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의 기록 : 로제타석은 고대 이집트 비석으로 1799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로제타 마을 부근에서 한 프랑스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고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비문에는 이집트의 왕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업적과 은혜를 요약하고 있으며, 그의 재위 9년에 쓰여졌다. 이집트 상형문자, 이집트 민중문자, 그리스 문자 등 3가지 언어로 기록되어 있어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의 실마리가 되었다. 나일강 문명을 일으킨 이집트는 상형문자를 사용했으며 오랜 기간 파라오가 지배하였다. 중세 시대에는 이슬람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1500년 중엽에는 오스만 투르크가 이슬람 제국을 정복하면서 이집트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먼 변방이 되었다. 1805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한 장교인 "무하마드 알리"가 오스만 투르크 술탄의 이름으로 이집트를 통치했으며,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사이드 파샤" 가 뒤를 이었다. 그 무렵 프랑스의 어느 토목 회사가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겠다고 제안하자 수락한다. 수심 8m, 길이 160km, 운하는 10년만에 완성된다. 공사가 진행되는 중에 사이드 파샤가 죽고 그의 조카 "이스마일 파샤"가 이집트의 통치자가 된다. 드디어 1869년 이스마일 파샤는 전 세계 여러나라 지도자를 초청하여 수에즈 운하 개통식을 연다. 하지만 어느때 부터인지 이스마일 파샤는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돈을 빌리기 시작하는데 재임기간 동안만 1천만 달러가 넘는 빚을 져서 그 돈을 갚기 위해 수에즈 운하의 관할권을 영국으로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이로인해 유배생활을 하게되고 그의 아들 타우피크가 통치하지만 이미 영국의 식민지나 다름없었으며 드디어 영국이 수도 카이로를 점령하면서 나라를 잃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이집트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이집트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1차 세게대전에 휩쓸려 들어갔다. 하지만 전쟁의 와중에도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벌였다. 마침내 1922년 2월 28일 영국은 이집트의 독립을 허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