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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 : 12 -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 고전 1 : 14 -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
고전 1 : 12 -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
고린도 교회에는 4대 당파가 있었다.
바울파 - 바울이 이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요(행 18: 1-7) 특히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에(롬 11: 13) 바울을 추종하는 자들이 있었다.
아볼로파 - 아볼로의 능변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있었다.
* 행 18: 24 -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 행 19: 1 -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게바파 -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였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있었다.
* 갈 2: 7-10 -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그리스도파 - 이들은 사람을 따르는 당파와 상관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 갈 2: 12 -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 한다는 것이니
'너희가 각각'의 헬라어 '헤카스토스 휘몬'(*)은 각자가 자기 견해를 밝히었음을 시사하는 말로 분쟁의 문제가 얼마나 넓게 확산하였는지 알려준다.
그들의 문제는 신학적인 견해 차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몇몇 지도자들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 또는 편파심 때문에 조성된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그 분파를 넷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것이 전부였는지 혹은 그 외에도 더 많은 분파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본문에 소개된 네 분파의 내용을 살펴보자.
2] 바울에게
바울에게 속했다고 하는 자들은 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자들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에 이방인 개종자들이 모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여튼 그들은 바울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다른 지도자들을 배격(排擊)하면서까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향한 바르지 못한 충성심을 배격하고 비난했다.
3] 아볼로에게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학자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고 웅변적인 사람인 것 외에 그를 알 수 있을 만한 자료는 없다.
* 행 18: 24-28 –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 딛 3: 13 – 율법교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
다만 고전 3: 16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라는 말로 보아 그가 고린도 교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풍부한 학식으로 인해 지식층의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였을 것이고 그들은 곧 바울을 멀리하고 아볼로를 지도자로 세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아볼로가 대립적이거나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증거는 없다.
4] 게바에게
'게바'(*, 케파스)는 '바위'(rock)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 '게바'(*)의 음역으로 베드로의 아람어식 이름이다.
그가 당시에 고린도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혹자는 이 파를 바울에 대항하는 율법주의 부류로 보기도 한다. (Baur).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신학적인 것이 아니며 단순한 편당 심리에서 발생 된 것이므로 이러한 해석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 파는 베드로에게 예루살렘에서 지도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그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모여 그를 추종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베드로의 이름을 헬라식으로 부르지 않고 아람어로 부른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5]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이 파가 어떤 성격인지 알기가 매우 곤란하다.
혹자는 고린도 교회 내의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지닌 한 분파라고 한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고린도 교회의 분파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은 설득력이 없다.
추측하건대 이 파는 위의 세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당파인 듯하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그리스도에게만 속하였다고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 역시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그 곳에 당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러한 당파를 만든 그 정신을 책망하고 있다.
고전 1 : 13 -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며 나뉘실 수 없는데, 그의 몸 된 교회에 어떻게 분파가 합당하겠는가?
그 교회를 개척한 바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비교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바울이 죽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의 이름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히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며 일치 단합해야 한다. 분쟁과 분열은 수치스러운 죄악이다.
1]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나뉘었느냐'의 헬라어 '메메리스타이'(*)는 완료시상 형태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나뉘어졌고 지금도 회중 안에서 계속 나눠지는 상태로 있느냐?'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본 절을 혹자는 단지 문자적으로 '그리스도가 나뉘어졌다'라고 긍정적인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Lachmann, Meyer).
그러나 이 문장은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는 수사적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아무튼 이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진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은 인간 지도자를 중심으로 당쟁을 일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값을 무효화(無效化)시키며 그리스도만이 가지는 구주로서의 권위를 무시하는 결과임을 보여준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사역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아무도 그리스도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3]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이 질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유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름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토 오노마'(*)는 전치사 '에피'(*, 행 2: 38)나 '엔'(*, 행 10: 48)과 함께 쓰인 용법보다 강한 표현으로 영적인 결합의 상태로 들어감을 가리킨다.
* 행 2: 38 -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 행 10: 48 -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본 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나 삼위일체 하나님과 견준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며 나뉘실 수 없는데, 그의 몸 된 교회에 어떻게 분파가 합당하겠는가? 그 교회를 개척한 바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비교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바울의 이름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주 안에서 겸손히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며 일치 단합을 보여야 한다. 분쟁과 분열은 수치스러운 죄악이다.
고전 1 : 14 -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 -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
바울은 자기가 세례(침례)를 강조했거나 실시하지 아니한 것을 감사했다. 세례는 주께서 친히 명하신 의식이며, 믿는 자는 세례를 받아야 하며, 세례를 받지 않는 것은 주의 명령을 어기는 죄가 된다.
* 마 28: 18-20 –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그곳에 보내신 것은 세례를 주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세례는 중요하지만 구원에 본질적이지는 않다. 즉 세례를 받으면 반드시 구원받는다든지. 세례를 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에 본질적인 것은 복음 신앙뿐이다.
사람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에 이를 것이다.
* 막 16: 16 -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 요 3: 36 -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1]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그리스보'는 행 18: 8에 나타나는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와 동일한 인물로 보인다.
* 행 18: 8 -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회당은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멸망 이후 포로기 때 유대인들이 예배와 기도를 목적으로 모임을 하던 장소로써, 점차 종교뿐 아니라 교육과 재판 등 유대인들의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형태로 변모해 갔다.
그리고 본 절의 '가이오'라는 이름은 행 19: 29에 나오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는 다르지만 롬 16: 23에 언급된 모든 고린도 교회를 접대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 행 19: 29 -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 롬 16: 23 -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또한 요삼 1: 5-6에 나오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가이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Robertson).
* 요삼 1: 5-6 –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여하튼 바울은 이 두 사람과 스데바나 집 사람(16절)에게만 예외로 세례를 베풀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하지 않다. (Morris).
바울이 제한적으로 세례를 베푼 이유는 구태여 밝히고 있지 않지만, 바울이 이들에게만 세례를 베푼 것을 '감사한' 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는 몇몇 당파의 지도자들이 자기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서로 다투어 가며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세례의 본래 의미를 잃고 세례를 단순히 당파 확장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세례를 베푸는 데 있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몇몇 소수의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었을 것이다.
이 사실이 바울 자신이 제자를 만들고 있다는 비방을 막을 수 있어서 그는 기뻐하였다.
이제 세례의 참된 의미에 대하여 알아볼 때가 되었다. 세례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밥티스마>로서 원래는 '물속에 잠김'이라는 뜻인데, 롬 6: 3-5에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으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을 가르쳐 주고 있다.
* 롬 6: 3-5 –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이는 주님과의 연합을 상징하는 의식으로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는 말은 세례가 먼저 주님의 죽음과의 연합을 표현하는 의식임을 가르친다.
골 2: 12에서도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라고 함으로써 역시 같은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 골 2: 12 –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세례는 롬 6: 5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뿐 아니라 부활에도 연합했음을 묘사하고 있다.
* 롬 6: 5 -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연합이라는 <쉼퓌토이>는 '함께 자라는 것들'이라는 뜻이다. 즉, 옛날에는 우리가 각자였지만 주님과 연합한 후에는 주님 안에서 주님의 생명을 공급받으며 주님과 함께 자라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한 주님과의 연합의 의미는 '죽음과 다시 삶'을 상징한다. 세례는 먼저 죄에 대하여 죽음을 상징한다. 주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을 때 우리의 죄에 대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과 연합하였다면 우리 역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다. 세례는 일종의 장례식이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삶을 끝내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반드시 한 번 죽어야 한다.
그것을 죄에 대한 죽음이라고 했으며 이는 주님을 믿고 영접할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루어지지만, 세례라는 상징적 의식을 통하여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세례는 또한 주님 안에서 새 생명으로 다시 삶을 상징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다고 하였다.
이는 주님의 생명 새로움 안에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 우리의 생명이 아닌 주님의 생명 안에서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의 것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해야 하며, 주님 안에서만 살아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주님 밖에 있다면 우리는 절대 안전하지 않은 것이다.
세례는 또한 거듭남을 상징하는 표가 된다. 죽음과 다시 삶이란 곧 '거듭남'인데, 이를 요 3: 5에서는 '위로부터 난다'라는 뜻으로 말하기도 하였고, 벧전 1: 23에서는 '다시 태어난다'라고 말하였다.
* 요 3: 5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벧전 1: 23 -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아무튼, 거듭남이란 한 번 죽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영적인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요 3: 5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원리는 세례를 가리킨다. 곧 세례가 물세례와 성령세례로 구분되는 것은 세례가 거듭남의 원리와 연관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물로 거듭남이란 물세례의 상징을 통하여 구원의 표를 얻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거듭남의 원리에서 보면 물세례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다시 사는 것을 뜻한다.
거듭남의 원리에서 보면 성령세례는 영적으로 죽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되어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에도 여백의 공간이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내 삶에 여백이 클수록 사랑과 행복을
넉넉히 채울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건강과 행복이 늘 함께 하시길 소원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