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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 전성환님의 좋은 의견에 일련의 댓글로 달아놓은 내용이었는데, 내용 상 하히해님의 글과도 접점이 꽤 있기 때문에 구차하지만 따로 모아서 글로 올립니다.
일단, 임란에서 조선군의 활약 못지 않게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군과 각 부대장들의 행동 및 결단인데, 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은 개전 초기에, 적어도 일본군이 분명히 완전한 승리를 거머쥘 기회가 한 번 정도는 있었다는 점입니다. 바로 평양이지요. 여기에서 대체 일본군은 왜 끝까지 국왕을 추격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애초에 왜 그렇게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점령지를 확대해 나갔을까요? 적어도 숙련된 군인, 경험이 많은 장수라면 그저 빨리 나아가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그리고 그만큼 보급이 중요한 요소임을 모를리가 없는데 말이죠.
이에 대한 의미심장한 주장 중 하나로, 당시 일본 장수들의 전략적 오판을 자아낼만한 요인으로써 일본의 정치/사회환경과 조선의 정치/사회환경의 차이를 지적하는 것이 있습니다.
1. 일본군은 도성의 함락-평양성의 함락 이 두 사건을 "결전 決戰"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일본의 철저하게 분열된 봉건사회는 개별영주 및 영지의 독립성이 강합니다. 애초에 어느 지역에서 큰 전쟁이 발발한다고 해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한 지역 vs. 다른 지역]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한 지역에서 짱 먹고 있는 사람 및 그 수하들 vs. 다른 지역에서 짱 먹고 있는 사람 및 그 수하들]의 싸움이라는 것이지요.
"아니, 본질적으로 모든 전쟁은 다 그런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문장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봉건적 성향이 강한 사회에서의 전쟁은 왠지 모르게 "사전私戰" 의 성격을 띕니다. 이것은 서양의 중세나 일본이나 비슷한데, 근대사회 이후의 국지전이나 전면전, 총력전을 경험한 오늘날의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에 필요한 동원이 국가적으로, 대규모로, 체계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적公的"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매우 익숙합니다.
여기서 '공적'이라고 한다면, 조직적/행정적으로 통합된 국가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전쟁수행의 시스템을 통하여, 병력의 징집, 훈련, 전개, 무기의 생산 및 배치, 보급품의 생산 및 이동 등 전쟁을 위한 모든 요소에 필요한 사회적/물적/인적 자원이 분배되어 활용된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공적인 전쟁수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직력과 행정력이 (그리고 근대적 규모로 쌈박질 하려면 운송/교통편의 발달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봉토별로 분열되어 있는 봉건사회에서는 당연히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아니, 애초에 [하나의 체제, 시스템으로 통합된 국가들간의 전면적 전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개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공동운명체로 모든 국민이 묶여있는 하나의 통합체로써의 국가]라는 개념부터 있어야 하는데, 봉건사회에는 이런 국가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봉건사회에서의 전쟁은 지역 및 국가 단위의 전쟁이 아니라, 인물 vs 인물의 "사적인 전쟁"이며, 병력의 동원, 자원의 분배, 행동 및 거취의 선택 등 모든 면에서 굉장히 "사적"입니다.
서양의 대표적인 경우를 하나 들어보죠.
영-프의 100년전쟁 초중반, 전쟁의 동기는 영국이 주장하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입니다. 그에 대한 영주들의 반응은 "유리한 세력에 붙자"입니다. 프랑스 땅이 영국에 넘어가든 말든, 그딴건 애초에 아웃 오브 안중이죠. 프랑스의 국왕 쟝 2세가 막내 아들인 "용감한" 필립에게, 프랑스 영토의 일부를 영지로 뚝 떼어줘서 생긴게 부르고뉴 공국인데, 떼아주면서 부터 아예 프랑스와는 별개의 나라처럼 행동합니다. 나중에는 아예 헨리5세와 동맹을 맺고 영국 편을 들죠(-_-;). 이런 식으로, 전황에 따라 프랑스 내에 있는 여러 영지의 영주들은 전황의 전개에 따라,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충성의 대상을 바꿉니다.
애초에 봉건영주들의 입장에서는 누가 왕이든 따위 별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국가의 이름이 "잉글랜드 왕국"이든 "프랑스 왕국"이든 또한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국왕의 세력이 강하다면 '프랑스'라는 의미도 없는 이름 때문에 그에 저항하여 영지가 개발살나고 가문이 몰락하고 할 필요가 없잖습니까. 두 왕의 사적인 전쟁입니다.
영국왕이 이겨서 프랑스를 몽땅 다 차지한다고 해도, 어차피 영주들은 프랑스의 새로운 국왕으로, 그 봉건영주들의 총대장으로 영국왕을 섬기면 됩니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스요. 오죽하면, (장차 샤를르 7세가 될) 프랑스의 왕태자가 "이 프랑스 땅에서 내 봉신보다 영국왕의 봉신이 더 많다규;;; ㅠㅠ" 면서 절망을 했겠습니까.
이런게 소위 봉건사회의 전쟁의 "사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는 일본사회에도 매우 비슷하게 전개가 됩니다.
전국시대에서의 전쟁의 양상은 매우 극적이고 비장한데, 이게 뭔가 전쟁이라는게 "코시엔 토너먼트"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코시엔 고교야구대회는 토너먼트 방식이고, 어느 팀이든 전승을 해야만 우승을 합니다. 그 도상에서 단 한 번의 패배만 있어도 토너먼트 탈락이죠. 전국시대도 뭔가 비슷한데, 소규모 접전은 매우 일상적이라 온 나라가 상시적인 전쟁상태에 있지만, 그래도 일단은 작은 충돌을 제외하고는 서로 숨을 죽이면서 엄청나게 군비를 쌓아나갑니다.
그러다가, 뭔가 한 방... 단 한 방의 큰 싸움 -- 즉, 최종적인 결단을 통해 나오는 합전: "결전決戰"이 발생합니다. 이 "결전"이라는 단어, 오늘날에조차도 일본인들이 무지하게 좋아하는 단어지요. 이런 "결전"은, 그 말 그대로, 일단 거기에서 대패를 당하면 당시 일본의 환경에서 "권토중래"를 꾀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다시 몇 번이고 싸울 수 있는게 아니라, 말 그대로 단 한 번의 결단으로 단 한번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최고최종의 전투인 것이지요.
전국시대의 일본 또한 서양의 중세와 비슷하게 통합된 국가로써의 틀이 전무한 지경이고, 통합된 국가적 정체성을 지닌 행정체계가 아니라 독립된 영주들이 위계적/수직적 권위에 따라 상징적으로 복종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일단 한 번의 결전에서 패하면 그것으로 전국의 향방이 바로 가려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패배자는 항복을 하든, 사로잡혀 처형을 당하든, 스스로 배를 가르든간에 어쨌든 멸망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뿐이지요. 영주에 따라서는 봉신들에게 공포의 존재같은 사람도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드문 예 -- 봉신에 대한 영주의 통제력은 결코 강하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전국시대의 영주들에게 있어서 큰 전쟁이란 곧 "決戰" 이며, 또한 "結戰"이 되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패하면 당장 봉신이니 맹우니부터 바로 등을 돌리는 것이 예사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세력권이, 그냥 전쟁 한 방에 바로 무너지고 와해됩니다. 패한 영주기 적지도 아니고 자기 영지 안에서 도망가다가 자기의 (배신한) 봉신에고, 혹은 자기의 농민들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다면, 당대 일본 장수들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의 전쟁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하여 조선에서의 전쟁을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일본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했다고손 쳐도, 결국에는 조선을 하나의 커다란 쿠니, 조선의 왕을 하나의 큰 다이묘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전쟁 초기에 소위 '전격적'에 가까운 속도로 진군하여 도성을 함락하고, 조선반도 남쪽의 상당한 권역이 일본의 통제 아래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허술한" 그들의 대처가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됩니다. 결전사상에 입각한 전국시대의 전쟁은 몇 년이고 오래 동안 싸우는 경우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단기결전입니다.
단 한 번의 결전에서 최대한의 성과와 최대한의 패배를 적에게 안겨주기 위해서는 신속하게 기동하여 우선 야전에서 적의 주력을 무너뜨리고, 이후 패주하는 적을 좇아 적의 지성과 주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적의 영주가 더 이상 싸울 능력도 없으며, 믿고 따를 수 있는 모든 권위가 실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면 그것으로 싸움은 끝이니까요. '흙먼지를 일으키며 되돌아 오는" 그런 환경이 아니니, 그것으로 적의 백성도, 적의 병사들도, 적의 영주조차도 모든 싸움이 끝나고 어떠한 희망도 없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놀랍게도, 이러한 성향은, 국민국가로 전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미군이 진주한 일본에서조차 보이는 듯 합니다...)
개전 첫 해에 동래성의 관문을 박살내고 쳐들어와서, 미친 듯한 속도로 조선반도 남부의 권역을 장악하고, 두 갈래의 군대가 서로 경쟁하듯 북상하면서 가장 중요하고 거대한 두 도시인 한양과 평양을 점령했다는 것은, 아마 당대 일본 장수들의 생각으로는 "결전에서의 결정적 승리"에 해당하는 사건이었을 듯 싶습니다. 일본으로 치면 주된 공략대상으로의 공격루트 상의 수 많은 지성이 대부분 함락되었고, 다이묘의 근거지인 주성 또한 함락당하였으며, 영주는 결국 패주하여 어딘가로 도주한 상황인데, 일본 전국시대의 예를 따른다면 이 시점에서 이미 전쟁은 끝난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남부의 도는 일본이 장악하였고, 지성에 해당하는 여러 고을 및 읍성 등 또한 함락되었고, '다이묘'에 해당되는 국왕은 도주하였으니 응당, 조선의 백성들도, 조선의 병사들도, 조선의 각 고을 수령등도 완전한 패배를 자인하고 항복해오는 것이 순리였을 것입니다. 적어도, 왜장들의 생각에서는요. 국왕의 운명은, 대체로 전쟁에서 패하여 도주하던 영주가 맞이하는 운명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였으니 굳이 거세게 북방까지 추격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스스로 항복해오거나, 자살하거나, 누군가 배신자가 잡아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 '결전'에 대한 전국시대 일본인들의 경험은 매우 흔하고, 매우 극적이며, 매우 비장합니다. 전국시대의 흐름은 그야말로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영주들 사이에서 결전에 결전을 거듭하는 싸움이었으니까요. 작은 영주들끼리의 결전으로 보다 큰 영주가 탄생하고, 그런 영주들끼리의 결전으로 거대한 전국다이묘가 출현하고....
전국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오다 노부나가 또한 오케하자마 결전으로 일어서서 결전을 거듭하며 거대한 다이묘가 되었고, 그 오다가 몰락한 후 야마자키의 결전 한 방으로 미츠히데가 몰락하고 히데요시가 부상했으며, 이후 시즈카다케의 결전 이후 오다의 중신 시바타 카츠이에 또한 몰락, 토요토미의 천하가 되었고,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의 결전 한 방으로 이에야스의 시대가 되었으며, 오사카성에서의 최후결전으로 함락으로 토요토미 세력은 완전히 절멸되었고... 이런 "決戰"을 수 없이 마주한 일본 장수들이 개전초기, 조선과의 전쟁에 대해 어떤 인식을 하였는지 매우 흥미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당대 유교 및 동아시아 관료제/행정조직의 본좌였던 조선인의 "忠"과 봉건사회 일본인들의 "忠"
그런데, 일본 장수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였다면, 그것은 결정적인 전략적 실수였을지도 모릅니다. 조선은 봉토를 중심으로 운용되는 봉건국가가 아니거든요. 근대국가 레벨로 "국가"와 "국민"에 대한 관념이 존재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조선은 사실 중국보다도, 일본보다도, 서양의 어느 국가보다도 공동운명체로써 "나라"의 개념이 강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면에서 그것은 (일부 사람들이 그토록 까는) 유교가 이룬 최대의 성과라고 할 수도 있지요. 漢代 이후 법가의 정신이 상당히 가미되어 혼합된, 현실적 통치체제로서의 유교적 질서는 동아시아에서 매우 강력하고도 효율적인 통치이념이 되었고, 그 통치이념으로써 잠재력을 강력하게 발휘한 것은 중국보다도 오히려 조선에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선의 체제에서는, 백성을 통치하고 교화하는 중심적 존재로써 국왕이 존재하고 있고, 그 국왕을 보좌하는 조정의 신료 및 수하의 관료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한 "조선"이라는 국가 또한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유교적 통치시스템이 그토록 강력할 수 있는 이유는, 개별가정에서의 "孝"가 가부장 아래의 가족의 매우 끈끈한 유대와 단결을 이끌어내었고, 그 "孝"의 원리가 보다 큰 개념으로써 "忠"이 되어 국왕에 대한 백성의 유대와 단결을 이끌어내었으며, 그러한 백성의 경애와 충성의 대상으로써 왕과 사대부는 "仁"과 "禮" 로써 백성을 대접해야 하며, 이렇게 위로 올라가는 충과 효, 아래로 내려오는 인과 예는 곧 "義"를 통해 하나로 묶이니 그것이 곧 하나의 "나라"를 이루는 근본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리즈 시절의 조선에서는 양반 사대부와 국왕이 백성에 선정을 베푸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어기며는 국왕이라도 개발살날 수 있는 막대한 의무"로 받아들여졌으니까요,
이러한 엄청나게 강력한 이념을 통해 조선은 굉장히 강력한 관료제 및 행정체계를 자랑하고 있었고, 이는 개전 초기에 불타는 개가죽마냥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 일본에 장악된 지방에서 전령이 평양, 의주까지 올라와서 보고를 하고 장계를 올리며, 굵직한 패배가 연속되는데도 패잔병이 그대로 다시 모여 군대로써 되살아나고 (그리고 그 때 마다 경험치를 쌓아서 레벨업까지....;;;;), 한 때 중앙의 통제가 끊어진 것만 같았던 상황에서 의병과 관군이 자발적으로 행동을 개시함에도 불구하고 꽤 수준높은 역할분담 및 연계가 가능할 정도로 현장조직체계까지 움직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됩니다. 당장 칠천량에서 그런 패배를 당해서 조직 자체가 다 와해되었는데도 이순신을 구심점으로 명량에서의 기적을 연출한 이후에는 불과 몇 달 내로 해군이 재조직되었으니, 기본적으로 행정력과 조직력이 살아있는 한 읍이니 도니 성이니 몇 개 함락되고 왕이 거처를 옮긴 정도로는 싸울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는거죠.
그리고 그 의지를 뒷받침하는 당시 병사들의 근본이념은 곧 "忠" 이었습니다. 조선은 [국왕에 대한 직접적인 대상을 향한 "忠"]과, 하나의 개념인 [나라에 대한 백성의 "忠"]이 서로 괴리되지 않도록 단단히 봉합하여 통합시킬 수 있는 이념체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 개인에 대한 충성과, 나라에 대한 충성이 괴리를 일으켜, 백성이 그 양자가 서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는 혁명으로 이어집니다;;) "나라의 녹을 받는 사람으로써 외적과는 결코 같은 하늘을 이지 않겠다"라는 식의 결연한 의지가 살아있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적어도,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전함이 남아 있습니다 ... 신이 살아있는 한 적은 결코 업수이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레벨로 끝까지 저항함을 결의하는 충의는 당시 일본인들로써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애초에 일본의 "忠"의 개념은 그와는 전혀 달랐거든요.
전국시대의 "忠"은 지역을 제패한 개인, 인물에 대한 "忠"이며 매우 강렬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에 불과했으니, "사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사적인 성격"의 봉건제 답게, 그 "忠" 또한 매우 사적인 조건에 따라 좌우됩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사적인 "忠"이라는 것은 온전히 "忠"이라기 보다, 개념적으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리 -- "의협심" -- 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그러한 의리 또한 그나마 그 인물 1대에 머물러있지, 그 사람 죽으면 충의건 의리건 뭐건 바로 다 와해되고 그 때 마다 권력싸움을 펼치던 환경을 보아온 (그리고, 그런 정치적 지변의 변화와 함께 섬기는 영주를 무수히 바꾸면서 생존해왔던) 장수들에게는 각 고을의 수령이며 지휘관이며 다 도망가고, 국왕도 도성에서 튀고, 전쟁의 향방은 명백히 조선에 불리해 보이는데 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위한 "忠"으로 의병이며 관군이며 그토록 저항을 하는건지, 아마 이해하기 쉽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일본에서 조선과 같은 "忠"의 개념은 에도막부가 들어선 이후 매우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서서히 진행되어 갔으니까요.
3. 생각
임진왜란의 싸움은, 어느 측면에서는 군사력의 충돌인 동시에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신념과 체제의 충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문약"한 조선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쌓아온 시스템의 "내공" 및 그걸 뒷받침하는 신념체계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지요.
임진왜란에서 일본의 침략군은 봉건체제 아래서 100년 넘도록 쌈박질하던 나라에서는 어떻게 싸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실로 가공할 침략이었지요. 반면, 임진왜란에서 조선은, "평화의 단 잠에 빠져있던 나라"라는 것이 (흔한 대중적 상상과는 달리)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 그 평화를 가능케한 체제와 시스템의 저력이 얼마나 막강한건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전자의 장점은 즉물적이고 화려하여 알아보기 쉽습니다. 후자의 장점은 매우 내면적이고 치밀하여 쉽게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후자야말로,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게 아니다"라는 금언에 보다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만 초기의 일본군의 빠른 진격은 아마 이러한 이념과는 별개의 문제로 그 당시 일본군의 입장에서 최선의 전략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어느 나라이든 나라의 지휘부는 결국 조정이기 마련이며, 이런 지휘부에 대한 타격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도 전쟁에 있어서 핵심적인 전략이니 말이죠. 만약 일본이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면서 천천히 진격했다면, 한성에 있는 조선의 조정이 초기 기습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 제승방략 정책에 따라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군대를 모아서 실제 역사보다도 훨씬 더 조직적인 저항을 했으리라 추측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으로서는 정말 피하고 싶은 상황이죠.
오오 이렇게 또 배워갑니다 냠냠
따라서 신속한 진격에 따라 후방이 좀 불안해지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한성으로 빠르게 진격해서 조정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쪽이 일본군에게는 보다 좋은 상황이겠죠. 물론 조정의 기능이 '마비' 되었다는건 선조가 의주로 몽진을 가서 그 곳에서 자리를 잡기 전까지를 말합니다. 또한 일본군 역시 '보급' 이 중요한 요소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걸 해결할 방법도 있었습니다. 배를 이용해 서해쪽의 항구를 통해서 보급을 하겠다는 전략이죠. 만약 이게 현실로 일어났다면 임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ㅠ.ㅠ 허나 모두가 알다시피 조선에는 먼치킨을 넘어서 '사기' 수준의 수군장군이 하나 있었죠. ㅎㅎㅎ
결국 일본군의 초기 전략이였던 신속한 진격의 '편익' 인 초기 기습효과와 지휘부의 기능 마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고 일본군의 (아마도) 예상을 뛰어넘는 후방 의병활동으로 인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점 감소했을 것이고, 반대로 신속한 진격의 '위험' 인 보급불안은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전혀 계산 밖인 해전에서의 패배와 마찬가지로 계산에서 벗어난 의병활동으로 원래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한 의주까지 진격하지 못한 이유에는 아마 명나라를 의식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100% 추측이긴 합니다만, 평양과는 달리 의주는 명나라와도 국경을 맞댄 지역이니 만치 그 곳까지 일본군이 밀고 들어오는 것은 명나라 입장에서도 두고 볼수만은 없는 일이겠죠. 물론 토요토미야 명나라까지 진격할 꿈을 꾸었다지만 이건 일본군 장수조차도 믿지 않는 혼자만의 망상에 불과했고, 일본군 입장에서는 명나라를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성 때문에 조선의 조정을 아예 조선의 국경너머로 몰아내버릴 수 있는 매력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차마 진격할 수가 없었겠죠.
잘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글입니다.
좋은 글입니다. 깔끔하게 잘 정리하셧군요.
쓰느라 고생좀 하셧을듯요.
아 댓글이 달렸다고 새소식 올라와있던게 이글때문이었군요 잘봤습니다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일본의 패인은 결국 왕을 못잡아서 인듯 합니다.;
장기에서도 결국 왕 못 잡으면 게임이 안끝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