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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윤기나는 등껍질과 실처럼 가는 다리
사그락거리는 야상곡은
우리가 안전함을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린다
-린다 호건
리치는 23년 동안의 결혼 생활이 실패로 돌아간 후,
말레이시아에서 외롭게 보낸 한 해를 이렇게 회고한다.
깊은 밤 홀로 앉아 글을 쓰는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밤
바퀴벌레 한 마리가 나타나서 곁에 머무르기 시작했는데,
바퀴벌레는 꼭 그를 지켜보는 듯했고
어쩌면 그저 함께 있어 주려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리치는 그런 바퀴벌레의 존재에 고마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고마움이란 바퀴벌레에게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이 아니다.
물론 과학자들은 바퀴벌레의 뛰어난 생존능력에 마지못해 감탄하지만 말이다.
에디 루빈의 부모는 루빈이 열다섯 살 되던 해에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때부터 루빈의 목표는 자유를 얻을 때까지 정신병원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썬> 잡지에 기고한 그의 글을 보면, 입원 후 며칠을 벽에 패드를 댄 환자실에서 보냈다고 한다.
안경을 벗으면 법적으로 시각장애인이나 마찬가지였던 그는
안경을 비롯한 모든 소지품을 빼앗긴 채 환자실에 갇혔고,
밖에서는 다른 환자들의 야유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시야의 끄트머리에 어떤 움직임이 포착되었는데, 흐릿한 갈색 덩어리 같아 보였다.
루빈은 그 물체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고, 이내 그것이 바퀴벌레임을 알아차렸다.
평소에 바퀴벌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동반자를 만난 것 같아 반가웠다.
그는 바닥을 기어다니는 바퀴벌레를 쫓아다녔고,
침대 매트리스 위를 오르내리거나 몸단장을 하거나
먹이를 찾아다니는 바퀴벌레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바퀴벌레는 갑자기 벽에 난 틈새로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 루빈은 자신을 자유로 인도해 줄 교훈을 얻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바퀴벌레가 감옥 같은 이 곳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았다면 자신도 그럴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탈출에 성공했다.
인간과 바퀴벌레 사이의 긍정적 교감을 담은 이야기는 흔치 않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발간된 몇몇 이야기들은 주로 감옥을 배경으로 한다.
1938년 텍사스 주의 교도소에 수감된 한 사람은 휘파람을 불면 바퀴벌레가
자신의 독방으로 찾아오도록 훈련시켰다고 했다.
그리고 <위클리 월드 뉴스>라는 주간지는
1995년 애완용 바퀴벌레를 키우던 한 죄수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이 죄수는 바퀴벌레에게 치즈를 먹이고 목에다 실을 묶어 감방을 거닐며 산책도 시켰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뉴스거리가 된 것은 교도관이 바퀴벌레를 죽이는 바람에
주인공이 교도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감옥이나 병원 외의 장소에서 바퀴벌레와 마주친다면 그것은 전혀 반갑지 않은 만남으로, 관심이나 감탄보다는 혐오감을 자아낸다.
인류보다 훨씬 더 오래 지구에 머문 이 바퀴벌레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바퀴벌레의 뛰어난 환경적응력에 대한 가장 큰 도전,
곧 바퀴벌레에 대해 무턱대고 적대적인데다 끊임없이 불어나고 있는 인간들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1980년 예일대에서는 동물 종의 인기 순위를 정하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모든 사람들의 예상대로 바퀴벌레가 모기마저 누르고 당연히 꼴등을 차지했다.
온난한 기후, 어두컴컴한 장소, 우리가 먹다 남긴 음식 등을 좋아하는 바퀴벌레의 특성상,
바퀴벌레는 사람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는데,
이러한 밀접한 관계를 견디지 못할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퀴벌레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구역질나고 두려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바퀴벌레가 벽 속에 숨어 추접스럽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고,
바퀴벌레 퇴치용품을 팔아 거금을 버는 회사들은
수천 마리의 바퀴벌레가 우리 곁에서 때지어 살며 세균과 질병을 퍼뜨리고
우리의 생활 공간을 점령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며 홍보에 열을 올린다.
바퀴벌레 하면 연상되는 오물(따지고 보면 다 우리가 배출하는 오물이지만) 때문에
우리는 이 무해한 곤충이 물지도 쏘지도 않고 인간에게 직접 해를 입히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생물학자 로날드 루드의 주장에 따르면,
바퀴벌레는 해충이 아니며 우리를 해칠 만한 균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우리 문화가 지닌 바퀴벌레 혐오증을 합리화하기 위해
바퀴벌레를 특정 질병과 연관시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렇게 도출된 모든 연구결과는 정황적 증거에 불과하다.
인체에 감염될 수 있는 그 어떤 질병도 바퀴벌레와 직접 연관성이 있다고 밝혀진 바가 없다.
바퀴벌레가 질병을 퍼뜨린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누명이라는 것이 대다수 과학자들의 생각이다.
바퀴벌레는 대개 일생을 건강하게 지낸다.
또한 바퀴벌레가 건드린 음식을 사람이 먹는다 해도
바퀴벌레가 남긴 오염물질은 얼마든지 다른 통로로 우리 몸 속에 들어올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대부분 이 사실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다.
바퀴벌레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너무도 극단적이어서,
현재 밝혀진 4천여 종의 바퀴벌레 중 사람과 더부살이하는 서너 종을 박멸하는 데 사용되는
살충제가 미국의 살충제 총 소비량의 약 25%를 차지한다.
바퀴벌레와 오물
수생곤충, 파두벌레, 인도 카나리아, 종려나무벌레 등등,
바퀴벌레는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집에 바퀴벌레가 산다는 것은 집이 지저분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창피해서 붙인 이름들이다.
바퀴벌레가 나오는 집에 사는 주인은 성격에 문제가 있고 생활도 너저분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가 접하는 문학이나 영화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리고 바퀴벌레가 가장 수치스러운 곤충이라고 응답한 한 설문조사의 결과도
이러한 믿음에 기인할지 모른다.
바퀴벌레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수치심과 따가운 눈총의 원인이 된다.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 타인의 비판을 모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집에서 바퀴벌레를 없애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집을 깨끗이 청소한다 해도,
우리가 온난한 지역에 사는 한 우리는 바퀴벌레와 동거할 수밖에 없다.
바퀴벌레는 먹이를 지나치는 일이 거의 없으며,
먹이의 종류도 정말 광범위해서 심지어 책 제본에 쓰이는 접착제까지 먹는다.
딱딱하든 말랑말랑하든 못 씹는 물질이 거의 없는데다,
극소량의 먹이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음식 부스러기 한 톨도 놓치는 일이 없다.
극한 상황에 처하면 먹이 없이 석 달을 버틸 수 있고, 물 없이는 한 달을 버틴다.
바퀴벌레 종류 중 몇 가지는 쓰레기나 하수구 속에 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퀴벌레가 더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바퀴벌레는 의외로 깨끗한 습성을 지닌 곤충이다.
고양이가 온 몸을 핥는 것과 비슷하게
바퀴벌레도 몸을 비틀면 더듬이와 다리 구석구석에 입이 닿는다.
그리고 인간과 접촉한 뒤에는 더더욱 격렬하게 몸을 씻는다.
카프카의 단편 <변신(Metamorphosis)>을 비꼰 듯한 소설 <신발가방(Shoebag)>의 저자 메리 제임스는 이 사실이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신발가방>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밤새 소년으로 변해버린 어린 바퀴벌레에 대한 이야기다. 온몸이 세균으로 득실거리는 인간으로 변한 이 바퀴벌레는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한다.
벽 속에 숨어 있는 바퀴벌레를 상상할 때,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다기보다는
몇 시간씩 몸단장에 열중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바퀴벌레의 일과는 대부분 어두운 은신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세정식(洗淨式)에 하루 몇 시간을 투자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살충제 제조업체들의 탓도 크다.
바퀴벌레를 고양이 같은 사랑스러운 동물과 비교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매출에 지장이 있을테니까.
바퀴벌레와 알레르기
최근 들어 바퀴벌레를 알레르기와 연관짓는 경향이 있다.
한 주요 일간지는 “바퀴벌레를 싫어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며
다음과 같이 낯익은 독설을 내뿜는다.
“만인의 혐오대상 바퀴벌레는 동절기 알레르기와 천식을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기사는 그 근거로 최근에 실시된 연구를 내세웠는데,
연구에 따르면 바퀴벌레 사체의 껍질이 분해되면서 생기는 화학물질을 들이마시면
두드러기쑥의 꽃가루나 민들레 씨가 일으키는 것과 똑같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관성은 생각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다.
알레르기는 매우 복잡한 질병으로, 그 원인을 찾아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알레르기라고 명명된 증상의 근본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알레르기가 40년 전에 비해 두 배에서 열 배는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최근에 출판된 한 환경의학 서적에 의하면,
알레르기가 더 빈번하게 나타나는 까닭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공기, 음식, 물의 유독성 화학물질 함유량 증가,
그리고 이러한 물질의 체내 축적에 있다고 한다.
이 책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해진 실내 공기오염도
알레르기의 증가에 일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근대 건축물에 사용되는 건축자재, 그리고 근대 농사법으로 재배되어
화학약품에 찌들고 필수 영양소는 결핍된 음식이 실내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윤리적인 기자나 유력한 신문이라 해도 문화적 그림자의 영향을
무의식 중에 전파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접하는 글이나 주장을 비판적인 눈으로 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 글이나 주장의 결론이 지구 공동체의 구성원인 특정 동식물에 대한 적대심을 키운다면
특히 더 그래야 한다.
브라질의 알레르기 연구자가 1997년에 실시한 연구 결과,
바퀴벌레 외골격의 성분 중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만한 성분의 비중은
2%에서 3%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앞서 신문기사에서 말한 알레르기의 ‘주범’이라고 하기에는 한참 모자라는 수치다.
브라질에서는 또한 바퀴벌레에서 나온 성분으로 백신을 개발하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동종(同種)요법의 전제를 기반으로 한 연구다.
끈질긴 천식이나 알레르기, 또는 다른 호흡기 질환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바퀴벌레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동종요법 치료에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바퀴벌레와 알레르기간의 합리적 상관성을 찾는다면,
바퀴벌레가 알레르기에 대한 ‘처방전’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도 적대심은 관찰력과 관찰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바퀴벌레를 증오하고 죽인다고 해서
화학물질이 범람하는 세상에 대해 일어나는 알레르기 반응을 막을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적 만들기’가 초래할 결과나 ‘적 만들기’를 종용하는 왜곡된 선동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도 없다.
바퀴벌레에 대한 공포증적 반응
바퀴벌레에 대한 반응은 대부분의 경우 히스테리에 가깝다.
비합리적인 공포는 결국 살충제 남용을 초래한다.
예를 들자면, 스무 살 된 한 이스라엘 여성이 날아다니던 바퀴벌레가 혓바닥에 앉자
살충제를 입에 뿌렸다는 기사가 최근 신문에 실렸다.
그 여성은 입, 혀, 성대와 후두에 화상을 입고 병원 신세를 졌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바퀴벌레가 너무 싫은 나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충제를 집어들었다는 말로밖에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지 못했다.
수 허벨의 저서 <또 다른 질서로부터의 공격: 벌레 이야기(Broadsides from the Other Orders: A Book of Bugs)>에 등장하는 한 대학교수는 평생토록 바퀴벌레 공포증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바퀴벌레만 보면 공포에 온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공포증적 반응은 그 강도 때문에 일종의 장애로 보아야 한다.
앞서 나온 젊은 여성이나 대학교수의 극단적인 반응은
공포증을 비롯한 다양한 불안증세야말로 현대 사회의 가장 흔한 정신적 질환이다.
치료법은 긴장을 완화시키는 심신단련법과 공포의 대상을 일부러 떠올리는 요법을 병행하여
환자의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치료법은 증상을 다루는 데에 그친다.
심층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그 무엇,
우리가 외부세계에 투영시키는 그 무엇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기력을 배후조종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그 무엇의 근원은 장막 뒤에 숨은 무슨 마술사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그림자’이다.
그 장막을 거둬내고 투영된 사물에 의식의 빛을 비추어야만
그 사물의 괴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타자(他者)에 대해 좀더 적절한 반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타자가 바퀴벌레라 할지라도 말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바퀴벌레에 대해 공포증까지는 아니지만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도 높은 거부반응을 보인다.
이러한 감정은 제대로 분석되지 않은 채, 바퀴벌레에 해대 쏟아지는 부정적인 선전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든다.
내가 구독하는 지역신문의 원예 관련 기사 하나를 예로 들어보겠다.
글쓴이는 해충방역업체 출시의 도시 곤충학자인데,
바퀴벌레를 살충제를 뿌리거나 짓밟아 죽였을 때 느껴지는 ‘만족감’에 대해 기사를 썼다.
비슷한 맥락에서 랩과 헤비메탈을 하는 한 그룹은
이름을 파파로치(Papa Roach, 아빠 바퀴벌레)라고 지음으로써
대중문화가 혐오해마지 않는 곤충을 일부러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바퀴벌레 박멸을 통해 권력을 맛보고 마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인류 대 바퀴벌레’라는 인식 속에서
바퀴벌레를 죽일 때마다 조금씩 어떤 안전지대로 접근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적으로 규정한 상대를 제거함으로써 얻는 만족감은 금방 시들해진다.
다른 피조물을 적으로 규정한 사람에게 안전이란 항상 요원한 목표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를 지구상의 도망자로 만들고,
도망자가 된 우리는 의심에 사로잡혀 싫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죽이면서 살게 된다.
- 계속 -
[출처] (펌)다른 존재와 관계 맺기-바퀴벌레|작성자 씽리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