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의 뿌리 잘 다스리면 모든 망상 없어집니다 / 고봉스님
사소한 일 하나까지도 인연따라 일어나지 않는게 없으니, 결국 내 마음이 지어낸 일이지요.
일체가 다 스승이고, 일체처가 다 법석이죠.
팔만사천 번뇌 사그라뜨리려면 '나'를 버리는 정진 있어야 합니다.
스님(1931~2003)은 1931년 충주에서 출생, 18세때 해인사 입산하여 영월스님을 은사로 득도, 인곡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해인사 선원장을 역임하였다.
•
•
내가 태어난 곳은 충주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는 벽지인데 어릴 때 스님구경이라고는 못했어요.
그런데 이웃에 사는 친구의 누님이 해인사로 출가를 했어요.
그 친구를 통해서 불교 얘기랑 해인사 얘기를 많이 듣게 됐지요.
해인사에는 도닦는 사람들이 가득하다고 했어요.
도인들은 한결같이 말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딱 소리만 나면 먹을 것이 들어오고 또 딱 소리만 나면 먹을 것이 나간다고 해서 어린 마음에 신기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 친구는 또 부처님일대기랑 6조 혜능스님 얘기도 들려줬어요.
그게 제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평소에도 막연하게나마 도 같은걸 한 번 닦아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친구의 말이 도화선이 되었지요.
자나깨나 해인사가 무릉도원처럼 다가왔습니다.
해인사는 어린 소년의 꿈이요, 이상향이 돼 버렸어요.
부모님한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출가한다고 하니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3년만 공부하고 돌아오겠다고 하니까 네가 도를 깨치면 이세상에 도 못깨칠 사람 없겠다며 허락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는수 없이 말도 않고 집을 나와 해인사로 향했습니다.
그때가 내 나이 18세되던 해였습니다.
대구를 거쳐 고령에 도착한 다음 해인사까지 걸어갔습니다.
마을사람들에게 도닦으러 해인사에 간다고 하니 주지스님을 찾으라고 해요.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스님' '스님'하는데 불교용어를 잘 몰랐던 나의 귀에는 꼭 '神님' '神님'하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정화전이었던 당시 해인사에는 현당 등에 대처승들이 머물렀고, 가야총림으로 불리던 관음전과 퇴설당 그리고 선열당 등에는 비구승들이 살았습니다.
나는 가야총림에서 행자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해인사에는 방장 효봉스님을 비록 청담스님 구산스님 등 큰스님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퇴설당 너머로 언뜻 언뜻 보이는 큰스님들의 좌선하시는 모습은 그야말로 선풍도골의 풍모 그대로 였습니다.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발심이 될 때는 돌마루나 툇마루 혹은 우물가에 앉아서 큰스님들의 흉내를 내곤 했었지요.
당장이라도 도를 깨치고야 말겠다는 그 초발심이 지금까지의 수행생활의 밑받침이 되어 주었습니다.
요즈음 수행 납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도 초발심때의 마음을 항상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공부가 어느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것에 그냥 안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공부에 진척이 없으면 포기를 하거나 타성에 젖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천산 암벽이라도 깰 것 같은 초발심때의 마음을 지속해야 합니다.
행자생활중에 염불을 익히라고 하는데 하기가 싫었습니다.
오로지 선방에 가고싶은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스님노릇 제대로 하려면 염불도 알아야 된다고 해서 마지못해 염불도 배우고 강원에도 들어갔습니다.
강사스님께서 천수경을 가르쳐주며 외워오라고 하는데 금방 암기가 됐습니다.
반야심경을 하루만에 다 외워버리니 스님이 어디서 중노릇하다가 왔느냐고 묻더군요.
해인사에 오기전 고향에서 사서까지 익혔던 터라 문리는 어느정도 터져 있었습니다.
일제 암흑기를 막 벗어나 6·25전쟁을 치러야 했던 당시의 한국사회는 암담하고 배고프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의 눈빛은 푸르고 성성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다른 잡생각이 생길 여지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옷한벌에 일단사 일표음의 두타행이 저절로 되던 시절,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마음은 넉넉했습니다.
기한발도심(飢寒發道心)이라고 했어요.
춥고 배고파야 발심이 된다는 얘깁니다.
문명이 발달하여 편리해질수록 도닦기 힘들어집니다.
다 해준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절실해야 공부가 됩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야 화두가 타파되지요.
기본자세가 잘못되면 기름때 묻은 공부, 남보기에 점잖은 공부밖에 안됩니다.
6·25전쟁당시 은사이신 영월스님과 함께 해인사를 떠나 양산 통도사, 언양 석남사, 청도 운문사 등지를 전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이었어요.
전쟁의 와중이었는데도 공부가 참 잘됐어요.
거기서는 화두로 밥을 먹고 화두로 길을 걷고 화두로 잠을 자는 생활이 지속됐어요.
그냥 대충 후다닥 해치우는게 없었습니다.
매사에 화두가 살아있는 생활이 계속됐지요.
그러던 어느날 가슴에 맺힌 것이 확 트이는데 모든 미운 감정들이 싹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
•
백련암에서 약 1㎞ 떨어진 곳에 옛날 조선시대 한적스님께서 벽곡(곡식대신 솔잎·밤 따위를 날것으로 조금씩 먹고 삶) 하시며 수행하시던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에 토굴을 짓고 2~3년간 살았습니다.
진주 응석사 토굴에서도 몇개월 산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1종식에 장좌불와를 하며 용맹정진을 했습니다.
그때 느낀 것이 공부에는 자신의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는 겁니다.
현실에 대한 집착을 그대로 두고는 발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발심하려면 먼저 나라는 것을 버려야 됩니다.
내가 있음으로 명예가 있고, 돈이 있고 여자가 있습니다.
나라는 근본무명 내지 착각을 벗어나 불성으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바로 화두입니다.
화두는 곧 생명체입니다.
화두를 드는 순간, 잡념망상이 다 떨어지는 순간은 살아있는 상태요, 화두를 놓치는 순간은 곧 무명속입니다.
현실에 집착하여 분별심을 일으킴은 곧 역경계에 걸리는 것이니, 이는 무명입니다.
화두를 드는 순간은 이런 경계가 다 떨어져 버리니 화두는 곧 생명이요, 광명이며 지혜고 문수입니다.
화두를 들고 놓는 것도 이와같아 화두를 들면 모든 것에 걸리지 않으니 광명이요, 태양이지만 화두를 놓치면 곧 무명입니다.
화두가 순일하게 잘 이어지려면 나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집착이 모두 떨어져야 합니다.
태풍이 불고 파도가 치는데 배를 띄워봐야 배는 파산하고 맙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속에 있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다 떨어져야 합니다.
마음속의 바람이 가라 앉아야 화두를 들면 순식간에 쏙 몰입하게 됩니다.
이런 도리는 제가 공부를 해봐서 잘압니다.
공부가 잘 안될 때는 반드시 세간사 어떤 일에 걸려 있어요.
그런게 남아 있으니까 공부가 안돼요.
그게 다 떨어진 순간이 바로 발심입니다.
#고봉혜웅선사 #해인사
첫댓글 감사합니다 () () ()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양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
감사합니다._()()()_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소중한 말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