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J 핀켈의 ‘괜찮은 결혼’
미국에서 결혼의 역사를 보면 크게 세 개의 흐름이 있다. 첫 번 째는 실용의 시대이다. 경제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결혼을 하였다. 다음은 사랑의 시대이다. 농사법이 발달하고, 과학의 발달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결혼에 사랑을 강조하는 시대가 되었다. 산업자본화 사회가 되어서 인구가 늘고, 부부가 모두 경제활동을 하면서 성 역할을 주장한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났다. 이제 부부간의 역할 문제가 제기되면서 결혼은 위기를 맞는다. 이때 나타난 결혼생활에서 자아표현의 문제가 대두했다.
고학력 인구가 증가하면서 지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지금까지의 문화전통을 거부하는 반문화혁명이 일어났다. 미국인들은 이제 자아발견과 개인의 성장이라는 방향으로 항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미국보다 한 발 늦기는 하지면 역시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는 결혼에서 부부가 서로의 진정성과 자기발전의 욕구 충족을 돕는 자아 표현을 강조한다. 오늘의 이 같은 현상을 심리학자 로버트 벨라는 ‘자아 표현의 관계는 진정한 감정을 완전히 공유하는 데에서 생긴다. 사랑이란 서로 끝도 없이 풍요롭고, 복잡하고, 흥미진진한 자아를 모색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결혼은 시간이 흐르면서 욕구의 변화가 나타난다. 이 변화의 과정을 ‘산에 오르는 것’으로 표현했다. 맨 아래에는 생리적 욕구의 단계이다. 다음 단계는 산의 조금 더 높은 곳으로서 안전의 욕구 단계이다. 다음은 소속감과 사랑의 욕구이고, 더 위에는 존경의 욕구이다. 산의 꼭대기에는 자아살현 욕구의 단계이다. 산은 높이 오를수록 숨이 차고 더 많은 산소를 요구한다. 여기서 산소 공급이란 서로의 정서적, 심리적 욕구에 대한 배려이다. 결혼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하다. 오늘의 결혼생활은 이 모든 단계를 잘 거쳐내야 한다.
오늘의 결혼 패러다임이 바뀌었는데도 (미국사람의 경우) 결혼 자체를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따라가지 못한다. 수잔 겔로그는 ‘오늘날 미국 사회를 보면 가족의 이상과 가치에 대하여 명쾌하게 공감하는 생각을 찾아볼 수 없다. 많은 미국인들은 가정생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있다.’라고 했다. 이 말은 미국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가 오늘날에 겪고 있는 문제가 아닌가?
이제부터 책 ‘괜찮은 결혼’을 참고로 하여 ‘건강한 결혼의 길’을 찾아보자.
우리는 장기간에 걸쳐서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때문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려면 부부가 함께 가로막고 있는 덤불을 성공적으로 헤쳐나가야 한다. 부부간의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막연히 세월을 흘려보내면서, 아이들이 장성하여 집을 떠나면 회복되리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일반적으로 더 나빠진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지만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예외이다 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한다.
대부분의 결혼 생활에서 신혼 때의 만족감을 지속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아이가 생기고, 부부의 성생활이 무너지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결혼생활의 만족감을 유지하려 나선다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만족한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
결혼생활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부부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를 가정하면서 전략을 세워야 한다. 두 가지 가정이란 양립성과 개방성이다.
(1) 양립성
양립성이란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있다는 말이다.
첫째. 부부란 결혼 축사에서 말하듯이 하나로 화합된 것이 아니고, 양립해 있다는 가정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이유를 보면, 두 사람을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는 동기가 없으므로 서로 다르게 사는 것이 필연적이다, 라고 말한다. 부부라고 하여 일치하는 동기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추구하는 목표가 일치하더라도 두 사람이 추구하는 방법이 다를 수가 많다. 함께 추구하려면 상당한 조정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부부가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감정을 일치시키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인간이 갖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양립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둘 중 하나이든 둘 모두이든 양립할 수 없는 목표를 포기하는 것이다.
둘째는 둘 중 하나이든 둘 모두이든 서로의 도움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자신의 기량을 키운다.
셋째는 둘 중 하나이든 둘 모두이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다른 파트너를 찾는다.
서머 세 모움은 이렇게 말했다.
“올해의 나는 작년의 내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변하는 내가 변하는 다른 사람을 계속 사랑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변화는 결혼의 양립성을 높이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부부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함으로 의지하려 하지 말고 스스로 살라는 것이다.
(2) 개방성
개방성이란 부부가 서로 마음을 열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가정이다. 이것은 자아 표현의 결혼생활이다. 자아표현은 부부가 지금 드러나 있는 자아와 진정한 자아를 서로 이해하고 받아주자는 것이다. 즉 진정성을 말한다. 심리학자들이 이 문제를 연구하여 내린 결론은 부부가 현실의 상대와, 이상으로 바라보았던 상대를 서로 결합하여 서로를 바라보는 경우가 가장 행복하더라고 했다.
사랑에 빠져서 연애를 할 때는 실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상화된 모습만 보인다. 결혼을 하면 반대가 된다. 연애 때처럼 현실의 모습을 보지 말자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재와 이상을 결합하여 보기로 하자. 사랑은 상대의 긍정적인 면을 더 돋보이도록 하고, 부정적인 면은 눈을 감도록 하는 마력이 있다.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장기간 조사한 연구(특히 아내들에게)를 하였다. 가장 성취감을 주는 결혼생활의 특징은 상대를 정확하게 평가하기보다는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이상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상대방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는 것이 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더라는 것이다. 예로서 부부모임에 함께 참석하여 무례한 행동을 하였더라면 다만 예의가 없는 사람일 뿐이지 나쁜 사람은 아니다, 라고 보아주니까 관계가 더 좋더라는 것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 중에도 아내 자랑을, 남편 자랑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 일반적인 평가는 주책 정도로 본다. 그러나 행복한 부부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런 주책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3) 직업의 선택
에릭슨이 분류한 인생의 단계에서 청장년기는 후손을 만드는 욕구로 결혼을 한다. 어른으로 진입하면서 떠안아야 할 또 하나의 과업은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이다.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다.
모든 사람은 직업을 선택할 때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직업을 성공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직업선택에 불만이 생기면 청장년기의 삶도 고단해진다.
직업을 선택할 때는 개인의 욕구가 가장 큰 영향을 준다. 개인의 성격과도 관계가 깊다. 성격이나 욕구가 만들어지는 것은 어릴 때부터 성장해온 과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성장하는 과정에 세상을 사실 그대로도 보지만 환상적으로 보기도 한다. 환상에 의하여 직업을 선택한 경우는 도중에 직업을 바꾸는 일이 많다. 직업을 바꾸는 일이 버스를 옮겨 타듯이 쉬운 것이 아니다. 많은 고민을 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일이 흔하다. 이런 이유로 청소년기에 직업을 탐색하는 기간을 가지는 것이 성공적인 직업 선택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어른이 되면 괜찮은 줄 알았다(김해남.박종석 지음)’라는 책에서 ‘진영’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직장생활에 관하여 이야기 한다.
입사 3년차의 직장인인 진영씨는 오늘도 아침에 억지로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출근 15분 전이다. 허겁지겁 택시를 타고 출근을 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부장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왜 이 짓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나, 당장 사표를 써야겠다. 사표를------, 사표를 ---, 생각에 젖어 멍하게 있는데 ‘손님, 다 왔어요. 요금 주시고 내리세요.’라는 기사 아저씨의 말씨가 짜증스럽다. ‘아, 예, 예’ 요금을 내고 허겁지겁 내렸지만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었다. 택시 기사까지도 자기를 깔보고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을 선택할 때는 냉정하게 현실적인 여러 가지를 따지기 보다는, 손쉬운 일자리라서, 또는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취직한다고 하였다. 더군다나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은 새롭게 대인관계를 맺어야 할 사람들이다. 나를 따뜻하게 대하기보다는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청소년기까지 보내면서 사람들과 맺어온 인간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가 세상을 마주 할 때는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까지의 과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울한 과거는 어른이 되어서 사회에 진출하였어도 우울한 사고를 하도록 한다. 그렇다고 하여 오늘의 어려움을 나의 과거로만 돌릴 수도 없지 않는가? 또한 과거를 바꿀 수도 없지 않은가?
이미 지나간 과거의 경험을 바꿀 수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주어진 현실을 운명이다 라면서 고통을 감내하면서 살아야 할까? 지금의 우리 생각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과거가 나빴다고 미래도 나빠야 한다는 법칙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무의식이 슬프고, 험난한 길을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길밖에 없다. 쇼펜하우어의 말이 도움이 될 것이다.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사물은 어디에도 없다. 거기에 대한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일 뿐이다.”
첫댓글 네~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