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조직 중 급진파들은 아옌데의 그러한 평화주의 노선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그들 역시 도심에서 소요를 일으켰다. 정부 입장에서는 지지 기반인 그들을 강력하게 탄압할 수 없어 그런 소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우파들은 이러한 모습을 정부의 무능함으로 선전했다. 경찰 조직의 불만도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그런데 이때 중재자가 나타났다. 나라가 점점 내전의 수렁에 빠지게 되자, 보다 못한 카톨릭 성직자들이 나서서 좌우파의 극단적 대립을 막아보고자 한 것이다. 칠레는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로, 기세등등한 우파들도 성직자들의 그런 제의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중재 하에 아옌데와 기민당 당수는 정치적 타협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한편 군대 내부에서는 젊은 장교 중심으로 파시즘이 확산되어 갔다. 급기야 군대는 전국의 주요 공장을 습격해 노동자들의 무장 해제를 목적으로 무장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군사 쿠데타의 수순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협상 끝에 기민당 쪽에서 내놓은 타협안은 이런 거였다. “아옌데의 직무 권한을 사실상 무력화하고 모든 개혁 조치를 원점으로 돌린다.” 사실 이건 완전한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심하던 아옌데는 결국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통해 국면을 돌파하기로 작정한다. 이 시점 이후로 국회는 완전히 문을 닫았고 우파 의원들은 더 이상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법적 근거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진행되고 있던 와중, 군대 내 입헌주의 파와 아옌데를 연결해 주던 알라야 대령이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이제 더 이상 군대 내에 아옌데를 지지해 주는 세력이 힘을 쓸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아옌데의 표정은 이날따라 더욱 어두웠다.
칠레는 남북으로 가늘게 늘어진 나라로서, 화물차를 이용한 물품 유통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화물차 주인들은 이때 차량을 정지시켜 놓고 파업을 벌이고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CIA는 이들에게 하루 4$ 씩 일당을 지급해 주고 있었다고 한다. 정부는 보다 못해 인력을 동원해 화물차를 운행하려 했다. 이때 이를 제지하던 차주와 정부 측 인력이 무력 충돌을 벌이게 되는데, 보수 언론들은 일제히 이 모습을 중계하며 정부를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헌법 파괴자”로 몰아세운다. 군부 내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1973년 9월 4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80만에 달하는 아옌데 지지 세력이 거리 시위를 한다. 일주일 뒤 아옌데의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앞두고 위력을 과시한 것이다. 노동자와 빈민들로 구성된 그들은 “아옌데, 우리가 당신을 지켜주겠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밤을 샌다. 우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9월 11일 오전 6시, 발파라이소에서 해군 부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은 곧장 아옌데에게 전해졌다. 아옌데는 배후를 알아보려 했으나 더 이상 아무도 그에게 보고를 올리거나 답하지 않았다. 오전 9시 30분 경,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라 모네다” 궁 위로 전폭기 두 대가 선회 비행하기 시작했다. 쿠데타의 주역은 참모총장인 피노체트였다. 쿠데타 군은 아옌데에게 망명을 권유했다.
아옌데는 항복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쿠바의 카스트로에게서 선물 받은 자동소총을 들고 직접 교전에 나섰다. 그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대통령 경호대원들과 쿠데타 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폭기는 대통령궁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수세에 몰린 아옌데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정부 측 라디오를 통해 최후의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범죄와 폭력으로도 사회의 진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억압받고 고통 받게 되겠지만 언젠가 가로수 사이로 다시 시민들이 평화롭게 거닐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칠레 만세! 노동자 만세! 민중 만세!”
오후 2시 30분 경, 아옌데는 남아 있는 부하들을 모두 피신시키고 자신의 집무실에서 자결한다. 시신을 목격한 자에 따르면 그의 뇌가 갈라져 뇌수가 벽에 이리저리 튀어있었다고 한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칠레의 좌파 활동가들 수백 명이 학살당하게 된다. 기록에 따라 살해된 사람이 3만에 이른다고도 한다. 1990년 군부 정권이 물러나 민주화 시대가 다시 열리기까지 무려 100만에 이르는 반정부 인사들이 국외 추방을 당해야 했다. 납치, 실종, 고문 피해자는 10만에 달했고 살해, 암매장 당한 사람이 3천이 넘었다.
p.s
군부 독재 시절, 파시스트들과 목숨을 내걸고 싸운 사람들은 역시 주로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특히 한국 대학생들의 시위 방식에 크게 감명 받고 이를 본받으려 노력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