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 엘리어트를 추억하며....
Sean Michael Elliott
(편의상 경어체는 생략합니다. 양해해 주세요)
내가 션 엘리어트을 처음 접한 것은 1986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세계 남자 농구 선수권 대회를 통해서였다. 미국대표팀의 데이빗 로빈슨, 먹시 보그스, 케니 스미스, 아몬 길리암, 찰스 스미스등은 익히 잘 알고 있던 선수들이었는데, 스윙맨으로 선발 출전한 선수 하나는 그리 눈에 익은 선수가 아니었다. 얼핏 봐서는 약간 호리호리한 마이클 조던처럼 보였다. 몸 움직임이 상당히 유연했고, 볼핸들링이나 패스웤, 가로 세로 수비력, 그리고 경기 조율능력까지 갖추고 있던 만능선수였다. ‘Explosive and Graceful’ (폭발적이며 우아한) – 당시에 중계를 맡았던 릭 베리의 표현이다. 그가 대학 1년생 국가대표 션 엘리어트였다.
1968년 2월 2일생. 신장 203cm. 아리조나 턱슨 고등학교를 졸업한 엘리어트는 아리조나 대학에 입학해 본격적인 농구선수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후에 스퍼스에서 호흡을 맞춘 스티브 커가 대학 3년선배였고, 둘이는 1986년 국가대표에 함께 차출된다. 아마도 당시 아리조나대의 감독이 국가대표감독이었던 사실이 상당 작용했을 것이다. 기본기를 잘 가르치기로 유명한 룻 올슨 감독밑에서 엘리어트의 대학시절 농구는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4학년 때는 평균 22.3점, 7.2리바운드, 4.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최우수 대학농구 선수에게 주어지는 The Wooden Award를 수상하기에 이르른다. 엘리어트는 아리조나대가 소속되어 있는 Pac-10 컨퍼런스의 All-time 최다득점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 기록 보유자가 카림 압둘자바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1989년 1라운드 드래프트에서 3번픽으로서, 데이빗 로빈슨과 함께, 스퍼스에 의해 선택된 그는, 이후로 1993-4년 시즌을 제외하곤, 스퍼스의 일원으로서 그의 NBA 커리어를 마치게 된다. NBA 데뷰를 하자마자, 전 시즌에 21승밖에 못 올린 최하위권의 팀을 56승 팀으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던 엘리어트는, 이 후 세 시즌 동안 계속 득점력을 향상시키며, 팀의 기둥으로 자리잡는다. 1992-3년 시즌에는 생애 첫 올스타 게임에 부름을 받기도 했다. 다양한 공격옵션을 갖고 있던 엘리어트. 특히나 유연한 드리블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폭발적인 풀업 점프샷이나 레이업은 그로 하여금 당시에 ‘가장 수비하기 까다로운 선수중 하나’라는 딱지를 달고 다니게끔 만들었었다.
그렉 포포비치 감독과 함께
1993년 플레이옾스에서 찰스 바클리의 피닉스에게 고배를 마신 스퍼스는, 골밑에서 로빈슨을 도와 주며 상대방 인사이더 득점원을 수비해 줄 선수가 절실히 필요했고, 그래서 엘리어트는 디트로이트의 말썽꾼 데니스 로드맨과 트레이드 되고 만다. 엘리어트가 샌안토니오를 떠나면서, 저렴한 값에 자신의 주택을 로드맨에게 팔고 간 얘기는 참으로 유명한 얘기다. 로드맨의 스퍼스 입단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던 멋진 인간 션 엘리어트! 하지만 정작 자신의 디트로이트 선수생활은 악몽 그 자체였고, 시즌 중반쯤에 휴스턴으로 쫓겨나다시피(?) 한 엘리어트는 그의 신장병을 감지한 로켓츠팀 프론트에 의해 다시 친정팀 스퍼스로 버려(?)진다. 신장이 안 좋아서 부어 오른 얼굴과 몸으로 인해 살이 찐 것처럼 보여서, 게으르고 몸관리도 못하는 선수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썼던 엘리어트는, 친정팀으로 돌아 오자마자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공수에서 맹활약하며 팀을 서부 파이널까지 이끈다. 그리고 다음 시즌인 1996년, 그는 평균 20득점을 내며 다시 한번 올스타 게임에 이름을 올린다. 그 이후 두 시즌 동안 엘리어트는 여러 부상으로 인해 슬럼프에 빠지지만, 첫 우승을 노리는 1998-99년 시즌에 맞추어서 자신의 경기력을 다시 한 번 끌어 올린다.
1999년 스퍼스의 첫 우승신화 한 가운데에 그가 있었다. Lock-out으로 인해 50게임으로 줄어 든 시즌, 그는 50경기 전경기를 선발출장하며, 평균 11.2점과 함께 스퍼스의 공수를 조율했다. 특히나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포틀랜드와의 2차전 경기에서 9.9초를 남기고 그가 터뜨린 3점슛은 스퍼스의 신화적인 우승행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플레이로 회자되곤 한다. 2차전 스퍼스 원정경기에서 단단히 준비하고 나온 블레이저스는 사보니스의 맹활약에 힘입어 경기전체를 장악했었다. 2차전을 뺏기면,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잃고 3,4차전 원정경기를 포틀랜드에서 치뤄야 하는 매우 불리한 상황. 이미 사이드라인 밖으로 나가고 있는 공을 가까스로 잡아내어, 선을 밟지 않기 위해 까치발을 해가며 터뜨린 그 ‘Memorial Day의 기적’ 샷은 스퍼스를 절망에서 구해냈고, 시리즈의 분위기를 스퍼스쪽으로 완전히 가져오게 했던 중차대한 플레이였다.
'The Memorial Day Miracle' 첫 우승의 신화를 쏜 엘리어트
우승 직후, 엘리어트는 팀의 사기저하를 염려해 시즌 내내 비밀에 붙여 왔던 그의 신장병을 세상에 공개했고, 8월 16일에 신장이식 수술을 받게 된다. 구단 관계자와 선수들 중의 대다수가 기독교 신앙인인 스퍼스는 데이빗 로빈슨의 주관하에 비상 기도회를 갖게 되고, 엘리어트에게 신장을 이식한 그의 형 노엘의 도움과 함께 수술은 성공리에 끝난다. 2000년 3월 13일, 엘리어트는 스포츠 역사상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재기한 '첫 번째' 사나이가 된다. 그의 재기전은 애틀란타 혹스와의 경기였다. 그렉 포포비치 감독의 말을 인용해 보면, 당시의 상황은 모두가 엘리어트의 컴백을 만류하는 부정적인 분위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기엔 엘리어트의 용기와 믿음은 너무 컸다. 그는 재기하고, 병마를 싸워 이기고, 팀에 공헌 한 번 제대로 더 하고 은퇴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멋지게 재기에 성공했고, 18게임을 뛰며 팀에 공헌한다.
엘리어트는 2001년에 은퇴를 했다.
엘리어트의 커리어 최고득점은 41득점으로 1992년 12월 18일 댈러스전에서 기록했다. 커리어 전체 평균은 14.2점, 4.3리바운드, 2.6어시스트였다. 스퍼스 역대 최다 3점슛 시도 (1,485회)와 최다 3점슛 성공 (563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엘리어트는 스퍼스 구단 역대 10위 기록에 이름을 많이 올려 놓았다 – 최다 출장 (3위, 669게임), 최다득점 (4위, 9,659점), 최다 리바운드 (6위, 2,941개), 최다 어시스트 (7위, 1,700개), 최다 스틸 (7위, 1,700개), 그리고 최다 블락 (9위, 257개).
은퇴 후, 엘리어트는 2003-4 시즌에 NBC, ABC, ESPN 방송국의 농구 분석가로 일했고, 그 후로 지금까지 스퍼스 지역방송국의 스퍼스 게임 전문 해설위원으로 활약해 오고 있다.
엘리어트의 #32 배번은 2005년 3월 6일 영구결번 됐다.
배번 #32 영구결번식에서.....
1999년 스퍼스 우승팀에 관련된 글을 번역하다가 갑자기 다시 추억하게 된 션 엘리어트.
글쓰기 전, 1986년 당시 AFKN에서 직접 녹화했던 세계선수권 게임들을 잠시 끄적여 보았다.
션 엘리어트, 그가 오늘 무척 보고싶다...........
첫댓글 Sean, 당신이 너무 너무 보고 싶습니다 ㅠ_ㅠ
페이스업 뿐만 아니라 포스트업 역시 상당히 좋습니다. 폭발적인 득점원은 아니었지만,3번으로서 구사할 수 있는 대부분의 테크닉을 가졌던 선수가 아니었나 싶군요.
스코티 피픈이나 그랜트 힐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3점슛 능력이나 드리블에선 이 둘을 앞서는 것 같고요. 리그 최고의 선수라고 할 순 없었지만, 단점 또한 전혀 없었던 선수. 언제나 성실하고 이타적이고 겸손한 선수. 이런 3번 선수 하나 스퍼스에 들어올 수는 없을까요? [아~ 아까와라 - 샘 맥키넌....]
들어오면 백투백이 거의 확실시 되는데... ㅠㅠ
(방문) 저도 참 좋아했던 선수입니다. 깔끔한 외모와 매너도 마음에 들었었고, 무엇보다 신기했던 것은 경기를 직접 보면 저렇게 잘 하는 선수가 기록표에는 거의 눈에도 띄지 않을 숫자만을 찍고 있었다는 것이죠. 피펜에게도 그런 경향이 있었지만, 직접 보기 전에는 진가를 알 수 없는 선수였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너무너무 좋아 하는 선수입니다. 아~~~~ 보고파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Doctor J님이 직접 보셨거나 소장하고 계신 경기들에 관해 이렇게 글로 남겨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86년 세계선수권을 본 사람이 이곳에 몇 명이나 있을까요 ? 듣는 것만으로도 짜릿하군요.
빅 오님, 또 방문해 주셨군요.^^ 그런데 이제는 [방문]이라는 말을 앞에 안 붙이시네요? 스패스팸에 가입하신 것으로 받아 들이겠습니다.^^
(방문) 앗, 깜빡했습니다. -_-;; 스퍼스와 던컨을 정말 좋아하기는 하지만 한 팸에 가입하기에는 NBA 전체에 다 애정이 있어서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아니, 30 손가락인가요 ?
그렇습니까? 저는 특별히 아파서 더 사랑스러운 손가락이 한 두개는 꼭 있던데요...?!
좋은 글..감사히 읽었습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와 함께 sanspurs님의 션 엘리엇에 대한 글도 기대해보네요^^ㅋ
잘 읽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엘리어트 점프력도 대단했죠.^^ 특히 대학시절엔, 빠른 스텝을 이용해 수비를 따돌린 다음 호쾌한 덩크를 많이 꽂았었습니다. 워낙에 올어라운드 능력이 뛰어나서 그의 운동능력 부분들은 상대적으로 언급이 많이 안 되는 듯 합니다.
이 선수 진짜 좋아했는데...정말 그립네요 션 엘리엇...신장 수술이후 호크스전 복귀경기서 덩크하지 않았나요...?국내신문에도 크게 소개되었죠...
약 12분간 출장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하늘로 치솟아 오르면서 내리꽂은 덩크는 그가 내면적으로도 얼마나 강한 사나이인지를 보여 준 플레이였죠. 당시에 스퍼스 선수들이 모두 벤치에서 일어나 환호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디켐비 머툼보도 게임후 인터뷰에서 엘리엇의 용기와 재기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디트로이트 시절 어떤 안좋은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션 엘리엇, 에이버리 존슨 참 애정가는 선수들이었는데..
우선 1993-4년 시즌 내내 여러 종류의 부상과 질환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45.5% 야투율에 12.1 평균득점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냈죠. 당시 피스톤스팀과 상성이 맞지를 않았다고나 할까요? 완전히 겉도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성적부진을 이유로 올스타 게임 전에 휴스턴의 로버트 오리와 트레이드 됩니다. 하지만 엘리어트의 신장질환을 이유로 로케츠는 엘리어트와의 계약을 포기하고, 그냥 버립니다. 이 정도면, 프로선수로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다 겪었다고 볼 수 있죠. 부상에, 신장질환에, 최악의 개인 기록, 두 개의 다른 팀으로부터 퇴짜 맞고..... 그래서 저는 엘리어트의 1999년 우승을 누구보다도 더 기뻐했습니다.^^
제 인생에 몬스터와 함께 가장 이상적인 3 번이었습니다. 득점 기계였던 몬스터와는 또다른 느낌의 3 번, 올라운드하면서도 자신의 몫의 200% 를 해낼 수 있는 선수, 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1 옵션에서 3 옵션으로, 3 옵션에서 1 옵션으로 오고갈 수 있는 선수, 로즈, 보웬과 함께 가장 "스퍼스 선수"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선수였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인사이더님, 오랜만에 팸에 들리신 것 같네요.^^ 타 농구 사이트의 운영진에 합류하신 것으로 압니다.... 축하 드리고요.... 저, 그런데 '몬스터'라 함은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요?
자말 메쉬번을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베이스라인에서 상대수비 등지고 있다가 스핀무브로 벼락같이 골밑으로 들어가 덩크하는 모습은 알고도 못막았던... 신장문제 빼고 고질적인 무릎부상만 없었다면 더 잘 했을텐데 아쉬웠죠. NBA TV에서 해설하던데 목소리도 꽤 좋더라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