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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호로고루(漣川 瓠蘆古壘)
연천2경 : 임진강변에 쌓은 고구려군의 요새 호로고루
대한민국의 사적 제467호
1. 개요
2. 조사 내용
3. 역사
4. 관련 유적
5. 사적 제467호
1. 개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에 위치하는 고구려 보루. 사적 제467호. 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여담으로 이름이 호로인데 임진강이 옛날에는 호로하(瓠瀘河)라고 불렸기 때문에 호로하에 있는 오래된 보루라는 뜻으로 호로고루라고 불리게 되었다.
2. 조사 내용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서 1990년대부터 2014년, 2016년에 걸쳐서 조사한 고구려의 보루이다. 평면 이등변삼각형의 구조를 띠고 있는데, 사실 성벽이라고 말할 만한 건 동벽 단 하나뿐이다. 나머지 북쪽과 남쪽의 벽은 임진강, 한탄강의 용암절벽 그대로를 성벽으로 삼아서 공력을 줄였다.
대체로 토축이 주된 성벽의 구성방식이지만 일부구간에는 외면에 석축으로 보강한 곳도 있다. 또한 토축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토축 가운데에 석축으로 심주를 둔 방법을 택하였다.
성 내부는 평탄한 지대로 감시초소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주혈건물지와 고구려 때의 생활의 흔적, 그리고 고려시대의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고구려의 연화문 와당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장군총에서 나오는 와당부터 평양성에서 나오는 와당과 닮은 것이 많아서 호로고루의 중심적 운영연대는 역시 5세기대의 고구려 남진 정책의 산물로서 파악되고 있다.
고구려의 와당은 관아가 있는 건물에만 쓰였다라는 기록을 통해 볼 때, 이 임진강, 한탄강 대치라인에서 호로고루가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추론하게 해주는 자료이다.
호로고루처럼 이등변삼각형의 평면형태를 보이는 보루들은 덕진산성(확인 要), 은대리성이 있다. 모두 와당이 나오는 거점 보루이다. 이 거점 보루들 간의 거리는 비교적 등간격이고 그 주변으로 더 작은 보루들이 임진강, 한탄강을 따라서 펼쳐져 있는데 농담이 아니라 거점보루를 대대본부, 작은 소형보루들은 작계 진지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또 이 거점 보루들의 특징으로 도하(徒河), 도섭(徒涉)이 용이한 지점에 설치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지금 현재 고구려 보루들이 그러한 입지에 보루를 설치하였다는 것은 주도권을 잡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런 전략적 입지선택을 바탕으로 고구려가 효과적으로 임진강, 한탄강 전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흙으로 만든 북이 출토되었다. 북 조각에는 '상고(相鼓)'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보이던 북으로 추정된다.
3. 역사
광개토대왕의 남진 사업과 그를 계승한 장수왕대의 남진은 475년 일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데까지 성공한 계획적인 진출이었다. 단계적으로 그 구분이 나뉘는데, 1. 황해도 일대의 점령, 2. 임진강·한탄강 유역 진출, 3. 양주 분지 진출, 4. 아차산 일대 진출, 5. 한성 공략의 과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 대의 남진으로 황해도 일대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황해도 일대에는 구월산성, 장수산성 등의 대규모 포곡식 산성을 건설하여 통치 거점으로 삼았다. 이를 발판으로 임진강 일대에 전선을 형성하는 데에 성공한 것으로 이 임진강 일대의 보루군들은 그러한 과정의 증거이다. 임진강 권역 아래의 고구려 보루들은 모두 여기 임진강 유역의 거점 보루만큼 크지 않다. 되려 연천 무등리 보루처럼 비교적 소형인 형태로 주로 구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치 현대의 군대 편제 마냥 사단 - 대대 - 중대 및 각급 소대 진지와 같은 구성으로 아차산까지 진출한 끝에 목표 대상인 풍납토성 및 몽촌토성을 점령한 것이라 보면 될 것 같다.
한편 이 고구려 보루들은 남진의 성공으로 필요가 없어진 뒤 몇몇 주요 거점들에 한해서만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었고 추후 신라 진흥왕대에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에 즈음하여 다시 대 신라 방어선으로 재활용된다. 지금도 임진강에는 고구려 산성과 신라 산성이 대치하는 구도 그대로 발굴되는 양상이다.
4. 관련 유적
남한의 고구려 관련 성곽 유적
남한 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은 산성과 고분군으로 나뉜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 유적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남한엔 거의 없다고 보았었으나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점차 그 알려지게 되었다. 남한 내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의 편년은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반경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역사적 맥락으로도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따라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5. 사적 제467호
문화재청 홈페이지: 연천 호로고루 (漣川 瓠蘆古壘)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효종 7년(1656)에 편찬된 『동국여지도』 이며 이책에는 호로고루가 삼국시대의 유적임이 명시되어 있고 최초의 학술조사 기록은 1919년에 발간된 『조선고적조사보고』이다. 이 보고서에는 도면과 함께 사진을 싣고 있으며 삼국시대 성으로서의 중요성이 기술되어 있다. 그 후 1991년부터 2003년 사이 본격적인 학술조사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의 형태는 북동쪽에서 남서 방향으로 흐르는 임진강에 접한 현무암 천연절벽의 수직단애 위에 있는 삼각형의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성벽의 전체둘레는 성의 가장자리를 따라 재었을때 약 400여m이고, 그중 남벽은 161.9m, 북벽은 146m이며, 동벽은 현재 남아있는 부분이 93m이고 성내부는 전체적으로 해발 22m, 성벽 최정상부는 30m 정도이다. 성벽 중 가장 높은 동벽 정상부와 서쪽 끝부분에는 장대(將臺)가 설치되었으며, 성으로 진입하는 문지는 동벽 남쪽을 제외하고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천호로고루는 연천당포성, 연천은대리성과 함께 임진강과 한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하는 삼각형의 대지위에 조성된 독특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으로 임진강이 국경하천역할을 했던 삼국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귀중한 문화유적이다.
[이기환의 Hi-story](51)북한군과 고구려 기마병의 공통점, 연천 호로고루
주간경향 2024.01.01~07.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지난 주말에 경기 연천 장남면 호로고루 주변에 심어놓은 해바라기를 실컷 보고 돌아왔습니다.
6만송이의 해바라기밭에서 연신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관람객들로 북적댔습니다. 오는 10월 4일까지 열리는 행사가 ‘통일바라기 축제’인데요. ‘해만 바라보고 돈다’는 해바라기를 따서 ‘통일바라기’, 즉 ‘통일을 바라는 축제’라 한 겁니다.
참으로 절묘한 작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다른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연천이 북한과의 접경지역이니까, 판에 박힌 발상에서 ‘통일’ 자를 붙인 것이 아니냐고요.
해바라기와 통일바라기 축제
호로고루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되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호로고루(瓠瀘古壘)’, 그 이름부터가 낯설죠. ‘호로’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임진강의 구간 이름인 ‘호로하’에서 따왔고요. ‘고루’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옛 보루’를 뜻하죠. 보루가 있었다면 엄청난 요충지였겠네요.
임진강과 한탄강은 강원 평강 오리산·검불랑 등에서 분출한 용암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하천인데요.
용암이 굳어져 생긴 현무암 지대를 따라 형성된 높이 10m가 넘는 두 강의 단애가 상류부터 끊임없이 펼쳐져 내려옵니다.
그중 두 강의 합류지점(연천 전곡 도감포), 칠중하(파주 적성 구간), 호로하(연천 장남면 구간) 등은 깎아지른 단애가 없고 수심마저 얕아 쉽게 건널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점입니다. 이중 호로하가 도보로 건널 수 있는 마지막 구간이었습니다.
이 호로하에서 약 500m 하류 쪽으로 가면 한국전쟁 이전까지 번성했던 고랑포구가 있었습니다. 서해안에서 거슬러 올라온 조기·새우·소금 배들이 파주·연천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던 콩·땔감·곡물 등과 교역한 포구였죠. 그러니 고랑포~임진강 하류~서해안 구간은 수심이 깊어 사람이, 혹은 기마부대나 전차부대가 건널 수 없죠.
북한군의 남침로, 무장공비 침투로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북한군의 주력 전차부대가 개성~문산이 아니라 20㎞나 우회한 곳이 호로하와 칠중하 쪽 임진강 구간이었습니다. 1968년 북한군 특수부대의 1·12사태 침투로가 이곳에서 멀지 않고요. 1974년 발견된 고랑포(제1) 땅굴도 8㎞가량 북동쪽에 있습니다. 장마철이 아니면 수심이 무릎까지밖에 올라가지 않는 곳이니 호로고루 부근을 침투로(남하로)로 삼은 겁니다.
예전에는 어땠을까요. 지형이 바뀌지 않은 이상 마찬가지였겠죠.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를 경영하려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요충지였습니다. 호로하, 즉 호로고루 부근은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누린 백제의 영역이었을 겁니다.
최근 호로고루 인근의 파주 적성 육계토성이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 축조된 백제성이라는 발굴성과가 나왔는데요. 생긴 것도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과 닮아서 ‘리틀 풍납토성’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개풍 장학리(북한)~연천 횡산리~삼곶리~삼거리~우정리 1·2호분~동이리~학곡리 적석총 등 기원후 1~2세기에 축조된 백제 적석총이 8기나 확인됐습니다.
그러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부터 이 땅은 고구려 영역으로 바뀌죠. ‘광개토대왕비문’에 따르면 396년(광개토대왕 5) 남침작전을 벌인 고구려가 58성 700촌을 빼앗고 ‘백제왕을 영원한 노객(奴客·신하)으로 삼은 뒤’ 돌아왔습니다.
고구려는 천자, 백제·신라는 제후?
<삼국사기> 등에는 기록되지 않았는데요. 475년(고구려 장수왕 63·백제 개로왕 21)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남침로도 바로 이 호로하와 칠중하 쪽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그랬듯 호로고루 쪽이야말로 고구려 주력인 기마병 부대가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었을 테니까요.
고구려군은 이후 동두천~의정부~상계동 등을 거쳐 아차산에 이르렀고 한강을 건너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을 7일간 공격한 끝에 함락시켰을 겁니다. 그 루트를 따라 조성된 38곳의 고구려 보루 및 성이 고구려군의 남하 과정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이 고구려 성과 보루는 대부분 둘레 400m 안팎의 소규모인데요. 여기서 고구려의 점령지 통치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행정관을 둬 점령지역을 다스리고, 조세를 받는 형식이 아니라 전진·후퇴의 루트만을 확보했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396년) 광개토대왕이… 백제왕을 영원한 노객으로 삼고 돌아왔다”는 ‘광개토대왕비문’이 눈에 띄는데요.
또 “475년 한성 함락 후 백제 문주왕(재위 475~477)이 신라가 보낸 원군 1만명과 함께 돌아와 보니 고구려군이 이미 물러갔다”는 <삼국사기> ‘문주왕’조도 주목거리입니다. 5세기 말에 작성된 충주 고구려비문에 “고려 태왕이 신라 매금(왕)과 (더불어) 세세토록 형제와 같이(如兄如弟)… 화합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렇게 5~6세기 전반 남진정책을 펼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노객’ 혹은 ‘형제국’으로 삼은 뒤 장기간 점령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것이 심상치 않답니다. 이 때문에 만주벌판을 호령한 고구려가 스스로 황제국을 칭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백제·신라까지 조공국가, 즉 제후국으로 삼았다는 유력한 해석이 등장한 겁니다.
대식가였던 고구려군의 ‘짬밥’
4세기 말까지 백제, 그리고 5~6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의 ‘리즈 시절’을 상징하던 임진강 유역은 553년(신라 진흥왕 14) 다시 격동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한강유역을 점령한 신라가 거침없이 북진합니다. 이때부터 임진강은 고구려-신라의 국경선으로 변합니다.
고구려는 강 북안에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 1·2보루 등 크고 작은 보루와 성을 고쳐 쌓거나 새로 구축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호로고루는 고구려의 최전방사령부 역할을 했습니다.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1998년 토지주택박물관의 정밀지표조사 결과 호로고루에서 고구려 기와 조각들이 대거 확인되면서 정식 조사가 시작됐는데요. 그 결과 임진강이 굽이굽이 돌아가면서 이뤄진 삼각형 형태의 천연 단애부에 접해 둘레 401m의 성벽을 조성한 사실을 확인했고요.
‘한들벌’로 이어지는 동쪽만 높게 성벽을 쌓았고요. 임진강, 즉 호로하에 면하는 곳은 30m의 절벽으로 곧장 이어지고, 북쪽 역시 40~60도가량 아찔한 급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 동벽만 막을 수 있다면 적의 침입이 불가능한 요새로 기능했을 겁니다. 성 내부의 전체 규모는 2000평 정도 됐습니다.
이곳에서는 임진강·한강 유역의 40여개 고구려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고구려 기와와 토기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심지어는 한성백제의 도성 체계에 있던 몽촌토성보다 많이 출토됐는데요. 그만큼 규모가 큰 건물이 존재했다는 얘기입니다.
2006년 확인된 지하보급창고에서도 흥미로운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소·말·개·사슴·멧돼지 등 6종의 동물뼈와 불에 탄 쌀·콩·조·팥 등 곡물들이 출토됐습니다. 1300g들이 밥공기도 나왔는데요. 요즘의 밥공기가 200g 정도 되니까 고구려 병사들은 엄청난 양의 ‘짬밥’을 먹은 겁니다. ‘흙으로 만든 북(鼓)’도 출토됐는데요. 적의 습격을 알리거나 아군의 진격을 독려할 때의 두들겼던 ‘변방의 북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호로고루와 동쪽으로 20㎞쯤 떨어진 무등산 보루에서 수백가마니에 달하는 탄화 곡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5~7세기 고구려군의 군량미 창고였습니다. 연구결과 고구려군이 먹은 쌀의 품종이 ‘인디카(Indica)’가 아니라 ‘자포니카(Japonica)’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인디카’는 지금 동남아 등지에서 먹고 있는 ‘메진’ 쌀이고, ‘자포니카’는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차진’ 쌀이죠. 5~7세기 고구려가 양질의 군량미를 군사들에게 제공할 만큼 부강한 나라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삼국시대 군사분계선
저는 호로고루에만 가면 임진강 맞은편, 즉 남쪽에 있는 또 하나의 성터를 바라보고 상념에 잠기곤 합니다.
그곳이 ‘이잔미성’인데요. 정식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일부 남아 있는 석축으로 미뤄보면 신라성일 가능성이 큰데요.
호로고루와 이잔미성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고구려-신라의 최전선 사령부였겠죠.
그렇다면 임진강은 삼국시대판 군사분계선, 혹은 휴전선이겠네요. 강 양쪽의 성에 주둔한 병사들은 어땠을까요.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지만, 때로는 “밥은 잘 먹었냐”, “고향 생각은 안 나냐”고 큰 소리로 소통하지는 않았을까요.
가끔은 그렇게라도 숨 막히는 대치국면을 풀지 않았을까요. 그랬을 것 같습니다.
신라를 똥개 취급한 당나라
이와 같은 신라~고구려의 살얼음판 대치국면(553~660)은 백제 멸망(660)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고구려가 공격 목표가 되면서 혈전의 무대로 변하죠. 662년(문무왕 2) 정월의 전투를 기록한 <삼국사기> ‘문무왕’조를 봅시다.
신라는 “보급품을 평양으로 보내라”는 당나라군의 요구에 따라 김유신 장군(595~673)의 지휘 아래 군량미를 운송합니다. 한 달 넘게 눈보라와 함께 강추위가 불어닥쳐 사람과 말이 얼어 죽어갔습니다. 결국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철군을 결정합니다.
“철군하던 신라군이 호로하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군이 쫓아와 강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다. 신라군은 고구려군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기습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조는 “이때 신라는 고구려군의 수급을 1만이나 베고, 5000명을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호로고루와 이잔미성이 치열한 전쟁터가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나라군의 과도한 요구가 계속됐습니다. ‘오라 가라’는 당나라군의 ‘똥개 취급’에 신라의 괴로움은 극에 달했습니다.
667년(문무왕 7) 신라군이 당나라군을 위해 칠중성(호로고루 인근 성)을 막 함락시킬 무렵이었습니다. 갑자기 당나라 사자가 달려와 “칠중성은 됐으니 빨리 평양성으로 군량미를 보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김이 빠진 신라군이 공격하다 말고 군사를 돌려 수곡성(황해도 신계)까지 군량미를 싣고 진격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신라군에게 “당나라군이 이미 철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장안(당나라 수도)으로 철군한 당나라군은 문책이 두려워 황제(고종·재위 649~683)에게 “신라가 군사를 늦게 보내는 바람에 철군했으니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고해바쳤답니다. 문무왕과 신라 조정의 분노가 켜켜이 쌓여갔습니다.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에 전승
백제에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시킨(668)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냅니다.
신라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임진강 호로하와 칠중하는 신라-당나라군의 격전지로 변합니다.
673년(문무왕 11) 5월 당나라 총관 이근행(?~682)이 호로하 서쪽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치고 수천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러자 남은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로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9월에는 신라군이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을 역시 호로하에서 격퇴했습니다.
<삼국사기> ‘문무왕’조는 “호로하에서 왕봉(경기 고양)까지 치른 9차례의 전투에서 당나라군 2000여명의 목을 베었다”면서 “두 강에 빠져죽은 당나라군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신라는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고 당나라를 내쫓는 기반을 닦았습니다.
오랜만에 찾아본 호로고루에 해가 저물고 있었는데요. 해바라기밭을 앞에 두고 호로고루 위로 넘어가는 일몰과 붉은 노을을 찍으려는 카메라가 장사진을 치고 있더라고요. 예부터 호로고루 주변의 임진강 절경을 ‘고호팔경(皐湖八景)’이라 했거든요.
“낚시터에 비치는 깊은 밤 고운 달빛(釣臺暮月)… 자미성(호로고루) 위로 떠오르는 초승달(嵋城初月)… 저물녘 고랑포 선창으로 돌아오는 돛단배(石浦歸帆), 장단 석벽 좌우로 펼쳐지는 가을 단풍의 절경(赤壁丹楓), 경순왕릉에 비치는 저녁햇빛(羅陵落照)….”
호로고루라는 심상치 않은 이름 속에 담겨 있는 ‘심상치 않은 역사’의 사연을 한번쯤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통일바라기’라는 이름의 축제를 여는 뜻도 한번쯤 새겨 두기를….
호로고루 해바라기축제
호로고루에서는 매년 9월 중순부터 10월까지 해바라기 축제가 열린다. 호로고루의 성벽을 따라 조성된 3만3000㎡의 부지에 6만 송이의 해바라기가 장관을 이룬다. 인근에 코스모스 꽃의 향연도 펼쳐져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코스모스는 해바라기보다 약 1~2주 늦게 피기 때문에, 9월 중순에서 하순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호로고루에서 임진강의 아름다운 풍경도 감상할 수 있어서, 해바라기 축제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연천의 대표 축제가 되었다.
연천 호로고루(漣川 瓠蘆古壘) 위치도
발굴조사 당시의 호로고루 항공사진.
[임진강의 수직 단애에 접해 성을 조성했으며
삼면이 급경사와 절벽으로 이뤄져
천혜의 요새로 기능했다.]
호로고루 원경.
[임진강의 연천 장남 구간인 호로하 인근에는
징검다리 식으로 모래톱이 드러날 정도로 수심이 낮아
기마부대가 쉽게 건널 수 있다.]
호로고루 내부에서 확인된 지하창고는
고구려군의 보급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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