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은 무릉도원에서의 신선놀음을 꿈꾼다. 때마침 찌는 듯한 무더위가 한풀 꺾인 8월의 어느 날, 그 꿈을 실현하러 떠났다.
목적지는 경치가 아름다워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경북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큰 마을’. 그곳에서 영화 <그해 여름> 속 한 연인의 특별한 추억을 되짚었다.
초록색 도화지 위에 섬세한 붓질로 완성한 그림. 서울에서 3시간30분을 달려 도착한 경북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큰 마을’의 첫인상이 꼭 그랬다. 푸른 산자락으로 둘러싸인 동네에 고색창연한 한옥과 돌담이 수를 놓았다.
그 풍경을 마주하니 신선들이 산다는 뜻의 선원(仙源)이라는 단어가 마을 이름에 들어간 이유를 알 듯했다. 국내 대표 복숭아 생산지인 영천답게 마을은 복숭아밭 천지였다. 그 덕에 어느 집 앞에 가든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 맴도는 듯했다.
발걸음은 어느새 마을 안쪽에 있는 한 고택에 닿았다. ‘정용준씨 가옥’이다. 조선 영조 때인 1725년에 지어진 이곳은 중요민속자료 제107호로, 이 마을의 명소다.
특히 본채에서 50m 거리에 서 있는 정자는 고풍스러운 마을 풍경에 화룡점정을 찍는다. 건축 직후 옆에 있는 연못에서 연꽃이 피어났다고 해 연정(蓮亭)이라고도 불린단다.
눈으로 직접 본 정자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삐걱대는 정자에 조심스레 걸터앉아 탐스럽게 핀 연꽃을 바라봤다.
1969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그해 여름>에서 이곳은 여주인공 서정인(수애 분)이 어렸을 적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이자 남주인공 윤석영(이병헌 분)과 사랑에 빠진 장소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랑을 키워간다. 짧았던 여름이 끝나고 그들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지지만, 그해 이곳에서 보낸 여름은 서로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는 한때가 됐다.
누구에게나 그런 한때가 있다. 인생 전체로 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평생 잊지 못하는 한때 말이다. 가슴 한쪽에 묻고 살다가 그 시간들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힘이 되는 그런 한때를 가졌다는 사실에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으랴. 아름다운 풍경에 둘러싸여 행복했던 시간을 되새기는 일이 신선놀음 아니겠나 싶었다.
연정을 나와 오는 길에 눈여겨봤던 임고서원으로 향했다. 마을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서원은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중기 1553년에 건립됐다. 기품 있어 보이는 서원에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정몽주 선생의 기개가 엿보였다. 특히 개성의 선죽교를 실측해 그 규모대로 가설한 다리가 꽤 근사했다.
서원 곳곳에선 어린 자녀를 동반한 가족들이 눈에 띄었다. 한팀은 개학을 앞두고 여름방학 과제를 하러 왔고, 다른 한팀은 늦은 여름휴가를 만끽하는 중이란다. 사람들은 저마다 여름을 떠나보낼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영천을 떠나기 전, 서원의 풍경을 눈에 담는 것으로 뜨거웠던 2018년 여름과 헤어질 준비를 마쳤다.
영천=최문희, 사진=김덕영 기자 mooni@nongmin.com
1960년대 농촌 배경으로 펼쳐지는 대학생·시골처녀의 로맨스
영화 ‘그해 여름’
농촌봉사활동으로 농촌에 온 대학생 윤석영(이병헌 분)과 시골마을 도서관 사서 서정인(수애 분)의 가슴 진한 사랑을 담은 멜로영화다. 공간적 배경은 수내리라는 가상 마을이다.
영화는 자칫 상투적일 수 있는 농촌마을 풍경을 깨끗한 수채화처럼 그렸다.
2006년 개봉작임에도 전기가 들어온 첫날, 마을 사람들이 모여 텔레비전을 함께 시청하는 모습이나 볏짚으로 지붕을 얹는 모습 등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정감 있는 일화는 1960년대 농촌을 경험한 적 없는 관객들에게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