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영 찬
수업이 일찍 끝난 한적한 오후 별로 할 일도 없어서 캠퍼스 벤치로 나왔다. 교정의 해당화는 무르익은 봄날을 빛내듯 붉게 앞 다투어 피어나고 낯익은 역사과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캠퍼스를 주름잡듯 오늘도 푸근한 이야기로 지루함을 달래준다. 인연이 깊은 B와 여학생들과 어울려 세상을 이야기 하고, 보시시 피어나는 청춘을 노래하다 시간이 한참 흘러 느릿느릿 집으로 가다 보면 나중에는 집 방향이 같은 B와 명애와 나만 남았다. 어린 명애는 조용하지만 가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잘 하여 호감이 가는 아가씨라 B와 몇 번 그녀의 자취방에 가 놀다오곤 하였다. 그러나 인연은 아닌지 우리들과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은 시집도 안가고 대전에서 꽃집을 한다는 이야기만 생전의 B한테서 어렴풋이 들었다. B는 가까운 인척인 데다 중학시절 자취하면서 연애를 하다 보니 지능이 우수함에도 명문고에 떨어져 할 수 없이 청주에서 나랑 같이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래도 B는 고교시절에는 열심히 공부를 한 덕분에 성적이 잘 나와 역사과를 수석으로 들어가 가끔 학교도 같이 가곤 하였다.
그러나 인생에서 제일 즐겁고 낭만적인 대학시절은 화살같이 빠르게 흘러 7년 후 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그래서 취직을 위해 B와 함께 순위고사를 보려고 강원도 교육청이 있는 춘천으로 가기 위해 비둘기호를 타고 씽씽 달려갔다.. 다음 날 시험을 잘 치러 3월에 발령이 나 나는 태백시로 향했고, B는 학원 강사를 하다 한 학기를 더 쉰 후 10월에야 첩첩산중인 최전방 인제군 기린중으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5공 시절 인제군은 군인세상이라 정말 말조심해야 하는 곳인데 B는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한 것 같다. B는 대학시절에도 가끔 시국발언을 해 토론하기를 즐겨하곤 했다. 그날도 중학생 역사 수업 중 정치이야기를 잠간 한듯 싶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여기서야 별 문제가 안 되겠지만 5공 초기인 데다 그곳은 군인 자식이 많은 학교라 단번에 보안대에 그 내용이 보고되었을 것이다. B는 보안대에 즉시 끌려갔고 아마 그곳에서 고문을 당한 뒤 직장도 해임된 듯하다. 물론 자존심 강한 B는 정신이 흐릿해진 뒤에도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아 짐작을 못 했는데 다른 친구가 우연히 그런 이야기를 해주어 겨우 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B는 학교에서 해임된 뒤 학원에 들어가 열심히 강의하여 돈도 잘 벌고 통신공사 다니는 여자와 결혼도 하여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그런데 10여년 후부터 고문 후유증이 서서히 나타나 학원에서 밀려나고 집에서도 인정을 못 받는 지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면 돈이 없다고 종종 신세한탄을 했다. 말하는 것은 전과 별 차이가 없는 데 직장생활을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불쌍해 측은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전에는 친척들이 모이면 ‘고스톱’도 잘 쳤지만 언제 부턴가 구석에 앉아 물끄러미 쳐다만 보다 꾸벅꾸벅 졸기만 하여 뇌에 이상이 왔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 몇 년 후 B의 형이 너무 불쌍하다며 충주로 데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활달한 사람을 누가 저렇게 만들었을까, 분노도 치밀면서 한편 그것도 팔자려니 생각하니 문득 가엾어졌다. B는 말년을 대우도 못 받고 비참하게 살다 갑자기 뒤로 넘어져 50 문턱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친 뒤 이곳 공원묘지에 묻혔다.
세월이 한참 흐르니 별안간 친구 생각이나 차에 올라 가까운 공원묘지를 향해 달려간다. 언덕을 오르니 시원한 바람은 머릿결을 넘어 숲으로 숲으로 줄달음쳐 날아오르고 산새들은 그 위에서 축제라도 즐기듯 짹짹 거린다. 파아란 잔디를 밟으며 비탈진 곳을 오르려니 무수한 주검들이 묵묵히 누워있다. 묘비들을 보니 아직 살아서 한창 일할 나이인데 벌써 이곳에 와서 쓸쓸하게 문지기처럼 산을 지키고 있는 많은 무덤들이 안타까워진다. 나라도 오래 살아서 저 사람들이 못다한 꿈을 대신 이루어 주고 싶다. 비탈길을 한참 올라 외진 곳에 이르니 B가 조용히 잠들어 있는 묘지가 나타난다. 친구가 평소처럼 벌떡 일어나 특유의 달변을 쏟아 내면서 커피 한 잔을 마시자고 할 것만 같다. 곱게 자란 잔디를 손으로 헤치며 무덤 앞을 촉촉하게 커피를 뿌려주자 무심한 개미들만 모여들며 허무감만 진하게 안겨준다. 소식통 B가 생전에 가끔 놀러오면 명애를 비롯하여 친했던 역사과 친구들 이야기도 듣곤 했는데 이제는 그 친구가 가버려 전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무심한 세월은 잘도 흐르니 젊은 시절의 아쉬운 인연만 문득문득 스쳐 지나갈 뿐이다.
첫댓글 '교정의 해당화는 무르익은 봄날을 빛내듯 붉게 앞 다투어 피어나고 낯익은 역사과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캠퍼스를 주름잡듯 오늘도 푸근한 이야기로 ,,,,,'
안타까운 추억입니다. 잘읽었습니다.
곱게 자란 잔디를 손으로 헤치며 무덤 앞을 촉촉하게 커피를 뿌려주자 무심한 개미들만 모여들며 허무감만 진하게 안겨준다. 소식통 B가 생전에 가끔 놀러오면 명애를 비롯하여 친했던 역사과 친구들 이야기도 듣곤 했는데 이제는 그 친구가 가버려 전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무심한 세월은 잘도 흐르니 젊은 시절의 아쉬운 인연만 문득문득 스쳐 지나갈 뿐이다.' 감상 잘하고 갑니다. 건필하십시요.
급하셨나봅니다. 일단 제목과 작가의 성명은 올려주신다음에 글을 써야 독자에게 예의를 다하는 줄 압니다.
격식은 아니지만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 세월이 한참 흐르니 별안간 친구 생각이나 차에 올라 가까운 공원묘지를 향해 달려간다. 언덕을 오르니 시원한 바람은 머릿결을 넘어 숲으로 숲으로 줄달음쳐 날아오르고 산새들은 그 위에서 축제라도 즐기듯 짹짹 거린다. 파아란 잔디를 밟으며 비탈진 곳을 오르려니 무수한 주검들이 묵묵히 누워있다."
'친구가 평소처럼 벌떡 일어나 특유의 달변을 쏟아 내면서 커피 한 잔을 마시자고 할 것만 같다.
곱게 자란 잔디를 손으로 헤치며 무덤 앞을 촉촉하게 커피를 뿌려주자 무심한 개미들만 모여들며 허무감만 진하게 안겨준다...'
소설같은 이야기인데 현실이라니요...
격동의세월을 살아온 지식인들의 안타까운 희생에 이아침 가슴이 아립니다.
맞습니다. 선생님 산자들의 몫은 우리라도 오래 살아서 저들의 못다한 꿈을
이루어드려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좋은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