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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정체는 노랑. 아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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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다
Scene 1. 첫만남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는 초록색 정글 짐이 있다.
오래 된 아파트의 오래된 , 페인트가 조금씩 벗겨진 철제 정글짐.
내가 10년 전 처음 이 동네에 이사 왔을 때만 해도 파란색이었는데
그 때도 페인트가 벗겨지고 있어서 다시 초록으로 칠한 것이다.
동네 꼬마들도 옆 아파트의 새로 생긴 놀이터로 놀러 다니지 이 놀이터는 찾지 않는다.
아파트 뒤켠의 낡고 오래된 재미없는 정글짐.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 터라 몇 년 전 부터 나의 공간이 되어왔다.
친한 친구와 다퉜을 때.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을 때.
좋아하던 선배에게 여친이 생겼을 때.
아빠가 딴 여자를 만나는 걸 봤을 때.
부모님이 이혼했을 때.
엄마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곁을 떠났을 때.
다치고 상처받고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놀이터에서 나는 홀로 시간을 보냈었다.
엄마가 그렇게 떠난 뒤에 스스로의 문을 닫고 입을 닫았을 때도
이 놀이터에서는 난 위로받을 수 있었다.
나의 쉼터가 되어주는 공간.
초저녁,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습관처럼 놀이터에 들렀다.
낡고 삐걱거리는 그네에 앉아 엠피쓰리를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The scientist - Coldplay'
음악이 흘러나오고 나는 가방에서 담배를 찾았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는데 정글짐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정글짐 위에 교복 차림의 어떤 남자애가 앉아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머리는 탈색된 노란 색에다가 한 쪽 어깨엔 비스듬히 기타가방을 매고 있었다.
나의 공간에 들어온 낯선 존재.
성가시다.
물론 이 놀이터가 언제까지나 나만의 것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언짢아져서 괜한 머리카락만 쓸어 올렸다.
"담배, 몸에 안좋은데... 특히 여자한테 치명적이다?"
무시하려고 마음 먹고 담배 연기를 내뱉는 나에게 뜬금없이 말을 걸어왔다.
다시 봤더니 나와 같은 학교 교복이다. 저런 노란 머리가 눈에 띄지 않을 리 없는데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생각보다 더 성가신 존재가 될 것 같았다.
"어,너도 생강고등학교네. 너 여기 살아?"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대답을 하지 않는데도 관심을 돌리지 않는 게 점점 짜증이 났다.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은 지 벌써 2년이 된 나에겐 이런 관심은 전혀 달갑지 않다.
쳐다보지도 않고 앉아있던 그네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었다.
담배도 털어 버린 뒤 가방을 챙겨서 집에 가려는데 등뒤에서 좀전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완전 무시하네.. 치. 학교에서 보면 아는 척 좀 해줘-"
개소리.
뒤도 안돌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Scene 2. 전학생
다음날 학교는 여느 때와 같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애들은 여전히 시끄럽게 쨍알대고 남자애들도 여전히 지저분하게 뛰어놀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즐거워서 한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떠들어 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2학년이 된 후로 그 누구와 말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고맙게도 아이들의 기피대상이 되어있었다.
언제나 비어있는 옆자리는 맘에 들었고 교실 맨 뒤에 위치한 책상도 맘에 들었다.
조회시간이 되자 왁자지껄한 교실이 조금 조용해지고 곧이어 앞문이 열리고 담임이 들어왔다.
담임은 딱 봐도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잘생기고 성격 좋은 젊은 남선생으로 학교의 인기남이다.
그래봤자 나에게 교직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뿐이지만.
"자 사랑하는 우리반 학생들! 오늘 니들에게 소개시켜줄 친구가 있다!"
담임이 사뭇 재밌어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전학생인가봐-' '헐, 남자 여자?'
담임은 기대했던 반응이 나오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문밖에 대고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어떤 남자애가 휘적휘적 걸어들어왔다. 약간 긴장된 표정이었지만 대체로 여유로웠다.
주변의 여자애들이 또다시 기대감에 차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조용- 자기 소개해봐, 윤지빈."
"안녕. 난 윤지빈이라고 해. 중학생 때부터 영국에서 살다가 일주일 전에 귀국했고, 오늘부터
여기 학교 다니게 됐어. 잘 부탁해-"
왠지 들어본 듯한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제 놀이터에서 만난 남자애가 서있었다.
여전히 노랗게 탈색된 머리에 한 쪽 어깨엔 비스듬히 기타 가방을 매고 있었다.
전학와서 몰라봤던 거였군. 같은 반이라니 왠지 더 싫어 졌다.
"전학생 잘생겼지? 니들 친하게 잘 지내라? 뭐 궁금한 거 있는 사람 물어봐."
담임이 전학생을 가리키며 말하자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다.
"영국에서 왜 온거야? 영어 잘해?"
"여자친구 있어?"
"키 몇이야?"
"머리 염색한거야?"
"그 가방은 뭐야?"
영국에 엄마가 계셔서 지내다가 아빠가 아프신 바람에 돌아왔다. 영어는 그냥 좀 한다.
여자친구는 지금은 없다. 키는 182다. 머리는 작년에 염색했다 탈색된 것이다. 기타가방은...
쏟아지는 질문에 조금 민망해하면서도 하나하나 대답을 하던 윤지빈은 교실을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입가에 보일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눈이 마주친 채로 말했다.
"가방은 기타 가방이야. 나 기타치거든. 근데 이거 책가방이기도 해."
주변에서 기타 쳐보라며 또다시 시끌시끌하게 말이 나왔다. 잠시 담임의 허락을 구하더니
가방에서 어쿠스틱 기타를 꺼내 자세를 잡았다. 주변에서 오오 하는 기대와 호기심이 들끓었다.
"딱 한곡만이다, 윤지빈. 신청곡 받지?"
담임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노래제목들을 외쳐댔다. 그러자 담임은 다시 조용하라고 외친 뒤 말했다.
"니가 골라서 신청받아야 겠다. 이것들 잘생긴 전학생 왔다고 흥분하기는."
약간 무안해 하던 윤지빈은 잠깐 웃어보이더니 곧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쳐다봤다.
무슨 영문인가 해서 인상을 찌푸린 채로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다음 순간 윤지빈의 말에 굳어 버렸다.
"아.. 그럼. 저 맨뒤에 앉은 여자애요. 쟤한테 받을 께요."
말이 끝나자 교실은 찬 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여자애들은 소근소근거리면서 나를 힐끔 거렸다. 뭐야 쟤 말 안하잖아, 아 재수없어 왜 쟤야, 지금도 지혼자
표정 존나 구리게 하고 있어 말은 할 줄 알아 등등 수군거림이 있었다.
그러자 남자애들도 여러가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시발.
"어? 어 그래, 그럼 보리가 선곡할래? 아무 노래나 되는거지?"
담임도 이 상황이 약간 의외였는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자연스럽게 내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은 점점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호기심과 함께 긴장된 표정으로 변해갔다.
윤지빈도 입가에 웃음을 띈 채로 손바닥을 조그맣게 펴서 '안녕'이라는 입모양을 해보였다.
그렇게 아무 말도 안하고 시간이 흘렀다.
조금 잠잠하던 반이 또다시 술렁이고 여자애들의 시선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날카로워졌다.
담임도 이 상황을 어찌할 지 고민하는 눈치로 아무 말이 없었다.
남자애들은 이제는 대놓고 쳐다보는 걸 멈추고 지들끼리 나를 주제로 시끌시끌 떠들기 시작했다.
이런 쓸 데 없는 관심, 이런 거지같은 상황을 멈추고 싶었다. 당장.
"Coldplay - yellow, 이거 연주해 줘."
점점 소란스러워 지는 주변에도 계속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윤지빈에게만 들릴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대부분 아이들이 못들었지만 주변의 몇몇 아이들이 놀란 얼굴로 뒤돌아 나를 쳐다봤다.
"OK, 접수."
한쪽 눈을 찡긋해보이더니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음에 맞춰서 노래를 조용조용하게 불렀다.
교실은 또다시 조용해졌다. 윤지빈의 목소리와 기타 선율만이 조용히 울렸다.
말할 땐 저음이었던 목소리가 노래를 할 때엔 조금 허스키해졌다.
쉽지 않은 노래여서 어디 한번 해봐라는 심정이었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원곡과는 다른, 좀 더 가벼운 느낌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윤지빈이 한곡을 다 부르고 가볍게 감았던 눈을 뜨자
교실은 다시 엄청난 환호와 탄성으로 가득찼다. 몇몇 여자애들은 정도를 지나친 호들갑을 떨었고
남자애들도 약간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담임도 조금 놀란 듯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박수를 쳐댔다.
방금 전까지 나에게 몰려있던 불편한 시선들이 모두 윤지빈에게 옮아 갔다.
그것으로 족하다.
다만 윤지빈의 시선은 아직도 나를 향해 있었다.
Scene 3. YELLOW MARTINI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그 사이 윤지빈은 학교의 유명인사가 되어있었고 많은 아이들이 윤지빈을 보러 반으로 찾아왔다.
보기완 다르게 예의바르고 성실한 모습에 교직원들도 탈색된 머리는 어차피 두발자유인 규정에 어긋나지
않으니까 귀엽게 봐주는 듯 보였다. 공부도 꽤나 하는 지 지난 모의고사에서도 상위권에 들었다.
게다가 사근사근하고 사교성 좋은 성격으로 반 아이들 모두에게 좋은 평을 듣는 듯 했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그저 그아이와 가끔 마주치는 시선이 귀찮을 뿐이다.
놀이터에서도 몇번 마주쳤지만 그 때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다.
윤지빈은 언제나 페인트칠이 벗겨져가는, 색이 바랜 정글짐 위에 늘어지게 앉아 있었다.
더이상 나만의 공간이 아닌 놀이터는 이제는 그저 놀이터일 뿐이었다.
점점 놀이터를 찾는 일이 줄어 들었다.
얼마전 엄마와 이혼한 뒤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던 아빠에게서 4개월 만에 연락이 왔다.
영국으로 이민간다고 했다. 그 때 만나던 여자와 함께 영국에서 평생 살거니까 그리 알라고.
통장으로 넣어 주던 돈도 꼬박 꼬박 넣어 줄테니 먼저 연락하지 말라고.
그리고 내일 떠나는 비행기니까 한동안 계좌 구설하고 하면 이번 달 생활비는
조금 늦게 입금될 거라는 얘기로 말을 마쳤다.
1년 전만 했더라면 나는 악에 받쳐 소리소리를 지르고 엄청난 분노에 못참고 눈물을 터뜨렸겠지만
이제는 담담하게 알았다고 했다. 오히려 가서 잘지내고 행복하게 살라고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전화를 끊고 보니 지난 2년 간 내가 전화를 통해서라도 말을 했던 유일한 대상이 아빠였다.
뭐, 이제는 진짜 입 열 일도 없겠네.
피식하고 한번 웃는데 엄마의 화장대 거울에 얼굴이 비쳐보였다.
엄마없이 혼자 살면서 살이 많이 빠졌다. 자르라고 말해줄 사람이 없으니 머리도 많이 길어 허리까지 왔다.
스스로도 웃는 모습이 너무도 어색하다.
그러고 보니 윤지빈도 영국인데.
거실 쇼파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닥 즐기지는 않지만 일주일에 한갑정도는 피는 것 같다.
기분이 애매할 때 습관처럼 찾게되는 레종.
생각해보니 저번 달 생활비를 전부 썼기 때문에 아빠가 입금하기 전 통장에 잔고는 0원 이었다.
한 달.
집에 쌀도 없고 라면도 없다.
세탁할 세제도 다 떨어지고 섬유유연제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청바지에 남방을 대충 주어 입고 모자를 눌러쓴 뒤
집 앞 사거리에 있는 재즈바로 갔다.
"어서오세- 어? 보리 오랜만이다?"
재즈바에서 알바를 하던 산하 언니가 나를 보자 반갑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여기 알바를 관뒀으면 어떻게 할 지 조금 신경쓰였는 데 다행이었다.
산하 언니는 엄마가 그렇게 죽고 나서 내가 힘들었을 때
아무 말 없이 곁을 지켜준 엄마의 오랜 친구 딸이다.
어릴 적 자주 같이 놀았던 터라 많이 친하긴 했지만 내가 말을 안 하게 된 이후로도
언니는 나를 편하게 대해주는 몇 안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산하 언니에게도 말을 안 한 지 꽤 됐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말을 해야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언니에게 알바자리 없냐고 물어보자 언니는 꽤 놀랐다.
"와- 보리, 너 이제 말 하는거야? 목소리는 그대로네, 헤헤.
음.. 나 내일부터 과외해야 되서 여기 알바 못하는 데 아마 내 자리 채우면 될걸?"
그렇게 몇마디 더 나누고 난 뒤 언니가 사장을 불러왔다.
나이든 아저씨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젊은 여자였다. 산하언니가 대충 얘기를 해 뒀는지
얘기는 금방 끝나서 오늘부터 테이블 정리와 잔 정리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사장도 좋은 사람이었고 주급도 나쁘지 않았고 분위기도 차분해서 그럭저럭 맘에 들었다.
아빠가 이렇게 잠깐 돈 못부친다고 해서 휘둘리기 보다는 여기서 꾸준히 알바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딸랑-
"어서오세요-"
사장과 얘기가 끝나고 탈의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뒤 머리를 묶으며 나오는데 손님이 들어왔다.
재즈 바인 만큼 꽤나 차분한 분위기에 건전한 손님들이 많이 온다고 들었다.
산하언니의 의례적인 인사에 문 쪽을 바라보는데 예상 외의 인물에 나는 굳어버렸다.
"어?"
"..."
"...민보리?"
이제는 익숙해진 저음의 목소리에 노랗게 탈색한 머리와 하얀 얼굴이 보였다.
죄지은 것은 아니지만 왠지 얼굴이 화끈화끈 해져서 바 뒤로 도망치듯이 숨어버렸다.
윤지빈이 여길 왜 오는 거지.
놀이터에 뻔질나게 오는 것을 봐서는 같은 동네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여기는 우리 또래의 아이들이 찾을 만한 바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같이 온 사람들도 옷이나 머리모양을 보아하니 보통 학생처럼 보이진 않았다.
"보리야 왜그래? 아는 애야?"
산하언니가 무슨일인가 싶어 따라들어오며 물었다.
그 사이 윤지빈과 일행은 다른 알바의 안내에 따라 안쪽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아...그냥."
대충 넘기고 주방으로 들어가 칵테일에 들어갈 과일과 올리브를 준비하려는 데 뒤에서 윤지빈 목소리가 들렸다.
"마티니 주세요."
일행은 놔두고 혼자 카운터 테이블에 와서는 뻔뻔스럽게 꽤 독한 칵테일을 시켰다.
조금 거슬렸지만 아무말없이 아까 받은 레시피대로 드라이 진에 리큐르를 따랐다.
옆에 있던 산하언니가 쉐이커를 흔들어서 완성시킨 뒤 다른 손님 주문을 받으러 갔다.
특이하게도 리큐르가 레몬이여서 그런지 약간 노란 빛을 띄는 마티니였다.
잔에 따르고 올리브 두개를 넣은 뒤 윤지빈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서 알바하는거야? 언제부터?"
대답할 필요는 없다.
"말 안하네. 저번에 노래 신청할 때 목소리 좋던데."
휘말리지 말자.
"남자애들이 너 꽤 좋아하던데... 목소리 좀 자주 들려주지 그래. 응?"
윤지빈은 이미 어디서 한잔 했는지 약간 풀려있는 눈으로 전처럼 나를 응시했다.
마티니를 한모금 마시며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매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렀다.
"민보리.. 넌 더 밝아질 필요가 있어... 웃으라고..스마-일."
윤지빈이 나에게 이런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뻔했다.
그저 말을 안하는 아이에 대한 호기심과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친절 혹은 개수작.
"웃으면...참 이쁠 텐데.... 하.. 요즘은 왜 놀이터 안와....."
...
"너.. 혼자 산다며.. 부모님 이혼하고 엄마 돌아가시고.. 혼자.."
시발.
나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주워 들었을 말 지껄이면서
밝아지라느니 예쁘다느니 하고 지껄이는 윤지빈이 거슬렸다.
그래도 말을 섞기가 싫어서 묵묵히 글라스를 닦았다.
윤지빈은 그 사이 마티니 한 잔을 다 비워갔다. 목소리는 점점 가라앉아서
저번에 노래를 불렀을 때 만큼 허스키해 지고 있었다.
"보리야.....나도..그래. 나도 그런데..넌 왜이렇게 틈을 안내줘...응?"
닦던 글라스를 내려놓고 윤지빈을 똑바로 쳐다봤다.
풀린 눈으로 마주쳐오는 시선이 두려웠다.
자꾸만 얽히려 하고 있다.
노랗게 탈색된 머리에 흰얼굴. 까만 눈썹. 까만 동공.
살짝 붉어진 볼과 입술.
평소엔 밝고 명랑해 보이던, 한없이 가벼워 보이던 윤지빈이 다르게 보였다.
그렇게 하하거리고 잘 웃던 입인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서러워 보였다.
"... 다 마셨으면 가지 그래."
점점 테이블에 늘어지려는 그를 응시하며 한마디 꺼냈다.
그러자 무표정하던 얼굴에서 피식하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말......잘 하면서.."
휘말리고 있다.
윤지빈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서글픈 표정에 나도 모르게 답답해져 버렸다.
더이상 쳐다보기가 힘들어 눈을 내리떴다.
아까 닦던 글라스를 다시 닦으려고 집어드는 데 가까이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는 순간 뭔가 따듯한 것이 입술에 닿았다.
두 눈에는 윤지빈의 하얀 얼굴과 감은 두 눈 긴 속눈썹.
그리고 입술에는 윤지빈의 뜨거운 입술.
카운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몸을 일으킨 채로 윤지빈은 나에게 키스하고 있었다.
두 손으로 내 머리와 턱을 감싸쥐고 천천히 입술을 맞대어 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대로 멈춰버렸다.
얼마 뒤 산하언니와 바 매니저가 와서 윤지빈이 나를 놓고 나서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
윤지빈은 그대로 멈춰있는 내 손을 붙잡더니
당황한 산하언니와 매니저를 뒤로 하고 나를 끌고 나왔다.
문밖으로 따라 나왔더니 윤지빈은 앞에 세워져 있던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민보리. 뒤에 타."
이 상황에서 나는 윤지빈 뺨이라도 한대 세게 쳐주고 다시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것이 맞다.
노랗게 탈색한 머리카락이나 발갛던 입술 따위 더이상 꼴도 보기 싫어야 하는데
나는 걸음을 옮겨 그 뒤에 타고 말았다.
얼마 뒤 도착한 곳은 놀이터였다.
바이크를 세우더니 늘 앉아 있던 정글짐으로 올라갔다.
나는 늘 앉던 자리인 낡아서 삐걱거리는 그네에 앉았다.
"갑자기 키스해서 미안."
"..."
"사실 나 너 처음 본 순간 반해버렸거든...음... 민보리 너 진짜 예쁜 거 알아? 하하하..
...근데.. 그렇게 이쁜데.. 완전히 닫혀있더라, 니 마음."
"..."
"힘들었고 지금도 힘들겠지만.....너 상처받고 다치게 될까봐 스스로 두겹 세겹씩 감싸서
아무한테도 니 속내 안내비치는 거잖아... 근데..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주고 받는 거잖아.
우리 엄마나.. 니네 부모님.. 다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니가 뭘 알아."
"..민보리... 사람한테 받은 상처는 사람이 치료하는 거야. 니가 아프고 괴로웠던 흔적으로 남은 흉터들..
내가 낫게 해줄께. 그러니까..... 더이상 상처받는 거 두려워서 혼자 떨고 있지 말고..
나한테 열어줘. 내가 너 사랑하는 거 하나 믿고 이제 그만 열어줘."
"...안 돼."
"....거짓말쟁이."
윤지빈은 앉아 있던 정글짐에서 가뿐하게 뛰어 내렸다.
그러고는 나에게로 다가와 나도 모르게 볼에 흐르던 눈물을 닦아 주며 끌어 안아주었다.
순간, 안겨있는 그 품이 너무 따뜻해서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길 잃고 헤매던 아이처럼
엄마 손이 그리워 우는 아이처럼.
그가 앉아있던 정글짐은
내가 며칠 찾지 않은 새에 노란 페인트로 다시 칠해져 있었다.
Scene 4. 너의 정체는 노랑, 아니 사랑.
너의 정체는 노랑
너는
노랗게 바랜 머리카락
노랗게 칠해진 정글짐
그리고 yellow martini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다가와 언제부턴가 노랗게 스며들던
너의 정체는 노랑, 아니 사랑.
아 또다시 손발이 오그라 드는 소설을 올리고 마는 군요 하하하
새싹 4에서 시작한 소설도 묻히고 있는 마당에
이런 단편의 탈을 쓴 긴 글 나부랭이를 들고오다니
난 참 용감해요.
그래도 이 소설은 어느 정도..음..
열린 결말?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
되도록이면 많은 상황 설명은 안 하려 했어요
여주인공이 닫혀있는 캐릭터다 보니
주변에 별 관심이 없고 뭐 ..중얼중얼
잘하면 남주인공 시점으로 번외 갈수도 있겠지만..
과연?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댓글은 나의 힘.
(관심 좀ㅠㅠ 굽신굽신)
첫댓글 번외번외 손발 안오그라드는데넘재밋어용
뿅님 완전 사랑함 ㅋㅋㅋㅋ전 댓글 먹고 삽니다:-)
감동적이군요..ㅇㅏ..저런남자
ㅋㅋ 그런가요 ㅋㅋ ㅋㅋㅋㅋㅋ 이거 번외 써야 겠네요:-)
재밌어요~!잘보고 갑니다~!
ㅋㅋㅋ 저 번외도 올렸어요 ㅋㅋ 재밌게 보셨다니 좋네요 > <
와~장편으로해도 재밌겠어요 잘보고가용!ㅎㅎㅎ
아이쿠 ㅋㅋ 재밌으셨다니 ㅠ ㅠ 번외도 올렸다지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