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 (THU)
여러분은 혹시 도노 선생을 아시는가? 본명보다는 닉으로 에세이스트 카페의 인지도 1위를 자랑하는 이 사나이는 경우가 바른 사람이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특히 시간 약속은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이다. 에세이스트카페산우회의 총무직을 맡고 있을 때 등산계획을 공지하면 어느 방면에서 오는 회원은 무슨 역에서 몇 분 걸린다는 정보까지 일일이 올려서 회원을 질리게 만든 장본인이다. 다른 이들과의 약속에 대해 이렇게 엄격하니 자기 자신과의 약속은 불문가지다.
금년 1월에 발간된 에세이스트 29호에 도노의 부인 C선생의 '항상 떠나는 당신'이란 작품이 실렸다. 반려의 일탈심리를 리얼하게 파헤쳐서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품이 발표된 이후, 작품의 모델이 된 도노는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단다. 이 작품이 발표되지 않았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는데 발표가 되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약속이므로 자신은 일탈(그 많은 일탈의 형태 중에 그는 꼭 그것을 '가출'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의문스럽지만)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잇살이 조금 많은 내가 듣기에 그건 궤변이었다. 내가 알기에 일탈이란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비정상적, 충동적 욕구이며 시와 공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노는 그 일탈마저 약속에 범주에 포함시켰고 일탈을 하기위해 계획을 짰다.
우선 금년은 넘기지 않는다. 연말이 가까워오면 바빠지니 추석 전에 해 치운다. 더 구체적으로 큰 딸이 교환학생으로 출국하기 전에 한다. 목적지는 근무지와 멀지 않은 곳. 아, 늙은 친구가 관리하는 고시원이 있다. 그는 거사, 하루 전에 현장을 방문하여 내게 방이 있는지를 알아본 후 결행하기로 했다. 그의 기획은 빈틈이 없었다. 나로서야 술 마실 기회가 거저 생겼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D-DAY (FRI)
그는 이 모든 일을 극비에 붙이고 결행에 옮겼다. 집에다가는 수필 수업이 끝 난후 통보를 할 생각이라고 했다. 학교수업이 일찍 끝난 금요일, 집으로 가서 짐을 꾸렸다. 트렁크에 이불과 벼개, 정장을 포함한 옷 몇 가지, 일요일에 등산까지 할 양 등산복에 등산화 등까지. 차에 싣고 내게로 왔다. 나는 그를 안내하여 리더스동 219호에 입실시켰다.
그러나 일은 엉뚱한데서 삐그덕 했다. 그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와 맥주 한 잔 한 후 금요수업에 갈 계획이었는데 C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자기차가 망가져서 그러니 당신 차를 써야겠다고 했단다. 그는 약간 당황했지만 한 시간 전에 가출한 아파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몰래 지하 주차장에 차를 파킹해 놓고 수필수업을 들으러 갔다. 수업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가출을 통보하면 식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통보할 땐 뭐라고 이야기하는 게 멋있어 보일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시간은 후딱 갔을 것이다. 수업 뒤풀이는 귀가의 부담이 없으니 여유가 있었다. 모처럼만에 2차까지 가서 술도 꽤 마셨다. 집을 나왔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하는지 작은 딸이 왜 여태 안 오시냐고 문자를 보내왔다. 조금 김이 샜다. 가장의 가출 알기를……. 그는 즉각 돋보기를 꺼내, 안보이는 휴대폰의 문자폰을 들여다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치기 시작했다. 집을 나왔으니 찾지 말라고. 쳐 놓고는 보내기를 눌러 버렸다. 그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할 가족들을 떠올리며 소주잔을 털어 넣었다. 음, 가장 없는 가정도 한번 겪어 보라고. 그간 온실 같았지? 그런 생각을 했단다. 이번엔 큰 딸이 발목을 잡는 문자를 보내왔다. <아빠, 뭐야. 나 좀 편한 마음으로 다녀오게 해줘.> 이건 말을 바꿔서 얘기하면 빨리 들어오란 얘기일 것이다. 아! 이거 씨~왜 이렇게 발목을 잡는 게 많아?그렇다고 내가 갈 줄 알아? 그렇게 생각했단다.
D+1 (SAT)
나는 부슬 부슬 내리는 비에 산보를 포기하고 신문을 펼쳤다. 비만 오지 않으면 도노와 샛강 산책을 나갈 생각이었다. 어제 몇 시에 들어왔나? 한 시 다 되도록 기다렸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노로부터 문자가 왔다. <일어 나셨어요? 어제 저의 집사람한테 전화 안 왔나요?> 나는 곧 답장을 보냈다. <안왔어요. 이리 와서 카피나 한 잔 하슈> 커피를 준비하며 난 웃음이 나왔다. 가출한 사람이 집사람 전화는 왜 기다려? 이곳에 올 것으로 짐직하고 확인하는 전화가 왔어야 했는데 그런 전화가 오지 않았다니까 실망했나 ? 돈오가 들어 왔다. 어제의 이야기를 들으며 배꼽을 잡았다. 커피를 한 후 우산을 쓰고 해장국집을 찾아 나섰다. 순두부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었다. 아침에 해장술을 한 게 몇년 만인가? 나는 약해지고 있는 도노를 잡아서 오래 있게 해야 한다. 도노는 방에서 좀 쉬었다가 제 집 근처에 있는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을 하고 다시 오겠단다. 가출 한 사람이 할 것 다 찾아 한다. 저런 가출은 보도 듣도 못했다. 아마도 못 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문자가 왔다. <헬스하러 왔다가 식사만 하고 가려했는데 작은 애 때문에 오늘 여기서 잡니다.> 흠......
D+2 (SUN)
도노는 하루 종일 소식이 없었다. 그는 집에서 가출을 한 것이 아니라 고시원에서 가출했다.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 그러더니 저녁을 먹고 났는데 전화가 왔다. 지금 고시원으로 가는 길이란다. 차샘과 같이 온단다. 곧 도착한 그들 부부와 신포차로 들어갔다. 차샘은 고시원으로 갔을 줄 알고 마음 놓고 있었단다. 갈 곳이 여기밖에 더 있냐는 것이다. 뛰어 봐야 부처님 손바닥이란 얘기다.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니 그렇게 잘 어울리는 부부도 없다. 짐을 빼러 온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다. 악착같이 닷새를 채울 모양이다. 그래놓고 닷새 가출했다고 하려나보다. 조그만 손가방만 찾아서 갔다.
D+3 (MON)
<굳모닝 써. 219호 냉장고에 있는 것 책상 밑에 있는 누런 봉투에 모두 담아 선생님이 처리해 주세요. 짐 가지러 내일 낮에 갈게요. 완전히 사람대신 짐이 고시원경험을 한 꼴이네요. 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 도노올림> 오전에 보낸 문자다. 방에 가보니 냉장고엔 소주와 캔맥주 등이 있었다.
도노는 그의 수작 '젊은 날의 초상'(에세이스트 21호. 2008. 9/10월)에서 가출했던 경험을 썼다. 가출, 닷새만엔가 야단을 되게 맞을 줄 알고 들어 와 보니 식구들 누구도 가출 한 사실 조차 모르고 있다고 했던가? 그에 비하면 이번엔 조금 발전 한거다. 아내와 딸들이 알고, 걱정을 했으니까.
D+4 (TUE)
도노는 오후 두시 조금 넘어서 차를 끌고 왔다. 차를 가져 온데다가 나는 나대로 근무중이어서 그럴듯한 송별주는 마시지 못했다. 219호실 냉장고에 넣어둔 술로 평가회를 겸한 간이송별회를 했다. 그래도 건진 것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아침에 해장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언제 해장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를 갖겠냐는 것으로 자위했다.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보며 도노 가정에 행복을 빌어줬다.
나는 도노가 이번 가출을 통해 '젊은 날의 초상'을 넘어서는 대작을 쓰기를 바란다. 그 작품은 '중년의 초상'이란 타이틀이면 더 좋다.
첫댓글 도노선생은 원리원칙주의자다. 도노선생 앞에서는 절대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그랬다가는 망신을 당한다. 도노선생은 한 번 한 약속은 절대 어기지 않는다. 지난 주 수업을 마친 후 도노선생이 폭탄선언을 한다고 했다. 폭탄선언을 들으려면 술을 한 잔 사야 한다기에 나는 도노선생을 모시고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술을 한 잔 마시더니 '오늘 가출을 한다는 것이다.'원리원칙주의자에 도덕과 윤리라면 공자선생과 맹자 선생을 능가하는 도노선생이 가출을 한다니. 이는 보통 빅뉴스가 아니었다. 그 후 나는 도노선생의 뒷이야기가 무척 궁금했다. 그런 도노선생도 딸한테 만큼은 어쩌질 못하는가 보다.
그 날 심상찮은 분위기를 뒤로 하고 집으로 갔더니만.....
도노님께 그동안 이런 일이~~~,
부인 C선생의 전화 목소리가 이상하다 했더니...
도노선생이 침뱉기 명수를 만났으면 고시원에서 일박에 대해 좀 갈등을 했을텐데...
음,그런줄도 모르고 ..무슨 곡절이 있었겠지.. .때론,거칠게 살 필요도 있지만, 악수는 두지말게. 피곤해.~~ 도노는 내친구!! 홧팅~~
찰스, 아니 촬슈님(이창순샘 버전) 안녕하시죠?
예,산신령님!반갑습니다.
사람은 1박 2일, 짐은 4박 5일 동안 고시원 경험을 했습니다. 새벽에 깼을 때 낯선 풍경에 놀랐습니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도노선생이란 분, 선생님과 많이 닮으셨지요? 그쵸?
언제 영상이 되려오? 하하.
또 썰렁했어요?ㅎㅎ
단막극 '김빠진 가출'의 주인공을 함 바꿔볼까요 집을 나온 사람을 부인으로 그럼 어찌 되었을까요. 남자들은 좋겠어요.
맞아요.
괜히 약이 오르더라구요...
가끔은 출가를 하고 싶은 때가 있다.
가출이 아닌 출가를요? 가출은 단기성이고 출가는 영구성인데?
김삼진선생님 글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요즘 뜸하시더니.. 책을 무지 읽으신듯 더욱 재미가...
재미있게 봐 주신거죠. ㅎㅎ
가출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요. ㅎㅎ
가출을 간만 보고 말았네요. 그런것 보고는 가출이라 하지않고 시위라고 하지요. 그러고보니 가출의 대가로 오해받을것 같은데 저는 한 번도 집 밖에 나가 자본 적 없습니다. 여행 말고는...
옳소, 이건 가출이 아니라 날 좀 봐 달라는 시위인 거 같네요.
작년 세미나때 도노 선생님 옆에 앉았는데도 너무 진중해서 말도 못했는데, '도노 선생의 김빠진 가출'을 읽고나니 무진장 귀여운 분이시군요. 삼진샘의 재치가 도노선생의 캐릭터를 확~업그레이드 해주네요. 어쩠던 약속은 지키셨으니, 도노 선생님 멋져브러.
많이 귀여워 해 주세요. 제가 숫기가 좀 부족합니다. 다음엔 옆에 계시면 용기를 내서 인사를 하겠습니다.
글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두 분의 알콩달콩한 우정도 아름답습니다. 도노선생님이 술을 하셔도 정신만은 꼿꼿한 선비정신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유익한 글이었습니다.
옛 선비들이 21세기로 나들이 나왔나~ 읽기도 부드럽구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