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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 : 9 -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
고전 1 : 9 -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 -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
9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본 문단을 매듭짓고 있다.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의 미쁘심에 대해서이다. '미쁘시다'라는 말은 <피스토스>로서 믿음이라는 <피스티스>의 형용사이다.
<피스티스>는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믿음 또는 신실함이라는 뜻이 되며,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될 때는 신실하심 또는 미쁘심이라는 뜻이 된다.
하나님께서 미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기 때문인데, 하나님의 신실하심 내용은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과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것이다.
1] 너희를 불러
바울은 본 서신의 첫머리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고 밝혔다. 본 절에서는 모든 신자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제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 롬 3: 29 -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2]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여기서 '교제'(*, 코이노니안)란 연합과 교통을 포함하는 말로 함께 참여함을 의미하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된다.
빌 2: 1에서 '그리스도 안에 무슨 성령의 교제가 있거든'이라고 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에게 계심으로써 주님과 우리가 서로 안에 거하는 상호 내주(Inter-Residence)를 말한다.
이는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세상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으나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이므로 영적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상호 내주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계시는 존재 방식이다. 주님은 요 10: 38과 요 14: 10 등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으라고 하셨다.
이 상호 내주의 원리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도 적용된다. 즉, 요 14: 20에서 그날에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을 것이라 하셨고, 요 15: 5에서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는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서로 존재하여야만 과실을 많이 맺고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이는 주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자만이 주님의 영적 생명을 풍성하게 누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주님을 본받고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미쁘시도다'의 헬라어 '피스토스'(*)가 원문에는 문두에 나와서 강조적으로 쓰였다. 이 말은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말로써 그의 자신의 근거가 되는 말이었다.
* 고전 10: 13 -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 살전 5: 24 -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 사용되는 중요한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 히 10: 23 -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 벧전 4: 19 -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 요일 1: 9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가 한번 우리를 불러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하셨다면, 끝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주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주를 대항하며 죄 가운데 살았을 때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면, 그는 우리가 지금 부족과 연약이 많을지라도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은혜 안에서 신실해야 한다. 우리도 변덕스런 심성을 버리고 꾸준히 그 분만을 따르며 그의 품성만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자. 우리는 확실한 지식과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자. 또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주의 재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우리도 그를 본받자.
3] 대림절과 재림
(1) 대림절
교회에는 사회에서 사용하는 태양력과는 다른 ‘교회력’(church calendar)이 있다. 성탄절이나 부활절도 교회력에 포함되었다. 로마 가톨릭은 우리보다 훨씬 다양한 교회력을 지킨다. 예를 들어 성모 마리아 승천일도 있고, 여러 성인 축일도 있다. 어쨌든지 세계 교회가 지키는 교회력의 첫 절기는 대림절이다. 이 대림절은 성탄절 4주 전부터 계산해서 4주간을 지키는 절기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초림과 임재와 그의 재림을 의미하지만 특히 그의 재림이 중요하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신앙은 초기 기독교부터 아주 분명했다. 기독교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의 재림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걸 그대로 믿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개중에는 실제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또는 이런 재림 신앙을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 이외에 대다수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대림절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근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겉으로는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세계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위선적이거나 무책임해서라기보다는 기독교 신앙 자체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만으로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예컨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경쟁원리가 철저하게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는 이해될 수 없다. 생명의 심층으로 들어가야만 첫째와 꼴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신앙마저 경쟁과 자기만족에 치우쳐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가르침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변죽만 울리거나, 아니면 그것 자체를 아예 부정하게 된다.
‘대림절’ 신앙도 그렇다. 신앙이 좋다고 자부하는 기독교인들도 이 가르침을 매우 막연하게 생각한다. 과연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지금은 어디에 계신가요? 사도신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는데, 그곳이 어딘가? 신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생각하던 하늘을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계몽주의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 중에는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은 뭔가 잘못된 것일까? 이런 것에 대해서 성경이 자세하게 설명해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성경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곧 성경 기자들이 정직하다는 근거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건을 마술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합리적으로 꾸며서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적인 사건을 경험한 그들은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그것을 단순하게 묘사했을 뿐이다. 오늘 우리의 세계관과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그들의 진술은 분명히 영적인 현실을 담고 있다.
(2) 그리스도의 재림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글머리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제2차 선교여행에서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고린도는 그 당시에 매우 잘나가는 도시였다. 풍요로운 도시에 살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 공동체 교우들의 삶도 괜찮았던 것 같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게 되었고, 특히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게 되었다.”(5절).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었다는 바울의 이 진술은 기본적으로는 신앙적인 것을 말하겠지만 그 이외에도 삶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여기에는 재정적인 문제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특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언변과 지식에서 뛰어나게 되었다.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된 것이다. 요즘 말로 바꾼다면 고린도 교우들은 교양인, 지식인, 중산층이 되었다. 바울은 문화적인 점에서 풍요롭게 사는 것을 절대화하지 않지만 또한 부정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금욕주의자도 아니고 쾌락주의자도 아니었으며, 탈속주의자도 아니고 세속주의자도 아니었다.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그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현실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고린도 교우들의 넉넉한 삶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9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우들에게 구제금을 요청하고 있는 걸 보면 바울이 재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서 살든지 하나님의 뜻에, 즉 영적인 시각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영적 시각이 본문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보자. 7절 말씀에 “모든 은총의 선물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고 있다.”
전혀 부족할 게 없는 현재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나타나심은 대립적인 사태다. 예수의 재림은 이 세상에서 쌓아놓은 인간들의 모든 업적이 근본적으로 해체되는 사건이라는 의미다. 우리가 성취해보려는 모든 좋은 삶의 조건들이 예수의 재림으로 이런 방식과 전혀 다른, 그것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발생하는 생명 사건이기 때문에 이 두 사건 사이에는 긴장이 따르게 마련이다.
바울은 지금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는 고린도 교우들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현재는 아무런 부족한 것 없이 잘살고 있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는 게 곧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뜻이다. 여기까지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예수의 재림이라는 게 막연하게 생각되기는 하지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개인의 죽음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접어야 할 때가 온다는 말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다음이 문제다. 우리의 확신은 대개 현재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거나 과거에 실증적으로 발생했던 사건들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그런데 예수의 재림은 순전히 미래의 사건이다.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사건, 그리고 과거에서 한 번도 똑같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깊은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지성적인 사람으로서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무조건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으로서 그것을 믿지 않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저는 이 시간에 여러분을 이런 딜레마에서 건져낼 수는 없다. 다만 성경과 신학이 제시하고 있는 길을 부분적으로 설명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길을 제시한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아무리 분명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3) 그리스도와의 친교
저는 예수의 재림으로 시작될 오는 세상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 삶을 직관함으로써 어느 정도 내다볼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삶은 무상하다. 그 어느 것도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지 못했다. 다른 각도로 본다면, 그냥 현재에 그대로 고정된 것들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나를 포한한 이 세상은 어디를 향하여 지금 가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완성되는 그 시간을 마련해두지 않았을까?
이런 말은 별로 결정적인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논리는 같은 정도의 반론을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저는 본문을 통하여 말씀드릴 수밖에 없다. 9절 말씀은 “하나님은 진실하신다. 그분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 주셨다.”
바울 사도는 예수가 재림할 때와 심판의 날에 대해서 언급한 후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여기서 재림과 심판은 비슷한 의미이다. 이 사건은 무상한 이 세상의 생명이 참된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의미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생명의 완성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일치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희망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부활의 첫 열매’로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미래의 사건인 종말, 재림, 심판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저는 이것을 ‘종말의 현재’라고 본다. 생명의 완성인 종말은 단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현재의 사건이다. 지금 우리가 참된 생명과 하나가 되었다면 우리는 결국 최후에 완성될 생명의 세계에 이미 들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대기적으로 구분한다. 그것만이 아니라 나와 너, 그리고 사물을 명백하게 구분하려고 한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다. 순전히 자기 기준에 따라서 이 세상을 구분하며 살아가는데 익숙하다. 이런 방식에 묶여 있는 한 우리는 종말이 이미 현재에 침입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희망할 수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연대기적 시간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 이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처음의 창조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종말에 완성될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 사이에 창조의 힘은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태초와 종말이 모두 하나님의 창조다. 그렇다면 결국 현재 안에는 이미 종말이 들어와 있는 셈이다.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방식으로 종말이 오늘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우리는 이런 창조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행위라고 믿고 있다.
이 창조와 종말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원행위 중심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와의 일치가 곧 우리가 종말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이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 단계에서는 증명이 아니라 신뢰가 필요하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 그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근거로 그를 그리스도로 믿고 있다.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운명과 미래를 그에게 맡긴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들은 종말을 현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종말의 현재가 대림절 첫 주간을 맞는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4)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이시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행이며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속한 이들을 가리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고 설명했다.(2절) 같은 구절에서 고린도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 속한 이들도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각처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라고 했다. 고린도 교회와 다른 모든 교회, 그리고 오늘 온 세계의 교회에 속한 우리는 모두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사실을 우리가 실제로 믿고 또한 그 믿음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아무리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실리지 않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쏟아낸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일부러 남편과 아내를 속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구요. 그래도 나름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는 부부중에도 마음이 실리지 않은 말을 할 때가 많다. 그 이유는 사랑한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 채 그 말의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거나, 예수는 주님이라는 말은 혁명적인 신앙고백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 이 용어의 쓰임새를 알아야 한다. 예수는 유대 남자의 평범한 이름으로 요셉을 아버지로 하고 마리아를 어머니로 하는 한 남자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번역이며 구세주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곧 예수는 구세주라는 뜻이다. 이 말을 여러분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십자가에 죽은 이를 구세주라고 믿는 사람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거나 믿게 될 일정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난 특별한 현상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말은 그가 주님이라는 말과 같다. 주(퀴리오스)는 그 당시에 로마 황제에게만 붙여지는 호칭이었다. 로마 황제는 당시에 생명여탈권을 가진 절대적 존재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퀴리오스라고 불렀다는 말은 황제숭배를 거절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그들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삶을 맡겼다. 네로 황제 같은 이들에 의해서 수많은 기독교인이 순교를 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이 로마 황제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퀴리오스, 즉 주인이었다.
저는 앞에서 사랑한다는 말과 실제로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씀드렸다. 이처럼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게 무엇인지 조금만 돌아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돌아보자. 주식과 부동산에 영혼을 심는 사람들이 많다. 제가 젊었을 때는 세상 향락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을지 모른다. 정확하게 말해서, 주님을 믿는 것과 세상살이에 똑같이 관심을 기울이는 게 옳으냐, 하는 주장이 가능하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진지한 태도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 교회 일을 한다는 핑계로 회사나 학교나 가정일을 대충 때우며 넘어간다면 아주 무책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한 가지 일 수밖에 없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소중해도 그것은 여전히 부차적이다. 세상살이는 잠정적이라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으로는 우리가 영원하고 참된 평화와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섬겨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아주 빨리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믿고 고백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의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본문에서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고 있다.”(7b) 주님의 재림이 바로 세상 생명의 완성이다. 이런 세상은 정치 지도자나 CEO가 만들어낼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바로 그런 세상을 희망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실제로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쉬울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 이런 재림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영성이다. 이런 영성에서 우리는 종말을 기대할 뿐만 아니라 그런 신앙으로 현재의 삶에 충실하게 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런 재림과 종말의 생명을 알고 희망하는 사람만이 현재의 삶에서 영원한 생명을 맛볼 수 있다.
(5) 하나님의 아들
바울을 비롯하여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예수님의 재림으로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믿었다. 이 말은 곧 다른 사람이나 다른 제도나 그 어떤 세상의 일로도 생명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우리는 아직 생명의 완성에 들어가지 못했다. 생명의 완성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하시고, 하나님만이 생명을 완성하신다. 아니 생명 자체가 곧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재림이 생명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그분은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론에서 볼 때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분이다. 다만 역사를 초월하신 하나님과 구별되는 역사적 예수님을 가리킬 때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지만(Homo ousios) 역사적인 차원에서 다른 위격(persona)으로 존재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다.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나님도 사람처럼 자식을 낳느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 바로 이 단어를 이해하는 데 달려있는 것 같다. 어떻게 사람의 아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을까? 초기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과감하게 선포했을까?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곧 생명의 완성자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이런 고백을 드리면서 여러분의 영혼은 생명의 신비와 그 완성을 향한 희망으로 불타야 한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이 시간 안에서 아주 짧은 생명을 맛볼 수밖에 없는 우리는 전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영적인 만족과 쉼을 얻을 수 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한다. 그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생명의 친교를 맺었다. 옳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삽니다.
* 요 11: 25-26 –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4] 그리스도인의 감사 : 박 조준 목사 1: 1~9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이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쓴 편지입니다. 본문 말씀 아홉 절 중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거의 매절 나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쓰려고 하는 편지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말, 칭찬하는 말을 하기는 쉽지만 책망하고 경고하고 교훈하는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려운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처했습니다.
고린도 지방은 지리적으로 그 당시 무역의 중심 도시였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윤택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지만 사람이란 약하기 때문에 재정적인 여유가 생기면 자연히 사치와 방탕에 빠지기 쉽습니다. 옛날 불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를 기억하시죠? 다른 데보다도 그 지방은 모든 지리적인, 환경적인 여건이 너무 좋아 에덴 동산처럼 아름다웠다고 했습니다. 그런 환경이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하겠는데 사람이 약하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육에 빠져 범죄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의 형편이 그랬습니다. 고린도는 아가야라고 불려지는 지역에 있는, 헬라의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위치적으로 보아 서방과 아시아, 동서양이 같이 무역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어서 무역과 부의 고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돈이 많다 보니까 모든 종류의 사치가 조장되었고 예술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죄악으로 타락한 곳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린도는 특별히 음란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여자” 하면 매춘부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과 즐긴다”라는 말이 매춘부와 즐긴다는 의미로, 또한 음욕을 채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음란한 도시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절에 보면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고 했는데 이것을 비추어 보면 사도 바울은 주로 이방인들 사이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아주 험한 환경 속에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당면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취급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놓인 사도 바울의 머리에 거듭거듭 떠오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법이나 규칙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때로는 인간적인 정의감으로 대처하려고 합니다. 또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일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정신력이나 영력으로 이것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방법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어려운 문제가 있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배워야 할 처리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는 처음에 바울 자신이 사도 됨을 꼭 밝힌다는 것이 특색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처벌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과 위임장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고 삶의 방향이 180도로 변화됐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 가던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음 예수를 전하는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갇힐 때까지 30년 가까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로마 제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세 차례에 걸친 유명한 전도 여행 중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며 갈라디아, 소아시아, 그리고 헬라인 마케도냐와 남부 헬라인 아가야 지방에 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저기 다니며 교회만 세운 것이 아니고 그가 설립한 교회를 방문하고 그때에 받은 인상, 또는 그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꼭 편지를 써 보내서 교회를 감독하며 지도하였습니다. 이 고린도전서도 이러한 편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것을 강조했어요? 그 당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꼭 이것을 들고 나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곤 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뭐였어요? “바울이란 사람은 예수의 열두 사도 중의 하나가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살아 계실 때 열두 사도를 세우신 것 외에는 누구에게도 사도적인 권위를 부여한 적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이란 자는 자칭 사도라는 사기꾼일 따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날카로운 공격의 화살을 직시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서도 첫 마디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1장 1절에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이라고 말했습니다.
거짓 선생들이 자신을 적대해서 말한 바로 그 칭호를 바울은 스스로 주장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습니다. 이 말은 이미 명백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그 말이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사도는 특별한 신분으로서 자신보다 높은 분으로부터 주어진 임무와 권위를 향유하는 전달자를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특별한 대표자나 파송자에 대해서 사용하신 칭호입니다.
광범위한 제자의 무리로부터 주님은 열두 사람을 택해서 사도란 이름을 주시고 그들을 전도하도록 내보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4~15절에 보면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개인적으로 선택되고 부르심을 받고 임명되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자격이 부여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신자’ 혹은 ‘성도’라는 말과 ‘사도’는 완전히 뜻이 다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사도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사도란 칭호는 구체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이 몸소 임명하신 열두 제자들과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임명했던 한 두 사람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특수한 칭호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도에 관한 교리는 성실하게 지키는 것 외에는 다른 사도의 계승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 가운데 바울 자신이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성도 바울’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사도 바울’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 가운데 사용되는 용어 가운데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도이며, 또한 오늘 어떤 성도에 대해서도 절대로 사도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사도직이 결코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신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이 말씀은 자신이 유대의 공의회나 산헤드린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임명된 것이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바울을 사도로 택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도직에 임명하신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사명을 주신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셨고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사실을 그의 사도직에 대한 필수 조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2절에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8~9절에 보면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했습니다.
바울은 왜 이와 같이 그의 사도직을 변호했습니까? 그는 그저 인간적인 허영으로 우쭐해진 허풍선이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람들이 그의 사도직 권위에 대해서 도전했기 때문이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전했던 복음이 위험한 궁지에 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었다면 그 당시 사람들이 그의 복음을 분명히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그의 사도직을 변호하려 한 것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기초한 그리스도의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고수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한 것입니다.
2절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은 교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자세히 보세요. 고린도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한 무리의 신자들이 어디서 집회를 가지든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교파나 교회의 이름을 가지고 교회를 구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교회를 생각한다면 교회는 주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더욱 중요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존재입니다. ‘거룩해진다’는 동사는 ‘하기아조’ (ἁγιάζω)인데 ‘구별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장소를 구별한 것이 성전, 성소요, 희생 제물이 성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하나님께 바쳐지고 거룩해진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어 주신 인간이 되는 것이며 또 그것을 알고, 그 희생에 의해 자기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기오스’(ἅγιος)란 말인데 그것을 영어 번역에서는 ‘성자’(saints)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옳은 번역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기오스’란 말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봉헌된 물건, 또는 사람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에는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소유’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람이 특별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성별되었을 경우에 그는 그 생활에 있어서나 성품에 있어서나 하나님께 봉사하는 데 마땅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하기오스란 말이 ‘거룩하다, 성자답다’는 말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구별된 인간이나 물건은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과 다른 물건과는 다릅니다. 구별된 사람, 구별된 물건답게 쓰여질 때 하기오스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흔히 자기들을 나타낼 때 사용한 것이 바로 이 ‘하기오스’라는 형용사였습니다. 그들은 ‘하기오스 라오스’(ἅγιος λαός), 다시 말하면 ‘거룩한 백성,’ 하나님께 속해서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는 분리된 백성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하기오스’라고 부른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합리적인 예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산 제물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다운 성격이나 성품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각처에서 우리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써 보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교회의 일부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축복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와 평강이란 말은 평범한 단어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깊은 신학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란 말은 사도 바울의 구원의 복음을 요약한 표현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평화, 사람 사이의 평화,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적인 평화로서 화해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원의 근본은 은혜요,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친절입니다. 이것은 모든 축복의 요약입니다. 민수기 6장 26절에 보면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는데 이것은 구약의 축복 형식입니다.
그러면 이 은혜와 평강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옵니다. 여기서 바울은 위대한 역사적인 사건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며 그 사건으로부터 그의 평화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왜 감사를 드립니까?
첫째로, 예수를 믿게 된 그 믿음 때문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했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의 공로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이 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은사 때문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은사는 ‘카리스마’(χάρισμα)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사람 자신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카리스마’란 대가 없이 주어진 은사, 자기는 도저히 갚을 수 없고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은사를 말합니다. 가령 구원은 은사입니다. 공로 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사람의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로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것입니다. 개인적인 재능(gift)은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우리 욕망대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기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7~8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 것이고 만일에 지었으면 곧 회개할 것입니다. 주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형제와 이웃 사이에 원수 맺지 않고 다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성도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성도답게 삽시다. 주신 믿음에 감사하며, 베푸신 은사에 감사하며, 주님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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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이라는 아름다운 공간에 행복을 담아 나의 인연 모든 분에게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미소와 함께 전해 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 하십시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