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8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믿는 자들은 많을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 진정한 믿음을 찾아보기가 그토록 힘들 것이라는 뜻임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내 안에 과연 주님 앞에서 내어 놓을 만한 믿음이 있는지요?
수시로 넘어지고 자빠지는 나의 믿음의 모습은 믿음이라고 할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런 나를 믿음이 있노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은 나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믿음 때문임을 믿습니다.
창세전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그 믿음 곧 신실함입니다.
이렇게 초라하고 미천한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이런 나에게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이 하루도 주님과 연합하는 날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행 8:26-40
제목 :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 나의 묵상
사마리아에서 빌립이 복음을 전하면서 표적을 일으키는 것을 본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파송하였다.
그곳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 성령 받는 것을 본 마술사 시몬이 돈을 내고 안수의 능력을 사고자 하였다.
그런 그를 베드로가 호되게 꾸짖은 후에 그 악함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사하여 주실 것이라고 한다.
이에 두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사마리아의 여러 동네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한편 주의 천사가 빌립더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 곧 광야 길로 가라고 하였다.
빌립이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맡은 내시가 하나님을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성경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수레를 타고 있었다.
성령께서 빌립에게 수레로 가까이 가라고 하셨다.
이에 빌립이 빨리 달려서 가까이 갔다.
그가 이사야서를 읽는 것을 듣다가 당신이 그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시가 말하기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빌립을 수레로 청하였다.
내시가 읽는 구절은 이사야 53:7절 이하이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하면서 공정한 재판을 박탈당하였고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을 당했으니 누가 그의 세대의 악함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읽은 내시는 빌립에게 물었다.
선지자가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말한 것이냐?
선지자 자신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냐?
이에 빌립은 이 글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 대한 복음을 가르쳤다.
그들이 물 있는 곳에 이르자 내시가 여기 물이 있는데 내가 세례를 받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느냐고 하자 그들은 내려 물에서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다.
세례를 베풀고 올라오자 성령이 빌립을 데리고 갔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시는 기쁨으로 자기 길을 갔다.
그 뒤에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그 성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가이사랴에 도착하였다.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그가 기록한 누가복음 24장의 말미에서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전한다.
(눅 24:47-49)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지는 것은 주님이 보내실 성령을 의미한다.
또한 사도행전에서도 동일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때 스데반의 순교 사건이 일어나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강제적으로 흩으신다(행 8:1).
이 때 빌립도 평신도로써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그가 복음을 전할 때 표적도 함께 행하므로 그것을 본 사람들 다수가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주의 사자가 빌립을 남쪽의 광야가 있는 가사까지 내려가라는 명령을 한다.
여기서 주의 사자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주의 천사를 일컫지만 더 정확히는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고 난 후에 그를 이끌어 아소도로 데려온 성령의 역사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하겠다.
이처럼 사마리아에 있던 빌립을 성령께서 친히 광야가 있는 가사 길까지 이끌어 가시고 간다게의 내시에게 세례를 베푼 후에는 다시 그를 이끌어 아소도로 옮겨놓으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상당히 급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성령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중요한 것은 선교나 전도는 봉사가 아니다.
베드로나 요한 그리고 빌립이 전도나 선교를 할 때 먼저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봉사를 먼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복음을 전하곤 하였다.
그것이 전도요 선교다.
물론 닫혀진 그들의 마음을 열기 위하여 봉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주객이 전도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문제는 선교나 전도를 하러 가는 이들의 다수가 예수의 이름으로 봉사를 하러 가서 봉사만 하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봉사활동이지 결코 복음을 전하는 선교나 전도가 아닐 터.
결과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해야 옳다.
아프리카의 성자라 불리는 슈바이처의 봉사정신은 가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박사학위를 다섯 개나 취득했음에도 그것들을 다 버리고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선교사가 아니라 의술을 베푸는 봉사자로 떠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조차 본받아야 할 신앙인으로 슈바이처를 꼽는다.
그는 예수를 전하는 선교사이기 이전에 신학자였다.
그런데 그가 쓴 논문 ‘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열심히 쫓아가야 할 롤모델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평생을 바쳤다.
그런 그를 자유주의 곧 신신학(新神學)의 아버지라 부른다.
그렇게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라면 인도의 성자 간디나 카톨릭의 성녀라 불리는 테레사는 어떤가?
뿐만 아니라 무소유를 주장하며 장삼 하나 고무신 하나만 가지고 살았던 불교의 법정이나 성철은 또 어떤가?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런 삶을 살아온 이들을 우리의 롤모델로 삼아 쫓아가야 할 분들로 삼아야 하는가?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진정한 목적은 다름 아닌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복음을 통하여 영생을 얻는 것에 있다.
그 영생이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요, 단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다.
내가 이 땅에서 주어진 삶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날마다 복음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영생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삶이라면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고통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필연적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 고통이 내가 볼 때, 때로는 무덤과 같아 보이지만 그 무덤은 생명을 잉태하는 처소이기에 그 과정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무덤도 동일하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서 무덤이 생략되면 십자가와 부활은 실제가 아니라 상징만 남을 뿐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시며 사도들이나 복음전도자들이 나가서 봉사 차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때가 있든지 없든지 무론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오로지 영원한 생명이다.
그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는 것이며 그 교제와 사귐을 통하여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오늘도 그 예수를 앎이 나의 힘이요 생명임을 믿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이 땅에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 그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자들이 추앙을 받는 시대입니다.
물론 그런 삶도 존경받고 인정받아야 할 삶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 땅이 전부가 아니요 우리가 사는 진정한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임을 믿는 자로써 만물 안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님이 분명할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는 봉사라 할지라도 거기에 머무는 봉사가 아니라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복음이 증거되게 하옵소서.
그럴 때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가 필요하오니 빌립을 이끌어 남쪽 광야가 있는 가사로 옮기시고 다시 그를 이끌어 아소도로 옮기신 것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일하심과 행동하심이 오늘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동토의 땅 베트남에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죽은 자들이 복음을 듣고 일어나게 하소서.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