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일 이스파한에 왔다. 옛날 번영했던 사파비 왕조의 수도였던 곳, 버스에서 내리자 버스터미널안에 있는 호텔이 눈에 들어와서 들어가 봤다. 깨끗하고 비싸지 않아서 교통이 편리한 터미널의 호텔, 카베호텔에 2박 있기로 했다.
이란과 미국은 오랜 적대관계에 있다. 그건 식민지 시대의 유산, 식민지 착취의 역사와 관련된다.
1951년 이란의 국회 마질레스는 민족주의자이며 개혁가인 모사데크의 법안으로 영국이 소유했던
Anglo-Iranian Oil사를 국유화시킴으로서 모사데크는 강력한 정치력을 획득했다.
그 결과 팔레비왕은 마지못해 그를 수상에 임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모사데크는 토지개혁 정책등 개혁을 추진하여 실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농토를 소유하도록 추진하였다. 특히 당시 석유로인한 수익의 90프로는 영국이 가져가고 나머지는 왕실과 일부 권력층에게 돌아가 일반 이란국민은 석유생산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체제였다.
즉 석유생산으로 인한 혜택은 영국과 팔레비 왕실, 그측근이 독점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50년에 AIOCA(Anglo-Iranian Oil사)는 2억 파운드의 이익을 냈지만 이란인들에게는 광구 사용료와 이윤 분배, 세금 명목으로 불과 1600만 파운드밖에 지급하지 않았다.
이 회사는 이란 정부보다 영국 정부에 훨씬 더 많은 세금을 냈다(5000만 파운드). 더구나 이 제국주의 강도질은 영국이 그 지분을 51% 소유하고 있던 한 회사에 의해 저질러졌다.
이란인들의 반감은 그들의 석유가 영국에서보다 국내에서 더 비싼 가격에 팔린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
1953년 석유회사의 국유화로 손해를 보게되는 영국은 미국의 CIA와 손잡고 모사데크를 몰아내고 팔레비 왕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다. 팔레비왕은 정권을 다시 잡자 친서방정책으로 일관하고 반 종교, 반이슬람정책을 편다. 부패한 독재정에 반대하는 정적이나 반정부 인사들을 비밀 경찰조직 사바크를 창설하여 무자비 하게 탄압한다. 모사데크의 개혁정책도 무산된다.
1978년 신학교 마드라사의 학생을 필두로 반정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망명중이던 이맘 호메이니의 라디오 연설의 영향이 컸다. 비밀경찰 사바크의 탄압을 이겨내고 1979년 이란혁명이 팔레비를 축출했다. 미국의 하와이로 망명한 것이다. 우리의 4.19와 유사하다 하와이 망명까지.
이맘 호메이니가 귀국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팔레비왕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는다. 재판결과에 따라 전왕 팔레비를 미국에 인도 요청하였으나 미국은 응하지 않는다.
이에 반미를 외치는 이란 시위대는 미국 대사관에 난입 대사관원 70여명을 억류한다. 군대와 헬기를 동원하여 인질을 구출할려던 독수리발톱 작전도 실패한다. 미군 수송기와 헬기가 충돌하는 바람에 수송기 승무원5명과 헬기에서 3명이 사망하는 희생만 남겨둔채 미군 델타포스는 철수하고,
미국은 사과와 보상끝에, 알제리에서 이란과 협상, 444일간의 대사관 인질사건은 종결된다. 협상결과 팔레비왕의 미국내 자산 700여만 달러를 이란에 돌려주기로 하고, 팔레비왕은 미국에서 출국한다. 쫓겨난 것이다. 결국 이집트에서 죽게된다. 인질들은 풀려나 미국에 돌아온다.
이스파한의 옛 이름은 아스파다나(Apadana)이다. 테헤란 남쪽 405km 지점에 위치한다. 자그로스 산맥 동록(東麓)의 해발 고도
1,585m의 고지에 있다. - 이맘 호메이니 광장
이스파한의 기후는 온화하다. 테헤란에서 시라즈에 이르는 간선 도로와 자그로스 산중에서 카비르 사막 남쪽 언저리 지방으로 가는 도로와의 접속점에 위치, - 이맘 호메이니 광장의 모스크,
이스파한은 예로부터 이 지방의 중심 도시로서 번영하였다. 특히 1598년에 아바스 대왕이 이곳을 수도로 정한 이래 사파비 왕조 때에 번영하였다.
이스파한은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침략도 잦았다. 13세기 몽골의 침략을 받아 파괴됐고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에 항거했다가 7만명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당시 기록은 살해된 이스파한 시민들의 머리를 쌓아 언덕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스파한은 사파비 왕조 시대에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압바스 1세(1587∼1629)는 1598년 이스파한을 수도로 정하고 도시를 가꾸었다. 유적의 대부분이 그 시절 만들어졌다. 문헌에 따르면 최전성기 인구가 100만명을 넘었고, 163개의 모스크, 48개의 학교, 1,801개의 가게, 263개의 공중목욕탕이 있었다고
옛 페르시아 도시의 모습을 가장 잘 남기고 있으며, 구시가의 중앙 광장을 둘러싸고 사파비 왕조 시대의 건축물이 많이 있다.
이맘 호메이니 광장은 1612년 건설을 시작한 당시의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가로 512m, 세로 160m의 규모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Naqsh-e Jahan이라 불리던 작은 광장을 아바스1세가 다시 대규모로 폴로경기장으로 활용 할 목적으로 지었다.
이스파한은 또한 농산물의 집산지인 동시에 은 · 구리 세공 · 사라사 · 융단 등의 전통 공예품의 생산지로서 유명하다.
이맘 호메이니 광장의 모스크
이스파한의 교외 소패산에는 케이블카가 있다.
메마르고 황량한 풍경이다. 강수량이 부족해서 나무가 없다.
산의 아래쪽에는 그래도 듬성 듬성 나무가 좀 있다.
이스파한 소패산 근처의 시외곽 풍경
별표는 우리가 들렸던 이란의 도시들이다, 터키에서 넘어와서 타브리즈, 테헤란, 캬샨, 이스파한, 쉬라즈, 야즈드, 마슈하드를 끝으로 투르크메니스탄의 아슈하바드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