안고 있었다.
...젠장. 뭐 하나 도와주는 것이 없구만. 연이가 듣지 못할 정도의 나직한 소리로 투덜대던 그는 문득 몸이 나른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휙휙 돌려 몸을 풀던 그의 머리가 어느 순간 축 쳐졌고, 그런 그의 모습을 연이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생각하며 눈꺼풀을 위로 올리기 위해 애쓰는 은혁의 눈에 연이의 얼굴이 보였다. 꿈을 꾸고 있나? 하지만 꿈이라기엔 그녀의 얼굴은 지나치게 예쁘다. 완벽하게 균형 잡힌 달걀형의 얼굴, 시원하게 쌍꺼풀진 또렷하고 커다란 두 눈, 오똑하면서도 앙증맞은 코, 볼때마다 키스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하는 붉은 입술.. 잠시 그 자세 그대로 그녀의 얼굴을 감상하던 그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연이는 지금 내 집에 와 있다. 그런데 왜 난 이렇게 누워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이어지며 몸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꼼짝도 할 수 없이 쳐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정신이 들어?”
“..나 영화보다가 잠든거야? 이런..미안. 그런데 몸이 좀 이상해. 움직이질 않아”
연이의 물음에 대답을 하며 은혁이 어떻게든 누워있던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기 위해 애썼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연이가, 소용없어, 그냥 가만히 있는게 더 편할거야, 라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곁에 앉았다. 이렇듯 무심한 그녀의 표정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친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다.
잠시 망연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옆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은혁이 눈동자를 굴렸고, 눈에 비친 것은 연이의 작은 손에 들려있는 녹슨 칼이었다. 무언가 현실감이 없다고 느껴졌다. 차라리 저 손에 들린 칼이 커다란 식칼 정도였다면 은혁은 공포에 질려 울부짖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건 식칼이 아닌, 중고등학생 시절 필통에 넣어가지고 다니던 자그만 커터칼이다. 지독히 비현실적이다. 은혁은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그와는 상관없이 연이는 그가 입고 있는 바지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리더니 마침내는 속옷까지 내려 그의 치부를 노출시켰다.
“여,연아? 뭐하는 거야?”
“뭐하긴.. 니가 보는 그대로지..”
지독한 아이러니다. 눈앞에 보이는 연이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평온하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마저 조용한 노래를 부르는 듯 듣기 좋았다고 여겼던 평소의 그것 그대로다. 그런 그녀가 한 손에 칼을 들고 내 옷을 벗기고 있다니! 순간 은혁이 불안한 어떤 예감에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연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너 지금 너무 무서워. 제발 이러지마...제발 연아”
그의 용서를 구하는 일그러진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연이는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뭘 잘못했는데? 하고 묻는다. 순간 은혁은 당황했다. 몇 초 되지도 않는 짧은 시간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무수히 많은 생각이 흘렀다. 뭘 잘못했냐고? 연이가 이러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날 밤의 일 밖에 짚히는 것이 없다. 그런데 뭘 잘못했냐고? 그럼 난 솔직히 말해야 하는 것인가? 널 강간해서 미안하다고? 마침내 결심한 은혁은 더할 수 없이 처량한 목소리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정말 미안해.. 그 날밤, 그래 너한테 몹쓸 짓 한거 그거 나야. 술에 취해서.. 잠시 이성을 잃었나봐. 하지만 너도 알잖아? 나 너 정말 사랑해.. 사랑해서, 안고 싶었어. 방법이 잘못되긴 했지만 그래도 연아, 나 너 사랑해, 용...”
한 번 말문이 트이자 정신없이 말을 하던 은혁이 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눈을 크게 떴다. 간신히 눈을 굴려 쳐다보니 그녀가 그 작은 칼로 그곳에 생채기를 낸 것 같았다. 연아!
“.. 사랑해서 그랬다..라. 알아. 니가 나 사랑하는거. 사랑하니까 안고 싶은 맘도 이해해. 그런데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연이가 그의 얼굴쪽으로 상체를 숙여왔다. 그녀의 평온한, 어떻게 보면 살짝 미소를 띤 듯한 표정과 꿈꾸는 듯 달콤한 목소리에 그는 순간 그녀가 짓궂은 장난을 사과하며 키스라도 해주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의 달콤한 입술이 아닌 그곳의 계속되는 통증이었다. 얼굴을 있는대로 찌푸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그를 무시하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너 그거 알어? 성범죄의 가해자 중 많은 수가 피해자의 친인적이라는거.. 모르는 사람은 그럴거야. 어떻게 가족이 그런 짓을 해? 라고.. 그런데 말이야, 그거 진짜다? 나 여섯 살때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한테나 해야 할 짓을 나한테 하더란 말이지.. 그래서였어, 내가 어느 정도 이상의 스킨쉽을 거부 했던건.”
더 듣고 싶지 않다. 연이가 내 몸에 무슨 짓을 해서 단죄를 하든지 제발 말을 멈추어주었으면 싶었다. 더 듣고 있다가는 지금보다 훨씬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 이후로 남자와는 손닿는 것조차 무서웠어. 십년도 더 된, 단 한번의 일이었지만 내 기억은 그 끔찍했던 경험에서 나를 놓아주지 않았지. 자 이젠.. 그런 나에게 니가 저지른 잘못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겠어?“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그녀의 말로 미루어보아 그녀가 요구하는 대답이 ‘강제로 널 안았던 것’이라는 등의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라면서 어이없다고 느꼈던 건 바로 그런 거였어. 여자가 스킨쉽을 거부 하는건 내숭이다.. 강제로 하면 처음엔 저항할지 몰라도 나중엔 자기도 좋아할거다, 뭐 이런거. 강제로 당하는데, 너 같음 좋겠어? 자 봐, 지금 너처럼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옷이 벗겨져 상처가 나는데도 좋아?”
통증이 심해지고 있다.
“나는 싫다고 저항하는데.. 그런 내 몸에서 쾌락을 취하겠다는 인간들, 다 죽여버리고 싶어. 수치심과 통증에 미치는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아프지? 여잔 강제로 당할 때 절대로 뭘 느끼지 못해. 몸이 거부하고 있으니 통증밖에 안느껴져. 지금 니가 겪고 있는 이것 같은 통증 말이야”
그랬었나. 형석의 죽음의 이유, 그가 날 부추겼던 것을 연이가 어떻게 알았을까?
“ 니가 나에게 저지른 잘못은, 물론 강간 그 자체도 있지만 말이야. 더 큰 건 내 영혼을 파괴시켰다는 거야. 아버지가 나에게 한 짓이 지금까지도 한번씩 떠올라 나를 미치게 하는데, 믿었던 니가 짐승처럼 나에게 달려들어서 한 짓은 나를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어버렸어. 육체에 난 상처야 치료하면 되겠지. 수치스럽더라도 말 안하면 아무도 모르겠지. 그저 강도 당한 것과 다를 바 없이 난 피해자일 뿐 내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렇지만 마음에 받은 상처는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거야. 길가다 마주치는 인간들 중 절반을 평생 증오하면서 그 때의 공포, 수치심, 아픔을 기억하겠지. 너도 아파봐야지.. 안그래?“
은혁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입이 굳었다. 아마 나는 죽어가나보다.
“따르르르르르르릉~”
이게 무슨 소리일까. 은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이질적인 어떤 음을 듣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64화음짜리 폰을 사고도 옛날 전화소리가 더 정겹다며 은혁이 단음으로 설정해놓은 폰이 요란스럽게 울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어? 내 몸이 움직이잖아? 연이는 어디갔지? 내 아랫도리에서 났었던 상처와 피는 왜 안보이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뒤로 한 채 은혁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의 의문을 폰이 해결해 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낚아채어 귀로 가져갔다. 발신인은 연이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혜정이었다.
“여보세요?”
“은혁씨! 큰일났어요! 빨리 연이 집으로 와주세요! 연이가..”
연이 집으로 오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방금까지 펼쳐지고 있던 상황이 갑자기 없어진 것도 혼란스러운데 연이가 뭘 어쨌다고? 은혁은 폭발할 듯 휘몰아쳐오는 머릿속의 폭풍을 무시한 채 벗겨져 있는 옷을 기계적으로 입고는 달려나갔다.
“예상 사망 시각은 대략 한달 전 쯤입니다. 아무리 여자 혼자 살아도 그렇지, 한 달 동안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의 안부도 궁금하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젊은 여대생의 자살 사건을 수사 중인 형사가 애인이라고 밝힌 은혁을 향해 못마땅한 듯 말했다. 은혁은 그야말로 쇠뭉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연이가 한 달 전에 자살 했다고? 그럴 리가 없다. 형석이 죽은 이후 한 달 동안 연이를 몇 번이고 만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향해 원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단 말이다! 그러나 형사는 그렇게 말을 하는 은혁을 정신이상자 보듯 바라보며, 쯧쯧.. 애인이 죽어 충격을 받았나보다 하고 혀를 찼다.
동맥을 끊은 것으로 보아 자살로 추정하고 있기는 했지만 타살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기에 경찰은 국과수에 시신의 해부를 의뢰했다. 그리고 며칠 후 국과수는 동맥 절단으로 인한 과다출혈이 원인이 된 자살로 잠정 결론을 내린 문서를 보내왔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집에서 샤워를 하며 은혁은 고개를 흔들어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녀가 한 달 전에 죽은 것이 맞다면 나에게 강간 당했던 그 시점에 자살을 했다는 것이 된다. 그는 두가지로 생각을 나누었다. 첫째, 그럼 내 앞에 나타난 연이는 혼령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산 사람처럼 나타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왜 형석만 죽이고 나는 죽이지 않았는가? 둘째, 부검까지 했다면 그녀의 몸에서 나의 정액이 검출되었어야 한다. 그리고 그녀의 침대에서 나의 체모도 발견 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왜 그에 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자살로 결론을 내렸는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한 달동안 자신이 제정신으로 지내왔는가 까지 의문스러웠다. 그리고 복잡한 머리 만큼이나 연이의 시신이 발견된 그 날 이후 은혁은 식사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샤워를 끝내고 몸을 닦는 은혁의 주위로 온기 대신 갑자기 소름 돋는 한기가 느껴졌다. 은혁은 순간 모든 동작을 멈추고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의 뒤에 누군가 있다.
분명히 느껴지는 누군가의 기척이 있었으나 은혁은 뒤를 돌아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사람일리 없다. 그럼 사람이 아닌 어떤 것이 내 뒤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 ‘누군가’는 스멀스멀 은혁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뒤에서 껴안 듯 은혁에게 밀착하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터져나갈 듯 굳어있는 그의 귀에 그것이 노래하듯 아름다운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 죽어버리면 시시하잖아.. 살아야지.. 살아서 평생 내가 느꼈던 것을 느끼며 속죄해야지.. 안그래..?"
첫댓글 마지막 여자의 대사가 섬찟하네요...짧지만 아주 재미나게 읽었습니다...건필하세요~
다시 역반전 되는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특히나 평생 느끼면서 속죄하라는 대사가 마음에 듭니다. 다른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건필하세요.
아름다운 목소시로 작게 속삭였다.→아름다운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재미있게 잘봤어요 건필하세요^^
잘 읽었어요^^ 정말 첨 쓰시는거 맞나요?ㅎㅎㅎ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읽어주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소설이란걸 써보니 "정말 재밌다"라고 생각되는 글들을 쓰시는 분들이 얼마나 대단하게 느껴지던지.. 소설 쓰는거 정말 어렵더라구요ㅡㅜ
아.. 정말..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