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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면류관
슥 6:9-15
9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0 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받되
11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12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14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15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
선지자 스가랴는 하나님으로부터 미래에 성취될 일에 대하여 어떤 상징적 행동을 취하도록 명령받습니다. 그것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금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는 것입니다.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9-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사람들 중,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그곳의 동포들로부터 헌물로 은과 금을 헌물로 모아 귀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요시야의 집에 묵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헌금으로 만들어진 면류관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라고 합니다. 이러한 상징적 행위는 여호수아의 대제사장 직분 실행, 성전 재건의 확실성, 폐허의 예루살렘 성 재건의 소망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도 이미 여호수아에게도 싹에 대한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3:8).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12) 이어지는 계시는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싹이 돋아나듯 자라서 성전을 건축하리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예루살렘의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어 그 계시 말씀이 성취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 성전 역시 역사 속 폐허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메시야의 언약에서 보면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은 어린 메시야의 탄생을 의미합니다(3:8; 사 11:1).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므로 그리스도가 성전이 되시므로 새 성전을 건축한 것입니다(요 2:19).
이 둘 사이에 평화와 의논이 있으리라(13-15) 13절 말씀도 역사의 흐름에서는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전하게 성취됩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광을 얻으시고 그 자리에 앉아서 전능한 왕으로 다스리시고 또한 대제사장으로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치적 왕직과 대제사장직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고 서로 충돌이 없이 하나로 통합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십니다. 한편 하나님은 헌금으로 만들어진 금 면류관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 헌신한 사람들을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이들의 믿음을 후대들에게 좋은 본이 되는 거울로 삼게 하신 것입니다. 끝으로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통해 세상 만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일어나 하늘의 성전을 건설하고 완성해가는 미래의 비전과 복음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용: 성전의 기초가 되시고 말씀의 선지자요, 영원한 대제사장이며 전능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당신에게는 어떤 분이십니까?
감사는 먼저 입술의 말로써 고백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삶이 말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우리의 생각과 삶을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말은 우리의 삶을 밝고 긍정적으로 만듭니다. 원망과 불평 대신 감사의 고백이 나의 입술을 통해 흘러 나왔을 때 나의 삶과 운명까지도 변화되는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됩니다.
< 설 교 >
새 순, 예수님의 교회
슥6:9-15 / 이윤재 목사
사람이 살아가면서 많은 착각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착각은 자유”라는 글에서 6가지 착각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먼저 남자들의 착각입니다. “여자가 쳐다보면 자기한테 호감이 있는 줄 아는 착각, 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해서 자기를 싫다고 하면 한번 튕기는 거라고 여기는 착각”이랍니다. 여자들의 착각도 있습니다. “남자가 먼저 말을 걸면 자기한테 관심 있는 줄 아는 착각, 남자가 자기와 같은 방향으로 걸으면 관심 있어서 따라오는 줄 아는 착각”이랍니다. 초등학생에게도 착각이 있는 데 “나도 서울대 갈 수 있다는 착각”이랍니다. 중고등학생도 착각이 있는 데 “앞 사람 등 뒤에 숨어서 잘 때 선생님이 안 보이면 선생님도 자기를 안 보는 줄 아는 착각”이랍니다. 엄마들의 착각도 있답니다. “우리 애는 정말 착한데 친구를 잘못 만나서 삐뚤어진 줄 아는 착각”이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의 착각이 있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착각”이랍니다.
어떻습니까? 믿는 우리에게도 착각도 있을까요? 저는 믿는 우리에게도 몇 가지 착각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가 “나는 하나님 잘 믿는다”는 착각입니다. “나 정도는 믿어야지. 내가 표준이야”.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예배에 잘 참석하고 있으니 믿음있는 사람”이라는 착각입니다. 예배참석이 믿음의 척도라는 생각입니다. 세 번째는 아마 이런 착각일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기 때문에 신앙생활 잘하고 있지 않느냐”는 착각입니다. 신앙생활의 표준을 봉사의 수준에 맞추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받고 봉사 잘하고 있으니 나는 믿음생활 잘하고 있지 않느냐는 생각은 의외로 우리가운데 있는 많은 착각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배 잘 드리면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까? 교회에서 주일날 하루 종일 봉사하고 시간만 나면 교회에 사는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입니까? 그렇다고 예배 잘 참석 안하고, 교회 잘 안 나오는 사람이 믿음있는 사람이란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 좋다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교회생활의 기준과 표준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생각하면서 오늘 스가랴 네 번째 말씀앞에 섰습니다. 우리는 매주 주전 520년경 바벨론 포로후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무너진 성전을 재건했던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 자신을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시간입니다. 첫째 스가랴는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겼습니다. 정결과 거룩의 메시지입니다. 둘째 스가랴는 일곱등대와 감람나무 환상을 보았습니다. 우리 능력의 원천인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 번째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살았고 운동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며 그 말씀은 선교의 날개를 펴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네 번째로 스가랴는 또 하나의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슥6:12,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여기에 “싹”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이 옛날 성경으로는 “순”으로 번역되어서 우리에게는 “순”이 더 익숙합니다. “순”이든 “싹”이든 그 내용은 뾰족하게 올라오는 연한 잎입니다. (그림). 아름답지 않습니까? 3월이 지나봄이 되면 여기 저기서 피어오르는 연하고 부드러운 잎을 여러분은 보실 것입니다. 보기에도 부드럽고 아름답습니다.
왜 갑자기 스가랴는 이 연한 잎의 환상을 보았을까? 이 “순”이 여기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서에 자주 나옵니다. 먼저 이사야입니다. 사4:2,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이사야는 주전 750년경에 활동했습니다. 주전 750년경 이사야가 예고하기를 앞으로 메시아가 오실 것이고 그는 연한 순같고 부드러운 가지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언서에서 “그날”은 메시아가 오는 날입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면 그는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인데 그 이름이 “순”이라는 것입니다. 연하고 부드러운 잎의 이미지로 메시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53:2에도나옵니다. “그는 주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여기서 “주”는 메시아입니다.
에레미아도 예언합니다. 렘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에레미아는 이사야보다 100년 후인 주전 650년경에 활동했습니다. 그 역시 앞으로 메시아가 오시면 그 분은 아름다운 새싹같고, 의로운 가지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에레미아는 “순”대신 “가지”라는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렘33:15에 또 나옵니다. “그날에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여기에 나오는 “의로운 가지”가 이사야에서 말하는 “순”입니다. “순”이든 “가지”든 예언자들은 식물의 이미지를 빌어 메시아를 표현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스가랴가 나왔습니다. 스가랴는 여러번 “순”을 말하는 데 첫 번째가 슥3:8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여기에 “내 종 싹”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메시아는 하나님의 종이며 그 속성은 새 싹과 같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순”이나 “싹”이나 “가지”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들은 모두 살아 있는 식물들입니다. 작은 싹에서 순이 나고 그 순이 자라 가지가 되고 그 가지가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그러면서도 작고 부드럽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점점 커집니다. 아직 다 안 자랐습니다. 앞으로 자라면 그 싹이 얼마나 큰 나무가 될지 모릅니다. 그 연한 순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을지 모릅니다. 이 분이 누구입니까? 스가랴는 식물을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말합니다. 12절,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새 순처럼 사람들에게 흠모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태어날 때가 그를 메시아로 알아본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라면서도 그는 멸시받고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죽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53: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그는 죽어 형통하게 되었고 하늘에 높이 들려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스가랴의 탁월성은 그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그가 지으려는 성전과 연결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가 지으려는 성전과 세 가지로 연관시켰습니다. 첫째 그가 성전을 세우신다. 둘째 그가 성전을 다스린다. 셋째 그가 성전을 세상에 보내신다. “세우시고, 다스리시고, 보내시고”, 이 세 가지는 오늘날 교회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믿음이 좋은 믿음인지? 우리는 교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을 때 스가랴가 제시한 이 세 가지 기준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셨다.
첫 번째로 스가랴가 말한 것은 누가 성전을 세우느냐의 문제입니다. 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슥6:12,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누가 성전을 짓습니까?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여호아의 전을 건축하리라”. 싹이라는 이름하는 사람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입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스가랴는 주전 537년, 고레스가 자유령을 선포할 때 총독 스룹바벨과 동역자 학개와 함께 수만의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건축위원회 명단을 보면 건축위원회 위원장에 총독 스룹바벨이 있었고 건축위원은 각 지파 장로들, 학개와 스가랴는 영적 지도와 건축진행을 겸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자원적 봉사자로 참여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 18년 동안은 사람들의 반대로 건축이 시작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8년이 지난 주전 520년, 드디어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성전건축이 완료되었습니다. 입당예배를 드리면서 백성들은 감격해 했을 것입니다. “아, 드디어 우리가 해냈구나. 포로였던 우리가 드디어 성전을 재건했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격해 하고 있을 때 스가랴가 뚜벅 뚜벅 걸어 앞으로 나가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성전 재건하느라 참으로 고생많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아야 할 은 여러분이 성전을 지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순“이라고 불리는 메시아께서 지으셨고, 그 분이 바로 이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성전짓는 데 수고했어도 우리의 주님이신 메시아가 이 곳에 계시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메시아가 곧 성전의 건축자요 주인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 성전입니다”. 장내는 순간 물을 끼얹듯 조용해 졌고 그들은 모두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앞에 엎드렸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교회로 세우신 분은 예수님이요 그 분이 교회의 주인인임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말씀에서 두 마디가 중요합니다. 첫째 “내 교회”, 교회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어느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습니다. 교회는 “내 교회” 곧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스위스 제네바에 가면 종교개혁자 죤 칼빈이 목회했던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칼빈이 오랫동안 목회했어도 칼빈의 무덤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죽기 전에 제자에게 자기 무덤에 이름을 남기지 말라고 강력하게 유언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 무덤에 이름을 남기면 후세의 사람들이 예수님은 잊어 버리고 칼빈만 기억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데 있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행20:28에서 바울이 말한대로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피흘렸습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에서 자기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교회 간판에도 제 이름 쓰지 못하게 합니다. 단순하게 교회를 대표하여 쓰는 이름이지만 한 순간도 내가 교회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다음 “세우리라“ 했습니다. 세운다는 말은 이전에는 없던 행동을 처음 하는 것입니다. 보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리모델링하는 것이 아닙니다. 없던 것을 새로 만드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이전에 없던 기관을 처음으로 세운 것입니다. 문법적인 형태에 있어서도 ”세우리라“는 미래형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 세워간다는 것입니다. 말속에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번 세우고 말겠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 세워가겠다는 것입니다. 무너지면 말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핍박으로 무너져가자 어거스틴을 통해 무너진 교회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유럽교회가 십자군전쟁으로, 페스트병으로, 100년 전쟁으로 무너져 갈 때 성 프란치스코를 통해 다시 세웠습니다. 중세교회가 교황권의 타락과 베드로 성당과 성물숭배로 무너져 갈 때 마틴 루터를 통해 종교개혁으로 다시 세웠습니다. 종교개혁이후 부흥의 열기가 사라지고 화석화되어 갈 때 경건주의 운동으로, 19세기 부흥운동으로 다시 일으키시고, 그 부흥운동의 끝자락에서 은혜받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세계교회사상 유례가 없는 부흥을 이루셨습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예수님이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이 세워가고 있습니다. 1998년 이 곳에 세워진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본래는 이 자리에 세우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남에 다시 지으려고 했고 그것이 안돼 화곡동까지 알아보다가 전혀 생각지 않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세우셨고 주님이 세워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다스리신다.
스가랴는 두 번째로 말한 것은 그러면 성전은 누가 다스리느냐? “순이라고 불리는 메시아가 성전을 세운 것처럼 또한 그가 성전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13절입니다. 슥6: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여기에서 “순” 메시아는 성전을 건축하고 그 자리에 앉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자리는 통치를 말합니다. “앉았다”는 것은 왕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앉는 것입니다. 계시록 4장, 5장에서 예수님은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계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그 보좌가 누가 앉아 있습니까? 계5:9, “일찍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앉아 있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2천년 교회를 이루어온 힘의 비밀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2천년 교회사에는 수많은 내우외환이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핍박과 박해가 다가왔고 안에서 끊임없는 부패와 이단의 공격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도 이겨내기 쉽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의 비밀은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온 환란은 믿음으로 이겨내게 하시고 안에서 나온 부패는 회개를 통해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를 가능하게 한 힘의 근원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무력적 통치가 아니라 생명의 통치였습니다. 생명의 통치는 말씀의 통치였습니다.
어떤 가정에 사는 집사님이 사업의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꿈에서도 나쁜 꿈만 꾸었습니다. 한 번은 꿈을 꾸는데 자기가 어린 학생이 되어 학교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골목에서 불량한 형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돈을 내 놓으라고 윽박지릅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죽었다 했는 데 웬일입니까? 불량배 뒤에는 아버지가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버지를 보자 두려움이 사라지고 담대해졌습니다. 불량한 형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픽 웃었습니다. 그랬더니 불량배 형이 말합니다. “허, 이 놈 봐라. 웃어?” 하면서 주먹을 들어 막 치려고 할 때 아버지가 뒤에서 손을 잡았습니다. 그때 불량배는 깜짝 놀라 줄행랑을 놓았고 집사님은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아, 고통당할 때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배후에 계신다. 내가 고통당할 때 불량배를 보지 말고 뒤에 계신 아버지를 보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세운 예수님의 교회도 음부의 권세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16:18,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아멘. 2천년 교회가 여기 까지 있는 것은 교회가 실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등뒤에서 하나님이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마귀의 공격이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마귀를 이깁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더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기억할 것은 우리가 항상 예수님의 생명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최후 승리하게 되어 있지만 그것은 마술적인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예수님의 생명으로 가득할 때 그렇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만 음부의 권세를 이겨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야 합니다. 스가랴가 메시아를 “순”, “싹”, “가지”라고 은유적으로 부른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것들은 다 생명체입니다. 자연적 생명입니다. 자연적 생명은 물주고 거름주면 자랍니다.
150년 전 생물학자요, 화학자인 져스티스 본리비그는 식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무기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질소, 석회, 인산, 칼륨이다. 그 원리처럼 모든 영적 생명도 기본적인 네 가지 공급을 통해 자랍니다. 기도와 말씀과 교제와 전도입니다. 이 네 가지의 영적 공급이 있는 한 영적인 생명은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대부분은 자연적 생명체들입니다. 씨, 싹, 가지, 밀, 겨자, 누룩, 소금, 빛등, 마4:26-29이 대표적입니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으렀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냥 교회다닌다고, 예배참석한다고, 봉사한다고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엠. 바운즈는 그의 유명한 저서 <기도의 능력>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들은 더 좋은 수단을 찾지만 하나님은 더 좋은 사람을 찾으신다.”. 그렇습니다. 신앙적으로 더 좋은 사람이란 더 좋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더 좋은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교회나오고, 봉사를 많이 해도 기쁨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통계를 보면 교회에서 봉사 많이 한 사람이 더 많이 시험들고, 봉사 많이 한 사람들이 더 많이 다투고, 봉사많이 한 사람들이 더 많이 교회를 떠납니다. 봉사를 안해서가 아니라 그 안의 생명이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씨가 땅에 떨어졌는 데 진액은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믿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을 구원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 삶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자라가야 합니다.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어야 합니다. 관건은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의 생명안에 지속적으로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인들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행11:23,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영적 생명의 두 가지 요소는 은혜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어느 교회 목회자가 그랬다고 합니다. 그가 교회를 부임하여 가정마다ㅜ 심방했는 데 심방하는 가정마다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집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까?” 열심히 교회 나가냐고 묻지 않았답니다. 믿음의 연조가 어떠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직분이 무엇이며 주일 예배에 잘 참석하고 봉사도 잘 하느냐고 묻지 않았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기 사시냐고만 물었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신앙생활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당신과 함께 살고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우리가 물을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다스립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예수 오래 믿을수록 더 고집이 세지고 더 겉늙고 더 아는 것만 많이 지는 사람되기 보다 더 풍성한 생명으로 더 많이 예수님을 닮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더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보내신다.
스가랴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전을 세상으로 보내는 일도 메시아인 “순”이 한다는 것입니다. 14-15절입니다. 슥6:14-15,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 다같이 “여호아께서 너를 보내리라”. 스가랴는 메시아이신 “순”이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다스리지만 또한 교회를 세상으로 보낸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볼 때 대단히 파격적인 메시지입니다. 왜냐하면 스가랴의 시대는 70년만에 바벨론에서 돌아와 겨우 성전짓고 살기 시작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70년이나 밖에 있으면서 죽을 고생을 하고 겨우 자유를 찾아 조국에 돌아와 성전짓고 살려고 하는 데, 또 그러려고 성전짓고 있는 데 갑자기 하나님이 “야, 너희들 성전짓고 거기 모여 살지마. 세상으로 가” 이렇게 말씀하니 너무 한 것 아닙니까? 겨우 돌아와 숨쉬고 있는 데 또 나가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스가랴는 성령의 감동으로 단호하게 말합니다. 15절, “만군의 여호아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 알리라”. 그래서 누구에게 보낸다는 것인인가 하고 보았더니 15절, “먼데 사람들”입니다. 이 “먼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공간적으로는 이스라엘과 멀리 떨어진 나라를 의미하고, 신앙적으로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사는 이방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먼데로 내가 성전을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말합니다. 교회란 거기 모여 오붓하게 시간을 갖는 것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10절입니다. 슥6:10, “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중요한 것은 “사로잡힌 자”입니다. 사로잡힌 자는 역사적으로 바벨론 포로되었던 사람들을 말하는 데 영적으로 말하면 마귀에게 사로잡히고 세상에 사로잡히고 죄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교회는 가라는 것입니다. 그 명단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데 헬데, 도비야, 여다야, 요시아입니다. 이들은 사로잡혀 있어서 도와주어야 할 대표적인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이름으로 볼 때 다 이스라엘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가까이 가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풍성하고 한편으로는 사로잡힌 자들에게 다가갑니까? 하나는 영성적 질문이고 하나는 선교적 질문입니다. 스가랴가 꿈꾼 성전의 두 가지 강조점,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은혜의 교회, 하나는 먼데 있는 자에게 찾아가는 선교하는 교회, 이 두 가지 질문이 20주년을 맞은 우리 교회를 향한 스가랴의 질문입니다. 며칠전 책을 읽었는데 가슴 뜨끔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교회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은 사랑하지 않는다.” 뉴질랜드 복음주의자 브라이언 메드웨이의 말이었습니다. 한참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지 않은가? 문득 이스라엘 속담이 생각났습니다. “베려고 하면 풀 아닌 것이 없고 품으려고 하면 꽃 아닌 것이 없다”. 어떻습니까? 풀과 꽃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입니다. 미워하면 다 풀처럼 베어야 합니다. 사랑하면 다 아름다운 꽃입니다. 선교는 풀을 꽃으로 보는 마음입니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오래전 미국 갈보리교회의 척 스미스목사님이 히피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위한 선교에 집중했다고 합니다. 히피들이 교회들어오기 시작하자 교인들이 새성전을 짓고 카펫도 새로 깔아답니다. 그러자 교회지도자들의 눈이 곱지 않았답니다. 히피들 때문에 교회카펫이 더러워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척 스미스 목사님이 이렇게 선언했다고 합니다. “만일 카펫이 더러워질까봐 젊은이들이 들어오는 것이 싫다면 한 가지 답이 있습니다. 카펫을 없애면 됩니다. 교회 무엇도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카펫을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두 가지입니다. 거기 모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가지고 먼데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 그 한 가운데는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여덟 가지 묵시의 단 한 가지 결론
스가랴 6장 9절~15절
1. 치유와 구원의 목적
① (8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 본문은 지금까지 살펴본 8가지 묵시의 결론에 해당한다. 스가랴가 본 모든 묵시의 최종결론은 ‘거룩한 성전의 재건과 메시아 왕국의 도래’다. 메시아 왕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색다른 표현이다. 스가랴가 전한 묵시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마침내 성전을 재건하시겠다는 언약의 비전이다. 성전재건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구원이고 메시아의 도래는 하나님의 임재, 곧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비전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통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구원 사건이다. ‘성전 재건과 메시아의 도래’가 선지자의 예언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할 때 비로소 성취된다는 점에 핵심이 있다.
② (9절~10절) “사로잡힌 자 중에서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었나니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취하되”
▶ ‘헬대’는 머리된 자, 강한 자, 지도자를 일컫는다. ‘도비야’는 성전재건을 훼방했던 산발랏과 도비야와 동명이인으로 ‘선한 자’라는 뜻이다. ‘여다야’는 지식 있는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가리킨다. ‘요시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를 의미한다. 이는 특정한 인물을 넘어 성전 재건의 대업을 성취할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돕기 위해 선택받은 모든 사람들을 통칭한다. 하나님의 일은 특정인이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라 돕는 사람들을 보내셔서 함께 이룬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사로잡힌 자 중에서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하나님의 일은 완전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아니라 치유 받은 자, 곧 구원을 미리 체험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때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눅 8:1~3)” 사로잡힌 자를 구원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나님이 치유하시는 목적은 치료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③ (11절)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 은과 금은 만물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권능이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학 2:8)” 면류관은 세상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위임하신 권세다.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슥 3:5)”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다. 권능과 권세를 부어 주셔서 수행하게 하신다. 사명만 맡기시는 게 아니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시고 물질도 주시고 지혜도 부어주신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려면 힘과 물질, 지혜와 권능을 맡기신 분에게 구해야 한다. 또한 맡기신 분에 뜻에 따라 선용하고 충성해야지 맡기신 것을 멋대로 남용하거나 배반해선 안 된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4:1~2)”
2.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영광
① (12절 상)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 ‘순(筍)’은 새로 돋는 싹이다. 절망에서 피어난 희망이며 사망에서 거듭난 생명이다. 이사야는 새 희망을 ‘그루터기’로 묘사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사 6:13)” 순은 일차적으로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가리키지만 더 나아가서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하지만 스가랴가 전하는 순은 더 깊은 의미로 확장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자기 곳에서’ 모든 시대마다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돋아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주님의 몸 된 ‘진정한 교회’와 ‘리얼 크리스천’까지 포함한다.
② (12절 하)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 여호와의 전은 ‘성소(생추어리, Sanctuary)’다. 특정한 건물이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처소다. 성전이나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사람이 성전이며 교회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6)” 하나님의 임재는 동행이고 동행은 준행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면 하나님이 동행하신다. 솔로몬의 성전이 무너진 이유는 말씀대로 준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7)” 새 성전의 완공은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을 나타내는 척도이며 언약의 성취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적이다. 타락한 성전을 무너뜨리신 하나님께서, 이제 말씀대로 준행하는 이들을 통해서 거룩한 새 성전을 완공하시고 마침내 구원을 완결하시겠다는 약속이다.
③ (13절)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 왕은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아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고 제사장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말씀대로 준행해서 성전을 재건할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받을 영광이다. 또한 이 말씀은 만왕의 왕이시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왕 같은 제사장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예표 한다. 그뿐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섬기는 진정한 교회와 리얼 크리스천에 부여된 영광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할 때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다스리신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2)”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의 본질은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이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 곧 삶으로 드리는 예배다. 솔로몬의 성전은 제사를 안 드린 게 아니라 영적인 예배를 드리지 않아서 무너졌다. 새로운 성전의 재건은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영적인 예배를 회복하시는 과정이다.
3. 청종하면 이같이 되리라
① (15절 상)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 택하심을 받은 유대인이 하지 않으면 택하심을 받지 못했던 이방인을 보내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는 일을 수제자인 시몬 베드로가 하지 않으면 구레네 시몬이 감당하게 하신 것처럼, 내가 사명을 저버리면 다른 사람을 보내셔서 그 사명을 대신하게 하신다.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하나님 앞에서 쓸데없는 걱정이자 건방진 오만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너와 내가 지키지 않으면 ‘먼데 사람이 와서’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너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너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눅 19:40)”
② (15절 중)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 성전재건이 중단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몰랐기 때문이다. 모르는 게 죄다. 영생은 아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하나님만 하나님이라는 것과 스가랴를 하나님이 보내신 것을 몰랐다. 지금은 모르지만 언약이 성취되는 그날에 비로소 알게 될 것을 예고한다. 성전 재건의 목적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기적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적을 베푸시는 목적도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드릴 양떼 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겔 36:35~38)”
③ (15절 하)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
▶ 이 모든 일이 성취되기 위한 단 하나의 조건은 ‘청종’이다. 청종이 전하는 뜻은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 8:15)” 청종은 단순히 듣는 경청을 넘어 지키는 준행과 기다리는 인내까지의 과정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을 통해서 이루신다.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도 청종하지 않으면 이같이 될 수 없다.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배반하는 자요 가시 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에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눅 8:11~14)” 이 비유에 등장하는 길가, 바위, 가시떨기, 옥토의 공통점은 모두 ‘말씀을 들은 자들’이다. 다만 열매 맺지 못한 것은 말씀의 문제가 아니라 밭의 문제다. 오늘날 말씀을 외치는 설교자가 많고 그 말씀을 듣는 청중은 더 많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열매가 없는 이유는 말씀대로 준행하고 성취될 때까지 인내하는 진정한 청종이 없기 때문이다. 스가랴가 본 여덟 가지의 묵시가 성취되는 단 하나의 길은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청종’이다.
하나님의 영에게 쉼을 주고 있는가?
스가랴 6:1-15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6:12)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열방들의 심판이 된다. 네 말 탄 자의 첫째 환상이 이스라엘의 곤궁한 상황과 열방의 평안의 대조였지만, 마지막 여덟 번째 네 병거의 환상은 반대로 이스라엘의 평화와 열방의 심판의 대조다. 놀랍게도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영마저 쉼을 얻었다고 한다.(8절) 네 병거는 온 세상의 주 앞에 서있다 나가는 바람 즉, 심판을 행하는 성령의 역사다. 특별히 북쪽으로 나간 자들이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했다고 한다. 스가랴 시대 대적은 바벨론이었고 또 바벨론은 항상 죄악의 도성이자 사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 모든 구약예언이 그러하듯 가까운 미래뿐 아니라 종말론적 예언이다.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사탄의 도성이 완전히 심판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이 쉼을 얻지 못한다. 사탄이 그만큼 하나님에게 위협 고민거리가 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이 땅의 인간들을, 당신의 백성들마저 사탄의 교묘하고 음흉하고 끈질긴 시험과 훼방에 넘어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너무 안타깝고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다. 종말론적 심판이 시급 절실할 뿐 아니라. 반드시 당신의 때에 이뤄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현장지도자 스룹바벨 두 사람의 지도 아래 성전재건이 완수될 것인데 은과 금의 면류관을 여호수아에게만 씌우라고 했다.(11절) 그가 전 백성을 대표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실제적 회복은 성전재건보다 그로 인한 영적부흥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차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12절)할 것이라고 한다. 그럼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재건한 성전은 무엇인가? 그들이 성전재건을 하지 못한다는 뜻인가? 또 그 면류관을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16절)고도 한다. 재건되지도 않을 성전에 어떻게 둘 수 있는가? 이 싹은 이새의 집안에서 나실 새싹(순) 즉,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실 당신의 몸으로 이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성전이다. 헤롯 성전을 허물라 사흘 만에 다시 지으리라고 하신 그 성전이다.(요2:19) 그러니까 그 성전은 “먼 데 사람들이 와서 (함께) 건축”(15절) 되리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성경예언이 당대, 가까운 미래, 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겹쳐서 하나로 말하는 것은 후대의 성경독자로 한 눈에 다 함께 보아 알게 하려는 목적이다. 또 미래의 일을 현재 상황처럼, 심지어 과거시제로 묘사하기도 하는데 미래 예언이 반드시 일어남을 보장하는 뜻이다. 스가랴 때에, 아니 창조 전부터 예수님의 초림으로 당신의 백성에게 구원 은혜를 베풀고 재림으로 끝까지 완악한 자들의 심판을 완성할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선 이미 실현된 과거로 자리 잡고 있었다. 믿음은 온전히 실현된(될) 미래를 현재에 적용시키는 실력이다. 신자는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완성될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자다. 바꿔 말해 구약백성과 신약신자들은 하나님의 영이 쉼을 얻게 하는 소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첫째 성전(교회) 안에 오직 여호수아(예수)의 면류관(십자가)만 두어야 한다. 둘째 먼데서 오는 사람과 함께 성전(교회)을 지어나가야 한다. 예수님처럼 외모로 사람을 보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님 사랑을 누리게 해야 한다. 과연 이일에 충성하고 있는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
슥 6:9-15
◆ 대제사장 여호수아
(11)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바벨론에서 돌아온 세 명이 있다. 이들의 이름의 뜻은 아름답다. 헬대(주님의 세계), 도비야(하나님은 선하심), 여다야(하나님께서 아심)다. 이 셋은 모두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 각 무리의 수장이 되는 사람들이었다(대상 27:15, 스 2:36, 2:60).
이들에게서 은과 금을 받은 것은 아마도 이들이 자기가 이끌었던 무리에게서 받은 헌물을 건네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스가랴는 이들로부터 받은 은과 금으로 면류관을 만들어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울 것을 명 받았다.
대제사장에게 면류관을 씌우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본래 대제사장이 쓰는 성소에서 쓰는 관이 있지만, 그 관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갖춘 관이지 면류관이 아니다(출 28:36-38). 면류관이란 모름지기 그 쓴 자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용도다.
지금까지의 역사상 대제사장이 면류관을 쓴 예가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씌울 것을 명하시고, 그가 성전을 건축할 것임을 말씀하심은 단순히 당대를 향한 예언이 아닐 것이다. 여호수아와 예수가 같은 의미의 이름임을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이것은 후에 오실 메시아의 이름과 그의 영광과 그의 사역을 암시하는 예언이다.
메시아가 건축할 성전은 돌성전이 아니라, 자기 몸된 성전이고(요 2:21), 그것은 성도들의 무리, 곧 교회다(고전 3:16). 이 메시아(그리스도)께서 쓰실 면류관에 대한 예표로서 보여주신 것이다.
◆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
(12)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은 누굴까?
당장 그 시대에서는 성전을 짓고 있었던 스룹바벨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스룹바벨이 멀쩡하게 존재하고 비록 성전이 완공되지는 않았지만, 짓다가 멈춘 상태일 뿐인데 새삼스럽게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하셨다는 것이 어색하다. 아무리 봐도 '싹'이 스룹바벨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다.
싹(히브리어/쩨마흐)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여러 번 예언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쩨마흐)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쩨마흐)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렘 23:5, 렘 33:15)
그리고 13절은 개역개정은 싹과 제사장이 별개의 인물인 듯 번역했지만, 한글 킹제임스성경은 "그가 주의 성전을 건축하고 영광을 지니며 그의 보좌에 앉아 다스릴 것이요 그가 그의 보좌 위에 제사장이 될 것이라. 또 그들 둘 사이에 화평의 의논이 있으리라."고 번역했다. 즉 싹과 제사장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한 사람인듯한 암시다.
예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속죄제로 드리신 대제사장이시다(히 3:1).
또한 여호수아에게 씌웠던 면류관은 다시 반납해서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고 지시하셨다(14). 이것은 여호수아가 면류관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 진짜 주인이 따로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예표일 뿐이다. 참고로 14절에서 언급된 사람 중에 몇 명은 이름이 다르게 소개되었지만, 10절에서 언급된 사람들과 동일한 사람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종종 이름이 여러 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오늘 본문에서 언급한 싹은 스룹바벨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다고 했는데, 스룹바벨 성전은 당대의 유대인들이 건축한 것이므로 이 예언에 해당할 수 없다. 이 예언은 미래에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성전을 이룰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 예언의 성취를 보게 된 자들은 스가랴가 과연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15).
예언서들은 종종 이렇게 기가 막힌 방법으로 메시아 곧 그리스도와 그가 다스릴 하나님 나라를 암시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성경은 모순되고 엉터리며 해석이 불가능한 책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순간 성경은 신비하고 놀라운 책임을 알게 된다. 모든 예언이 제자리를 찾으며,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하심이 드러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예수께서 구약에서 예언한 그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라. 그 순간 성경의 모든 예언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볼 것이다. 거듭말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수많은 그리스도 중의 하나가 아니라 구약에서 무수히 예언했던 그 그리스도(the Christ)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마 16: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