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2월1일 [(녹)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 히브리서 10,32-39
복음 마르코 4,26-34
◈ [서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장기적 관점으로 오늘
하루의 ‘따로’를 마련하라
2019년 다해 2월1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장기적 관점으로 오늘 하루의 ‘따로’를 마련하라>
복음: 마르코 4,26-34
얼마 전 동남아시아를 여행할 일이 있었습니다. 가이드 한 분을
만났는데 40대 초반이었고 미혼인 남성이었습니다. 거의 20년을
동남아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가이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확실히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월세를 사는 것을 보니 집을 살 돈이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오래 외국에서 살 줄
알았으면 왜 진작 집을 마련하지 않았을까.’를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20년 동안 월세 낸 것만 모아도 동남아에서 집 몇 채는 사고도
남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후회하면서도 시내 중심가의 서른 평
넘는 아파트에서 월세로 혼자 살며 차도 굴리고 골프도 치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는 10년이 지나도 집을 사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에서의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앞만 보느냐, 멀리 보느냐’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자신이 20년 동안 그렇게 외국에서 살 줄 알았다면,
그리고 차근차근 돈을 모으고 집을 마련하고 사업을 확장했다면
지금과 같았을까요? 분명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오래 외국생활을 할 줄 몰랐고 그렇게 몇 년을 외국에서 살다보니
한국에도 들어와 적응할 수 없게 되어 또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문화에서 고쳐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빨리빨리’
문화입니다. 이 문화가 어쩌면 멀리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개발도상국 정도 되면 이 문화가 참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열심히 일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어느 정도 잘
사는 나라가 되었고 그렇다면 삶의 시스템도 바꾸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문화에 젖어 단기적인 성공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우리나라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영어를 가르치고
좋은 대학 보내기 위해 학원을 보냅니다. 한 나라 말을 완전하게 잘
할 줄 알아야 두 번째 언어를 배워도 완성도 있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학원은 아이들의 자기 스스로 방법을 만들어가며 공부하는
습관을 없애버려 완전히 수동적인 사람으로 만듭니다. 결국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창의력도 없고 남들이 시키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학생 때 좀 덜 좋은 대학에 들어가더라도
스스로 공부하는 방식을 터득하고 노력하게 하면 비록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삶의 큰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삶이 대학이
끝이고 취직이 끝이고 결혼이 끝인 것처럼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어떤 대학을 나왔는가와 행복은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연구결과들이
많습니다.
10년 , 20년 , 30년 후, 그리고 내가 죽을 때, 그리고 우리 후손이
살아갈 세상을 예측해야합니다. 성공한 사람치고 복권을 사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단기적인 이익을 보려고 하는
사람치고 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경마장에서
도박하는 사람에게 투자하고 싶겠습니까? 투자의 귀재인 워렌 버핏은
10년 이상 가지고 있을 수 없는 주식은 사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앙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마치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씨앗이 뿌려졌다고 곧바로 열매 맺는 일은 없습니다.
밭에 뿌려진 씨앗을 열매 맺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열매는 거의 맺히지 않습니다.
이 뒤에 나오는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씨앗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씨앗으로 뿌려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열매는 비유말씀을
깨달으려고 노력하는데서 맺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만 따로 설명해주시는
것이 몇 년 후에는 비유말씀만 들은 이들과의 차이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따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가 열매 맺게 하는
방법입니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따로 예수님과 머무는
시간을 가졌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생각해 내어 세상을 바꾼 스티브 잡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에 한 시간은 명상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은 더 노력하는
사람에게 따로 더 많은 무언가를 안겨주려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다 소진시키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따로’ 다만 10분이라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10년 후의 우리
영성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 어제(연중 제3주간 목요일) 강론을 수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시간이 없어 빨리 쓰다 보니 기억 속에 있는 것만 조심성 없이 써서
실제와 많이 다른 사실들까지 오해의 소지가 많게 썼습니다. 그래서
다시 올리니 한 개인 분에게 안 좋은 인식을 남길 수 있는 이전 글은
배포되지 않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연중 제3주간 금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1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 4,26-34: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사람은 모른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 좋은 뜻을 품는다면, 그것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자라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 즉 자기 안에 심어져 자라나고 있는 덕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아직 헤아릴 길이 없다. 땅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열매를
맺듯이, 인간도 그렇게 스스로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
땅이 처음에는 싹을 트게 하고 줄기를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가득 달린 낟알을 낸다. 아직 약한 싹이지만 좋은
시작이다. 우리 마음에 심겨진 덕이 선행으로 발전할 때, 줄기에서
이삭이 패는 것이다. 덕에서 훌륭하고 완전한 행동이 나올 정도로
진보하면 마침내 이삭에 낟알이 가득 달리는 것이다. 그 낟알들이
영글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31절) 겨자씨는 아주 평범하고
하찮은 씨앗이다. 빻으면 그 힘을 드러낸다. 믿음도 처음에는
단순하지만, 역경으로 으깨어지면 그 힘을 발휘하여, 믿음에 관해
읽거나 듣는 사람들을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운다. 하느님의 말씀은
분노의 쓸개즙을 가라앉히고, 교만의 불꽃을 억누른다. 말씀의
씨앗에서는 커다란 나무와 같이 자라났다. 이 나무는 바로 세상
곳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 교회에 하늘이 새들, 곧 하느님의
천사들과 사람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
주님은 겨자씨였다. 그분께서 상처 입지 않은 겨자씨였을 때,
백성들은 그분을 겨자씨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이 그분을 아직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려고 잘게 부서지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겨자씨처럼 동정녀의 태라는 정원에 뿌려지신 그분은
십자가 나무로 자라셨고, 그 가지들은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갔다.
수난의 절구에 빻아진 그분의 열매는 그분과 관계를 맺는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이 맛을 지니고 보존될 수 있도록 넉넉한 양념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빻아짐으로써 당신 안에서 우리
모두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모든 것이 되셨다. 그분은 당신 정원 즉
교회에 씨를 뿌리셨다. 교회는 온 세상으로 퍼져가는 정원이다.
복음의 쟁기로 갈고, 가르침과 규율의 말뚝으로 울타리를 치고,
사도들의 노고로 온갖 해로운 잡초를 제거한 정원이다.
이 정원에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영원한 꽃들인 동정녀들의 백합과
순교자들의 장미꽃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모든 이의 푸른 풀밭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의 부드러운 초목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정원에 뿌리신
겨자씨이다. 그분은 성조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셨고,
예언자들은 싹을 틔웠고, 사도들은 크게 자라게 하였다. 그 씨앗은
교회 안에서는 큰 나무가 되어, 선물 즉 은총을 실은 수많은 가지를
뻗었다. 우리에게 있는 씨는?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제 모든 것, 생명까지도 여러분을 위해 바칠 것을
약속합니다!
요즘 가끔 듣는 말 중에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란 말이 있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 혹은 삶을 새롭게 시작한
중요한 계기를 일컬어 ‘터닝 포인트’라고 말합니다.
역경을 딛고 당당하게 일어선 유명 인사들이 힘겨웠던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이렇게 단골 멘트를 날립니다. “제 인생의 가장 암흑기, 제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치던 그 순간이 사실은 내 삶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체험을 하는가봅니다 저 역시
돌아보니 제 수도생활 안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역시나 대단한 성취를 이룬 순간이나
높이 올라간 순간이 아니라 제 인생사 안에서 가장 암울했던 순간이자
가장 밑바닥에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니 하느님께서는 참 묘하신분이십니다. 별것도 없이
우쭐거리던 저를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으셨습니다.
저를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 보내시면서 제 교만과 이기심의 산을
인정사정없이 깎아내시더군요. 그리고 거기 가장 밑바닥에서 다시 한
번 저와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봉헌생활에 대한 제 그릇된 기대와 사사로운 욕심을 산산조각내신 후
거기서 다시 한 번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돌아보니
제대로 된 바닥 체험을 했던 그 시점이야말로 하느님의 뜨거운 자비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은총의 꼭지점이었습니다.
돈 보스코의 한평생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사제요 교육자,
수도회 창립자로서 그의 삶은 셀 수 없는 역경과 고통, 수많은 터닝
포인트와 넘어야할 높은 산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사제성소를 꿈꾸는 그에게 의붓형
안토니오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그의 앞길을 가로 막았습니다.
너무나 가난했기에 신학교 입학을 위해 동네 사람들로부터 적선을
구해야 했습니다. 사제서품 이후 그의 시련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주민들로부터의 오해, 그들과의 마찰이 점점 심해졌습니다.
동료사제들 역시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신질환자 취급을 했습니다.
오라토리오 청소년들의 숫자는 이백 명 삼백 명, 점점 늘어가는 데
그나마 도와주던 협력사제들과 후원자들마저 등을 돌리고
떠나갔습니다. 그에게는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던 수많은 청소년들뿐,
철저하게도 그는 혼자였습니다.
1846년 7월의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돈 보스코의 나이는 이제 32세,
사제가 된지도 5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찜통 같은 더위 속에 고된
하루를 보낸 그는 침실로 돌아가다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검진을 끝낸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사제가 와서 병자성사를
집전했습니다.
그가 위독하다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그날 저녁 고된
노동을 끝낸 수많은 아이들이 그의 침실을 찾아왔습니다. 땀에 전
작업복, 횟가루를 뒤집어 쓴 옷, 시커먼 굴뚝 재가 그대로 남아있는
옷 그대로 저녁도 먹지 않은 채 단숨에 달려온 것입니다.
그들은 울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발 신부님이 죽지 않게
해주세요!” 의사는 면회를 금지했고, 간호사는 사람들이 돈 보스코의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통제했습니다. 아이들은 사정하며
매달렸습니다. “잠깐만이라도 신부님의 모습을 보게 해주세요! 제가
여기 왔다는 것을 신부님께서 아시면 꼭 들어오게 하실 거예요!”
“제발 들어가게 해주세요. 신부님께 할 말이 있다니까요!”
아이들의 간절한 기도 속에 돈 보스코는 8일 동안이나 사경을
헤맸습니다. 그동안 치유의 은총을 얻기 위해 어떤 아이들은 뙤약볕
아래 일하면서도 물 한 모금 먹지 않았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일과가
끝난 후 대성당으로 가서 밤새워 기도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성모상 앞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이런 아이들의 기도덕분이었는지, 기적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7월
말 어느 주일 오후, 돈 보스코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오라토리오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놀이에 열중하던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돈 보스코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든 아이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큰 아이들은 손으로 의자를 만들어 돈 보스코를 그 위에 태웠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와 함께 성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눈에서도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오랜 감사기도 끝에 돌아서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살아난 것은 바로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저는 앞으로 제 모든
것, 생명까지도 여러분을 위해 바칠 것을 약속합니다.” 그 후 돈
보스코는 죽는 순간까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청소년들 가운데
머물렀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수도회]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마르 4,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1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마르 4, 28)
저절로 열매 맺게 하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또한 언제나 자연스럽습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속에서 우리모두는 살아갑니다.
떠나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우리모습입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이와같이 자연스레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리입니다.
순리라는 흐름안에 하느님의 뜻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들 삶또한 저절로 자라게하는 하느님 방식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또한 자연스럽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고
자연스레 영글게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오신 자연스러운 순리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땅과 줄기 이삭과 낟알 이 모두는 자연스러운 하나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2월 1일 (금) - 보응해 주시는 하나님
오늘은 "보응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이사야 49장 4절 말씀에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 이름을 기억한다 하십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로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들어 화살 통에 감추신다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됨됨이를 다 아시고 어디에 쓸지, 어떻게
사용하실지 판단하고 계시다가 즉 필요한 곳곳에 쓰임 받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그 모든 행위에 따라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보충해주시고 때로는 응답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갈고 닦고 다듬어
사용하실까요? 바로 택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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