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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에 대한 응답
슥 7:1-7
1 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2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4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7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슥 7:1-7 / [국치일 행사를 계속해야 하는가?] ㅁ) 다리오왕 4년, `기슬래'라고 부르는 달 9월 4일에 주께서 다시 스가랴에게 말씀하셨다. (ㅁ. BC 518년 12월 7일) 2) 이때에 벧엘 주민들은 사레셀, 곧 왕의 최고 행정관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수행원들을 딸려서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들은 여호와의 호감을 사도록 선물을 준비해 주면서 3)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예루살렘에서 만날 수 있는 예언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묻도록 하였다. `우리가 이미 그토록 여러 해 동안 금식하며 슬퍼하는 절기를 지켰던 것처럼 앞으로도 5월이 오면 그 행사를 계속해야 옳겠습니까?' 4) [과거의 회상] 이때에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내게 이같이 말씀하셨다. 5) `이 땅의 모든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같이 전하여라. 너희가 이미 70년 동안 ㄱ) 5월과 7월에 금식하며 슬퍼하는 절기를 지켜 왔는데, 너희는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한 금식이었다고 생각하느냐? (ㄱ. BC 587년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해의 5월 9일 성전 파괴일과, 7월 3일 그달랴 총독 암살일을 슬퍼한 날이다) 6) 너희들이 떡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도, 바로 너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냐? 7) 오래전, 예루살렘이 아직 파괴되기 전, 유다 나라의 모든 성읍들과 남쪽의 초원지대와 서쪽의 야산 지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던 때에, 내가 그 당시의 예언자들을 시켜서 이같은 말씀을 선포한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본문에서부터 8장까지 금식과 축제에 관한 말씀이 이어질 것입니다.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입니다. 다리오는 바사 왕입니다. 기슬래월은 유대 달력으로 9월로서 그달 4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했습니다.
울며 근신하리이까(1-5) 벧엘 사람의 부하 몇이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5월 중에 울며 근신할까 묻습니다. 그때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대답하십니다. 그들은 약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애통하며 금식해 왔다고 합니다. 그들의 다섯째 달 금식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성전 훼파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바벨론에 잡혀 간 유대인 포로들이 금식한 것입니다. 일곱째 달 금식은 바벨론 군대로 말미암아 유대 총독 그달리야와 및 유대 땅에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의 살해된 사건을 슬퍼하는 것입니다(왕하 25:25, 26). 그런데 하나님은 금식과 애통이 여호와 앞에 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라고 지적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6) 하나님은 금식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먹고 마시는 것도 스스로 만족하려고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슬픔을 자아냈지만 참된 회개는 없습니다. 다만 저들이 처한 고통스러운 사정 때문에 애달파서 그 금식을 통해 비애를 표시하였던 것뿐입니다. 그들은 그 금식을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공로로 이해했습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의 표식이 금식이라 생각했습니다. 금식은 애통과 하나님 앞에 자기성찰의 행위적인 수단이지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향한 참 마음이 사라진 금식은 자기 의, 자기 영광을 위한 위선일 뿐입니다(마 6:16-18).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7)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유를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었는데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애통함이나 금식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따르는 일입니다. 옛날에 예루살렘과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살았으나 지금 그곳이 황폐함만 남은 이유는 그들이 선지자의 외침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형식적인 금식 행사가 아니라 진정으로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적용: 하나님을 위한 금식,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을 당신은 어떻게 행할 수 있습니까? 왜 금식이 필요합니까(마 4:2)? 특히 마태복음 6장 16-18절을 기초로 금식의 본뜻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문제를 놓고 반복적으로 생각하며 불안해 할 때 그것을 걱정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하면 그것은 묵상이 됩니다. 걱정은 하면 할수록 깊어지고 불안을 불러옵니다. 우리의 관심을 걱정거리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돌리면 걱정거리는 반드시 줄어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걱정이라는 병에서 해방될 수 있는 가장 좋은 치료제가 될 것입니다.
< 설 교 >
경건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스가랴 7장 1~13절 / 김철한 목사 오목천교회
우리는 여덟 번에 걸쳐 스가랴 서에 기록된 환상을 나누었다. 예루살렘 회복과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이루어질 것을 전하는 강력한 말씀이었다. 그런데 스가랴가 환상을 보고 예언 활동을 시작한 것은 다리오 왕 2년 8월이었다. 즉 주전 520년경인데 왕의 통치 4년 9월이 되어 스가랴는 다시 말씀을 받는다.
슥7:1 “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이라 하였으니 이는 주전 518년으로 예언 사역을 한 지 2년 1개월이 지났다. 여기서 받은 말씀은 한 마디로 진정한 경건을 제시하는 것이다. 당시 히브리 민족은 70년 동안 다섯 째 달과 일곱 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해 하였다. 5월의 금식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탄 것을 슬퍼하는 금식이었고 7월의 금식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임시 총독으로 있던 사반의 손자 그다랴가 이스마엘에게 살해 당함으로 남은 유다 백성들이 망한 것을 슬퍼하는 금식이었다. (렘41:1~2) 이는 얼마나 때에 맞는 금식이며 눈물이었는가? 나라가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전이 잿더미가 되었는데 이런 슬픔의 역사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우리는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부산 초량교회에 모여서 주의 종들이 기도하고 대통령이 나라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던 것을 기억한다. 피난을 위해 내려간 부산에서 그 기도가 응답되어 유엔군이 파병되었다. 위기 시, 멸망 시, 재난 시 기도해야 하고 금식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70년간 이어온 기도의 날에 대해 금식과 애통함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전해주고 있다.
1.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슥7:2~3)
70년간 이어져 오는 금식과 눈물의 기도, 이것은 유다 백성들의 자부심이었다. 경건한 백성, 종교적 백성, 선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몸짓이었다. 5월의 금식에 이어 7월에 이어지는 금식의 기도를 모를 자가 없었다. 슥7:2~3을 보면 벧엘 사람이 자기의 종들을 보내어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이 전해져 오는 5월 기도를 묻는다. 벧엘은 과거 북왕국의 성소가 있는 지역이었다. 예루살렘 성전 제의에 북쪽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싫어하여 여로보암 왕이 단을 쌓도록 만든 성소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벧엘의 사람들이 금식 기도의 단을 기억하고 울면서 근신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왔으니 이는 굉장한 파격이다. 예배들 드리되 남쪽 왕국은 예루살렘에서 드리고 북쪽 왕국은 벧엘과 단에서 드리게 하는 문제로 남북의 골이 커질대로 커졌는데 포로기 이후 여기 벧엘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의 전통이나 관습, 등져 왔던 원수의 한을 내려놓고 어찌된 마음인지 5월 금식, 7월 금식에 참여하고자 한다. 성전 재건 작업이 진행되었고 예배 의식이 재개될 무렵 벧엘의 사람들이 금식 기도를 하고자 물어왔으니 이는 대단한 생각의 전환이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의 금식하고 애통하는 것에 대해서 달갑지 않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금식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애통해 하는 슬픔을 기뻐하지 않는 분이실까? 아니다. 하나님은 금식을 기뻐하시고 눈물의 호소를 기뻐하신다. 그러면 왜 달갑지 않으신가? 벧엘의 종자들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어서일까? 아니다. 갈등은 사람이 만든 것이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다. 5월 금식과 7월 금식을 보시는 하나님은 경건을 지키는 이들에게서 위선을 보았기 때문이다. 즉 금식과 애통의 경건이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만족을 위해서 하는 자기 위로였기 때문이다.
슥7:5下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하나님은 거듭 거듭 반복해서 5월 금식과 7월 금식이 나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계신다. 아무리 개인과 집단이 보여주는 경건이 오랫동안 이어져오고 그 금식과 눈물이 특별한 이미지를 보여주더라도 경건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면 책망을 받는다. 금식과 애통해 하는 경건이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으니 어찌 그 금식을 기뻐하실까?
슥7: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결국 자기 만족을 위해서 자기의 포만감을 위해서 음료나 양식을 먹고 마시듯 경건한 금식 기도와 눈물 애통 기도가 활용된 것이다.
마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금식이란 경건의 목표가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를 위한 행위가 되면 안된다는 지적이다. 금식 기도만이 아니고 새벽 기도, 철야 기도, 그리고 대강절 성탄을 기다리는 마음 등 신앙 생활의 경건이 나의 종교 행사가 아니라 한님을 찾아가는 두드림이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어야 한다.
2.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우선이다. (슥7:7~10)
벧엘의 사람들이 마음을 낮추었다. 역사적, 정치적, 관습적 모든 갈등을 내려놓고 금식절에 울며 근신할 것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었다. 스가랴 선지자는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사람에게 보이려는 모양새를 경건보다 우선한다.
슥7:7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말씀에 서라.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실천없는 기도, 실천없는 금식, 실천없는 애통은 참된 경건이 아니다. 옛 선지자들의 외침은 무엇인가? 슥7:9~10에 나타나는 것은 이렇다.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말씀 실천은 단순한 생활이다. ① 모든 판단에 따르는 진실,② 베풀어야 할 사랑으로서 인애와 긍휼, ③ 약자에 대한 보호, ④ 해하지 않는 삶, 즉 서로 간에 잘 지내기이다. 이렇게 보면 말씀 실천은 “진실하자. 사랑하자. 돌보자. 잘 지내자.”이다. 유년, 초등 시절에 우리는 인사도 잘하고 먹을 것도 나눠주고 선생님의 심부름도 신이 나서 했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욕심만 많고 초등학교 시절 만큼도 우리는 더 나아진 삶을 살지 못한다. 진실하고 사랑하고 돌보고 잘 지내자는 말씀 실천이 어렵고 힘들 것 같지만 마음을 단순하게만 가지면 어렵지 않다.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고 말씀이 실천 가능하다. 내 의지가 단단해서가 아니다. 나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기에 실천하는 것이다.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아기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하나님 찾아오신 날이 성탕이다.우리도 말씀 실천을 해 보자.
3. 참된 경건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슥7:11~13)
유대 땅이 황폐하게 되고 사람 사는 인적이 드물어지고 아름다운 땅이 황무지가 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 때문이다. 사람의 불순종이 모든 것을 망가뜨렸다.
슥7:11~12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유대 백성의 문제는 마음의 강퍅함임을 보여준다. 그것도 금강석 같은 강퍅이다. 금강석은 최고로 강한 돌이다. 어떤 돌도 금강석보다 강하지 못하다. 마음이 이렇게 단단하니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는가? 발이 움직이고 다리가 움직여도 오직 불순종으로 달리고 달리는 것이다.
사실 사람의 불순종이 진노를 부른다.(슥7:12)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불순종의 결과 때문이다.
슥7:13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하나님도 마음의 문을 닫는다. 내가 불순종하면 하나님도 응답이 없다.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자에게 귀를 기울일 수 없다. 그러므로 불순종의 죄는 흩어지는 멸망 밖에 없다. 따라서 금식과 눈물의 기도를 하되 그 경건이 위선이 아니도록 하라. 진실의 기도와 경건은 순종에 있다. 어른이나 어린이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금식하는 5월과 금식하는 7월을 지키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순종은 한 평생, 한 세대 동안 이어온 종교적 행위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을 향하는 순종이 선이다. 아름다움이다. 순종이 믿음이고 순종이 실천의 시작이다. 순종이야말로 진정한 경건의 보증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일, 죄라고 생각지도 아니한 것, 거기서 돌아서라면 무시하지 말고 돌아서라. 기도원에 가 있어도 위선의 기도, 실천없는 기도, 순종없는 기도만 되풀이 한다면 그 기도는 경건한 무릎이 아니다. 진실하게, 참되게 말씀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드러내야 할 경건한 삶이다. 대강절에 회개하고 새롭게 다짐해야 할 자세다.
참된 금식
슥 7:1-7
성전을 건축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기 위해서 1장부터 6장까지 8가지의 환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가지 환상은 하나님께서 너희들과 함께 하여주셔서 성전을 건축하시고, 예루살렘성곽이 되어주시고, 또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다 물리쳐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전을 건축하는 가운데, 벧엘 사람이 사례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그들이 행하고 있었던 금식을 계속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BC586년 5월 7일에 바벨론이 쳐 들어와서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된 날을 기억하여 포로기간동안과 지금까지 매년 5월에 금식하는 습관과 전통이 있었습니다.
또 매년 7월에는 유다총독 그달랴가 암살당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서 금식하는 습관과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포로 이후 지금까지 매년 5월에는 종교의 상징인 성전이 파괴된 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 금식하였고, 또 7월에는 정치적으로 그들이 멸망된 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 금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왔고, 또 예루살렘성전을 건축되고 있기 때문에 매년 5월과 7월에 금식하는 것이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을 묻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뜻밖의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4절과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이 70년 동안 5월과 7월에 해온 금식에 대해서 그 금식이 진정으로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동안 한 금식이 진정으로 나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6절에 보시면 “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70년 동안 5월과 7월에 행한 금식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하여 행한 것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금식이라는 것이 절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은 형식적이고 외식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즉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벨론포로로 가기 전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금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58장에 하나님께서 금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것만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 가운데 가난한 자, 주린 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그들과 같은 자임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참된 금식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단순히 그들의 기도제목에 응답을 받기 위해서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들이 형식적이 금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금식기도나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기도가 과연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하는 기도이냐 너희들의 기도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냐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기도를 지금도 원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단순히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기도를 지금도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를 하실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닫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내 뜻 내 생각 내 감정을 포기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내가 내 마음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는 내 뜻이 없어져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입니다.
그래서 게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아버지여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왜 해야 돼? Why should I do that?
슥 7:1-7-14 - 찬송가 474장
<예화 - 어떤 신실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을 그리 어렵지 않게 한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금식이 너무 힘들다. 한 번은 1주일 금식을 작정하고 물만 마시며 일상생활을 하는데 목요일 자정쯤에 악몽을 꾸었다. 자신이 굶어 죽는 꿈이었다. 너무 무서워서 ‘죽는 것보다는 먹고 잘 믿는 것이 좋겠다’ 싶어 먹을 것을 찾는데 책상 서랍 속에 오래 전에 넣어 두었던 박하 사탕 한 알이 생각나서 그것을 찾아서 먹는데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숭늉 누룽지를 먹는데 감격스러웠다.>
한 끼나, 하루나 혹은 일주일 이상 금식 기도를 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처음에는 자신의 문제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금식기도를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내가 왜 굶어야 하나?’ 라고 생각하며 포기하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그만큼 금식기도는 힘든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하라고 하는 일들은 대부분 너무 힘든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기쁜 마음으로 나와 봉사하시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
거의 청년들이 제일 많이 참여합니다. 왜냐하면 공짜 밥이 제공되니까.
오늘 본문도 금식에 관한 일에서 시작합니다.
벧엘(이스라엘지역)의 사람들(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금식일을 계속지켜야 하는 지를 질문함 (3절)
매년 5월에 금식 - 원래는 4번의 금식기간 - 하루동안
예루살렘 성벽의 파괴 (4월) - 6월 17일
성전이 불에 탐 (5월) - (7월 4일)
그달리야(그다랴)의 암살을 기념 (7월) - 9월 3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패망 시킨 후 유다 땅에 남아 있는 백성을 관할케 한 총독. 그는 선정을 베풀었고 하나님의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보호했던 인물. 하지만 2개월 후에 정적으로부터 암살당함. 유대인은 그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암살된 날을 국난일로 제정
예루살렘 포위 (10월) - 12월 10일
그들의 질문: 여러 해 동안 한 대로 울며 금식해야 합니까?
성전이 재건되었는데, 우리가 계속해서 금식해야 합니까? 7장과 8장은 응답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5절 함께 보시겠습니다. (5절)
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 5월, 7월에 금식하며 애통했습니다.
하지만, 그 금식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지킨 것이 아니었음을 하나님은 지적하십니다.
-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 금식을 합니다. 식사시간 마저도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 그 금식일은 단순히 형식이고 하나의 절기입니다.
-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께 묻습니다. 너희들이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데, 그것이 나,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이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 혹시 그저 너희의 종교적 욕구를 풀기위해서 그런 것 아니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하나님이 지적하십니다.
- 벧엘 사람들은 금식일에 자신들의 불편함만을 봤던 것입니다.
- 또는 자신들의 종교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 세상 사람들은 금식 같은 고행을 통해서 신을 만나려고 합니다.
- 하나님이 만나줘야 하는데, 자신이 무언가를 해서 신을 만나려고 합니다.
- 근본적으로 자신의 종교적 욕구를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이런 종교적 의식을 합니다.
- 이런 금식일이 제정된 이유는 분명히 자신들의 불순종 때문에 성전이 파괴되었음을 상기하고, 그 날의 아픔과 슬픔을 기리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 하지만, 이제 그 금식일은 하나의 절기처럼 여겨지고 불편한 의식이 되었다.
-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 년에 4번의 금식 중에서 하나라도 없애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 또한 스가랴서의 배경은 고된 포로의 시기에서 벗어나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온 시기입니다. 돌아오자마자 성전을 재건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 사실 새로운 성전도 재건되어가고 있으니 그 말은 맞는 말처럼 보인다.
- 성전이 있는데 성전 파괴를 기억하는 금식일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 그런데, 사실 성전의 재건 공사는 시작했지만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할 때는 성전의 재건이 시작되었다가 여러 방해로 중단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금식을 폐지하자는 말이 나온 것이다.
- 하나님의 응답은 계속됩니다. 7절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은 금식일이 제정되기 전의 상황을 상기시키신다. (7절)
-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전에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았다.
- 하지만 계속해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셨고, 이들은 이방민족에게 포로로 끌려가서 고통과 슬픔 속에 살았다.
- 하나님은 그들 중에 신실한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페르시아 왕을 움직여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 하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 왜냐하면 성전 재건을 시작했지만, 중단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 8장 9절 보면 성전을 다시 짓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 하지만 성전 재건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또 한 번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 한 마디로 성실한 금식의식을 지키지도 않고, 아직 금식을 끝낼 때도 아닙니다.
- 그렇다면 언젠가는 성전이 재건되면 이 금식일이 폐지됩니까?
- 하나님은 그 날이 기쁨과 즐거움의 절기가 될 것이다. 8장 19절
- 그 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날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 벧엘에서 온 사람들의 문제제기는 아주 그럴 듯하게 보인다.
- 이제 슬픔의 과거는 벗어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 하지만 그들은 금식의 본질보다는 그 의식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 하나님은 그들의 위선에 대해 책망하셨다. (5절)
- 금식이라는 겉모양을 갖추었지만, 그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6절)
- 그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이 평화로울 때에 선지자들을 시켜 전한 그 말씀도 지키지 못했다.
- 9절부터 12절까지 읽겠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아서 포로시기를 보냈다.
- 금식일에는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날인데, 그저 자신들이 포로 생활하는 것이 슬프고 원통해서 금식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 아직도 불순종하는데, 금식 폐지가 웬 말입니까? 하나님께 순종이 우선입니
- 금식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우선.
- 의식을 지키느냐 폐지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우리 죄를 회개하고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13-14절
-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 후로 많은 불필요한 종교의식이 폐지되었다.
-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개신교에서 공통적인 현재의 종교적 의식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성수,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것을 기념하는 침례(세례), 예수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주의 만찬 등이 있다.
- 이런 의식도 그저 의식적인 것에 집중한다면 스가랴 시대와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 꼭 주일에 예배해야 합니까? - 침례(세례)할 때 꼭 흰옷을 입어야 합니까? - 주의 만찬할 때에 꼭 빵과 포도주만을 먹어야 합니까?
- 진정한 의미의 종교의식은 절차에 있지 않습니다. 마음에 있습니다.
-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한 예배가 필요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예수님의 희생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이 중요한가. 그러니 일주일에 아무 날에 한번만 예배하자. - 마음이 중요하니, 침(세례)는 나중에 받자. - 마음이 중요하니, 오늘 주의 만찬은 건너뛰자.
- 이 사람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 예수님의 부활을 모르던 두 제자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에 실망하여 엠마오로 낙향할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눅 24장) 처음에는 모르다가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그들이 깨달았습니다.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24:32) 그들은 당장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 이 두 제자가 마음이 실망했을 때는 옛날로 다시 돌아가려 합니다.
- 하지만 마음이 뜨거웠을 때는 당장 일어나 기쁜 소식을 전하려 갑니다.
- 마음이 행동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2:34)
- 마음이 악하므로 선한 말을 할 수 없다. - 악한 마음은 악한 행실로, 선한 마음은 선한 행실로 나타납니다.
-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이 뭐가 중요해 라고 생각하는 이면에는 좀 더 게으르고자 하는 마음, 이기적인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 교회의 의식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근본 이유는 악한 생각에 있습니다.
- 형식보다 마음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형식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 하나님께서도 그 절기를 폐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8:19절에는 그 날이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이런저런 핑계를 댑니다.
- 현대에는 그런 고리타분한 의식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먹고 살기도 바쁘다고 핑계합니다.
- 몸은 교회를 떠나 있지만, 마음은 교회에 있다고 말합니다.
-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예수님은 구세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합니다.
- 모든 교회의 의식이 형식적이라고 말하며 불필요하다고 말합니다.
-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 하지만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게으른 마음, 이기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 스가랴서는 성전 재건을 중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성전 재건을 시작하도록 격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거의 60년 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다시 건축하려 했습니다.
- 일단 시작은 했지만, 여러 방해 때문에 중단됩니다.
- 하나님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등을 보내어 다시 성전 재건을 격려합니다.
- 하지만, 일부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이 재건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성전 파괴를 기념하는 금식일이라는 의식을 계속해야 할지를 묻고 있습니다.
- 이들은 포로에서 돌아왔고, 성전도 재건되어 가는 이 기쁜 날에, 성전이 불에 탄 것을 기억하는 금식일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이들의 의도는 표면적으로는 순수해 보입니다.
-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 이들은 그 날이 금식일이기 때문에 금식했던 것입니다.
- 그 날이 성전이 불에 탔기 때문에 슬퍼했던 것입니다.
- 하지만 하나님은 죄의 회개와 변화를 원하셨습니다.
- 회개와 변화를 위한 금식이어야 하는데, 그저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슬퍼했던 것입니다. - 그러니, 그런 금식일은 그들의 생각에는 불필요해 보였습
- 하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야단치셨습니다.
-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서 의식만을 지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 이거 내가 왜 해야 돼? 하는 질문을 하면서, 모든 교회 의식이 필요한가 불필요한가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 우리의 죄에 대한 회개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 되야 합니다.
- 그런 마음을 가지면 모든 의식이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을 대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 오늘 주의 만찬 시간과 주일 예배 시간에 어떤 마음 가짐으로 이 시간들을 준비하셨습니까?
- 그저 여러분 자신의 종교적인 만족을 위한 시간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을 위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불순종했던 것을 회개 하는 시간입니다.
- 회개와 순종의 마음으로 모든 교회 의식을 대한다면, 여러분은 그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깨닫게 될 것입니다.
- 모든 교회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중앙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
스가랴 7장 1절~7절 / 김명섭 목사
1. 다리오 왕 사년
① (1절) “다리오 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 스가랴가 8가지의 묵시를 보았던 때는 ‘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슥1:7)’이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다리오 왕 사년’에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 다시 예언하게 하신다. 스가랴가 또 다시 예언을 재계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리오 왕 사년’이 역사적으로 어떤 때인지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스가랴가 전하는 예언의 목적과 메시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선 시대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모든 예언은 역사 속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스가랴서의 시대적인 상황은 동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에스라서’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② ‘고레스 왕 원년’에서 ‘다리오 왕 이년’까지의 역사
▶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스 1:1~3)”,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이른지 이년 이월에 (스 3:8)”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고 기공식을 했다. 하지만 귀환한 유대인들이 반역을 도모한다는 거짓상소 등으로 인해 성전건축은 무기한 중단된다. “이제 너희는 명을 전하여 그 사람들로 역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치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를 내리기를 기다리라 (스 3:21)”,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전 역사가 그쳐서 바사 왕 다리오 제 이년까지 이르니라 (스 4:24)”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다리오 왕 이년 6월부터 11월까지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을 통해 16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니 (스 5:1)”
③ ‘다리오 왕 이년’에서 ‘다리오 왕 육년까지’의 역사
▶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으로 성전재건을 시작한 ‘다리오 왕 이년’에 바사제국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내가 또 조서를 내리노니 무론 누구든지 이 명령을 변개하면 그 집에서 들보를 빼어내고 저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 집은 이로 인하여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만일 열 왕이나 백성이 이 조서를 변개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헐찐대 그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저희를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찌어다 하였더라 (스 6:11~12)” 다리오 왕이 고레스 왕의 조서를 발견하고 중단된 성전 건축을 재계할 것을 명하는 조서를 내린다. “유다 사람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할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 다리오 왕 육년 아달월 삼일에 전을 필역하니라 (스 6:14)” B.C 516년 ‘다리오 왕 육년’에 마침내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되었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B.C 586년으로부터 70년 되는 해다. 오늘 본문의 ‘다리오 왕 4년’은 성전건축을 재개한지 2년이 되던 해였고, 성전이 완공되기 2년 전의 시점이다.
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① (2절) “때에 벧엘 사람이 사례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 ‘다리오 왕 사년’은 한마디로 성전 재건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때다. 성전 재건이 형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에스라 6장에 기록대로 바사의 다리오 왕이 서적 곳간에서 고레스 왕 원년에 성전 재건을 명령했던 조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다. 스가랴가 묵시로 예언했던 말씀의 성취다. “그가 외쳐 내게 일러 가로되 북방으로 나간 자들이 북방에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하였느니라(슥 6:8)” 다리오 왕이 솔로몬 성전의 금, 은기명을 돌려보내고 필요한 자재와 경비를 보내 지체치 않게 하고, 수용물을 소청대로 영락없이 날마다 주어 하나님께 제사하게 했다. 이는 학개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친히 행하신 일이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6~7)” 따라서 오늘 본문은 성전 건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언약의 성취가 완수되는 가운데 스가랴를 통해 전하신 경고의 말씀이다.
② (3절)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
▶ ‘오월 간’은 바벨론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된 날을 가리킨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십 구년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하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사르고 (왕하 25:8~9)”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강제로 국권을 빼앗긴 날, 한일합방조약을 맺은 경술국치일과 같다. 한마디로 국치일을 기억하며 울며 금식하던 예식을 계속 해야 되는지에 관한 질의다. 사실 질문이 아니라 이제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었으니 그만해도 되지 않겠냐는 주장이다. 요즘으로 바꿔 말하면 백신 접종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으니 이제 마스크 벗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섣부른 주장과 같다. 코로나 팬데믹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방심하면 대유행은 어김없이 다시 시작된다. 어려울 땐 근신하다가 조금 형편이 나아져 살만하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양은 냄비 같은 근성이다.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손에 든 검을 꽂아선 안 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2~14)”
3. 외적인 성장에서 내적인 성숙으로
① (4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 2년 만에 다시 예언을 재계하신 이유는 초심을 잃고 넘어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성전의 외형은 번듯하게 세워져 가는데 내면의 성전은 여전히 무너져 있었던 까닭이다. 눈에 보이는 성전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도 함께 지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성전재건이 아니라 성전으로 지어지는 삶, 곧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을 요구하셨다. 스가랴 7장에서 14장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서 주신 새로운 특명이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성장에서 성숙으로’의 변화다. 거룩한 새 성전에 합당한 백성의 삶, 외적인 성장을 넘어 내적인 성숙을 명하신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머리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20)”
▶ 출애굽기는 총 40장에 걸쳐 ‘구원의 장대한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1장~13장까지 열 가지 재앙, 유월절과 홍해를 건넘으로 바로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은 바뀌었지만 노예근성은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14장~19장까지 광야로 이끄신다. 20장~34장까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율법을 일러 주셨다. 그리고 35장부터 말씀대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세워 성막을 건축하게 하신다. 성막은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의 척도다. 마침내 40장에서 완공된 성막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동행하신다. 출애굽기는 구원의 출발인 유월절과 홍해를 넘어 시내 산에서 계명을 받고 말씀대로 성막을 짓고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자리까지 나가는 구원의 대망을 증거 한다. 스가랴의 예언도 이와 같은 구원의 여정과 대망을 반복하고 있다. ‘바벨론 포로-약속의 땅으로의 귀환–16년간의 중단-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성전 재건을 통한 말씀의 준행-하나님의 임재’ 순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여정은 개인의 삶에서도 동일하다. 회개를 통한 죄 사함의 물세례에서 시작해서 성령세례를 받고 말씀대로 준행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리까지 도달함으로 완성된다.
▶ 성장에서 성숙으로 이끄는 사명, 보이는 성전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성전을 완공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이 ‘또 한명의 모세’라는 별명을 가진 제사장 출신의 학자 ‘에스라(EZRA)’다.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스 7:1)”,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 (스 7:6)”,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 (스 7:10)” 에스라는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된 후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때, 제2차 포로귀환을 이끌었던 영적 지도자다. 그는 고국에 돌아와서 이방문화에 빠져 율법준수로 타락한 신앙을 회복하는 사명을 감당했다. 일명 ‘에스라의 종교개혁’이다. 이것은 ‘EZRA 말씀학교’의 모델이다. 본 성경공부의 목적은 단순히 성경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양적인 성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질적인 성숙의 과정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데 있다.
4. 누구를 위하여 한 것이냐?
① (5절)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 공부해서 남 주냐는 말처럼 신앙생활은 자신에게 유익을 준다. 금식하면 나 자신이 절제와 겸손을 체험한다. 예배하면 내 삶에 은혜가 넘친다. 기도하면 내 영혼이 잘 되고 강건해지고 새벽기도하면 나 자신이 날마다 은혜로 살게 된다. 헌금하면 내 삶에 감사가 넘치고 봉사하면 내 삶에 기쁨이 넘친다. 경건한 신앙생활과 말씀의 준행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② (6절)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 이 말씀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신앙의 위선에 대한 경계다. 자신의 야망을 하나님의 비전으로 가장하는 외식에 대한 경고다. 외식은 신앙을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거룩한 직책을 ‘명예욕, 권력욕, 물욕’을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행위와 업적)가 아니라 중심(동기와 목적)을 보신다. 무엇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하는지를 감찰하신다. 헌금이 투자가 아니듯 봉사는 자기만족이나 자기과시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외식하는 신앙에 대해 엄히 경계하신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토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리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희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1~16)”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은 하나님의 상급이 없다. 신앙생활의 ‘공로주의’는 자기부인과 자기희생이라는 신앙의 본질을 떠나 도리어 자기과시와 자기자랑에 빠지게 한다. 오래 가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흔들린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신앙의 본질을 망각하고 도리어 타인을 정죄하는 오류에 빠진다.
③ (7절)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과 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 ‘이전 선지자’는 이사야를 가리킨다. 이사야와 더불어 호세아, 아모스, 미가는 모두 동시대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가야의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사 1: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함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이라 (호 1:1)”, “유다 왕 웃시아의 시대 곧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암 1:1)”, “유다 열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미 1:1)” 이사야를 비롯한 네 명의 예언자가 활동했던 ‘웃시아,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시대는 한마디로 남 유다의 제2의 중흥기다. 영토는 확장되고 경제는 성장하던 형통과 번영의 때다. 하지만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영적으로는 빈곤하고 우상숭배가 만연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많은 예언자들을 한꺼번에 보내신 이유가 있다. 고난으로 넘어지는 사람보다 형통할 때 넘어지는 사람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열에 아홉은 형통할 때 넘어진다.
▶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약 5:13)’ 고난이 많을 때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해야 한다. 즐거워 할 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고난이 오면 절망해서 낙심하고 형통하면 우쭐해서 자만한다. 예언자들의 경고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어렵다고 낙심 말고 잘된다고 방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의 본질은 ‘한결 같음’에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려울 때나 잘 될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고난당할 때나 형통할 때나 변함없는 믿음으로 성숙해야 한다. 한결같은 믿음으로 나가는 첩경은 ‘오직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준행하는 삶(시1:6)’에 있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금식이다
스가랴 7:1-14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6절)
여덟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성전재건과 영적회복을 독려했던 스가랴는 약 2년 간 휴식을 가졌다. 그 후 벧엘 사람들이 바벨론에 있을 때부터 유다가 함락된 사건을 회상하기 위해 5월마다 행하던 금식기도를 계속해야할지 문의했다. 이제 포로에서 귀환했고 성전도 한창 재건되는 판국이니 굳이 멸망사건을 떠올리며 괴로울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뜻이다. 하나님은 금식 중지 혹은 계속하라는 직접적인 답변은 없고 두 가지 원론적인 뜻만 밝혔다.
먼저 너희 선조들이 선지자들의 회개촉구에 응하지 않아 포로로 잡혀갔고 그래서 너희가 금식하게 된 것이라고 답하셨다. 또 이사야 선지자가 계시했던 금식의 참된 의미를 재확인해주었다.(9/10절) 진실한 재판, 인애와 긍휼을 베푸는 것, 고아 나그네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않는 것, 서로 해하려 마음으로 도모하지 않는 것 등은 율법에 기록된 내용이다. 율법대로 살았다면 그런 불행이 없었고 금식도 필요치 않으니 너희도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지 스스로 잘 판단해보라는 즉, 정말로 율법대로 살고 있다면 금식을 중지해도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들의 금식이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 왜 너희들을 위해 금식하느냐고 해야 논리가 맞는데 너희를 위해 먹고 마셨다고 야단쳤다. 분명히 금식해왔고 이젠 중지해도 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초점이 어긋난 답변이자 일방적으로 야단만 친 것 같다. 벧엘 사람은 5월 금식에 대해서만 질문했는데 하나님이 일곱째 달 금식까지 포함해서 대답했고, 나중(8:19)에는 네 번(4,5,7,10월)의 금식 전부를 거론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각 금식절기마다 기념하는 내용이 다른데 특별히 다섯째 달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전이 불탄 사건을 회상한다.(BC586, 왕하25:8) 나머지 셋은 예루살렘 포위(10월), 점령(4월) 유대인학살(7월)을 기념한다. 따라서 그 질문의 진의는 성전이 재건되고 있으니 불탄 성전을 회상하는 5월 금식만은 그만두자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그동안 영적회복보다 성전재건만을 위해 금식 기도했다는 뜻이 된다.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목적이 아니라 평안과 형통 - 먹고 마시는 일을 위해 빌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를 위해 먹고 마셨다고 야단친 것이다.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이사야가 말하는 금식의 참 의미는 쉽게 알 수 있다. 본문이 정작 말하는 바는 하나님과 정말로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면 금식할 필요 없이 먹고 마시며 즐겨도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먹고 마시며 즐기자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너희는 그러지 않느냐고 따졌고, 예수님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슬퍼할 필요 없지만 곧 금식할 때가 올 것이라고 답했다.(마9:14,15)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애도하라는 뜻이 아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사역할 때는 주님과 영적으로 온전한 관계를 이루지만 당신이 없을 때는 그렇지 않을 때가 있고 그 때 금식하라는 것이다. 바로 본문의 의미다. 국가, 교회, 개인의 위기나 악에 대해선 지금도 금식 기도는 잘한다. 정작 신자가 평소에 참된 금식을 즉, 실제로는 음식을 먹으며, 최선을 다해 주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고 있다면 얼마든지 먹고 마셔도 된다. 과연 평소에 즐겁게 먹고 마시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