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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 : 15 - 나의 이름으로 - 고전 1 : 17 -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 .
고전 1 : 15 - 나의 이름으로 -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본 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당파적 정신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1]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만약 그들이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으면 그들은 '바울파'임을 주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세례를 몇 사람에게만 베풀었던 것을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보아 감사의 제목으로 삼았다(14절).
이렇듯 바울은 성도들을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묶으려는 어떤 시도도 배제하였고 도리어 그리스도와 구속받은 자들 사이에 있게 되는 교제와 연대 의식을 중요시했다.
결국 본 절에서 바울이 자신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갖도록 성도들에게 말했거나 시도했다는 실마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하였다(Morris).
고전 1 : 16 - 알지 못하노라 -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
1]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스데바나'와 그의 가정은 아가야에서 최초의 열매였다(16: 15).
당시 스데바나는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에베소에서 바울과 같이 있었다(16: 17).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콘'(*)은 거처(居處) 즉 눈에 보이는 건물을 의미한다.
* 눅 12: 39 -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본 절에서는 가족이나 식구를 구성하는 개개 사람들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 말에는 그의 혈육 친척들과 종들까지도 포함된 것 같다(Mare)
2]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외에는'의 헬라어 '로이폰'(*)은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이란 뜻으로 '알지 못하노라'와 연결되어 바울이 언급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으려 했음을 시사한다(Robertson).
고전 1 : 17 -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 -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께서 그를 세례(침례)를 베풀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보복을 전파하기 위해 보내셨다.
세례(침례)는 죄에서 구원받는데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얻게 된다.
1]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바울이 고린도에서 제한적으로 세례를 베푼 이유는 새로 들어온 고린도 교인들이 겨우 교리 문답을 공부해야 할 단계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아볼로에게 적당한 때에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성례식을 거행하라고 맡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Mare).
* 행 19: 1 -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어쨌든 본 구절에서 바울은 그의 본질적인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진술한다.
* 행 26: 17-18 -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세례가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 자신도 몇몇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하지만 당시 일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세례가 영적인 성숙과 구원의 안정성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를 시정하여 준 것이다. 구약시대의 할례처럼 세례는 단지 회개와 신자 됨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외적 증표이며 하나의 종교의식일 뿐이다.
세례 자체가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물로써 세례를 받는 것 이상의 그 무엇, 곧 복음을 마음속에 영접하여 들이는 참된 믿음이 필요하다.
바울은 그 복음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은 것이다.
'복음을 전하게 하려'의 헬라어 '유앙겔리제스다이'(*)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바울의 복음 전하는 행위가 계속적이며 다른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2]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말의 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피아 로구'(*)는 '말의 명석함으로'라고 번역될 수 있다(Mare).
당시 고린도의 어떤 신자들은 인간의 지혜와 달변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였다.
그들은 전형적인 헬라인으로서 수사학과 철학 연구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였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바울은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가 받은 사명이 아님을 주장한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헛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노데'(*)는 이름과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무력해지거나 효력 없는 상태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바울이 설교하면서 십자가의 도 대신에 인간의 지혜나 인본적(人本的)인 철학 따위로 대치하였다면 그의 설교는 무력하고 인간의 지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또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그리고 스데바나 가족에게 외에는 세례를 주지 않았다.
물론 세례는 주께서 친히 명하신 의식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다. (마 28: 19).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세례를 받아야 하며 세례를 받지 않는 것은 주의 명령을 어기는 죄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그곳에 보내신 것은 세례를 주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세례는 중요하다. 그러나 구원에 본질적이지는 않다. 즉 세례를 받으면 반드시 구원받는다든지 세례를 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에 본질적인 것은 복음 신앙뿐이다.
사람은 복음에 대한 지식과 신앙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 복음을 깨닫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을 당한다.
* 막 16: 16 -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 요 3: 36 -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웅변과 수사학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이루신 일이며, 그 십자가로 지금 죄인을 부르시는 일이다.
사람은 생각과 감정과 판단이 참 부족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교회의 구성원이 된 후에도 서로 간에 오해와 갈등을 가지며 분쟁과 파당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한 분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일치하며 단합해야 한다.
그러면 루터교회나 개혁교회-장로교회나 침례교회 등 교파의 문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교파는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의 이해력과 지식의 제한성 때문에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교파는 이단과 구별된다. 이단은 기독교의 본질적 내용을 부정하거나 왜곡시키거나 더함으로써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한 치명적 오류를 가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의 신적 권위성, 무오성, 하나님의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신성(神性), 처녀 탄생, 속죄, 부활, 재림 등을 부정하거나, 또는 마리아 숭배, 교황 무오설을 주장하는 것 등이다.
그런 이단들은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파는 이단과 다르다.
교파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는 일치하고 어떤 중요한 교리에 있어서 인간의 이해와 지식의 차이 때문에 다른 의견을 가지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관계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사실을 다 인정한다. 감리교회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킨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인간의 책임과 자유로운 결정을 인정한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속죄 범위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성경은 어떤 구절들에서 보편속죄설을 말하는 것 같다.
* 요 3: 1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딤전 2: 4, 6 -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그러나 개혁교회는 제한속죄설이 논리 일관하다고 이해한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감리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회개와 믿음에 근거해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사람의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적 예정의 결과라고 이해한다.
교파들과 교단들이 많은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이 교회의 하나 됨에 모순된다고 볼 것은 아니다.
교회는 이미 영적으로 하나이며 그것이 반드시 한 조직체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상대방의 다른 견해를 존중하고 그를 배척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한 교회의 지체로 서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4] 하나되게 하옵소서 : 박 조준 목사 1: 10~17
사도 바울은 여러 곳에 하나님의 교회를 설립하고 언제나 저희들을 위해 기도하며 신앙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이 세상의 교회는 완전한 교회란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곤 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그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파당이 생겨 서로 다투는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설립자인 바울의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생긴 어려운 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에베소에서 썼습니다. 글로에라는 부인의 집에 속해 있는 예수 믿는 노예들이 고린도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그곳의 형편을 말하고 그곳에 있는 교회 안에 분파가 생겨 서로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두 번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그 말 가운데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형제’라고 부르면서 좀 심한 말을 하더라도 책망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채찍을 든 교사의 책망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책망인 것을 알아주기를 원했습니다. 더구나 ‘형제들’이라는 말을 쓴 것은, 형제라는 말 자체가 고린도에 있는 교회의 교인들 사이에 의견의 충돌과 불화가 있다고 하는데 형제로서의 성도들이 얼마나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형제는 서로 아름다운 형제애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 133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우리는 각각 생긴 것이 다르고 성품과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이 다른 것이 당연하고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공동의 운명을 위해서 함께 나아가야 할 때는 다수의 의견에 따를 줄 아는 아량도 필요합니다. 나 하나의 고집 때문에 공동체에 손해를 주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법궤가 정착이 되고, 국가적인 예배를 위한 이스라엘 민족의 집결지를 그곳에 두고 그들의 연합의 중심지가 정해진 이후로 연합하는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교회가 안정될 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연합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 무엇을 보여 주느냐는 것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서로 사랑하며 화평하게 지내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교회가 좋은 사업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가 다툰다면 좋은 사업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한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를 보세요. 저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서로 사랑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께서 역사할 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고, 사랑하니까 화평이 오고, 사랑하니까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교회를 특별히 선전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니까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여기에 감동을 받고 매력을 느껴 교회로 모여들게 되었고,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보기 싫고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서로 불화하고 다투는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찬양과 감탄을 금치 못하여 하는 말입니다. 왜요? 이런 일이 흔히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실제로 그것이 어려운 일이므로 성경은 형제 사이에 우애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범죄하여 좇겨난 후에 아들 형제를 낳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형제는 사랑해야 하는데,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형 가인은 동생 아벨을 들로 유인해서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1절에 보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2장 10절에도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했습니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형제는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형제는 재물 때문에 다툽니다. 이것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개 같은 짐승은 사람이 먹다 버린 뼈다귀 가지고도 서로 물고 찢고 싸우지만 사람이 어떻게 짐승처럼 재물 때문에 싸우겠습니까? 돈이 형제의 우애를 상하게 하는 일은 사람이라면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서로 사랑하고 서로 화목하라고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천리(天理)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이 부족해서 이 천리를 어길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비극입니다. 더구나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자녀들이 할 일은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요 13:34~35). 그리스도의 피로 한 몸 이룬 형제 자매 된 우리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계명을 어길 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향해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물론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끼리는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기를 힘쓰는 사람은 싸움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잠언에 보면 “말쟁이가 있으면 다툼이 그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속담처럼 “불난 집에 부채질”하지 아니합니다. 보통 때는 가만히 있다가도 무슨 분쟁이 좀 생기면 갑자기 분주해지고 열심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한강물 흐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잠언 6장 16~19절에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형제 사이의 화목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화평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기도하고 시간을 내고 어디 가나 화평을 말하고 온갖 노력을 다 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요 설명할 여지도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21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로 다투는 것보다는 헤어지는 것이 화평을 위해서는 도움이 됩니다. 창세기 13장 8절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과 그 조카 롯이 육축과 노비가 많으므로 같이 지내기가 서로 어려운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초장은 한정이 되어 있는데 그에 비해서 육축이 많으니까 아브라함의 양을 돌보는 목자와 롯의 양을 돌보는 목자가 초장 때문에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롯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래서 롯은 여호와의 동산처럼 아름다운 소돔과 고모라 땅을 택하였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다투지 아니하고 갈라섰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데 바나바는 유대 전통을 벗어나지 못해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같이 전도 여행을 하던 바울과 바나바는 이미 주의 말씀을 전한 곳에 가서 형제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방문하러 가는데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를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해서 심히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피차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가서 교회를 튼튼히 세우는 데 힘을 썼습니다. 서로 합해지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싸우기보다 서로 헤어져서 각자의 책임을 바로 감당하는 것이 덕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제가 서로 사랑하지 못할 때 우리 마음에 화평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 사랑하고 연합해야 할 이유가 많이 있지만 형제 자매가 연합하는 일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처하여 있는 이 시대에 교회에 부과된 가장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좀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신교의 공헌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신교의 약점 가운데 하나가 너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계적으로 신교는 교파가 300개가 넘고 우리 한국에만도 200개에 가까운 교파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제일 많이 나뉘어 있는 교파가 장로교입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도 선교 100년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 될 수는 없으나 같은 형제끼리 다투는 일만은 없어야겠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이 수고하셔서 찬송가를 통일해서 이제 어느 교단에 속한 교회에 가든지 찬송가를 하나로 부르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대로 아브라함이 롯에게 뭐랬어요? “이 땅에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있다. 유대인만 있는 것이 아니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은 우리들이 다투면 우리를 멸시할거야.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우리끼리 서로 싸우지 말자.” 아직도 우리 나라에는 교회에 참석치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보이는 우리의 위치는 어떠한가 하는 것을 언제나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세요. 10절 말씀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화해시키고자 해서 두 가지 재미있는 관용구를 사용했습니다. “같은 말을 하라.” 다시 말하면 의견의 일치를 보라는 말입니다. 서로가 양보할 때 이루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은 의학적인 용어로 부러진 뼈를 고치거나 어긋난 뼈를 바로 맞출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분열은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교회라고 하는 유기체의 건강과 힘을 위해서도 속히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바울이 언급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교회 안에 네 개의 분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머물러 있으면서 계속 다투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용어는 ‘스키스마’(σχίσμα)인데 그 말은 옷이 해진 것, 나들나들하게 해진 것을 뜻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마치 해진 옷과 같이 보기 흉하게 될 위험한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세요. 각 분파의 이름에 바울, 게바, 아볼로 같은 인물이 나오는데 사실 바울이나 게바나 아 볼로는 이 분파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의견의 차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더구나 그들이 동의한 일도 없는데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자신들의 분파를 위해서 마음대로 이용한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가 분열되고 교파가 분열되는 것을 가만히 보면 자기 자신들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이름에 걸어서 분열을 조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드러난 원수보다 자기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더 문제가 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가령 바울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분파였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자유의 복음과 율법의 종말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속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유를 방종으로 만들려 했고 기독교를 방패삼아 무엇이나 마음대로 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구원받은 것이 죄를 범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24절에 보면 아볼로에 대해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웅변에 능하고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식인의 활동 중심지였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지성화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아볼로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기독교를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으로 전환시킨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게바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게바는 베드로의 유대인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게바에게 속했다고 하는 사람들 역시 유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유대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은총을 경히 여긴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심지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자기들만이 고린도에 있는 참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완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주장만 고집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잘못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에게만 속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데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관용이 없는 독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 되고 형제애를 가지도록 권면합니다. 그들의 분파와 분리를 책망합니다. 분쟁의 근원이 어디 있습니까? 밑바닥에 깔려 있는 교만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사역자에 대해서 싸웠습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충실한 사역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과 기쁨을 도와주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당을 짓고 그들의 사역자를 당의 머리로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가장 고상하고 영적인 지도자로 불렀고, 다른 이들은 아볼로를 가장 열렬한 웅변가라고 불렀고, 또 어떤 이들은 게바 혹은 베드로를 그 당시에 가장 권위 있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할례받은 사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만을 따랐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도 타락하기 쉬운 것같이 복음이 그들의 불화와 분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잘못이 아니고 인간성의 타락과 부패의 증거입니다. 교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타락시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나뉘었느냐? 아니다.” 그리스도는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한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하나님의 종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절 이하에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방법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기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교단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조나 교리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에는 다 한 아버지 집에 가게 될 것입니다.
유명한 미국의 부흥사 D. L. 무디가 시카고에서 집회를 할 때 이야기입니다. 운동장에서 야외 집회로 하는데 강단에 올라선 무디는 하늘을 향해서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베드로 선생님, 거기 하늘 나라에 장로교인이 몇 명이나 됩니까?” “장로교인은 한 명도 없다.” “그래요. 그러면 감리교인은 몇 명이나 됩니까?” “여기는 감리교인도 없다.” “아니, 그러면 침례교인은 얼마나 됩니까?” “침례교인도 없다.” “그러면 거기는 도대체 누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여기는 회개하여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만이 있는 곳이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파를 따지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가 다르다고 다투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서로 다투고 시비하다가 하늘 나라에 가면 주님의 얼굴만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기 싫어하던 사람과도 얼굴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어 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 하나가 되지 못한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시대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단결하여 하나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문자 그대로 공산주의 사상, 유물주의 사상, 세속주의 사랑이 우리에게 도전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힘을 합쳐서 이 겨레를 악한 사상과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우리를 성도로 부르심을 감사하며 거룩함을 나타내자.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미 거룩함을 얻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확신한 것을 감사했고 또 주께서 그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였다.
그것은 성도들의 성화의 확실함과 끝까지 견딤의 진리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화를 이루실 것을 믿고 더욱 분발하자.
둘째,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덕목이다.
* 고전 13: 13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강림하심은 동일한 사건을 가리킨다.
* 눅 17: 30 -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 살전 4: 16 -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 살후 1: 7, 10 -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
* 히 9: 28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복된 소망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역사의 대종말이 올 것이다.
마지막 심판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광의 천국이 주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자.
셋째, 우리는 항상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합하자.
우리는 다 같은 말을 하고 우리 가운데 분열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히 단합하자.
교회는 지도자들 때문에 분열해서는 안 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죄 사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교리적 차이 때문에 교파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교파가 성경의 근본 교리에서 이탈한 이단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와 다른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 지체로 인정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고린도 교회의 파당은 설립자 바울 사도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여기서 그들을 향해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채찍을 든 책망이 아니라 사랑으로 말하는 책망이다.
* 시 133: 1-3 –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우리는 생김이 다르고 성품과 배경이 다르기에 생각하는 것이 다른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공동의 운명을 위해 함께 나갈 때는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아량도 필요하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교회가 안정될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연합이 있고 평화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 무엇을 보여 주느냐?를 논하기 전에 서로 사랑하며 화평하게 지내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초대교회를 살펴보면 저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서로 사랑했다. 성도들의 마음속에 성령이 역사하므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서로 사랑하므로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여기에 감동을 받아 교회로 모여들어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다.
* 행 2: 42-47 –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형제는 다투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믿음의 형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 요 13: 34-35 –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은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마 5: 9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버리자.
* 잠 6: 16-19 – 16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17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19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하든지 형제의 화목을 위하여 힘쓰자.
* 요일 4: 20-21 –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 엡 4: 1-6 –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요 17: 21 -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가 건강함에 감사하고,오늘 내가 숨 쉴 수 있음에 감사하고,
오늘 내가 누군가를 만남에 감사합시다.
모든 일을 감사하고,감사하다 보면 감사 못할 일이 없으며,
감사가 넘치다 보면 우리의 삶도 저절로 행복해질 것 입니다.💖