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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의 생애와 사상]
세상에 대한 헌신: 칼뱅주의, 노동, 자본주의(2)
제네바의 초기 자본주의
16세기 초 많은 도시가 심각한 내분을 목격했다. 전통과 타성性상속받은 부,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정치 구조 같은 요소가 한데 뒤섞여 사회적 지위를 떠받치는 기존 귀족 계급과 드디어 자기들의 때가 왔다고 느낀 신흥 상공인 계급 간에 갈등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취리히에서 벌어진 종교개혁 투쟁은 전통에 매인 귀족 세력과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진보적인 신흥공인 세력의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종교개혁과 자본주의가 공통으로 신흥 도시 엘리트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했음을 시사하는 사례는 없을까?
만약 그런 사례가 있다면, 프로테스탄티즘이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을 만들어 냈다고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베버가 '근대 자본주의'라고 칭한 경제적 활력을 지향하는 특정 사회 계층은 종교개혁을 받아들이는 것을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목적을 성취하게 해줄 수단으로 간주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에 뜻밖의 연관성이 있을 수 있으므로 후자가 전자를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둘 다 근대 초기 도시 사회의 권력 구조에 생긴 변화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은 신흥도시 상공인 계층과 경제적·종교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은 이들 계층이 제약이 많은 중세 후기의 경제적·종교적 신념과 관습 안에서는 불가능했던 자기표현과 자아실현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게 해 주었다.
제네바의 경우에는 친사부아 세력인 마멜루크파와 친스위스 세력인 동맹파 간의 싸움을 전통과 진보의 충돌로 설명할 수 있다. 오랫동안 사부아 공국과 전통적인 가족 관계를 맺어 온 마멜루크파는 제네바가 계속 사부아 공국에 의존하기를 바랐다. 이와 달리 동맹파는 일반적으로 좀 더 진보적인 세력을 대표했다. 이들은 자기들의 정치적·경제적 미래를 자유와 연결 지어 생각했고, 당시에는 스위스 도시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 자유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제네바시의 경제 활력을 책임지는 구성원들은 1520 년대에 베른시나 프리부르시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이 무렵 이들과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보이지 않았다. 베른시와 프리부르시 둘 다 아직 가톨릭 도시였다. 제네바 동맹파가 이들에게 매력을 느낀 이유는 이 두 도시가 스위스연방에 속해 있어서 동맹을 맺으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득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른시가 츠빙글리식 종교개혁을 받아들였을 때 프로테스탄티즘은 이미 복잡한 경제 방정식과 정치 방정식에 추가된 종교 인자였으나 그렇다고 필수 구성 인자까지는 아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535 년에 제네바는 이웃인 사부아 공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해방되어 독립적인 프로테스탄트 도시국가가 되었다. 종교적 독립과 정치적 독립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고, 일련의 중요한 역사적 우연을 거쳐 이 둘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치적 독립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이 없었다. 어렵게 얻은 독립을 지켜내려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라도 자급자족이 이루어져야 했다. 13세기 이래로 제네바 경제는 국제적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무역 박람회에 의존해 왔다." 주요 무역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제네바는 15세기가 밝아 올 무렵 서유럽의 중요한 화물 집산지로 자리매김했다. 메디치가를 비롯하여 이탈리아에서 은행업을 하는 주요 가문들이 제네바에 지점을 개설할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15세기 중엽, 제네바는 베버가 말한 '구식 자본주의'의 중심지였다.
15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제네바의 상황은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1464년부터 1466년까지 이탈리아 상인들이 이웃 도시 리옹에서 열리는 무역 박람회에 가느라 제네바 무역 박람회에 오지 않았다." 부르노 카이치(Bruno Caizzi) 의 표현대로 실제로 두 도시 간에 '경제 냉전'이 시작되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알아채고 이탈리아 은행업자들은 제네바 지점을 폐쇄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여전히 제네바를 자주 찾았지만, 1520년부터 1535년 사이에 은행이 문을 닫고 정치 불안이 심해지면서 제네바는 무역 중심지로서 유리한 지위를 잃고 말았다" 역설적이지만, 무역업자들이 유입되면서 정치 불안이 조장되었다. 독일 상인들이 제네바시에 들어올 때 루터파 출판물을 가지고 온 것이다. 이 출판물들은 통상적인 상품만큼이나 잘 팔렸다. 1518년부터 1523년까지 경제 성장기에 접어드나 싶었지만, 불확실한 정치 상황 때문에 곧바로 역전되었다. 1524년부터 1534년까지 불경기가 이어졌다. 제네바시에 닥친 고유한 어려움 때문에 더 심각해지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제네바의 상황은 스위스 도시들이 겪던 경제난과 비슷했다.
화물 집산지로서 전통적으로 해 오던 경제적 역할을 상당 부분 빼앗긴 제네바는 독립한 해인 1535년에 도시의 생존을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침체와 불황의 악순환에 빠진 가난한 도시는 인근 약탈 국가들의 침략 위협에 맞서 거액을 들여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조차 없었다. 1535년부터 1540년 사이에 스위스 여러 도시에서 경기 침체가 시작되었지만, 제네바는 놀라운 회복세를 보였다. 1540년부터 1559년 사이에 회복세는 더 견고해졌다. 이때 제네바시 전역에서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경기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부분적으로, 독립을 지키겠다는 시의 결단이 경기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독립 투쟁으로 얻은 자유를 지키겠다는 기업의 의지가 있었다. 그런데 최근 제네바 공화국의 운명이 걸린 이 기간에 이 도시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던 원인에 관심이 쏠렸다. 그것은 바로 스위스 프로테스탄트 도시들의 재정 연대다. 근대 스위스은행 제도, 특히 국제금융 벤처기업에 강하게 개입하는 제도의 기원은 16세기의 네 번째 10년이 시작된 153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헬베티아 연방 도시들과 다른 도시들이맺은 협약이 이러한 발전을 촉진한 중요한 원인이다. 특히, 1519년에 로잔과 베른이 맺은 협약, 1526년에 제네바와 베른이 맺은 협약은 이러한 동향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처음에는 도움이 필요한 시기에 동맹 도시들을 정치적으로나군사적으로 지원해 주는 것이 이 협약의 기본 목적이었다. 그러나1 530-1531년에 재정적 지원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취리히는1차 카펠 전쟁의 여파로 정치적·경제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에 바젤시는 가톨릭 동맹에 맞서 프로테스탄트 동맹의 진실성을 지키기 위해 곤경에 빠진 취리히시에 1만 4,300 에퀴를 빌려주었다. 1531년말부터 1532년 초에 헬베티아 연방에 속한 프로테스탄트 도시들에다시 불운이 닥친 이후에 베른시는 바젤시에 1만 2,750 에퀴를 빌렸다.” 1530년대 초에 일어난 스위스 종교전쟁은 프로테스탄트 도시들이 어려운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해 준 금융 제도가 출현하고, 바젤이 이 금융 제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제네바가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그런 재정 지원을 받을수 없었다. 그러나 1536년부터는 무장, 방어 시설 확충 등의 목적으로 바젤시에서 자금을 빌릴 수 있었다. 1536년 혁명의 여파로 동맹도시들 사이의 차관을 조정하기 위해 '방주의 보물 trésor de l'Arche’이라는 기관이 설립되었다. 제네바는 1567년부터 외국 자본을 끌어올 다른 자금원을 광범위하게 확보하기 시작했다. 1590년에는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 헝가리, 저지대 국가들, 스위스 도시들에 있는 다양한 프로테스탄트 자금원으로부터 약 21만 1,000에퀴를 받았다." 이런 자금 덕분에 제네바는 이웃 가톨릭 도시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독립을 지킬 수 있었다. 1567년에 설립한 '공공거래소Le change public ' 처럼 도시 안에 새로운 금융기관이 문을 열면서 제네바가 자주 독립체로서 살아남을 가능성도 더 커졌다.
그런데도 제네바 안에 독립적인 자금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인식이 갈수록 강해졌다. 1551년 제네바시 재정 기록에는 '바젤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메모가 적혀 있다. 외국 자본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제조업이 제네바에서도 발달하면서 시의 재정자립도를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540년대 초에 이런 동향이 포착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발전기는 외국 망명자가 대거 유입된 시기와 겹친다. 1549년부터 1560년까지 프랑스를 떠난 약 4,776명의 망명자가 제네바에 도착했다. 그중 1,536명은 공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족에게 적대적이던 제네바 당국의 태도에 용기를 얻은 것이 틀림없다." 대다수 망명자가 프랑스에서 소규모 제조업이나 공예나 상거래에 종사했었기 때문에 많은 이가 제네바에 정착한 뒤 별 어려움 없이 생계 활동을 재개했다.
몇몇 사례는 제네바에서 제조업이 성장한 배경을 설명해 준다. 단기간에 제네바는 벽시계와 손목시계 제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프랑스인들이 제네바에 망명을 온 덕분이었다.” 종이와 활자 생산 같은 보조 산업과 함께 중요한 의미가 있는 출판업도 발전했다.
보르디에 가문과 말레 가문처럼" 옷감과 의복 거래에 종사하던 프랑스 가문들이 이주하면서 제네바에서도 이런 산업이 성장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망명한 숙련공들의 전문성과 상황 판단이 빠른 이탈리아인 어음 인수업자들이 제공한 자본을 바탕으로 비단산업은 중요한 수출산업으로 발전했다. 낡아 빠진 영주 교회 제도와 함께 사실상 '근대 자본주의'의 마지막 세속적 장애물이라 할 수 있는 길드 제도가 폐지되면서 제네바에 이제 막 도착한 사람들도 큰 제약 없이 사업체를 세우고 제조업과 상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아주 밀도 높은 기술이 제네바에 집중되었다. 거기다 필요한 자본을 마련하기도 쉬워지자 제네바는 베버가 '근대 자본주의'라고 칭한 경제 활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때 이탈리아 제품을 서유럽에 유통하는 거점이었던 제네바 박람회는 이제 제네바에서 제조한 상품을 널리 유통하는 유통망의 중심이 되었다. 스위스 경제사가 장 프랑수아 베르지에(Jean-Francois Bergier)가 지적했듯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 발전의 필수 요소인 자본, 제조 기술 및 능력, 유통망이 이 기간에 제네바에 거의 동시에 생겼다.
그러나 제네바를 현대적 의미의 자본주의 사회로 묘사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를 산업혁명 이후에 발전한 경제 관계 체제와 동일시한다면, 제네바는 자본주의 사회로 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제네바 시의회는 자본주의의 핵심 원리인 자유방임주의를 격렬히 반대했다. 제네바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상업 활동은 중앙의 정밀 조사와 간섭을 받았다. 이는 인쇄업자 앙리 에스티엔(Henri Estienne)과 프랑수아 에스티엔(François Estienne)이 매 단계에서 상당한 제재를 받은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시의회에서 경제 거래를 조사하고 심각한 제재를 가했다. 도덕 생활, 경제생활, 정치 생활을 막론하고 생활 전반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시의회의 활동은 제네바가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었다. 16세기 자본주의는 19세기 자본주의와는 조금 다르다. 그래도 자본주의인 것은 맞다.
그렇다면 칼뱅은 이런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 모든 것이 우연처럼 보인다. 역동적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유리한 역사적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우연히 발전이 이뤄진 것 같다. 제네바의 자본주의는 주로 간접적으로 칼뱅의 종교사상에 기인하는 요인들에 대응하여 생겨나고 발전했다. 예를 들어, 1540년대와 1550년대에 경제활동을 하는 이민자가 제네바에 대거 몰려든 이유는 분명히 칼뱅의 종교 사상 때문이다. 칼뱅의 종교 사상 때문에 그들은 첫째로 조국 프랑스에서 이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둘째로 제네바에 정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앙이 얼마나 독실한가와 상관없이 이들 이민자가 종교개혁 기간에 유럽에 자본주의를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고 휴 트레버 로퍼(Hugh Trevor-Roper)는 강조한다. 따라서 부분적으로라도 칼뱅은 프랑스 사회에서 경제활동에 힘쓰 계층이 제네바로 이주하도록 부추기는 요인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칼뱅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에 신앙에 기반을 둔 스위스의 재정 연대가 먼저 이뤄졌다. 칼뱅 시대에 제네바에 자본이 모이게 도와준 금융기관과 기구가 있는데, 이들이 제네바에 힘을 실어 준 것은 칼뱅 때문이 아니다. 제네바가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도, 그래서 이런 자본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도 칼뱅의 영향력 덕분이 아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경제활동의 중심지이자 종교 활동의 중심지가 된 제네바에서 자본주의와 칼뱅주의가 처음 손을 잡았다고 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 둘이 손을 잡은 것은 거의 우연이었다. 이 둘은 역사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었다.
더욱이 제네바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한 것은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에는 사부아로부터, 그 다음에는 베른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제네바 공화국의 역사적 진화는 종교 발전과 정치 발전이 서로 얽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이 둘을 완전히 떼어 놓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1550년대에 공공연히 자본주의 전략을 채택하도록 제네바를 부채질한 것은 경제적 자립과 그에 따른 정치적 자립을 지켜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과정에 불가피하게 엮이긴 했지만, 종교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러한 발전에 호의적이었던 칼뱅의 태도 역시 제네바에서 자본주의가 번성할 수 있었던 환경 중 하나였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루터와 비교해 보면 쟁점이 분명해진다. 일반 사회사상과 마찬가지로 루터의 경제관은 그가 개혁을 시작했던 소박한 독일 시골 지역의 사회 현실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곳은 소작농과 귀족의 갈등과 같은 봉건 말기 시골 생활의 고질적인 문제에 몰두하는 세계였다. 루터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줘야 하는지와 같은 그 시대의 경제 문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도시 재정을 좌우하는 문제는 잘 몰랐던 것 같다. 루터는 농민이 중심이 된 봉건 농경사회에서 신흥 자본주의 경제를 갖춘 사회로 독일을 바꿔 나가던 경제 세력을 전혀 알지 못했다. 1524년 여름에 쓴 <상거래와 고리대금업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루터는 어떤 형태로든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영어 단어 'finance'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 'fynanzte'는 루터에게 중립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기, 속임수, 폭리 취득 행위 등 완전히 부정적인 뜻이 담긴 용어였다. 루터의 경제사상(실은 이런 거창한이름을 붙일 것도 없지만)이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에 적대적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위대한 자유도시들에서 최근 생겨난 정교한 금융의 세계를 잘 몰랐다는 증거다.
그러나 칼뱅은 제네바의 재정 상황과 그 의미를 아주 잘 알았다." 그는 어떤 의미로든 '경제 이론'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자본의 기본 원리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칼뱅은 자본과 노동의 생산적성질을 완전히 인정했다. 인간의 상호 의존성과 사회적 존재의 의의를 강조하는 수단으로써 분업의 경제적 편익과 매력 때문에 분업을 높이 평가했다. 종교개혁 급진파가 부인했던 개인의 사유재산권도 지지했다. 기업 윤리를 다룬 신명기 구절들은 지나간 시대의 사회상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라고 시인했다. 칼뱅은 원시 유대 농경사회와 관련된 명령들을 16세기 제네바와 같은 진보적인 근대 도시 사회에 강요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 일명 고리대금업을 절대 금지하는 규정은 원시 유대 사회의 특별한 필요에 맞춘 것이라며 일축했다. 그런 사회와 제네바는 유사점이 없다고 보았다. 이자는 자본에 대한 임차료일 뿐이다.“칼뱅은 또한 변동 이율을 기꺼이 허용하려 했다. 이것은 완전 자유시장은 아니지만 거의 자유로운 시장에서 자본에 가해지는 압박을 칼뱅이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를 금지함으로써 얻는 윤리적 이익은 다른 수단으로 보호할 수 있다고 보았다. 더욱이 칼뱅은 자본을 투입해서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는 것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1540년대에 섬유 산업을 지원하도록 시의회에 로비 활동을 한 데서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칼뱅은 자본주의를 가로막는 종교적 장벽을 제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하는 노동관을 명확히 밝혔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 칼뱅은 신자들이 세속적인 생활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노동에 새로운 의미와 존엄성을 부여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데도 너무 쉽게 하나님으로 오인되므로 괄시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므로 또한 긍정해야 마땅하다. “신자들은 이 땅에서의 삶을 멸시하는 데 익숙해지되, 인생 자체를 혐오한다든가 하나님의 고마움을 모르고 불평해선 안 된다" (IIIix3). “그 자체로는 복된 것도 바람직한 것도 아닌 일이지만 경건한 자에게는 유익이 될 수 있다”(III.ix.4).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갇히지 않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현대의 실존 범주로 표현하자면, 이 세상은 우리의 '활동 공간'이다. 이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비판적 초연함을 잃지 않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선물인 이 세상을 긍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되 이 세상에 푹 빠지거나 세상 속에 가라앉거나 세상에 삼켜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칼뱅은 세속적인 일상의 걱정과 염려에서 벗어나기보다는 바로 그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인의 묵상과 기도가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약간은 냉소적으로 '정관적 삶'을 다룬다(IV.xii,10, 16).신자들은 이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삶으로 완전히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부름을 받았다. 스스로 육체노동 위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넌지시 책망한다는 점에서 이 교리는 반귀족적이라고 봐야 한다." 칼뱅은 찬성을 표하며 바울의 격언을 인용한다.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살후 3:10). 칼뱅의 노동관을 해설하는 사람들은 실업자들의 상황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고 보았다. 아마도 1920년대 실업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논평일 것이다. 사실 칼뱅의 발언은 제네바로 피신한 프랑스 귀족들을 포함하여 특별히 귀족 계층을 겨냥한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그들은 자기가 육체노동자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칼뱅은 추기경들의 웅장한 저택과 소유물, 귀족들의 육중한 몸집을 겨냥하여 노동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게으름을 비판했다. 칼뱅의 동료인 테오도르 드 베즈가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그런데도 제네바 사회는 귀족 계층의 낡은 사회관을 참을 수 없어했다. 제네바로 피신한 옛 귀족들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프랑스 귀족 계층이 보인 반응을 담아낸 당대의 흥미로운 기록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프랑스 귀족 피에르 드 부르데유 브랑톰(Pierrde Bourdeille Brantème) 은 제네바에 갔다가 옛 귀족 프랑수아 도베테르(François d'Aubeterre)가 단추 만드는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왜 그런 귀족 출신이 단추나 만들며 자기 품위를 떨어뜨려야 하는가, 라고 그는 물었다. 이 이야기는 시대착오적인 프랑스 귀족 계층과 혁신적인 제네바 사업가들이 일반적인 노동, 특히 육체노동을 대하는 전혀 다른 태도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노동은 제네바를 평등한 사회로 만들었다.
칼뱅의 복잡한 노동관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이 한 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그 핵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분수 그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처지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고전 7:17). 각 신자는 정당하고 공인된 직업으로 부르심을 받는다(IV xiii.10, 16)." 일상 속 노동은 칼뱅의 영성을 구성하는 일부가 되었고, "노동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라는 중세 수도원의 구호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다. 제네바에서 육체노동은 단순히 표준이 아니었다. 종교적으로 인정받은 숭고한 목표였다. 설사 가장 보잘것없는 생산자라 할지라도 그가 하는 일상적인 활동에 처음으로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이 세상에서 하는 활동은 존엄하고 성결했다. 어쩌면 영국의 시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가 칼뱅 본인보다 더 웅변적으로 그의 통찰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시여
나를 가르치소서 만물 안에서 주님을 볼 수 있게 하시고
내가 무엇을 하든 그 일이 주님을 위한 일임을 알게 하소서
법 조항에 매인 종을 위해 지루하고 고된 일을 거룩하게 하소서
누가 방을 쓸거든, 주의 법으로 그와 그 행동을 만족스럽게 하소서
이들이 스스로 자본주의자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집단으로 보인 이런 태도는 자본주의, 특히 제네바와 역사적으로 관련이 있는 형태의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것을 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칼뱅의 공헌은 두 단계로 이뤄졌다. 첫째, 의욕을 꺾는 요소를 제거했다. 중세 시대에 영리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쏟아지던 사회적·종교적 비난 같은 것을 없앴다. 둘째,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유리한 태도와 습관을 육성해서 긍정적으로 의욕을 북돋웠다. 절약, 근면, 인내, 노력, 헌신 등 부르주아의 가치들은 모두 칼뱅의 이론을 통해 종교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칼뱅의 종교관이 의도한 주산물이 아니라 부산물이다. (베버는 칼뱅주의가 자본의 축적과 재투자를 명쾌하게 장려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베버는 칼뱅주의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성실하게 임할 것과 이 세상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금욕 생활을 강조한 결과 의도치 않게 자본의 축적과 재투자를 촉진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하는 태도를 종교적으로 인정해 준 것은 맞다. 그러나 이것이 제네바에서 자본주의가 발흥한 중요한 원인은. 아니다. 제네바 자본주의는 종교적 선동 때문이 아니라 경제적 필요 때문에 탄생했다. 도시경제에 도시의 생존이 달린 듯했다. 경제적 자급자족에 정치적 자립이 달려 있었다. 제네바의 경제발전은 칼뱅에게 영향을 받은 강력한 종교적 활력보다 더 근본적인 충동때문이었다. 그것은 원초적이고 영속적인 인간의 생존 본능이다. 칼뱅이 자본주의 발전에 일반적으로 도움이 되는 종교적 · 사회적 태도를 키우는 데 영향을 끼쳤을 수는 있다. 그러나 조금은 막연한 칼뱅의 태도라는 기본 뼈대에 뚜렷한 계획과 정책과 기관으로 살을 붙여서 자본주의라고 부를 만한 형체와 사양을 부여한 것은 제네바시였다. 결과적으로, 칼뱅은 기존에 있었거나 새로 생겨난 제네바의 태도와 기관을 옳다고 인정해 준 셈이다. 이것은 제네바시가 국제 칼뱅주의의 윤곽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해 준다.
그러나 칼뱅이 칭찬한 경제적 태도는 단순히 자본주의에 우호적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철저하게 반봉건적이었다. 칼뱅의 사상이 프랑스에 끼친 영향을 설명할 때 상당한 역할을 하는 것은 칼뱅 사상 중에 바로 이 측면이다. 지금부터는 이 부분을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