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무대 외 4편
홍여니
어둠을 도려낸 조명이 당신에게 쏟아지고 있었지. 말끔하지 못한 슈트가 당신의 위트를 더 돋보이게 했어. 온음표가 4분음표로 쪼개지는 비트와 함께 연습은 시작되고
악기를 조율하며 눈인사를 나누느라 처음엔 아무런 요동이 없었지. 삐걱대는 화음에 쫓긴 당신의 눈빛은 쉴 새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어. 잔물결이 일렁이는 지문 사이로 부르튼 도돌이표가 출렁거렸지. 눈을 감고 연주하는 손길이 느껴질 때마다 허밍으로 대답하던 나를 알아챘을까. 음표의 꼬리를 버리고 달빛 아래를 흐르고 싶기도 했지.
가늘고 긴 보면대 위에서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으므로 서로를 지탱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 꼭 들어맞는 생의 한 순간쯤은 눈부셔도 된다고 생각했지. 리드미컬한 음향이 커다란 공연장 입구를 메아리쳐 돌아왔을 때 당신의 손사위를 놓치지 않았지. 막이 내려지고 커튼콜이 이어지고 당신은 무대 뒤로 사라졌어.
당신의 뒷모습이 장막을 쓸고 지나간다. 반 옥타브만큼 올라간 목소리로 새로운 울음을 준비한다. 당신은 어딘가에서 또 만날 것이고 슬픈 곡조에 숙련된 나는 다시 어둠을 도려내어 당신과의 협주를 기다릴 것이다. 세상의 소리들이란 울음 아닌 울림이 없다는 사실을 나지막이 읊조리면서.
그림자 구조대
난간으로 번지는 그를 쓰다듬는다. 내일을 모르는 오늘까지의 의지는 검거나 희멀겋다. 한참을 바라보다 흩어지는 물결을 두 손 안에 그러모은다. 한참을 바라보다 흩어지는 물결을 두 손 안에 그러모은다. 반으로 접고 또 접은 두려움을 가방에 고이 넣는다. 숨죽인 허공을 붙잡고 한쪽 발을 올린다. 미리 도착한 보트가 강물을 달랜다. 다리 아래 고개를 치켜든 구조대원에게 묻는다.
거기 강바닥이 깊은가요
위험하니 난간에서 물러나세요
그럴 수 없어요 전 이미 그를 지웠어요
얼마든지 새로 돋아날 겁니다 정면으로 바라보니 벅찬 거죠
저는 정면을 고집하지도, 또렷한 경계선을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랬겠죠 빛의 파장은 우리가 가늠할 영역이 아니에요 삶 또한 별다른 방도가 없어요
저만 그런가요 이 순간이 계속되나요
아닙니다 수없이 건져올린 그들이 말했어요 다 지나가니까 순간이라고
구조대원의 단언에 뒤로 한발 물러선다. 검게 물든 가방을 들어 올려 난간 앞으로 바싹 다가선다. 붉은 경광등이 빠르게 돌아가고 대원들이 입수 자세로 취한다. 추락을 예감한 듯 그는 색을 지우기 시작한다. 눈물을 밀어내며 가방을 힘껏 던진다. 물빛으로 부유하는 검은 그림자를 구조대가 건져 올린다. 온몸을 던져도 결코 죽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그가 뜨거운 눈물으 흘린다.
기억제본공방
느리게 뛰는 심장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밤길 물어물어
망가진 책도 다시 엮어 준다는 를리외르를 찾아갑니다
손끝의 모세혈관에 다다른 기억을 모두 꺼내놓으며
흩어진 날들조차 다시 엮어달라고 들이밉니다
첫 번째 장은 흐릿했으므로 아쉽지만 비워둡니다
어설프게 꾸미느니 공백이 나을 수도 있으니까요
처음으로 샀던 엄마의 생일 선물이
콩나물과 사이다 한 병이었다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지요
달빛이 들어앉은 들꽃 몇 송이를 신문지에 말았던 것도 같아요
두 번째 장은 악몽이 다른 꿈을 삼켜버려
그냥 넘어가기로 합니다
어깨너머로 배운 바둑을 좋아했었는데
보아뱀 닮은 애인이 흑돌을 먹어치우는 바람에
더 이상 포석을 깔 수 없었지요
바둑판 위에도 잡풀이 수북이 자라난다는 걸 처음 알았지요
세 번째 장은 밥 짓고 이사 다니는 무딘 사연을
굳이 남겨야 할지 망설이다 또 그냥 접습니다
묵은쌀에서 헌책방의 오래된 종이 향이 나곤 했지요
여러 번 이삿짐을 싸느라 선인장의 목이 꺾인 적도 있었습니다
네 번째 장은 불혹(不惑)에서 불을 떼고 혹만 남아
쪽잠으로 설친 베갯잇을 내다 버렸습니다
차라리 반딧불이를 찾는 게 나을 뻔했어요
무명초의 이름을 떠올릴 수 없어 다음 장으로 넘깁니다
이제 펼쳐야 할 마지막 장은 또 어떨지 몰라
여뀌 꽃대 입에 물고 엉거주춤 서 있었죠
아 괜한 짓을 했습니다
밤새 쓴 편지를 태우고 백지를 접어 보낸 아이처럼
빈 종이만 묶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괜찮아
를리외르는 큼지막한 종이꽃을 접어 표지를 꾸며줍니다
제본이 끝나자 두툼한 책등 너머로 달이 뜹니다
심장이 조금씩 빨라져 달의 문채(文彩)를 넣기 시작합니다
제 심장박동에 놀란 종이꽃이 도도록이 어둠 속에서 피어납니다
끝내 읽지 못한 책을 엮은 를리외르는
그가 아니라 나였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달고나는 달고
동그라미 안에 갇힌 별과 새 한마리를 샀다
가장자리를 살살 긁어 별을 완성하려는 순간
모서리 한 귀퉁이가 부서져 내린다
직선과 직선이 방향을 달리해서 만나면
생각에도 예각이 생긴다
별 조각에선 달다 못해 톡톡 쏘는 팝핑캔디 맛이 났다
날을 세우지 않은 새의 날개는
어느 한 곳 부러지지 않고 살아남는다
소다를 찍어 국자를 젓는 할머니가
시뜻하게 새 한마리를 건네준다
속내를 감추고 능청스레 살아남은 새를
공중에 매달아 놓는다
뭇별이 총총 박힌 모자를 눌러쓴 아이가
날개를 뽑아 천천히 녹여 먹는다
뭐가 이렇게 터지나,
입천장이 따가운지 턱을 추켜세운다
하늘 꼭대기에 별 조각을 매달기 위해
나는 자주 헐거워지는 운동화 끈을 고치고
뻣뻣해진 어깨를 날개 모양으로 구부려본다
사람에 갇힌 사람들이 날개를 찾아 지저귄다
노랑에서 주황 사이
해바라기 그림 한 점을 집안으로 들였다
금발을 나부끼며 당차게 흔들리는 꽃잎들
액자 가득 사선으로 부는 바람을 비껴 서서
먼 곳을 바라는 모습에 온몸이 물들여졌다
노랑이거나 주황이거나
해를 바라보며 가야 할 길을 정하던 순간에
나부끼고 있었을 자세로
사람을 고쳐 쓰는 게 아니라
생각의 각도를 틀어야 함께 살 수 있다는
그 각도로 고개를 틀고서
밤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도도 기력을 잃지 않고서
문이 열리면 저쪽 아침을 슬쩍 엿보다가
이내 방향을 틀어 꼿꼿해진다
집으로 곧장 들어서기 싫었던 날들
노랗게 이운 달빛이 왜 하필 발들에 묻어 따라오는지
걷어차도 달라붙은 열망 뒤에 따라오는 상처 같은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만 흔들리다가
뿌리로 스며든 달 부스러기 다시 어기적 줄기를 오른다
잃어버린 미소가 숨은그림처럼 촘촘히 박혀있는 씨
하나씩 뽑으면 와르륵 쏟아져 발등을 덮고
오늘의 버둥거림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줄
새로운 거처가 자란다
서성이던 열기가 줄기를 건너 가늘어진 발목을 감싼다
―《시로여는세상》 (2023 / 봄호), 2023년 상반기 《시로여는세상》 신인상 당선작(심사위원: 김용옥, 김병호, 전해수)
홍여니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한뉘문학회 동인. 《시로여는세상》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