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뉴 트롤스의 '렛 잇 비 미'(1977)는 미국 듀오 에벌리 브라더스가 1959년에 발표한 원곡을 다시 부른 것이었다. 그런데 1964년 미국 싱어송라이터 제리 버틀러가 베티 에버렛과 듀엣으로 부른 것이 에벌리 브라더스의 원곡보다 더 많은 대중의 사랑을 누렸다. 버틀러와 에버렛 버전은 빌보드 5위에 올라 에벌리 브라더스가 1960년 달성한 것보다 두 계단 위였다.
가스펠과 솔 음악으로 팝 그룹 '임프레션스'를 짧게 이끌다 솔로로 데뷔해 더 오래, 많은 히트 곡들을 남긴 제리 버틀러가 지난 20일(현지시간) 시카고 자택에서 85세 삶을 마쳤다고 일간 뉴욕 타임스(NYT)가 다음날 전했다. 그의 조수는 파킨슨병을 앓았던 고인의 죽음을 확인했다.
고인은 솔로 데뷔 후 빌보드 팝 및 R&B 차트에 55개가 넘는 히트곡들을 갖고 있는데 15개의 톱 40 히트곡과 15개의 R&B 톱 10 히트곡들을 보유했다. 메아리 치는 듯한 바리톤 음색에다 방정한 무대 매너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물론 라디오 시대라 가능한 일일 수도 있었다.
1985년 가요계를 은퇴한 뒤 2018년까지 일리노이주 쿡 카운티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민주당원으로 17명으로 구성된 이 자치구 이사회의 일원으로 보건 및 병원 위원회 의장을 맡았으며, 건설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고인은 1939년 12월 8일 미시시피주 북서부 선플라워에서 제리와 아벨리아 버틀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 때 가족이 시카고로 이사해 카브리니그린 주거개발 단지에서 살았다. 그는 2011년 샌디에이고 지역 KPBS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교회를 통해 음악을 배웠으며 10대 시절 커티스 메이필드를 처음 만난 것도 교회에서였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교회에서는 좋든 싫든 누군가 '아멘'하면 그만이었다"고 돌아봤다.
버틀러와 메이필드는 곧바로 의기투합해 4인조 노선 주블리 가스펠 싱어즈를 결성했다. 1957년 그들은 두 밥 그룹인 '루스터스'로 합쳤는데 나중에 '임프레션스'가 됐다. 이듬해 제리 버틀러와 임프레션스는 지역 레이블 비제이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 이렇게 나온 '포 유어 프레셔스 러브'가 R&B 차트 3위에 올랐는데 버틀러가 열여섯 살 때 지은 시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주간 신문 시카고 리더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사운드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우리는 두 밥이 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다르고 지속하는 임프레션스를 갖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존 맥이언은 롤링 스톤 일러스트레이티드 히스토리 오브 로큰롤에 "'포 유어 프레셔스 러브'는 거의 첫 번째 솔 레코드로 여겨질 수 있다"고 적었다.
1960년 임프레션스를 떠난 뒤 곧바로 커티스 메이필드와 캘빈 카터를 위해 쓴 'He will break your heart'를 톱 10에 올려놓았다. 이 노래는 내구력을 증명했는데 10년이 훌쩍 지난 뒤 토니 올랜도와 돈이 리메이크한 'He Don’t Love You (Like I Love You)'가 넘버 1에 올랐다.
1961년 버틀러는 '문 리버'를 차트에 올려놓은 첫 가수가 됐다. 사실 이 노래는 헨리 만시니와 조니 머서가 만들어 오드리 헵번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불러 이듬해 아카데미상 주제가상을 수상했는데 버틀러가 먼저 불러 톱 40 차트의 11위까지 올려놓았다. 대중에게는 앤디 윌리엄스의 노래가 훨씬 각인됐고, 윌리엄스 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됐지만, 싱글로 따로 발매되지 않았다.
버틀러가 이 노래에서 들려준 부드러운 보컬은 초기에 강한 영향을 미친 냇 킹 콜에 대한 경배의 뜻도 담겨 있었다. 버틀러는 케니 갬블과 레온 허프 두 프로듀서와 힘을 합친 두 앨범 'The Iceman Cometh'(1968)와 'Ice on Ice'(1969)은 솔 느낌을 더 살려 그가 남긴 최고의 앨범들이란 평가를 받는다.
1962년 버트 바카락과 할 데이비드의 'Make it easy on yourself'로 20위까지 진출했다.
버틀러에게 가장 높은 팝 차트 순위는 ' Only the strong survive'(1968)로 팝 차트 4위, R&B 1위에 올랐다.
'아이스맨' 별명을 붙인 사람은 필라델피아 디스크 자키 조지 우즈였다. 버틀러는 1975년 음악평론가 데이비드 네이선에게 “조 텍스, 제임스 브라운과 아이슬리스 같은 다른 친구들과 내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난 그냥 그곳에 서서 노래하고 있는데 조지가 나보고 멋지다고 하더라. 이렇게 해서 아이스맨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자신의 레코드에 많은 이들의 이름을 적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슴이 미어지는 발라드 'I’ve been loving you too long'은 오티스 레딩과 함께 작곡했는데 1965년 히트곡이 됐다. 그는 네이선에게 "내 레코딩 작업은 대다수 아티스트가 채택한 것과 약간 달랐다. 난 좀더 창의적으로 일했다. 많은 아른 아티스트들은 프로듀서들에 의지했는데 난 프로듀서들과 함께 더 많은 일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임프레션스를 떠난 뒤에도 그는 메이필드와 함께 작업하며 1983년 전국 투어에도 함께 할 정도로 우의를 나눴다.
버틀러는 쿡 카운티 관리로 일하면서도 스타 지위를 뻐기지 않았다. 시카고 트리뷴이 1995년 보도한 데 따르면 그는 “학구적 면모”에다 "카운티 정부의 모든 일에 정통한" 것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위원회 멤버를 뽑는 방식을 개선하는 데 열성을 다했다.
그는 일리노이주 유니버시티 파크에 있는 거버너스 주립대에서 정치학과 음악사를 전공, 1993년 석사 학위를, 1998년 박사 학위를 땄다. 자서전 'Only the strong survive'를 얼 스미스와 공저로 2004년 내놓았다.
가끔 그의 노래에 백업 코러스를 하던 아네트와 60년 해로한 뒤 2019년 사별했다. 두 아들 랜디와 토니, 네 손주와 한 명의 증손주를 유족으로 남겼다. 고인의 누이 매티는 시카고 리더 인터뷰를 통해 낭만적인 음악에 대한 헌신을 요약했다. “그는 사랑과 사랑하는 느낌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사랑한다. 그는 정말로 많은 이들을 진정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