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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권위와 탐욕을 버린 하나님의 자녀들 원문보기 글쓴이: Daniel
성경에 등장하는 광활한 영토의 패권을 거머쥔 역사 순서는 다음과 같다.
아시리아(앗수르)는 바벨론에게 정복당했고,
바벨론(이라크)은 페르시아(이란)에게 정복당했고,
페르시아는 헬라(그리스 마케도니아)에게 정복당했고,
헬라는 로마(이탈리아)에게 정복당했다.
바로 신약성경의 연대기가 로마제국 시기에 속한다.
다니엘서의 느브갓네살과 다니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상대로 되었다..
다니엘과 느브갓넷살이 꿈으로 이상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꾸는 모든 꿈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성경 말씀에 마지막 지구의 종말까지 모두 예언이 되어 있으므로
더 이상의 새로운 예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가 꾼 꿈을 신청해서 성경에도 없는 다른 계시를 만들어 내어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스스로 영험한 사람으로 돋보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꾸는 꿈은 자신에게만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 위험하지 않고 바른 적용이다.
계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제부터 세계에서 패권을 1000년이나 거머쥐었었던 역사를 가진 로마에 대해
간략하게 작성해 보려고 한다.
물론 로마 시대에 관한 역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번 쯤은 책으로 읽어서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열심히 공부했던 것들도 가물가물해진다.
역사에 대한 큰 줄기가 잡히지 않으면 성경을 읽을 때 생동감이 없고 막연한
신화로만 읽혀지고 지루해진다.
성경을 읽을 때, 인류 역사의 흐름을 떠올리며 읽는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로마제국>
1.로마의 건국(B.C.753년)
로마를 건국했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전설로 말하자면, 고구려의 주몽이나
신라의 박혀거세 처럼 여자가 남자에 의해 잉태된 것이 아니다.
로마 전설에 의하면, B.C.8세기 경에 알바롱가의 왕 누미토르의 딸인 레아 실비아가
마르스신이라는 존재에 의해 쌍둥이를 낳았다.
어느날, 누미토르 왕의 사악한 동생이 반역을 일으켜 왕의 자리를 빼앗고 훗날에
있을 후한을 생각해서 두 쌍둥이를 테베르 강가에 버렸다고 한다.
마침 테베를 강가를 지나던 늑대가 이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아기들에게 젖을 먹여서 키우고 있었는데,
쯤에 양치기 파우스툴루스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다니다가
늑대 굴 주변에서 아기들을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가 키웠다고 한다.
이 쌍둥이들이 자라서 이탈리아에서 7개의 언덕 중에 한 언덕을 택하여 마을을 세우고
로물루스는 스스로 이 마을의 왕이라고 선포했다고 한다.
바로 이 언덕 마을이 로마였다.
그러나 마을을 건설하는데 같이 힘을 쓴 동생 레무스는, 로물루스가 왕이 된다고 하니까
기분이 상해서 시기하였다. 그 후부터 둘은 서로 미워하며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 미워하던 중 어느날 레무스가 로물루스가 만든 성벽이 낮다며 조롱하면서
훌쩍 뛰어넘어 들어갔다.
이에 화가 난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여버렸다.
로마는 형제의 살인으로 로물루스가 왕권을 독차지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일까?
로마는 다른 나라에 비해 암살당한 황제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왕족의 근친상간이
많은 나라이다.
이렇게 로마가 처음 세워지기 시작한 시기를 B.C.753년 경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당시 7명의 왕이 이탈리아 반도를 다스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로마는 이탈리아에 사는 다른 부족들과 전쟁을 하면서 점점 영토를 넓혀나갔다.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부족으로는 에트루리아인들이었다.
이들은 로마 북쪽에 있는 이탈리아의 산악지대에 살고 있었다.
에트루리아니들은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는 민족이었고
오늘날까지 그들의 그림을 남겨놓았다고 한다.
에트루니아인들은 농작물을 재배하고 금속을 이용해 무기와 장신구들을 만들기도
했기 때문에 그리스에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무역을 했다.
이 때 에트루리아인들이 그리스의 알파벳 쓰는 법, 그리스 옷 입는 방법을 배워 왔고,
그리스 신들을 숭배하는 법을 배워 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에투리아인들이 로마 사람들에게 그리스의 문화를 전하여 로마에
그리스 문화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로마의 신화는 B.C.146년에 그리스를 정복하고 그리스의 문화와 예술을 그대로
로마에 적용시킴으로써 그리스와 로마를 합친 '그리스 로마 신화'가 되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서는
'그리스의 초기 도시국가들과 헬라제국'에 게시하였으므로
이번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그리스 우상 신들의 이름이 로마에서는 어떤 발음으로 불리는지만 알아 보기로 한다.
그리스 | 로마 | 그리스 | 로마 |
---|---|---|---|
아테나 |
미네르바 |
데메테르 |
케레스 |
아프로디테 |
베누스 |
타나토스 |
오르크스 |
아폴론 |
아폴로 |
니케 |
빅토리아 |
아르테미스 |
디아나 |
하데스 |
플루톤 |
아레스 |
마르스 |
헤스티아 |
베스타 |
에오스 |
아우로라 |
헤파이스토스 |
불카누스 |
에리니스 |
퓨리 |
헤라 |
유노 |
에로스 |
큐피드 또는 아모르 |
헤라클레스 |
헤르클레스 |
오케아노스 |
오케아누스 |
헬리오스 |
솔 |
가이아 |
텔루스 |
페르세포네 |
프로세르피나 |
크로노스 |
사투르누스 |
헤르메스 |
메르쿠리우스 |
제우스 |
쥬피터 |
포세이돈 |
넵투누스 |
셀레네 |
루나 |
모이라 |
파르카 |
디오니소스 |
바커스 |
레아 |
오프스 |
[네이버 지식백과] 로마 신화
2.집정관
그리스의 아테네는 노예를 제외한 모든 남자들이 포럼에 모여서
투표로 지도자를 뽑고 스스로 법을 제정하는 민주주의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렸지만
로마는 이 부분만은 다른 방식을 채택하였다.
로마는 귀족 계급에 속하는부자와 권력이 있는 남자들에게만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한명의 왕을 뽑으면 독재의 위험이 있으므로 두명의 지도자를 뽑기로 한 것이다.
이를 '집정관'이라고 한다.
3.아피아 가도와 수도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배하기 위하여 세계 최초로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도로를 포장했다.
로마인들은 화산재와 석회와 물을 섞으면 걸쭉한 혼합물이 되었다가 딱딱하게 굳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이를 건물이나 도로를 만들 때 큰 돌들을 서로 붙이는데 사용했다.
로마인들은 비가 오면 질퍽해지는 흙길에 전차와 마차의 바퀴가 빠지지 않고
잘 달릴 수 있도록 화산재와 석회에 물을 넣어 반죽한 재료로 도로를 포장하여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것이다.
(아피아 가도)
또 계곡 샘에서 로마까지 50km의 좁은 돌다리 같은 수도교를 세워 물을 끌어 왔다.
이 수도교는 협곡과 계곡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골짜기를 건널 때는
1층, 2층, 3층의 아치 모양으로 콘크리트 벽돌을 세워 돌다리의 완벽한 조합과 견고함,
우아함, 장엄함을 연출해 냈다.
이렇게 끌어온 물로 식수로도 사용했지만, 공중목욕탕을 건설해서 목욕을 즐기는
문화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수도교는 1985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 받았다.
4.줄리어스 시저(영어) = 카이사르(라틴어) (B.C.100~ B.C.44년)
이제 세월이 한참 지나 B.C.100~ B.C.44년의 카이사르 시대로 왔다.
카이사르(시저)의 정식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카이사르(시저)의 일가는 로물루스의 혈통의 귀족이었다고 한다.
이 시대에도 한사람의 독재가 아닌, 세 사람의 머리로 정치를 한다는 뜻에서
'1차 삼두정치'가 시작되었는데,
비공식적으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군사적 정치적 협정을 맺었다.
당시 함께 삼두정치를 하던 폼페이우스는 동방으로 정벌을 벌이고 있었고,
카이사르는 서방으로 정벌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로마의 왕이 되어 큰 제국을 이룰 꿈을 품고
뛰어난 웅변을 배우기 위해 배를 타고 지중해의 외딴 섬으로 가던 중에
해적에게 납치되었다.
하지만 담대한 시저는 스스로 자신의 몸 값을 정하고 해적들에게 협상하기를 명령하며
해적들을 마치 자신의 하인 부리듯이 호령했다고 한다.
시저는 해적에게 몸 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뒤에 군대를 이끌고 가서 그 해적들을 소탕하고
굴복시키기까지 하면서 그의 용맹을 로마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로서 로마시민에게 시저는 큰 인기를 얻기는 했지만, 로마의 원로들은 시저가 정권을
장악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를 브리튼(영국)에 원정을 갔다오는 길어 죽이기로 했다.
어느 나라이든 인간들은 자기 위로 올라가는 꼴을 못보는 모양이다.
좀 인기도 있고 잘 나간다 싶으면 죽이려고 한다.
시저는 브리튼에 원정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의 국경인 루비콘 강에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고는
그 기회로 로마에 들어가서 로마 정권을 점령해 버렸다.
(루비콘 강)
그후 카이사르(시저)는 로마의 집정관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을 암살할 음모를 꾸민
주동자였던, 사위, '폼페이우스'를 뒤쫒아 이집트로 갔다.
때마침 이집트에서는 아름다운 '클레오 파트라7세'가 자신의 동생을 제거하고
파라오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폼페이이우스의 목을 잘라 시저에게 받치고
자신의 동생을 죽여달라고 간청했다.
클레오파트라7세는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12세가 사망후
이집트 왕실의 '라지드법'에 따라서 왕족은 왕족끼리 근친결혼을 해야했기 때문에
남동생과 결혼을 해야 했다.
당시 클래오파트라는 18살, 남동생은 13살이었다.
마치 신라시대의 성골은 성골끼리 결혼해야하는 제도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클레오파트라에게 남동생이 남자로 볼일 수는 없었고,
나이 어린 남동생을 대신해서 이집트의 정치를 모두 관장하다시피 하였다.
게다가 클레오파트라는 천부적인 언어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무역에서도 알렉산드리아를 통교하던 수 많은 나라들의 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동생이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왕으로 성장하면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클레오파트라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이때 마침 로마의 카이사르(시저)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려고 찾아왔고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자신의 정권을 만회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시저에게 폼페이우스의 목을 받치고, 시저(카이사르)에게서
이집트의 독립과 왕좌를 보장받는 대신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시저의 여자가 되어 주었다.
당시 시저는 54살, 클레오 파트라는 21세였다.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시저)가 사랑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크레오파트라와 시저)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시저) 사이에서 '카이사리온'이라는 아들이 태어났고,
로마로 돌아가서 독재를 시작한 카이사르(시저)는 그의 친구이자 부하인,
'브루투스'에게 살해당하고만다.
브루투스는 갈리아(프랑스 지역) 정복으로 B.C.48년에 갈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지내며
카이사르의 총애를 받았으나,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독재를 하려는 것을
싫어하여 동지들 60명과 카이사르를 암살한 것이다.
5.악티움 해전 (B.C.31년)
악티움 전쟁을 이야기 하자면 클레오파트라7세의 이야기가 빠질 수가 없다.
카이사르에게 있어서 클레오파트라는 정부일 뿐이었다.
죽기 전에 카이사르는 아들인 카이사리온과 클레오파트라를 위해서 어떤 준비도
해놓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로마의 권력이 누구에게로 넘어가게 될지 알 수 없었던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왕좌를 불안한 상태로 바라보게 되었다.
로마에서 카이사르에게는 여동생 율리아의 19세 조카 이외에 상속인이 없었다.
카이사르는 살해되기 몇달 전에 이 소년을 양자로 들여 재산을 물려줄 상속인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가 바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는 군사적 경험이 없었고 정치적 경험이 없는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측근에서 노련하게 카이사르를 돕던 두 장군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가 있었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 당한 직후
안토니우스와 원로원들 사이에 군사적 대치가 있었고,
부르투스와 연루된 다른 암살자들은 이탈리아 북부 지방과 그리스에서
엄청난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B.C.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에 15년가까이 스페인, 북아프리카, 이집트,
소아시아에 이르기 까지 지중해의 어느 지역도 내전에 휩쓸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시 로마를 다시 장악하기 위한 열쇠를 쥐고 있었던 것은 카이사르가 데리고 있었던
병사들이 었는데, 카이사르의 암살 소식에 분개했다.
카이사르의 막대한 자산이 이 병사들을 먹여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병사들은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병사들의 임금과 은퇴 수당이 아우구스투스에게서 나올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는 경력도 없는 나이 어린
아우구스투스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안토니우스 장군과 레피두스, 아우구스투스의 3인 위원으로 '2차 삼두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를 라틴어로 세 사람을 뜻하는 '트리움비르'라고 한다.
삼두정치의 성공 여부는 세 사람의 야망이 충돌하지 않고 얼마나 균형을 잘 이루는가에
달려있었다.
이들의 첫번째 목표는 카이사르의 암살에 연루된 사람을 모두 처단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원로뭔 의원 300여명, 로마의 상류층 2000여명이 학살되었다.
이렇게 대규모 사형집행을 행하면서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많은 돈을 조달하였다.
또 브르투스의 군대를 무찔르는 데는 당연히 노련한 장군인 안토니우스가
'트리움비르 군대'를 지휘하였고,
그 사이 아우구스투스는 폼페이우스의 아들을 뒤 쫓아 시칠리아 섬 부근에서 처형하였다.
이렇게 잘려진 목들은 카이사르의 조각상 아래에 내동댕이 쳐졌다.
암살자들과 전쟁에서 레피두스가 탈락되고,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의
지분을 나눠가지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리스,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를 포함한 동쪽 속주를,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와 이탈리아, 갈리아, 스페인을 차지했다.
이제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는 권력투쟁의 주축을 이루고 결혼의 협정을 맺었다.
안토니우스가 아내 풀비아와 이혼을 하고
아우구스투스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결혼을 한 것이다.
이렇게 로마의 세력은 안토니우스 장군파와 시저의 양자인 아우구스투스파로
나뉘어졌다.
두 세력을 바라보던 클레오 파트라는 이집트의 독립을 위해서 어린 옥타비아누스 보다는
시저를 따라다니며 강한 세력을 키운 안토니우스 장군 편에 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클레오파트라를 멀리했던 안토니우스도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를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시저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던 클레오파트라는 결혼이 아니면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안토니우스에게 결혼을 요구하게 되었다.
결국 둘은 결혼을 했고, 안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이혼을 하고는
로마와 이집트를 아우르는 대제국 주의의 야망을 꿈꾸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과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공동 섭정으로 세우고,
자신의 세 자녀들에게는 소아시아의 통치자로 선포하였다.
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초상화를 세긴 동전도 발행하였다.
이러면서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두번째 '헤라클레스'이며 장차 새로운 왕족의 시조가
될 것이라고 고대 세계 전역에 알렸다.
하지만 안토니우스 휘하에 있던 병사들은 클레오파트라가 로마군 진영 속에 나타나
교만한 모습을 보이면서 공공연히 자신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다룰 수 있는
여자라는 것을 과시하는 태도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는 격분하였고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창녀'가 로마의 전통적인 가치를
져버리고 동방의 타락과 방탕 속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다며 신랄한 정치적 공격을 가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 때문에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도 안토니우스에 대한
반감이 거세게 일었다.
이에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 사이에 피할 수 없는 결전이 벌어졌다.
B.C.31년에 안토니우스 군대와 아그리파가 이끄는 아우구스투스의 군대가
그리스 서해안 악티움에서 해전을 벌이면서 권력의 승부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돌아갔다.
악티움에서 후퇴한 안토니우스는 이집트까지 쫒겨가서 최후를 맞이하였고,
뒤쫒아 간 아우구스투스의 군대에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포로로 끌려다니지
않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후에 꽃속에 누어서
독뱀을 풀어 자신의 가슴을 물게한 후에 죽고 말았다.
로마의 두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휘두를 수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아름다운 미모로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이 세상이 우러러 보던 두 영웅의 권력도, 다재다능한 클레오파트라의 재능과 지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치 않으면 빼앗기게 된다는 교훈을 남긴 채, 이 야심찬
야망가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시편118;8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 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 보다 낫도다
시편146;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라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어리석게 사람들의 알력에 의지하려고 하지 말자.
6.로마의 최초 황제, 옥타비아누스 = 아우구스투스 (B.C.27~ A.D.14년)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최초 황제로 카이사르의 조카였다.
그는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 휘하에 있던 로마 군인들을
버리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아우구스투스 군대로 들어가게 했다.
이리하여 아우구스투스는 30만 대군을 거느린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대를 갖게 되었다.
또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세 자녀들을 살려주고
이들을 로마로 보내서, 마음씨 착한 자신의 여동생 옥타비아에게 입양시켜 돌보게 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풀비아 사이에 태어난 장남과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사이에 태어난
카이사리온은 장차 자신의 적수가 될 것으로 간주하여 죽여버렸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으로 아우구스투스는 파라오의 보물을 몰수하고
이집트를 로마 제국에 합병시켰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조카이면서 양자로 입적되어 시저의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이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로마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뿐만이 아니라,
카이사르의 군사들까지 물려받아,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로마를 더욱 부강하게 만들수 있었다.
이렇게 로마를 잘다스린 아우구스투스였지만,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려다가 살해당했다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집정관의 자리를 그만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원로들은 아우구스투스를 만류했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 대신 '제 1시민'이 되었는데,
이것으로 황제의 자리로 오르게 되었다.
겸손하면 사랑받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겸손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를 사랑한 사람들은 로마시민뿐만이 아니었다.
원로들도 그를 "축복받은 자" 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팍스로마나 (로마 지배에 의한 평화)'를 이루었다.
로마는 주변국을 점령하고 제국의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도로를 수백 개나 건설하였다.
이 풍요로웠던 로마 시대에는 귀족들이 잔치 판을 한번 벌이면 몇 날을 먹고 마시고
했는데, 손님으로 초대 받은 사람들은 잔치 집에 가서 음식을 많이 먹어주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잔치 집에는 손님들이 옆으로 길게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즐겼는데,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나면 깃털을 목구멍으로 집어 넣어 다 토해내고 또 다시 먹고 하면서
미련하게 잔치를 즐겼다고 한다.
7. B.C. (주 전)와 A.D. (주후)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년도를 중심으로 역사를 B.C.와 A.D.로 나누어
배우고 있다.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역사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로마 시대에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님으로 탄생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인간들의
죄를 사하고 구원하실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약속의 메시아가 오셨는데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너무 초라한 목수의 집안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메시아의 의미를 모른 채 외모로만 판단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년도와 날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중심으로 세계 역사는
B.C.(Bfore Christ)와 A.D(라틴어로 Anne Domine)로 나누어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의 역사 기록을 인류는 B.C와 A.D로 정했다.
바로 이 로마시대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의 죄 대신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동물 제사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빌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요1;2~5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는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을 비추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아니하는 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A.D 27년에서 33년 경에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예수님의 열두제자들과 바울이 활동한 시기가 로마 시대이며,
그 내용이 신약 성경 전체를 이루고 있다.
(예수님과 12제자의 최후의 만찬)
<예수님의 12제자와 사도 바울>
1 베드로
2 안드레
3 야고보 ㅡ세베대의 아들
4 요한
5 빌립
6 바돌로매
7 마태
8 도마
9 야고보 ㅡ 알패오의 아들
10 유다
11 시몬
12 가룟유다→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먹고 자살한 후, 제비뽑기로 맛디아가 들어 감.
※ 바울
8.최악의 황제 '네로' (A.D.58~68년)와 로마 대화재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죽고 난 후의 황제들은 능력이 없었다.
2대 황제는 티베리우스 (A.D.14~37년)
3대 황제는 칼리굴라 (A.D.37~41년)
4대 황제는 클라우디우스1세 (A.D.41~54년)
로마 황제 집안은 대대로 근친 간의 결혼이 많다.
옥타비아누스의 손녀인 아그리피나가 전 남편과 결혼해서 네로를 낳았다.
아그리피나는 남편이 사망한 후에, 49년 숙부인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재혼하였고,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하여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하고
자신의 아들, 네로를 제위(帝位)에 오르게 하였다.
16살에 로마의 5대 황제가 된 네로는 처음 5년 간은 선한 정치를 베풀었다.
하지만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섭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기질로 정치를 하려고 하면서
아그리피나와 잦은 갈등이 생겼다.
네로는 점점 정신병자 수준으로 변해갔고,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조리 죽였다.
먼저 자신의 정권을 넘보는 클라우디우스의 친 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살해하였고,
59년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포파이나 사비나와 결혼을 반대하는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노예를 시켜서 죽였다.
이후 네로는 포파이나와 결혼을 했다.
아그리피나의 죽음은 정권에 눈이 멀어 숙부와의 결혼하고 나서
독살까지 서슴치 않았던 그녀의 행적에 따라 거둔 결과이다.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로마 황제들의 잦은 암살은 그리스 신화에서 배운대로 자책감 없이 행해졌다.
계속되는 폭정을 일삼던, 폭군인 네로는 실력없는 리라 연주를 즐기고,
그리스 건축물에 심취되어 자신의 궁전을 사치스럽게 꾸미는데만 열중하고 백성들은
돌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64년에 로마의 원형광장인 팔라틴 언덕과 카엘 언덕에 접한 장소의 기름창고에서 발생한
화재의 불길이 바람을 타고 로마의 언덕과 평지까지 맹렬한 기세로 휩쓸었다고 한다.
이 대화재는 5일 이상이나 지속되었고, 로마 14구역 중에서 10 구역이 피해를 입었는데,
3구역은 완전히 전소되었다고 한다.
로마대화재는 도쿄 대화재, 런던 대화재와 함께 세계 3대 화재이다.
이 대화재 때, 네로는 꼴사납고 낡은 집들이 없어져서 자신에게 새 건물을 지을 자리를
남겨주었다고 망언을 늘어놓다가 로마시민들에게 분노를 샀다.
이에 네로는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로마 시민들의 분노를
기독교인들에게 향하도록 진로를 바꿔놓았다.
이로써 로마 대화재로 인하여 기독교인 박해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로마시민들은 네로의 간교함에 넘어가서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기 시작하였고,
잔인하게 죽이기까지 했다.
당시 로마에는 원형경기장들이 많이 세워지면서 황제들이 로마시민의 인기를 얻기 위해
검투사 시합을 자주 열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콜로세움인데, 그곳에서는 전차 경기나 검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검투 경기를 한 장소이다.
(콜로세움)
대체로 노예들이 검투사가 되었는데, 이 경기에서 이기면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검투사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웠다.
또 범죄자들을 이 검투 경기에서 싸우다가 죽게 만들었는데,
황제가 때로는 검투사들을 굶주린 사자와도 싸우게도 해서 로마 시민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고 한다.
검투사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로마 시민들의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무척이나 즐겼다고 한다.
참 잔인하다. 거의 마귀적인 경기이다.
그리스-로마의 신이 무엇인지 알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기독교인들을 이 콜로세움 검투장에서 사자에게 잡혀먹게 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믿겠다고 다짐하면서
오히려 "카타콤'이라는 지하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카타콤이란 '낮은 지대의 모퉁이'라는 뜻인데,
카타콤의 구조는 지하 10~15m의 깊이에 폭이 1m, 높이 2m 정도에 계단을 만들어서
여러층에 통로로 이어지게 만들었고, 통로 곳곳은 넓은 방처럼 만들었고,
벽면에도 시체를 두는 벽감을 일정한 규칙으로 설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카타콤은 빛도 들지 않는데다가, 시체들이 부패하면서 생기는 세균과 악취때문에
사람들이 그곳에서 과연 살수가 있었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 역사적 사실을 지금 그 누가 확인할 수 있겠는가 마는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로
은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확실한 역사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물고기 그림으로 자신들끼리 비밀 암호를 만들어 서로 기독인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성경말씀을 나누면서 신앙을 두텁게 이어나갔다고 한다.
(물고기 = 익투스)
영화 쿼바디스 영상
출처:https://www.youtube.com/watch?v=1Cd8WXasrGE
다음 글에서 계속
첫댓글 님글 길지만 잘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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