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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슈바이처'
미국의 오지(奧地)에 투척한 반평생 인술(仁術)
海里
지난 해(2005년) 8월 미국 남부지방을 강타한 하리케인과 리타는 미국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은 대사건으로, 그리고 '자본주의의 깨진 거울'에 비친 미국의 치부에 눈 뜬 실망은 우리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미국의 재난대응 시스템에 경종을 울려 주었고 뉴올린스와 인근 지역의 한인들을 포함한 주민들이 아직도 그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다.
연방재난관리청의 집계에 의하명 카트리나로 인한 피해규모가 1,350억 달러에 달하고, 당시 1,209명으로 발표된 사망자수는 그 후 복구작업 중 계속 발견되고 있는 사체발굴로 그 정확한 숫자 파악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의 힘 앞에서 미국의 자존심은 상처를 입었고, 재난 대처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 정부 당국은 시민들로부터 분노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피해지역 한인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뉴올린스, 빌락시 등 인근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은 약 2,500여 명. 이 중 90%이상이 집이나 가계가 허리케인의 피해를 봤다는 게 이 지역 피해대책위원회
피해가 가장 컸던 뉴올린스의 경우 완전히 상실했던 도시기능의 일부를 되찾았지만, 여전히 복구에 어려움을 겪고있다. 특히 한인 사업체가 몰려있든 뉴올린스 동부지역의 경우 지금까지도 전기와 수도가 공급되지 않아 복구가 더욱 늦어지고 있다.
카트리나 발생 직후 정든 집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주민의 상당수는 뉴올린스로 되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카트리나 이전에 비해 일거리가 크게 줄어 한인들은 아직도 30% 이상이 타지에 머물고 있다. 이 중 상당구는 애틀랜타, 휴스턴 등 인근에 한인타운이 형성된 도시에 뿌리를 내리고 재기를 꿈꾸고 있다.
“절망에서 살아남는 길을 보았다”
이같은 엄청난 재해를 당하고서도 “절망에서도 살아나는 길을 보았다”며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동문이 있다. 그는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 서서 재기의 결의를 다지며 오히려 환희를 느낀다.
루이지애나 주 Welsh에서 인술을 펴고 있는 의사이면서 100여 에이커의 거대한 농장을 직접 가꾸고 있는
“제가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이 오지를 찾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조금은 힘들지만 그저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곳 인구는 2천여명, 주업은 농사다. 주로 쌀을 재배하고 최근엔 사탕수수도 많이 재배하고 있다. 강 박사는 1980년부터 농부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쌀 농사 콩 농사를 하고 있다.
“지난 해는 참 번거로운 해였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일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저의 경우도 예외일 수 가 없습니다. 불운도 있었고, 천재지변도 당했으니까요. 그것도 이역만리 타국에서 당해 서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는 카타리나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화제는 이내 그가 1980년 초 이 곳을 찾은 당시로 기억을 되돌렸다.
“저는 이곳을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25년, 그러니까 4반세기 전이지요. 아주 뒤진 곳에 살 곳을 찾으니 잘 나타나지 않았어요. 경제적으로 아주 가난하고 교육면에서 문맹율이 높고, 정치적으로 소외당한 곳을 찾았는 데 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의 손을 빌려 찾은 곳이 루이지애나 남쪽, 미국 사람들이 Deep South라고 부르는 오지에 위치한 Welsh란 곳입니다.”
웰쉬는 프랑스 후예들이 살고 있어서 이작도 프랑스 풍습이 유지되고 있으며, 나폴레옹 법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주와는 좀 다른 주법을 적용할 때가 있다. 웰시는 미국, 스페인, 프랑스인과 인디언, 흑인 등 다양한 인조이 살기 때문에 혼성문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 곳의 주식은 미국에서 제일 맛있은 음식으로 이름난 Cajun음식이다. 그 맛이 별미인 이유는 각 나라의 음식에서 좋은 것만 모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곳은 아열대 지역이어서 화씨 90도를 넘는 더운 지역이며, 눈이 안오는 대신 비가 많이 와서 농사 짓이게 아주 이상적이다. 1-3월은 우기로서 가는 곳마다 물이다. 봄이 되면 온 천지가 녹색이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캘리포니아, 아리조나와 같은 사막 지대와는 대조적인 자연 환경 속에서 산다.
그는 아주 잘 왔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벽촌에 살지만 남을 도울 수 있으니 사는 맛이 납니다. 정신 없이, 열심이 일하다 보니 25년이 훌쩍 넘어 갔습니다.”
소박하고 악의가 전혀 없는, 그리고 종교적인(카톨릭) 이곳 시골 사람들을 그는 무척 좋아했다.
그동안 웰쉬는 교육수준이 낮고 사회적으로 낙후돼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소외당하고 문화적으로 미개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가 할 일이 많았다.
이번 카트리나 피해로 화제를 돌린 강 박사는 이곳 Deep South는 시즌이면 으례 물바다가 됐다가 이내 쭉 빠지고 건조해 지는 데 이번 태풍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고 회고했다.
“우리 여섯 식구가 살고 있는 걸프코스트을 사정없이 때려치는 무자비한 하느님, 참 무정하시지 좀 봐주지 않고 형벌을 내리는 지 모르겠소. 공연히 이곳에 들어온 것 같소. 좀 재미보고, 행복을 느끼려 했는 데 그만 내 마음에 간직했던 자부심까지 씻어가 버렸읍니다. 자랑할 것이 없어졌습니다. 또 마음이 가난해져 버렸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을가요. 가슴에 절망으로 꽉 차서 기력마져 다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절친한 친구인 휴스턴의
“침울할 때 과거를 되돌아 보자”
“그런데요 저는 이런 캄캄한 절망에서 살아나는 길을 보았습니다.” 강 박사의 체험담은 이렇게 이어졌다. 이곳 주민들은 전기, 전화가 끊긴 암흑 속에서 헤매기를 2주. 지칠대로 지쳤다. 아침에 마을에 가면 National Guard가 물과 어름, 그리고 비상식Ration Box를 나눠줘서 그 걸로 연명했다. 라디오 하나에 의존하고 있으니 바깥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물 주고 밥 주고, 고맙지 뭡니까? 다행히 발전기를 설치해 줘서 마지막 2일은 전기를 켤 수 있었고 TV를 볼 수 있었습니다. 동대 사람들이 Hot Meal을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Ration Box는 한국전 당시 미군들이 배급해 줘서 50년 전에 먹고 생명을 유지했던 시절을 시켜 주었다.
그의 퍽 종교적인 간증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번 허리케인 두 번에 재앙이 뭔지 알았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40년 전 고국에서 우리가 한 일은 재앙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수 밖에 없었는데 아무튼 이번 제가 당한 수재는 제가 젊은 시절에 경험한 것의 몇 백배가 큰 정말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세상이 뒤집히고 망가지는 데도 더 많은 것이 남아 있었어요. 인간은 무한정의 재생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생을 하고, 역사를 만들어 후세들의 도움을 받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 시간반 달려 휴스턴 동창회 갈 때 제일 행복해”
강 박사가 사는 Deep South에는 한국인을 찾아볼 수 없는 게 아쉽다고 그는 말한다. 주변에 큰 도시가 없기 때문에 한국인이 얼씬도 하지 않는다. 강 박사는 연 2회쯤 텍사스의 휴스턴 동창회에 참석하는 데, “저는 그 때가 제일 행복하지요” 라고 그는 말했다. “거리가 한 2백마일 정도 되는데 동창회에 가서 선후배들을 만나고, 또 한국말을 들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으며, 한국 음식에 매료되기도 합니다.” 그는 침이 마르도록 우리 민족 고유의 언어와 문화, 음식에 대한 깊은 애정을 토로했다.
한 때 그는 450여 에이커의 농사를 지었다. 지금은 “힘이 부쳐 다 지을 수 없기 때문에” 경작농을 100에이커로 줄였다. 미국에 수 십년 살면서도 미국의 갖가지 풍물의 규모에 놀랄 때가 많지만, 쌀 농사에 관한 그의 설명을 듣노라면 또 다시 감탄을 연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의 농장에서는 3월초에 비행기로 볍씨를 뿌리고, 뿌리가 자리잡으면 물은 한 번 빼준다. 그후 뿌리가 단단히 박이면 물을 다시 채워 비료를 비행기로 뿌려주고, 벼가 어느 정도 자라면 살충제나 잡초제거제를 살포한다. 7월초에 이삭이 나오고 7월 말경에 추수를 한다.
벼 한 배럴(1백60파운드)에 10달러 정도이며, 생산비용은 이를 훌쩍 넘는 18달러정도다. 8달러의 손해는 국가에서 보도한다. 따라서 이곳 농부들은 정부보조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날에는 배럴당 20달러였는 데, 최근 곡물가격이 계속 하락하고 있다. 이란, 이라크, 남미, 특히 쿠바시장이 닫혀있기 때문이다. 요즘에 와서는 보조금도 삭감되고 있는 추세여서 농부가 살아남기가 힘든 현실이다.
이전에는 곡가와 원유가가 비슷했다. 그런데 최근 쌀값은 10 달라선, 원유값은 폭등하여 60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강 박사는 두 가격이 20달러 선이면 세계 경제가 안정될 것이라고 추산해 본다.
미국의 의사들은 대부분 65세에 은퇴하는데, 강 박사는 아직 은퇴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저 반 은퇴라는 말로 위로를 삼는다. 낮에만 외래환자를 보고 위독한 환자는 직접 치료하지 않고 다른 병원에 의뢰한다. 하지만, 이젠 골프장에서 한가로이 소일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라고 강 박사는 실토했다.
한국의 보건행정, 남북 적십자 회담 성사에 이바지
그는 1962년 문리대 동물학과를 졸업하고 공무원이 되고 싶어 고등고시를 준비하고 행정과에 수차 응시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신문기자가 되고 싶어 을지로에 신규개설된 신문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언론계의 중진이었던 박복산 선생을 비롯, 중견 언론인들이 만든 학원이었다. 견습기자 여섯 명을 뽑는데 다섯 사람은 문과출신이고
그러다 그는 입대를 하게 되어 그의 언론계 진출의 꿈은 좌절되었다. 제대 후 그는 서울대 보건대학원에 진학, 보건행정학을 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학문이었다. 존스 합킨스 대에서 개발한 순수한 미국의 학문이었다.
그는 여기서 1965년 보건학 석사를 딴 후 혜화동에 위치한 우석대학 의대에 들어가 69년 의대를 나와 MD가 되었다.
1970년 초 그는 보건행정관으로 보사부에 들어갔다. 그는 10년 동안 대한민국 정부의 보건행정 기획관 (Planning Officer)로서 열심히 일했다. 그후 그는 서울검역소 책임자로서 공항의 보건관계 지상조업을 감독했다. 그리고 보사부의 인구문제를 다뤘다. 당시 한국의 인구문제, 즉 인구증가율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1960/70년 국민소득은 80달러 수준이었고, 경제 성장율이 5%였는 데 인구증가율이 이보다 훨씬 높았으니 경제성장을 상쇄하는 꼴이 되었다. 그래서 제4차5개년 계획을 세우면서 인구증가율을 5% 수준으로 낮추라는 추상 같은 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보사부에서 노심초사 노력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그리고 세월이 흘러 동아일보의
그 때 상급자였던 서울대 선배로부터 “자넨, 내가 20년을 노력해 못 한 걸 불과 몇 개월만에 했다”며 칭찬을 들었을 때 무척 기뻤었다며 강 박사는 당시를 회고했다.
그런데 또 다른 큰 임무가 그에게 떨어진 것이다. 1972년
그리고 그는 미국행을 결심한다.
“나는 슈바이처가 아니다”
강 박사는 1973년 이화여대 출신이며 의사인 부인
“그건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었어요.”
그의 고심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는 아내를 어떻게 설들할 것인가 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설득할 논리를 개발했다.
“Deep South의 오지로 내려가면, 뉴욕에서처럼 타프한 경쟁이 없을 것이다. 더러운 물에 가야 고기도 많이 잡힐 것 아닌가. 호랑이 굴에 가야 호랑이를 잡지.” 그는 “나는 슈바이처가 아니다” 라며 겸양을 보였지만, 결국 (환자가 의사를 찾아오도록 기다릴 게 아니라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야 되겠다)는 의사로서의 하나의 의무감이 발로한 것으로 해석된다.
두 군데의 낙후한 산간벽지를 거쳐 정착한 곳이 웰쉬이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의사가 왕진을 나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뉴욕에서 성공한 의사라 오지를 찾아왔다며 온 마을이 환영을 했다.
혹시 왕진을 나가면 “당신은 제이의 슈바이처 박사입니다” 하며 추켜주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때마다 그는 고개를 설래설래 젓는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의 신들메를 들 수도 없습니다.” 그는 가슴 속으로 이렇게 수없이 외쳤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라는 말을 그는 인터뷰 도중 몇 차례고 했다. 아내
“사실 우리 모든 가족이 태풍의 피해를 입었습니다만, 이번 천재를 통해서 우리 가족들의 사랑과 그동안 받은 축복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