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은 바로 그러한 허망한 중생심, 즉 분별심인 식(識)을 통해 세상을 보던 습관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곧장 바로 보게 만든다. 비교 분별없이, 왜곡 없이,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그저 있는 그대로 통찰하게 되면, 집착도 괴로움도 설 자리를 잃는다.
분별심이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보지 않고, 아무런 필터 없이 텅 빈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될 때, 본래 드러나 있던 있는 그대로의 진실, 진리가 드러난다.
사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있는 그대로 보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중생들이 분별심이라는 필터를 통해 바라보기 때문에 온갖 문제가 생겨났던 것일 뿐이다.
이처럼 진리는 이미 눈앞에 완전하게 드러나 있다. 드러나 있지만 분별심이라는 중생심 때문에 보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괴롭고 어리석인 중생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드러나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 속에 빠져, 자기 식대로 해석한 분별의 허망한 세계관을 보며, 그것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선(禪)에서는 이처럼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는 완전한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세계를 마음, 법, 자성, 본성, 실상, 본래면목, 불성, 진여, 무분별심, 해탈, 열반 등으로 다양하게 부른다.
그러나 이런 이름들은 그저 편의상 붙인 하나의 이름일 뿐이며, 그저 방편으로 붙인 말일 뿐, 이 말속에 참된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진리의 자리는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
이름을 붙이려면 그 이름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는데, 이 진리는 대상이 아니다. 그 어떤 대상도 아닌, 말로 표현하자면 이 온 우주의 바탕, 배경과도 같은 말로 붙일 수 없는 자리인 것이다.
어떤 ‘것’이 아니다보니,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도 사실상 맞지 않는다. 그저 방편일 뿐.
그래서 선에서는 이 참된 진실의 자리를 그저 ‘이것’이라고 부르곤 한다. 또한 이 자리는 중생심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심, 진여심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 그리고 더 줄여서 ‘마음’ 혹은 ‘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에서는 ‘마음’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쓴다. 선에서 ‘마음’이라고 하면 그것은 중생심(분별심, 식(識))이거나 여래심을 말하는데, 문맥에 따라 중생심을 말하는지 여래심을 말하는지를 잘 새겨야 한다.
달마는 ‘마음은 없다’고 했다. 여기에서 ‘마음’은 물론 진여심, 여래심, 본래면목, 자성으로써의 마음이다.
이 여래심이라는 마음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있다거나 없다고 하려면 있거나 없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마음, 본성은 있거나 없는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배경 같은 것일 뿐, 어떤 특정한 대상은 아니다.
달마는 ‘결단코 마음은 없다. 다만 중생이 마음이 있다고 헛되이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중생이 분별심을 일으키면 그 중생의 분별심과 상대적으로 여래의 무분별심도 함께 분열되어 생겨난다. 즉, 분별심이 있으면 무분별심도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처럼 둘로 쪼개서 분별하여 인식하는 것이 우리 중생심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별심이 중생의 허망한 착각이기 때문에, 그 허망한 착각만 사라지면 될 뿐, 허망한 착각이 사라진 뒤에 또 다른 착각 없는 진여심이 다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름만 무분별심, 진여심이라고 붙여놓았을 뿐이지, 그런 진여심에 해당되는 무언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없다’고 한 것이다.
여래심, 진여심, 불성, 자성, 본성, 마음이라는 어떤 것이 따로 실체적으로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은 없다. 중생들이 허망한 분별심을 일으키니까 그것과 상대적으로 무분별심, 진여심이라는 것을 방편으로 설했을 뿐이지, 그 진여심, 마음이라는 것에 해당하는 어떤 실체적 대상은 없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 중생심으로 인해 괴로워하기 때문에, 그 중생의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를 ‘열반’, ‘부처’, ‘마음’이라고 이름한 것일 뿐이다. 중생이 있기에 부처도 있고, 생사가 있기에 열반도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수많은 경전에서는 ‘부처도 열반도 진리도 없다’고 설했다. 중생심이 없으면 진여심도 없다. 어리석은 중생이 없으면 지혜로운 부처도 없다.
중생이 스스로 자신의 괴로운 현실을 만들어 놓고는 그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또 다른 열반과 해탈이라는 목표를 세워 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중생의 헛된 망상이 없으면, 분별심이 없으면, 그저 아무 일이 없다. 중생의 분별심이라는 병이 없으면 그저 건강하게 아무 일 없이 살아갈 뿐이다. 중생이 부처라는 특정한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중생의 병이 곧 중생심이고 병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 열반이라고 했을 뿐이다. 열반, 해탈이라는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핵심은 사성제(四聖諦)다. 즉 인간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해결이야말로 불교의 주제다. 인간의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 불교다. 괴로움의 원인이 분별심에 있기 때문에 분별심을 소멸시키면 그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일 뿐, 또 다른 괴로움이 없는 행복한 세계가 따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의 세계에서 저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괴로움이라는 병이 있다가 병이 사라졌을 뿐이다.
그러니 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를 이름하여 해탈, 열반이라고 했을 뿐이지, 그런 특정한 건강한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열반은 이름이 열반일 뿐, 열반이라는 대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진여심, 불심, 부처님의 마음도 없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를 ‘무지 역무득(無智 亦無得)’이라고 하여, 지혜도 없고 깨달음, 불성, 마음을 얻을 것도 없음을 설하고 있다.
이를 선에서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도 하고, 무심(무심)이라고도 하며, 무아(無我), 공(空)이라고도 한다.
깨닫고 보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중생의 마음도 없고, 부처의 마음도 없다. 그 어떤 마음도 없다. 무심(무심)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바로 이 무심을 깨닫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비로소 ‘참마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사라지는 것일 뿐, 그 어떤 티끌조차 붙을 자리 없이 텅 비어 공할 뿐, 거기에는 부처도 붙을 자리가 없다. 아무 일이 없다.
확연무성(廓然無聖), 거기에는 성스러운 것조차 붙을 자리가 없다.
출처 : "선어록과 마음공부", 법상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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