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7월 안양시의회 의장 선거에서 정맹숙 의원을 표기한 12장의 투표용지. 1번과 2번(빨간색)을 제외하고는 미리 담합으로 약속한 위치에 표기했다.
“투표용지를 12개 구역으로 나눠 각자 달리 지정한 곳에 정맹숙이라고 쓰기로 합시다. 나중에 약속을 지켰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작년 7월 경기도 안양시의회. 후반기 의장 선출을 앞두고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서는 이 같은 은밀한 짬짜미가 오갔다. 실제 의장 선거에서 의원들은 거의 약속을 지켰다. 기상천외한 ‘담합’ 덕분에 민주당이 내정한 의원이 의장으로 선출됐다.
최근 수원지법은 당시 의장 선출이 무효라고 판결했다. 민주주의 기본 원리인 ‘무기명 비밀투표’ 원칙을 깨고 사실상 공개투표를 했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지난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의장 직무 정지를 결정하면서 지난 8개월 동안 안양시의회는 정상이 아니었다. 이번 판결로 거듭 망신을 당한 안양시의회는 후반기 원 구성을 다시 해야 할 형편이다.
“투표용지 12칸으로 나눠서 쓰자” 담합
안양시의회는 지난해 7월 3일 후반기 의장 선거를 실시했다. 의석 분포는 민주당이 13석, 국민의힘이 8석. 민주당 의원이 의장을 맡는 것이 당연했다. 민주당은 사전에 당내 경선을 거쳐 재선 정맹숙 의원을 내정했다. 그러나 역시 재선인 임영란 의원이 불복해 출마 의사를 밝혔다. 민주당 의원 일부가 이탈해 임 의원을 지지하고, 야당인 국민의힘 의원들이 합세할 경우 ‘반란’ 가능성도 있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내부 단속을 위해 절묘한 ‘해법’을 만들었다.
안양시의회의 의장 선거는 교황 선출 방식과 유사하다. 똑같은 모양의 백지 투표용지에 지지 후보의 이름을 자필로 적는다. 민주당은 불복한 임 의원을 제외하고 의원 12명이 담합을 모의했다. 방식은 이랬다. 의원마다 A4용지 4분의 1장 크기(가로 10㎝, 세로 15㎝)의 백지 투표용지가 한 장씩 주어지는데, 이 투표용지 안에 12칸(가로 3칸세로 4칸)짜리 가상의 공간을 정했다. 그리고 의원 12명에게 왼쪽 맨 위쪽, 오른쪽 가운데 하단 등 각각 한 칸씩 정해주고, 그 위치에 각자 의장 후보 이름인 ‘정맹숙’을 쓰기로 했다. 투표 결과 정 의원이 무난히 12표로 과반을 득표했다. 용지가 크기가 작아 깨알 같은 글씨로 정 의원의 이름을 쓴 경우도 많았다. 임 의원은 9표를 얻었다.
“무기명 비밀투표 원칙 위반” 시비
투표 결과가 나온 뒤 부정 선거 시비가 불붙었다. 투표용지 검표 과정에서 ‘이상한 표기’가 포착됐고, 선거 직후 담합을 모의한 의원총회 녹취록까지 유출됐기 때문이다. 안양YMCA, 안양군포의왕 환경운동연합 등으로 구성된 안양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비밀투표 원칙을 깨고 이탈표를 방지하기 위해 투표용지에 기표 방법을 지정해 누가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알아볼 수 있게 투표 방법을 사전 모의하고 담합했다”며 민주당 의원들을 비난했다.
작년 9월 14일 안양지역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안양시의회를 항의방문하고 있다. /안양시의회 의장선출 부정선거 시민사회단체 대책위원회
연대회의는 “심지어 의회 내에서는 ‘6대 때도 이렇게 했다’ ‘선거법 위반이 아니다’라며 무기명 비밀투표 원칙을 깨는 행위에 동참하도록 의원들을 설득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또 “무기명 투표라는 절대적인 조건을 위반한 선거는 무효이며, 이로 인해 선출된 의장 역시 신임을 받을 수 없다”며 “전국에 있는 지방자치단체 기초의회에 대한 능욕이며, 지방자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위법 행위”라고 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의장 선출 무효화와 재선거 논의가 제기됐다. 민주당은 처음에는 “논의는 했지만 투표는 자율적으로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사과문을 냈다. 정 의장 사퇴를 촉구하고, 불신임안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 의장이 사퇴 불가 입장으로 버티면서 논란이 계속됐다.
작년 9월 법원 “의장 직무정지” 결정
국민의힘 소속 의원 8명은 “의장 선출 투표가 비밀투표 원칙에 반해 무효이고, 무효인 의결에서 선임된 의장 체제에서 뽑힌 상임위원장 4명의 선출도 무효”라며 효력정지와 함께 무효확인 소송을 냈다. 이에 법원은 작년 9월 의장과 상임위원장의 직무 수행을 정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에 안양시의회는 그동안 의장과 상임위원장이 없는 상태에서 의사 운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변통으로 부의장으로 민주당 최병일 의원을 선출해 의장 직무를 대리하도록 했다. 상임위원장 4명도 다수당인 민주당에서 부위원장을 선출해 의사 진행을 맡기는 편법을 지속해왔다.
직무정지 상태로 행정소송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정 의장은 끝내 사퇴하지 않았다. 결국 본안 소송 판결을 보름 앞둔 지난달 10일 사퇴서를 제출했다. 민주당 경기도당에서 징계가 논의됐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안양시의회는 지난달 15일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정 의장 사임을 의결했다.
다시 원 구성 합의, 2심도 진행
지난달 25일 수원지법 행정2부(양순주 부장판사)는 원고인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의 청구를 인용했다. 재판부는 의장 및 상임위원장 선임 의결을 무효로 판결하고, 이들에 대한 선임 의결은 항소심 판결 선고시까지 효력을 정지했다. 재판부는 “특정한 방법으로 다른 투표용지와 구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기명·비밀선거 원칙에 위배돼 무효”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정 의원에게 투표한 12장의 용지 가운데 2장을 제외한 10장은 이름을 표기한 위치가 각각 달라 다른 투표용지와 구별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또 “각자 정해진 위치 등에 기표해 정맹숙 의원에게 투표한 사실을 담합한 다른 의원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라며 “무기명 투표의 비밀성과 그것이 보장하고자 하는 투표자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침해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안양시의회 여야는 작년 7월의 의장과 상임위원장 선거 백지화에 합의했다. 일단 15~16일 이틀 동안 본회의를 열어 새로 의장·부의장과 상임위원장을 선출할 예정이다. 그러나 작년에 선출된 상임위원장 한 명이 불복해 항소하면서 2심 판단을 더 받아봐야 할 입장이 됐다. 행정소송과 별개로 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시민단체에 의해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형사 고발돼 수사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