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포도주는 새부대에, ‘지금 여기’를 살자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코복음 2장 18 - 22절
시아주버니는 늘 배우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하였다.
12살에 6.25을 맞았고 부모를 동시에 잃은 형제들은 생존하기에 여념이 없어서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가 엄마고 아버지였다.
이웃이 가장 무서운 존재로 인식된 사람들은 웃어도 가짜고
아무에게도 온전히 가슴을 열지 않는 버릇이 들었다.
전쟁은 끝났어도 학업이 모두 중단되었던 이집 형제들에게는
일생동안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생이 앓는다.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은 군에 가고 누나는 엄마를 대신 했으며
시아주버니는 6살짜리 3살짜리 동생을 돌보아야 했다.
그 당시는 소년소녀가장이라도 살아남는게 더 중요한 관건이었을 것이다.
형제들이 번갈아 가며 군에 갔다오는 사이 시아주버니는 혼기에 차고
마침 동네에 성실함과 머리좋음이 알려져 편한 집안의 사위가 되었다.
뭍으로 나와 상회의 경리를 보며 신뢰를 쌓았고 수년동안 그 상회를 맡다싶이 하다가
독립하여 사장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안정은 새로운 위기이다.
그동안 눌러두었던 욕구가 고개를 처드는 시기이다.
그 분의 나날은 새 부대에 옛 포도주를 담느라고 바빴고 삶은 늘 떫었다.
야간이라도 제대로 대학을 마쳐야 하는데
고졸자로 입학할 수 있는 대학원이며 최고경영자 특수대학원을 전전긍긍하며
무려 대학원만 4군데를 졸업하였다. 어쩌다 말단 정치집단의 한 자리를 얻어
간간히 강의를 하는데 교수란 호칭을 붙여준 명함을 즐겨 사용한다.
지나고보면 모두가 헛물켜기인데 아직은 자신을 속이면서도 모르쇠로 간다.
그러는 가운데 동생은 고등공민학교에도 다니고 검정고시를 거치면서도
제대로 단계를 밟아 공부를 하여 결혼3년차에 고시에 합격하였다.
연이어 고생을 하면서도 대학원을 거쳐 박사학위까지 따느라고
가족에게 고생 꽤나 시켰다.
직장의 마지막 맛은 단맛이었다.
공무원 정년이 끝나도 대학으로 들어가 현장에서 익힌 전문과목을 후학들에게 내려주며
인생의 전반부에 비하면 황송하리만큼 안정되게 마무리하게 되었다.
스스로 걷운 결과이기는 하지만 형님은 늘 부족감에 볼이 메였다.
결국 시아주버니의 학력은 바늘 허리 맨 격이어서 어떤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길도 열지 못했다.
졸업장만 늘려가며 헛돈을 쓰는 바람에 자식들과 아내의 심정은 터진 자루같다.
차라리 사업에 열중하고 인터넷 사이트를 열어 업그레이드를 했더라면
계속 서울생활이란 새포도주를 새시간인 새부대에 넣으며 자식들 크는 재미로 행복했을 것도 같다.
한 때 구멍난 자리는 구멍났다고 인정하고 일찌감치 그 자리를 떠나
현재를 충실히 살아야 했다.
오늘이 내일의 보장구이다.
시아주버니와 같이 구멍난 기억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처 채우지 못한 욕구를
채우기에 급급하여 전 인생을 낡은 부대에 담다가 볼맨소리를 낸다.
늘 지각인생으로 살아간다.
아니 지각이 아니라 말뚝박고 제자리 돌기를 한다.
열심히 살아도 티가 나지 않는 것은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잘 안살아지는 탓을 이제 세상 탓 으로 돌린다.
40대에도 50대에도 60대에도 내내 모양새만 달리한 18세의 욕구에 매여있다.
70에 가까운 지금도 놓지 않고 가족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쓸쓸하기만 하다.
객관적 검증없는 노력으로 일생을 소진하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자신을 늘 텔레비전의 드라마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바라보아야 할 것같다.
올해 나의 구호는 알고 경험한 것일지라도 ‘새롭게 보기’이다.
각심하여서인지 새롭게 이해되는 것이 벌써 늘고 있다.
꺼진 불도 다시 보고 아는 것도 다시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