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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1년 10월 2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가로채자.’
하면서 서로 짜고는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
(마태오 21,33-43)
When the tenants saw the son,
they said to one another,
'This is the heir.
Come, let us kill him
and acquire his inheritance.’
They seized him,
threw him out of the vineyard,
and killed him.
말씀의 초대
포도밭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포도밭에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만 들포도가 맺었다는 비유로, 하느님께서 사랑하셨음에도 빗나간 길을 걷는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지적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된 사람들에게 모든 걱정을 주님께 맡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권고한다. 아울러 참되고 고상하고 순결하게 살면 하느님의 평화가 깃들 것이라고 전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겪은 고통과 박해를 비유로 말씀하신다. 포도밭 주인이 포도밭 소출의 몫을 받으려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으나 소작인들은 그들을 때리거나 돌로 쳐 죽였음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장차 받으실 박해와 죽음을 예고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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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명동 주교좌성당은 바람 잘 날 없는 곳입니다. 한때는 강제로 쫓겨난 철거민의 피난처였고, 민주화를 외치는 장소였으며,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과 쫓기는 이들의 위로처였습니다. 때로는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명동 주교좌성당은 세상의 슬픔과 번뇌를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교회의 생명 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충남 아산의 학(鶴) 마을에 이런 전설이 전해 온다고 합니다. 옛날 박 생원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죽은 학이 살아나는 것을 목격하고 학의 둥지에서 이상한 돌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중국 상인들이 이 돌을 보고는 놀라면서 일천 금에 사겠다고 약속을 하고 돈을 가지러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박 생원은 횡재하였다고 기뻐하며 그 돌을 제값에 걸맞게 만든답시고 비단 수건에 싸고 흙을 털며 반질반질해지도록 날마다 닦았습니다. 며칠이 지난 다음 중국에서 돈을 싣고 돌아온 상인들에게 그동안 잘 닦아서 소중히 보관한 돌을 보란 듯이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상인들은 크게 낙심하며 말했습니다. “이 돌은 혼을 다시 불러일으킨다고 해서 환혼석이라고 부르는 희귀한 돌이지요. 그런데 당신이 반들반들하게 닦는 사이 돌의 정기가 다 사라지고 말았소. 이제 이 돌은 그냥 평범한 돌일 뿐이오.” 그들은 혀를 차며 돌아갔습니다.
교회가 생명을 가지는 것은 번듯한 건물이나 잘 차려입은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힘없고 고통 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교회의 ‘모퉁잇돌’이 될 때입니다. 이런 정신을 잃고 나면 교회는 가진 자들의 향연, 생명 없는 친목 모임이 되고 맙니다. 우리 교회가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멋진 건물에 앞서, 정의와 사랑을 위해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신앙인의 정신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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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말씀은 어이없는 내용입니다. 어떤 지주가 포도밭을 일구고 포도주 공장까지 차린 뒤 세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사용료를 내지 않습니다. 돈을 받으려 하인들을 보냈더니 오히려 그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가로채려 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행동 역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예언자를 죽이고 예수님마저 없애려 한다는 지적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은혜를 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사건과 만남’이라는 예언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건을 통해 그분께서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고통스러운 사건일수록 그분의 말씀은 강렬했습니다.
만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연인 것 같아도 ‘분명한 뜻’이 담겨 있는 만남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지만 지나고 나면 잊어버립니다. 그때의 느낌과 깨달음을 묻어 버리고 맙니다. 복음 말씀은 이런 삶을 돌아보라는 질책입니다.
포도밭은 미래를 상징합니다. 생명과 함께 맡겨 주신 우리의 한평생을 뜻합니다. 그러니 인생의 소작료는 내야 합니다. 시간을 바치고 소유를 바치고 정열을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과 봉사 생활’은 다만 그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봉사는 의무입니다. 할수록 은총을 만나게 되는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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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뜻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도조를 잘 내면 큰 행복이 옵니다
-박용식 신부-
참 이상한 일입니다. 복음 속 포도밭 소작인들은 주인에게 도조(賭租, 임대료)를 내기는커녕 주인 아들을 죽이면서 그 땅을 뺏으려고 합니다. 땅이 없는 사람에게 농사지을 땅을 빌려줬으면 감사하는 게 마땅합니다. 그런데 해코지를 하다니 참으로 배은망덕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왜 이런 비정한 이야기를 비유로 들었을까요? 하느님은 지주이시고 우리는 모두 소작인임 셈입니다. 아마 이 비유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지주이신 하느님께 마땅히 도조를 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를 비롯한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입니다. 자신은 그저 관리자요 소작인일 뿐입니다. 태양을 비롯한 지구의 공기와 물, 땅은 물론 자신의 재산, 지식, 능력은 모두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다 소작인으로서 지주인 하느님께 도조를 내야 합니다. 하느님이 주신 자연 만물을 사용하는 자로서 그에 합당한 임대료를 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 자녀로서 각종 성사의 은총과 축복을 받으며 살기에 감사의 답례를 바쳐야 합니다.
한번은 유다교 랍비와 개신교 목사와 천주교 신부가 신자들이 낸 헌금을 하느님께 바치는 각자의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먼저 목사가 말했습니다. "바닥에 직선을 긋고 위로 헌금을 던져서 선 왼쪽에 떨어진 돈은 내가 쓰고, 선 오른쪽에 떨어진 돈은 하느님께 바칩니다."
이어 신부는 "바닥에 동그란 원을 그린 후 헌금을 위로 던져 원 밖에 떨어진 돈은 내가 쓰고, 원 안에 떨어진 돈은 하느님께 바친다"라고 말했습니다.
랍비는 "하느님께 바친 거룩한 헌금을 자신이 그어 놓은 선으로 나누는 일은 불경스럽다"며 헌금을 전부 하늘로 던진 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원하시는 만큼 가지시고 나머지는 제게 주십시오."
이 우스갯소리에 우리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도조가 과연 무엇일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도조를 바친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신장을 기증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 신장의 관리자로서 그동안 보관했던 것을 원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뿐입니다."
이 일화처럼 하느님이 주신 땅에서 얻은 재물을 자신만을 위해서 쓰지 않고 하느님 일을 위해서 쓰는 것이 진정한 도조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물과 능력과 시간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 역시 하느님께 도조를 바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이와 반대로 "내가 피땀 흘려 얻은 재물 나를 위해 쓴다"는 생각은 도조를 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또한, 자신이 가진 것 모두를 주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주님께 감사하는 것 역시 도조를 잘 바칠 수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 은총으로 여기며 그것을 누리게 되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 진리를 아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도조를 바칠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도 감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하시며 "(감사하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필리 4,7)"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대구대교구 소속의 한 원로사목자 중에 입버릇처럼 감사하다는 말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과거에 이분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는 순간에도 "감사합니다"하고 기도를 하셨답니다. 뼈가 여러 개 부러질만큼 큰 사고였음에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자 담당 의사는 학회에 보고할 일이라며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도 감사의 기도를 바친 이 신부님은 필리피서 말씀처럼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평화'를 얻은 것은 아닐까요?
자신이 가진 것을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결국 한 푼의 도조도 내지 않아 불행하게 된 악독한 소작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스스로 관리자요 소작인임을 인식하고, 받은 것에 감사하며 이웃과 나누고 하느님께 바친다면 틀림없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집짓는 자들이 버린돌
-최인각신부-
하느님 집의 머릿돌
온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풍요로운 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과 농부들이 남모르게 수고하며 흘린 땀의 고마움이 물씬 느껴집니다. 이런 마음으로 잘 익은 포도 한 송이를 입에 넣는 것을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포도밭 소작인 비유’에 등장하는 소작인들의 배은망덕함을 읽고 나서부터는 이러한 행복한 마음이 한방에 날라 갔습니다.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고, 정말 화가 났습니다.
포도밭 주인이 산등성이에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쉴 수 있는 공간도 정성 들여 만들어 놓고, 소작인들에게 이를 맡기고 떠납니다(이사 5,2). 이러한 주인의 정성을 볼 때, 그 주인이 포도 농사를 직접 지었다면 많은 결실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소작인들에게 맡겼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연중 제25주일에 묵상하였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 1-16)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마 포도밭 주인은 장터에 나와 일거리를 찾던 이들, 특히 오후 늦게까지 일거리를 찾지 못하던 사람들이 머리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일일 품팔이를 하는 이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자신이 정성을 다해 가꾼 포도밭을 그들에게 맡기고 떠납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인이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종들을 보냈을 때, 그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합니다. 포도밭 주인은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냅니다. 하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합니다. 포도밭 주인은 너무나 화가 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고 자신의 아들을 보냅니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러나 소작인들을 그 아들을 보자 그들의 더러운 본심(本心)을 드러냅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라고 하며 그 아들을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립니다.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 흘림이 웬 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이사 5, 7)라고 울부짖는 이사야 예언자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소작인들은 포도밭 주인이 베푼 사랑과 은혜도 저버렸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지켜야 할 공정과 정의도 내동댕이쳤고, 자비로움을 피눈물로 갚은 배은망덕 그 자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주인의 아들, 곧 상속자를 죽임으로써 대를 이어 농사지을 수 있는 일터마저 빼앗긴 어리석은 소작인들. 땅 욕심에, 재산 욕심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소작인들은 그토록 바라던 포도밭(하느님 나라)에서 쫓겨나, 결국 ‘돌 위에 떨어져 부서지고, 돌에 맞아 으스러지는 불쌍한 자’가 됩니다.
이 비유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이 아주 무겁고 답답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 뒤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라는 시편을 덧붙인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집 짓는 이’와 ‘소작인’의 차이가 무엇일까를 한참을 생각하다가, 집 짓는 이들과 소작인은 상징적으로 자기의 편안만을 추구하는 사람, 자기 욕심을 채우는 사람, 자기 아성(牙城)을 쌓는 사람, 남의 집을 짓는 사람, 불의와 부정의 집을 짓는 사람, 죄를 짓는 사람, 소탐대실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내버린 돌’과 ‘죽여버린 상속자’는 고마움과 감사함, 은혜로움과 자비로움, 겸손함과 온유함, 공정과 정의, 행복과 기쁨, 은총과 구원, 사랑과 평화를 내버리고 죽여 버린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불의하고 부정한 소작인들이 저버리고 내동댕이친 고마움과 감사함, 은혜로움과 자비로움, 겸손함과 온유함, 공정과 정의, 행복과 기쁨, 사랑과 평화 등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아 당신의 집(하느님 나라)을 짓고 싶어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퉁이의 머릿돌을 기초로 삼아 짓는 집이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하며 자랑스러울지 생각하니, 어느덧 하느님께서 이룩하시는 풍요로움이 놀랍게만 다가옵니다. 이 풍요로움을 간직하며 여러분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깨닫고 기도하고 나니, 이제 다시 포도 한 송이가 먹고 싶어집니다.
욕심의 결과
-고준석신부-
사막에 조그만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우거진 야자수와 맑은 샘물이 있어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좋은 쉼터가 되었습니다. 노인은 야자수 그늘에서 목마른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샘물을 떠주는 것으로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그네들이 물을 마시고 나서 몇 푼의 동전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을 했지만, 동전이 쌓여가면서 욕심이 생겨 나중에는 동전을 안 주는 사람들에게는 당당하게 동전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물을 더 많이 나오게 해 더 많은 사람에게 제공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샘터를 최신 시설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샘물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주변의 야자수가 샘물을 빨아들인다고 생각하고 야자수를 모두 베어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야자수 그늘도 없어졌
고 샘물은 말라 버렸습니다. 노인은 뜨거운 햇볕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욕심이 화를 부른 결과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이러한 욕심이 나옵니다.
주인은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는 등 포도 수확을 잘할 수 있는 모든
설을 다 갖추고는 소작인들에게 기꺼이 내주었습니다. 이제 추수 때가 되어 소출을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주인이 멀리 있어 못 돌아올 줄 알고 그 밭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종들을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주인은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마지막으로 종이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외아들을 보냅니다. 하지만 소작인들은 그 아들마저 잡아 죽입니다. 주인의 아들을 죽여야 자신들이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소작인들은 자신이 주인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일구는 포도밭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욕심이 화를 부른 결과입니다.
주님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못된 소작인의 모습과 위의 예화인 욕심 많은 노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고, 이를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실상 나에게 주어진 것들, 가족, 재산, 친구, 지금의 모습 등 이루 셀 수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 없는 것들만 생각하기에 불평과 불만을 지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행복은 언제나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나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듯이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불평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금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것을 생각해 보고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우리가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제철에 소출을 낼 수 있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포도밭과 관련된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고, 누가 그분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유다 지도층(21,23)을 대상으로 예수님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포도밭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밭을 경작하도록 부름 받은 소작인들은 ‘이스라엘’입니다. 주인이 파견한 ‘종’은 예언자들입니다. 상속권을 노리는 소작인들에 의해 ‘포도원 밖으로 던져져’(39절) 죽임을 당한 ‘아들’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형을 당해 죽은 예수님이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밭을 다시 맡길 ‘다른 백성’은 이방인들입니다.
먼저 첫 단락(21,3341)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하십니다. 그분은 포도밭에 대한 이사야서 본문을 암시하며 말씀을 시작하십니다.(제1독서: 이사 5,17 참조) 이사야서 본문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이 용서와 회심에로 계속 초대했음에도 충실하게 응답하지 않은 그분의 백성과 하느님의 계약 이야기입니다.(예레 7,24 이하; 9,13 이하 참조)
온갖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마음을 돌이키는 데 실패한 하느님은 마지막 순간에 마지막 선물인 당신 아들을 보내십니다.(37절) 이제 그 아들의 인격과 그분이 하시는 일 안에서 하늘나라가 이 세상에 현존하게 되고, 그분을 거부하는 것은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그 아들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분이고(갈라 3,16), 이미 성경에 오시리라고 기록된 분입니다.(로마 1,34) 하느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은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상속자’로 삼기 위해서입니다.(갈라 4,7)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물로 주신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아들은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히브 13,12) 받으셨습니다.
둘째 단락에서(마태 21,4246) 예수님은 당신 자신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교회의 머리, 모퉁이의 머릿돌’(42절 참조)이 되신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베드로는 성령강림 후 오순절 설교(사도 2,1436)에서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유다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다는 것을 대담하게 선포합니다.(사도 2,3336)
왜 예수님이 교회의 머릿돌일까요?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유다인을,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인을 신앙에로 부르시어 평화의 은총으로 서로를 일치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기 때문에 과연 ‘우리의 평화’라고 불리실 수 있습니다.(에페 2,14)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유다인들에 대한 심판선고처럼 들리지만(마태 21,4344),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느님 자비에 따라(로마 11,3336 참조), 언젠가는 ‘모퉁이의 머릿돌’인 그분 안에서 두 민족이 결국 서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분께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1베드 2,45 참조)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여”(필리 4,8) 주님 포도밭의 좋은 포도나무가 되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묵상(Meditatio)
주님, 계속 되풀이되는 종들의 파견과 냉담한 반응을 보면서 사순절 성금요일에 당신 십자가에 입을 맞추며 부르던 ‘비탄의 노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내 백성아, 내가 너에게 더 할 것을 안 한 것이 무엇이냐? 나는 너를 위해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포도원을 마련해 주었건만 너는 어찌 나에게 가장 쓴 것을 주었느냐? 목마른 나에게 너는 신 포도주를 주었고 너의 구세주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지 않았느냐?” 주님, 당신은 저에게 당신의 포도밭을 맡기셨고, 저의 인간적 욕심으로 그 포도밭을 망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시간과 노력이라는 땀과 피를 흘려 수고로운 ‘열매’를, 풍성한 포도 열매를 소출하기 바라십니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속한 백성’이 아니라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기도(Oratio)
만군의 하느님, 제발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고 이 포도나무를 찾아오소서.(시편 80,15)
새벽을 열며
어제는 제 동창 신부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과로를 해서 그랬는지 ‘대상포진’이라는 병에 걸려서 입원해 있거든요. 그래서 함께 병문안을 갈 다른 동창 신부와 함께 우선 할인 마트에 가서 먹을 것을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병원에 입원해 본 적이 많아서 그런데요, 사실 병원 음식이 그렇게 맛이 좋은 것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희 둘은 병원에서 먹으면 좋을만한 음식들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회, 회덮밥, 떡볶이, 꼬치구이 등등....
음식을 어느 정도 구입한 뒤에 우리들은 공구를 파는 곳으로 갔습니다. 제게 꼭 필요한 공구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 공구는 그 마트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공구들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공구에 대한 욕심이 조금 있답니다. 즉, 공구만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요, 제가 별로 쓸 것 같지도 않은데 구매를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어제도 제 마음에 쏙 드는 공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물론 그와 비슷한 공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구가 왠지 더 좋아 보이고, 그 공구와 함께 따라오는 사은품이 제게 너무나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살까 말까를 생각하면서 그 앞에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떠올려진 생각이 하나 있어요.
저는 단지 병문안을 가서 환자에게 먹일 것을 사러 이곳에 온 것이거든요. 그리고 공구는 그냥 온 김에 하나 구입하려는 것이었고요. 하지만 저는 원래 목적인 먹을 것을 구입하는데는 별로 갈등하지 않고, 대신 부수적인 것에 더 집중하면서 갈등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욕심 때문입니다.
이 욕심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 안에서도 이러한 일들을 하고 있지요. 우리들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 ‘사랑’에서 벗어나 다른 것들을 소유하고 집착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욕심’의 몫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들은 이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이러한 욕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주인은 울타리와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추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소출을 많이 내서 소득을 얻을 수 있도록 다 준비를 해 놓았지요. 그리고는 마음껏 농사를 지어보라고 그 자리를 소작인들에게 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조건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소작인들이 했던 행동은 너무나도 의외였습니다. 풍성한 소출로 대답한 것이 아니라 빈손을 대답했고, 뜨거운 박수로 응답한 것이 아니라 구타로 응답했고, 열렬한 감사와 환영으로 보답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외아들까지 죽이는 것으로 응답을 했지요.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 욕심으로 인해서 그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조차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시간이라는 밭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이라는 밭에서 많은 소출과 소득을 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갖춘 우리들의 이 몸을 주셨습니다. 또한 여기에 무엇이나 심고 가꿀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선택의 자유까지도 주셨지요.
그런데 과연 여러분은 시간이라는 밭에 무엇을 자라게 하고 있습니까? 혹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작인들처럼 욕심과 탐욕을 키우고, 이를 억지로라도 간직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서 자신이 꽉 잡고 있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보고, 이를 놓아버릴 수 있는 용기를 주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충동구매를 하지 맙시다.
빠다킹 신부
知人者智, 自知者明
-강영구신부-
+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가로채자.’ 하면서 서로 짜고는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
그대에게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설파합니다.
자기를 알면 자신이 앉을 자리와 설 자리,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자기를 모르면 자기의 자리가 어디인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게 됩니다.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知人者智, 自知者明.
‘남을 아는 것이 지식(智)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明)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자기를 몰라 어둠 속에 헤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는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지식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합니다.
그러나 비록 공부를 하지 못해 무식하지만
자기를 아는 사람은 자기할 바를 다하며 바르게 살고 가야할 길을 갑니다.
예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 속의 소작인들은 아들이 상속자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그들이 터무니없는 탐욕으로 포도원을 넘보고 아들을 죽이게 되는 이유도
지식(智識)이라는 덫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식한 것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행복한 주님의 날이 되기 바랍니다.(一明)
용심과 용심
-최영균 신부 -
형제들이 있는 집안은 대개 그렇듯이 형이나 언니가 입던 옷이나 학용품 장난감을
동생이 물려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려 입고 물려받는 것이 어른의 눈으로 보면
경제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어린아이의 눈에는 불공정하고 때론 서러운
감정이 들기까지 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똑같이 어여쁜 자녀이지만
동생들은 좋은 것이 있으면 자신은 다음 차례라는 것이 못내 서럽기도 합니다.
저 역시 막내입니다. 형님으로부터 옷이며 장난감을 다 물려받았지요. 그래서 인지
형이 더 많은 것을 가졌다는 생각 때문에 형이 미웠고 심술을 부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순 우리말로 용심이라고 합니다. 물론 지금은 형에게 용심을 품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나도 모르게
용심이 들곤 합니다. 그리고 이 용심은 결국 인간의 내적 평화를 깨트리는 ‘죄’를
낳습니다. 종교인의 일생 과제는 수심(修心)과 또 다른 의미의 용심(用心)을
갖추는 것입니다. 수심이란 마음을 바로 닦는 것이요, 용심(用心)은 마음을 바로
쓰는 것입니다.
욕심이 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수심과 용심(用心)입니다.
그리고 그런 수행을 위해 선행될 조건이 바로 ‘버리기’입니다. 더 좋은 것을 갖고,
더 많은 칭찬과 더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이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는
우리의 오그라든 손을 펼 때 용심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떠날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인 부러움(용심)을 놓아버리고 모욕과 고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그리스도의 수심과 용심(用心)이 부럽습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잘 내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이정희-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작인들은 참 못된 사람들이다. 땅도 주고 망대도 세워주고 울타리도 쳐주었는데 도지를 내지 않으려고 주인이 보낸 종을 죽이고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다. 하지만 대사제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아들었다.
예수님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대사제와 바리사이파·사두가이파·율법학자들을 무섭게 질타하신다. 나는 예수님이 그들을 배척하신다고 믿었고 가난한 이들 편에만 서시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했다.
연구소 식구들과 복음 안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격려하셨던 행적을 찾아본 적이 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먼저 예수님의 질타는 사랑의 표현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청을 모두 받아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셨고 많은 요청을 받으셨으며, 누구의 요청도 거절하신 적이 없다. 오라는 곳에 가셨고, 찾아온 사람들을 맞아들였다. 병이 낫기를 바라는 사람, 옷자락을 잡는 사람,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사람…. 예수님 혼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구원되기를 바라는 이들의 마음속 갈망과 고통, 그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함께 어우러져 기적이 이뤄진 것이다.
또 바리사이파의 초대에도 응하시면서 혹독하게 야단도 치신다.(루가 11,37-54) 그런데도 그분은 여전히 찾아가시고 서슴없이 할말을 하셨다. 그분의 꾸중은 바로 회심으로 초대하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결코 어느 한편에만 서는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도조를 잘 내는 백성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시는데 나는 과연 도조를 제대로 내고 있는지 두려운 마음이 든다. 오늘 복음을 사랑의 질타로, 함께 하느님 나라에 살자는 초대의 말씀으로 삼아야겠다.
(마태 21,33-44)마지막 날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사랑과 믿음의 하느님
-경규봉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포도원 주인은 많은 돈을 들여 포도원을 만들었다. 그는 포도즙을 짜는 확을 만들고 망대를 세우는 등 모든 설비를 구비하여 누구나 쉽게 포도원을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포도원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났다. 그 후 포도 수확기가 돌아오자, 포도원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종을 보내어 도지를 받아오도록 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도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고, 죽이고, 돌로 쳐 죽였다. 주인은 소작인을 철썩 같이 믿고 계속하여 종들을 보내어 도지를 받으려 했지만, 소작인들은 도지를 바치지 않으려고 계속하여 종들을 죽였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어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받으려 했지만, 이미 욕심으로 가득한 소작인들은 도지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포도원을 송두리째 빼앗기 위해서 아들까지도 죽이고 말았다. 소작인들을 믿었던 주인의 믿음은 배신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결론을 내리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답하기를 주인이 돌아와 그 악한 소작인들을 모조리 벌하고, 다른 이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이라고 말한다.
이 비유를 듣고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세상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세상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재물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친척이나 형제자매, 심지어 부모나 자식까지도 죽이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재물에 눈이 멀면 부모나 자식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눈이 뒤집혀지고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면 사람의 이성도, 판단력이나 분별력까지도 온통 마비되어 버린다. 사람이 탐욕의 노예가 되면 주변 사람들의 아우성이나 원성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러한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사람은 그렇다.
소작인들은 처음에 주인을 대단히 고마워했다. 자신들을 그처럼 신임해주는 주인은 은인이라고 생각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신들을 소작인으로 불러주었을 뿐만 아니라, 포도원에 모든 설비를 완비해놓고 자신들은 관리만 하면 되었으니, 돈이 들어갈 것도 없다. 정말 이처럼 고마운 주인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들은 주인의 고마움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열심히 포도원을 관리했고, 드디어 많은 포도를 수확했다. 그때까지 그들은 주인에게 소작료를 충분히 드리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포도를 수확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필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을 것이다.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해야 하고, 어쩌면 부모를 봉양하기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주인에게 바쳐야 할 몫까지도 자신들이 다 써버렸는지 모른다. 그렇게 된 후에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주인은 부자이며 자신들은 가난한 사람이고, 주인은 포도가 아니라도 먹고 살기 충분한 재력이 있지만 자신들은 그렇지 못하고, 어쩌면 주인이 포도가 아직 수확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잊어버릴 수도 있고… 등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이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진다. 이제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이 정성을 드린 그 만큼 포도가 많이 열렸고, 그렇게 열린 포도는 자신들의 수고와 정성의 산물이며, 주인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 자신들의 수고와 정성의 대가를 주인에게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 더욱이 주인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 주인이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도조를 달라고 했을 때, 그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고, 죽이고, 심지어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다. 사실, 그들은 종들에게 사정해야 마땅했다. 자신들이 너무 가난하고, 너무 필요해서 소작료를 바칠 것까지 다 써버렸노라고, 정말 죄송하고 잘못되었노라고 사정하면서 주인에게 자신들의 불쌍함을 여쭈어달라고 부탁해야 마땅했다. 그러면 주인은 너그러이 용서했을 수도 있다. 그들을 위해 포도원 설비를 완벽하게 할 만큼 그들을 배려하는 주인이었기 때문에, 주인은 그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겨 몇 년 동안 소작료를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 번 생각이 달라진 그들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다. 주인이 보낸 종을 처음에는 때리다가, 다음에는 죽이고, 그 다음에는 우상 숭배자를 처형하는 것처럼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이 얼마나 더 간악해져 갔는가? 시작은 미미하지만 그 끝은 창대하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작은 죄가 걷잡을 수 없이 큰 죄가 된다.
그렇게 소작인들이 종들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작인들에 대한 주인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혹시 종들이 길을 가던 중에 사고가 나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종들이 소작인들에게 혹시 행패를 부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다. 길을 가다가 변을 당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종들을 보냈고, 소작인들에게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서로 감시하라고 더 많은 종을 보냈다. 주인은 그처럼 믿음이 깊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주인이 다시 종들을 보냈다는 것은 주인에게 용서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용서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다시 종들을 보낼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소작인들은 주인이 그만큼 자신들을 믿어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소작인들은 전에 종들에게 했던 것처럼 다시 종들을 죽였다. 이미 탐욕에 눈이 멀고 눈이 뒤집힌 그들에게는 주인의 깊은 배려와 신뢰까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돌같이 굳어진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주인은 그들의 변심을 알아채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처럼 간악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를 보내도 죽여 없앨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주인은 그들이 종들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죽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작인들이 자신의 아들은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들을 보냈다.
세상에! 어찌 그럴 수가!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고 우매할 수가 있는가!
정말 땅을 치고 통곡할 정도로 어리석은 주인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우매한 주인이므로 종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까지도 죽임을 당하도록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비유란 점을 생각해야 한다. 주인이 그처럼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까닭은 주인 역시 눈이 멀었고 뒤집혀 있기 때문이다. 주인은 믿음에 눈이 멀었다. 사랑에 눈이 뒤집혀져 있었다. 그랬기에 소작인들이 자신의 모든 종들을 죽여 없애도 그렇지 않다고 믿을 만큼 주인은 그들을 믿고 사랑했던 것이다. 주인의 지극한 믿음과 사랑은 자신의 소중한 아들까지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소작인들은 주인의 아들을 보자 그가 상속자이므로 자신들이 포도원을 가로채기 위해서 아들을 죽이면 된다고 생각하고, 아들을 죽여 버렸다. 그들에게는 이성도, 판단력이나 분별력은 고사하고 손톱만큼의 양심의 가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인에게 그처럼 고마워하던 소작인들이 그렇게 악한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그렇다. 사람은 그처럼 믿을 수가 없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신을 당하는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지 않는가! 사랑에 배신당하고, 재물에 배신당하고, 사람은 그렇게 변하고, 배신할 수밖에 없는 간악한 존재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그 점을 가르쳐주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을 믿지 말라고, 사람은 상황이 변하면 그처럼 변절하는 것이 사람이라고, 역으로 악한 사람도 상황이 변하면 선한 사람이 된다고, 사람은 그처럼 변하는 존재라는 점을 가르쳐주고자 하신다.
역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주신다. 사람이 그처럼 배반하고 변절해도 끝까지 믿어주시고, 참아주시고, 견디어주시면서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심을 가르쳐주신다. 하느님의 믿음과 사랑은 끝이 없으며 영원하시다는 점을 가르쳐주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결론을 내리지 않으셨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했으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사람들이 결론을 내리도록 하셨다.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와 믿음과 용서가 끝이 없는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벌하신다는 결론을 예수님께서 맺으실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결론을 맺지 않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용서가 끝없음을 알려주고자 하신 것이다. 과연 우리가 그 사랑과 자비, 용서와 믿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날까지, 그래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까지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기다리신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끝까지 참고 견디시면서 우리를 믿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자신을 알자. 우리가 얼마나 간악하게 변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알자! 그래서 결코 자신을 믿지 말자! 그리고 사랑과 자비와 믿음으로 우리를 기다리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믿자. 당신의 소중한 외아들까지 죽여도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시는 하느님,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때까지 끝까지 - 영원히 - 참고 기다리시는 자비와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자.
“하느님 사랑 감사하고 나누자”
-김영수 신부 -
‘모퉁이의 머릿돌’
우리 본당에는 ‘막달레나 기도방’이라는 작은 기도방이 있습니다. 이 기도방에는 70평생을 사시다가 늦게서야 하느님을 사랑하게된 막달레나 할머니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할머니는 지난봄에 위암선고를 받고 큰 수술을 하게 되셨습니다. 수술을 앞두고 병문안을 갔을 때 할머니는 제 손을 잡고 말씀 하셨습니다.
“제가 이 나이까지 사는 동안 제일 큰 기쁨은 하느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당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오순도순 사랑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큰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다 베풀어 주셔서 지금껏 건강하게 살았으니 이제 모든 것을 다시 하느님께 바치고 가고 싶습니다”하시며 통장 두 개를 꺼내 놓으셨습니다.
한 통장에는 돈 500만원이 들어있었고, 또 한 통장은 전세금 700만원을 찾은 돈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되셔서 사시는 동안 아끼고 모은 할머니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할머니의 통장은 할머니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막달레나 할머니는 이제 그것을 하느님께 모두 바친 것입니다. 나는 할머니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소중한 봉헌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의 집을 짓기로 결정했습니다. 할머니를 위해 반은 남겨두고 나머지 반으로 본당의 빈방에 기도실을 꾸몄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정성을 함께 모아 아름다운 기도방이 완성되었습니다. 수술을 무사히 마치신 할머니를 모시고 기도방을 축복하는 날 할머니는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저 하느님께 감사합니다”하시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단칸 전세방을 떠나 양로원으로 기쁘게 가셨습니다. 막달레나 기도방에는 지금도 새벽부터 한 밤중까지 막달레나 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왔을 때 빈손으로 왔으며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빈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 비었던 손을 가득 채우는 데에만 급급해 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의 목표가 그렇게 채우는 일로 가득 찬다면, 한없이 내 것을 늘려 나가기 위해 닥치는 대로 움켜쥐고 사는 것이 인생이 되어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추루해집니다.
붙잡고자 하지만 잡히지 않을 때 괴로움은 우리 앞을 큰 힘으로 가로막게 될 것입니다. ‘내것’이라고 움켜잡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리의 삶은 괴로움과 전쟁이라도 벌이는 듯 소란스러워집니다. 세상을 내가 소유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내 만족의 수단으로 여기고, 인생을 내 욕망을 채우는 시간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은 인생의 땅위에 넘어집니다.
사랑이 아닌 소유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 스스로도 외로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넘어지게 합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밑 빠진 독처럼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의 진창에 빠지게 합니다. 더 잘되어야 한다는 욕망은 오로지 자신의 보양과 행운에 인생을 탕진하게 합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전해주시는 복음입니다.
복된 삶이란 하느님의 것을 내것으로 차지하려고 발버둥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에 감사하며 나누지 못하고 움켜쥐려고 아우성치는 삶으로부터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하느님께서 내 안에 심으신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려야 몫을 그분에게 드리는 일이 정의며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결실을 맺는 것이 공평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삶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세상을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 헛된 걱정을 하지 않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하느님께 필요한 것을 아뢰는 사람은 인간에게 헤아릴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삶을 감사하며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되 하느님의 몫을 하느님께 드릴 줄 알고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삶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예수님 편에 선 사람들
-양승국신부-
소년분류심사원에서 만났던 한 아이를 저희 집에 데려오려고 가정법원에서 재판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이 말로는 연고자가 전혀 없다고 했는데, 법정에 나가보니 건장한 체구의 할아버지께서 나와 계셨습니다.
오해가 생길지 몰라 할아버지께 최대한 공손하게 제 신분을 밝히며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간 경위도 차근차근 설명해드렸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안심하시고 아이를 저희에게 맡겨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할아버지에게서 '고맙다.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씀을 기대했는데, 웬걸 난리가 났습니다. 잠시 할아버지 눈동자에서 불꽃이 이글거리기 시작하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시더군요.
"네 이놈, 내 손자 데려가서 뭐하려고? 고얀 놈 같으니! 생긴 걸 보니 인신매매범이 분명해. 내가 너 같은 놈, 여럿 봤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보호자들 시선이 일제히 제게 쏠렸습니다. 너무 황당하기도 하고 창피스럽기도 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할아버지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할아버지,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저쪽으로 가셔서 말씀 좀 나누시죠."
만만찮은 할아버지는 사람들 호기심 어린 눈길을 등에 업고 더욱 의기양양한 얼굴로 저를 궁지로 몰아넣더군요.
"가긴 어딜 가자고 그래. 분명히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느니 구석으로 가자는 거지?"
저는 순식간에 그 사람 많은 데서 인신매매범으로 몰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일이 떠오를 때마다 그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신뢰한다는 것이 참 힘든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세상이 하도 흉흉하다 보니 사기꾼들도 많아지고 서로를 속이고 이용해야 살아남는 세상이다 보니 한번 의심해보는 풍조가 보편화된 듯합니다.
이런 풍조는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선량하고 무지한 백성들을 끊임없이 현혹시켰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의 타락과 착취는 백성들을 불신과 의심, 불안 상태로 몰고 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조차도 거부하는 결정적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그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 특히 신앙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일생일대를 건 도박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에는 정확한 목표선택과 그 목표를 향한 철저한 투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강한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한 확고한 신앙, 그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근본적 조건입니다.
유다인들이 저지른 과오 중에 가장 큰 과오는 가장 값진 보물이 자신들 손 안으로 굴러들어왔음에도 그 보물을 절벽 밑으로 멀리 던져버린 행위였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고대해왔던 메시아, 자신들을 죄와 악에서 구해줄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들 코 앞에 나타났음에도 그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형에 처한 사람들이 바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죽어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쓸데없는 자존심이나 교만으로 가득찬 사람들입니다. 재물이나 권세, 명예에 눈이 단단히 먼 사람들입니다. 가끔씩 밑으로 내려가 인생의 밑바닥 체험도 기꺼이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끝도 없이 올라가려고만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메시아는 바로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데, 천국문이 바로 우리 일상에 자리잡고 있는데,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있는데, 우리 눈이 너무 높기에,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너무나 물질 만능주의, 세속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에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단순한 사람, 소박한 사람, 가난한 사람,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언제나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무런 거부감 없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눠지게 됐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수용하는 쪽과 거부하는 쪽. 불행하게도 많은 유다인들은 예수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이는 유다인들이 저지른 실수 가운데 가장 큰 실수, 일생일대의 대실수였습니다.
인간의 배은망덕과 하느님의 인내
- 손희송 신부 -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잘 내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어떤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심부름 시킬 때마다 돈 백 원씩을 주었습니다. 수고비 덕분에 아이는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어린 아이가 너무 돈 맛을 들일까 염려 되어서 한동안 심부름을 시키고도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에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거기에는 그 동안에 한 심부름 내역과 수고비를 합산한 것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서 잠시 후에 역시 쪽지 하나를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열 달 동안 너를 내 뱃속에서 기르고 낳느라고 고생한 수고비, 너를 키우면서 젖먹이고, 기저귀 갈아 준 수고비, 네가 아팠을 때 밤잠 못자고 마음 졸이고 간호해 준 수고비, 그것이 얼마나 될까?’
인간은 너무도 자주 자신이 받은 은덕을 잊어버립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많은 은혜를 잊고 불충과 배반을 거듭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저지른 배은망덕을 일깨워 주고자 하십니다. 포도원은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즐겨 가리키는 상징이며,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을 지칭합니다(제1독서). 하느님은 온갖 정성을 들여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포도원을 가꾸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소작인들에게 임대하셨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 즉 이 비유를 듣는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주인의 명령으로 도조를 받으러간 종들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보내셨던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크나큰 불충에 대해 다시 한 번 크나큰 인내로 대하십니다. 하나뿐인 당신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비유에 나타난 소작인들은 주인의 외아들마저 죽여 버리고, 그 결과로 도조를 제때에 바칠 충직한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빼앗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당신을 배척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악한 소작인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경고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선택하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거듭 배반하다가 마침내 그분의 외아들마저 배척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 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지속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내친 당신의 외아들을 부활시켜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머릿돌로 삼으신 것입니다. 교회는 과거의 이스라엘처럼 배은망덕한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은총의 하느님께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제2독서), 그분께 대한 굳건한 신뢰를 갖고 간구하면서 그분의 평화 속에 머무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제 때에 도조를 내는가?
-유영봉 몬시뇰-
초점 :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의 포도원의 노래를 약간 바꾸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신다. 계약과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선택된 백성이 하느님의 아들을 배척할 때 받게될 벌을 경고하신다. 우리의 삶은 제 때에 도조를 내는 그분의 백성다운 삶인가?
1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사는데 왜?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태도는 개인주의적이다 못해 이기적이다. 누구에게도 간섭받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은 제 뜻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참으로 내 인생은 내 멋대로 살아도 되는 그런 것인가? 우리는 우리가 한번도 계획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때에, 원하지 않는 곳에, 지금의 나의 모습으로, 이런 가정에 이런 소질과 용모와 개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할 것이다. 우리의 태어남도, 현재의 모든 삶의 조건도 또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완전히 나의 자유로운 선택과는 상관없이 순전히 타의(他意)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일컫는 나의 일생은 완전히 나의 자유로운 선택 밖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양으로 태어나고 죽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에, 나의 일생은 나의 것이면서도 완전히 내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 전적으로 옳은 말일 수는 없다.
2. 불충한 소작인, 이스라엘.
오늘 제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라고 하시며,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신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상기시키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하느님을 외면하고 우상숭배와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의 죄악을 질책하시며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하시며 이스라엘의 배은 망덕을 질책하신다.
오늘의 복음 말씀도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외면하고 많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끝내는 주인의 아들까지도 없앤 소작인들에게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제 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마태 21,41) 하시며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으로 갚는 이들에게 내릴 하느님의 징벌을 말씀하신다.
3. 우리는 제 때에 도조를 내고 있는가?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계시와 율법 그리고 여러 예언자들을 통한 지도와 가르침을 수 없이 베풀었듯이, 우리에게도 세례로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갖가지 은총으로 깨달음을 주시고 크고 작은 도우심과 축복으로 이날까지 우리를 지켜주시고 감싸주셨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 고 반문하실 것이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하는 포도송이와 같은 결실을 맺고, 하느님께 돌려야 할 몫의 도조를 바쳐야 할 것이다. 내가 가진 건강, 지식, 재물, 능력이 나 자신만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주변의 이웃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앙인의 입장에서 볼 때 나의 재산이나 능력, 건강과 미모 뿐 아니라 나의 존재자체 마저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크신 은혜로 우리에게 베푸신 것에 대해 합당한 응답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살고,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쓰는데 왜?" 라는 오만 방자함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 분의 크신 뜻을 깊이 헤아리며 제때에 도조를 내는 삶이 되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손을 내미는 그들이, 귀찮아서 얼굴을 돌려버리고 싶은 그들이, 성격이 맞지 않는 데도 함께 살아야 하는 그들이, 우리에게 도조를 받으러 온 자들임을 깨닫도록 하자.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만한 것들을 마음 속에 품으십시오"(필립 4,8)하신 말씀처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다짐해야겠다.
악한 소작인들의 비유
-조욱현 신부 -
오늘의 전례는 ‘포도밭’의 전경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포도밭’은 하느님께서 결실을 풍성히 맺을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로 보살펴주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고 있다(호세 10,1; 예레 2,21; 5,10; 6,9; 12,10; 에제 15,1-8; 17,3-10). 이 ‘포도밭’이라는 상징적 개념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맺어지는 ‘혼인’의 상징적 개념과도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제1독서: 이사 5,1-7: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다
그런데 제1독서에서는 상처받은 하느님의 사랑이 감동적으로 읊어지고 있다. 우선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각별한 배려를 묘사하고 있다(1-2절). 최고의 수확을 거두기 위해 배려하고, 아주 질이 좋은 포도나무들만 심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들포도가 웬말인가?”(2절). 이것은 이제 하느님의 분노가 ‘심판’의 형태로 나타내시고 있다(3-6절). 비유가 이런 의미이지만, 이사야는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기대하셨던 ‘결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말한다.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말인가?”(7절). 즉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이 표현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불의를 행하여 그 포도밭이 좋은 포도를 내지 못하고 ‘들포도’를 즉 ‘불의’를 내고 말았음을 개탄하는 것이다.
복음: 마태 21,33-43: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이 ‘포도밭의 노래’의 내용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거듭 강조하신다. 마태오는 이스라엘을 주님의 ‘포도밭’이라는 문학형식으로 구원의 역사의 어떤 단계를 서술하고 있다. 소작인들이 죽여버린 ‘종들’은 예언자들이다. 거기에다가 주인의 아들 즉 하느님의 아들까지 죽여서 포도원 밖에 내버린다. 이 아들을 죽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상속자가 없이 지주가 죽었을 때에는 그 땅은 먼저 점유하고 있는 사람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탄식하신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마태 23,27).
여기서 주인의 가장 사랑이 충만한 극적인 구세사의 마지막 여정은 상속권을 갖고있는 당신의 ‘외아들’의 파견이다. 아버지께서는 끝까지 구원을 위해 애쓰신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여버렸던 것이다”(39절). 그래서 모든 것이 헛되이 되고 만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예고로, 그 죽음이 도시의 성 밖에서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히브 13,12). 예수께서는 이렇게 되었을 때 그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이 극적인 사건과 연루되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사건으로 생각하면서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제 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41절)라고 대답한다.
이제 이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 그리고 불충실한 이스라엘 대신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말은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42절)라는 시편 118,22-23을 인용하시어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중심에 당신이 계심을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계획을 무시하시며, 집짓는 데에 쓸모 없는 돌로서 ‘버려진’ 그리스도를 당신의 새로운 구원의 건축에 쓰일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신다.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 뿐 아니라, 부활의 승리를 예고하며 구원의 역사가 십자가를 통해 여정을 계속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역사는 교회라는 새로운 구원의 공동체를 통하여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잘 내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43절). 즉 “회개했다는 증거를 보일”(마태 3,8) 능력을 상실한 옛 계약의 ‘백성’ 대신에 풍성한 결실을 맺을 하느님의 새 ‘백성’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중단될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도한 교회를 통하여 계속 전진한다. 악한 소작인들은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아들’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그 포도원을 되찾으셔서 새 소작인들에게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실이 하느님의 위대한 승리로 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본질적 특성은 행동하는 데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정통교리는 불충실한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올바른 실천적 행위 속에 현존한다... 주님의 교회의 본체에 대한 믿음은 행동적 증거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된 구원의 은총은 새로운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풍성한 믿음의 결실을 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기를 요구한다”(G. Barbaglio, I Vangeli, Assisi 1975, p. 472).
제2독서: 필립 4,6-9: 배운 것, 들은 것, 본 것을 실행하시오
바오로 사도께서도 이 믿음의 ‘행동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신자들은 ‘본성적으로’ 진실된 것, 올바른 것, 고상한 것들을 실행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평가할 수 있는 사고능력을 가져야 하며, 이는 ‘기도’로부터 얻을 수 있다(6-7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행동적’ 신앙은 금욕주의 사상이나 순전히 인간주의적 사상이나 순전한 실천주의적 사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한 행동적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수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인간 공동생활의 삶의 공통적인 가치와 요구를 실현시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면서 이 구원의 사업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일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서공석 신부 -
오늘 복음은 유대교 지도자들을 포도원 소작인에 비유하였습니다. 포도원은 구약성서 이사야서가 이스라엘을 지칭하여 사용한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좋은 열매를 생산하지 못하는 포도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 중 “포도즙을 짜는 큰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는 말은 이사야서(5,2)에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는 말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밖에서 처형당한 사실을 기억하는 초기 교회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포도원에서 하느님을 위해 일해야 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죽여 놓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끝에 “집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는 시편(118,22-23)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소출을 잘 내는 백성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는 말로 끝맺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그분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중심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1고린 3,11)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 신앙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복음은 지주에게 정직하지 못한 포도원 소작인들과 같이 하느님에게 정직하지 못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엉뚱한 수작을 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의 자격을 잃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스스로를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라고 자각한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즉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점차 유대교와 결별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에 준해서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달리 해석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 제사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유대교 지도자들과는 견해를 달리하였습니다. 그들의 그런 자세 때문에 그들은 유대교 회당에서 점차 추방됩니다. 기원 후 66년 로마제국의 지배를 거부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전쟁을 일으켰고, 4년간 지속된 전쟁은 기원 후 70년 유대인들의 패전으로 끝났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마르 13,2) 파괴되고 도시는 폐허로 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에서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때부터 교회는 이스라엘을 계승하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합니다. 초기 교회는 그 시대의 사건과 변화를 하느님과 연계하여 생각하였습니다. 역사 안에 살아 계시고 일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발생시킨 자각입니다.
하느님은 인류역사 안에 살아 계시면서 말씀하고 일하십니다. 예수님도 역사 안에 태어나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역사 현장을 외면하고 과거에 소중했던 법이나 제도를 절대시하는 것은 역사 안에 살아 일하시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일입니다. 구약성서의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한 사명을 자각한 것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이 이집트에서 학대받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사실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선하신’(출애 33,19) 하느님과 연계하여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하느님에게 귀 기울인 결과 모세는 백성과 더불어 이집트를 떠나 자유의 땅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유대교 사회가 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예수님이 하느님에게 귀 기울인 결과 그분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도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그들을 용서하고 살리는 실천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시대적 변화를 읽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옛날 것만 하느님이 하신 일이라고 믿으면, 역사 안에 일하시는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구원으로 들리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말이라야 합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럽 중세 사회는 그리스도교 문화권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교회 밖에 있다는 사실은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해서 사람노릇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그 말을 반복하면 우리와 종교를 달리하는 모든 사람을 매도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가톨릭교회 밖에도 문화적, 영성적 깊이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하느님을 왜곡하는 독선적인 말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짐진 여러 분은 모두 나에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마태 11,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과거의 율법만 고집하던 율사와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은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 어깨에 지우고 자신은 그것을 나르는 데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고 비난하셨습니다.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외면하고, 한 시대에 발생한 율법과 제사에 집착하고 그것만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고집하였습니다.
유럽 교회는 인간 자유에 대한 현대 인류의 자각을 외면하였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창의력을 유럽 중세 사회에서와 같이 과소평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오늘 유럽 사회에서 설 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일하겠다는 교직 지망생도 수도생활 지망자도 없습니다. 주일에도 성당들은 텅 비었습니다. 중세의 관행에 얽매인 교회가 오늘의 사람들을 위한 구원을 선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남녀 성(性)차이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남성이 독점하던 분야에도 여성이 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성을 완전히 배제한 교회의 교계제도는 과거 성차별의 유산입니다. 이혼하고 재혼하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많은 아픔을 겪은 그들입니다. 교회는 그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하 관계로 경직된 조직은 그 실효성을 잃었습니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함께 의논하는 유연성이 살아 있어야 실효성을 거두는 오늘입니다. 권위로 무장한 현재의 교회제도는 그 실효성을 잃었습니다. 시대의 감수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지도자로 자처하는 일부 사람들의 권위를 보장해 주기 위해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기대하시는 소출을 잘 내는 백성으로 역사 안에 살아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