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는 바로 부처다.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미 여기에 있다.
부처를 향해서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곧 분별일 뿐이다. 분별하면 곧장 어긋난다.
분별하지 않으면 어찌 도를 알 수 있느냐고? 반드시 분별하지 않아야만 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말도 방편일 뿐, 도를 알고자 한다면 어긋난다.
도는 알고 모르는 것에 있지 않다.
도를 알려고 하면 ‘아는 자’와 ‘아는 것’이 둘로 나누어져 있어야 한다.
그것은 분별이기에 어긋난 것이다.
참으로 분별없는 깨달음을 확인하면 말끔하게 텅 비어 공하니,
거기에는 옳다거나 그를 것이 없고,
알거나 모를 것도 없다.
그저 텅 비어 확연무성(廓然無聖)하여, 성스럽다고 이름 붙일 것조차 완전히 사라진다.
법에는 거리가 없다. 진리에는 멀고 짧은 것이 없다.
오로지 여기 눈앞의 당처가 있을 뿐, 거기나 그때는 없다.
다만 지금 여기 목전에 있는 것만이 언제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살아오면서 ‘그때’를 단 한 번이라도 살아본 적이 있는가?
혹은 ‘그곳’에서 살아본 적이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짜로 있는가?
이것은 당장에 내 경험에서 우러나와 증명되지 않는가?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시간적으로 과거나 미래를 살아본 적이 없고, 공간적으로 다른 공간에 살아본 적은 없다.
다른 시공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는 내가 그것을 생각했을 때뿐이다.
분별했을 때만 과거나 미래와 현재가 분열되고, 여기와 저기와 거기가 분별될 뿐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은 없다.
아무리 먼 거리를 걸어간다고 할지라도 사실 우리는 먼 거리를 간 것이 아니라,
그저 내 발 위에 있었을 뿐이다.
땅 위에 있었을 뿐이다.
아무리 많은 세상을 보고, 여행을 하며 수많은 다양한 것들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눈앞’의 목전만을 경험했을 뿐이다.
대상을 따라가지 않으면, 색깔과 모양이라는 색경(색경)에 끄달리지 않으면, 언제나 ‘보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출처 : "선어록과 마음공부", 법상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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