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일어나 바다를 향해 달음질치던 절박한 발길을 끊고 날마다 세상이 요구하던 절대 교양을 끊고 쓸쓸하고도 쓸쓸한 장난감 네게 쓰던 분홍색 편지를 끊고 눈뜰 때마다 하루하루 증발하는 향긋한 생의 온기를 끊고 아득해지고 초라해지는 물거품 같은 나를 끊고’
- 김상미 詩『까치밥』
- 시집〈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문학동네 | 2022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말이다. 오가며 듣게 되는 캐럴과 이곳저곳에서 반짝이는 장신구들 덕분에 새삼스러워졌다. 얼마 전 뵈었던 한 선생님은 “세월 가는 속도를 이제는 포기했어.” 하셨다. 초탈해버린 듯한 그의 표정이 자주 떠오른다. 나도 저와 같은 표정을 짓게 되겠지, 싶기 때문이다.
서점 문을 닫은 늦은 시각. 노트를 하나 발견했다. 저것이 무얼까.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장 알아챘다. 작년 말 구입했던 스케줄 다이어리. 잊고 있었네. 겸연쩍어 하면서 꺼내어 펼쳐 보았다. 먼지가 쌓인 그것은 일월 자리만 빼곡할 뿐 새것과 진배없었다. 다시 쓸 수도 없으니 아깝다. 지키지 못한 다짐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씁쓸해져서 빈칸의 형식으로 남아 있는 지난날을 넘겨보았다. 내게 이렇게 많은 날이 주어졌었구나. 대체 무얼 하고 지낸 것일까 나는. 공연히 부아가 치밀어, 다신 다이어리를 사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한 해가 간다는 건 새해가 온다는 의미가 아닌가. 작년 연말 저 다이어리를 사면서 세웠던 목표, 다졌던 각오, 느꼈던 설렘이 과연 허튼 일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건 너무 가혹한 생각이 아닐까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버릴 것은 버리고 끊어낼 것은 끊어내되, 기대할 것. 더 나아질 것. 그런 의미에서 새 다이어리를 구해볼까. 그전에 내던지듯 폐휴지함에 담았던 다이어리를 꺼내왔다.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고 월왕 구천의 쓸개처럼 삼을 작정으로.
〈유희경 시인·서점지기〉
You Raise Me Up R. Lovland · Melissa Venema - Trump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